장난이 아니라 무식하게 긴 글인 관계로

읽는 사람의 편의를 위해 챕터별로 글을 접음

(※3만자에 육박하는 글 주의)



그러니까 다 읽기 전에 일단 개추부터 주면 될 듯?


읽고 싶은 챕터를 눌러서 펼쳐볼 것



1/✧             

개시



새벽녘의 햇살만으로는 

두꺼운 구름을 뚫지 못해

어둠이 드리운 숲길에서

마차 하나가 우뚝 서있었다.



마차 주변을 몇 번이나 왔다 갔다 하면서

다양한 시도와 실패를 겪느라 

땀에 흠뻑 젖은 마부는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을 억지로 움직여 

마차의 문 앞까지 다가간 마부가

목소리를 높였다.



"나, 나, 나리! 들리십니까?"


침묵.



마차 안의 사람에게선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마부는 침을 삼키고 떨리는 목소리로 

최대한 또박또박 말하려 노력했다.



"요전에 말씀드린 그 일이 벌어졌습니다!

별짓을 다 해봤지만, 말들이 겁에 질려

도무지 앞으로 나아가질 않습니다!"


침묵.



이어지는 침묵을 질책으로 느낀 마부는

주절거리며 변명하기 시작했다.



말이라는 짐승은 워낙에 겁쟁이라 이러는 

경우가 왕왕 있기 마련이다, 그래도 어지간하면 

마부의 요구에 순순히 따르기 마련인데

어찌 된 영문인지 최근 들어선 아무리 용을 써도 

이보다 더 앞으로 나아가질 않는다, 절대로 

추잡한 핑계 따위를 대려는 게 아니다, 

이런 외진 변경의 마부가 할 줄 아는 것이라고는 

자기 말들을 다루는 것뿐인데 오죽하면 이러겠느냐, 

제발 너른 마음으로 이 곤경을 이해해달라,

높은 곳에 거하시는 주님께 맹세코 

쇤네는 참말로 최선을 다했구먼유!



마부의 절박한 마음이 하늘에 닿았는지

마침내 마차 안에서 답이 들려왔다.



"정숙하시오."



마부의 입이 닫혔다.


마차의 문이 열렸다.



불과 어젯밤까지만 해도 고귀하신 분들과는 

평생 접점이 없던 마부가

적절한 예법 따위를 알고 있을 리 만무했다.


그러나 그보다 천하고 우둔한 자라도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알 수 있었다.


마부는 나리가 눈에 들어오기도 전에 재빨리

고개를 숙인 채 눈을 감고 성호를 그었다. 

양손을 꼭 쥐고 짧게 기도문을 외우며

마음속으로는 자신이 심각한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기를 빌었다. 


기도를 마치고 살며시 눈을 뜬 마부는 

눈앞의 광경에 기겁하고 말았다.



미처 고개를 들지 못한 마부의 눈에 

제일 먼저 들어온 것은 붉은 대검이었다.



흑요석 색감의 손잡이와 

정확한 대칭을 이루며 천칭처럼 꾸며진 가드,

그리고 불결 모양처럼 이루어진 칼날은 

언뜻 아름다운 장신구처럼 보일 법도 하였다.


그러나 호사가도 아니고 멋도 모르는 

한낱 마부 나부랭이의 눈엔 

그저 피로 물든 채 화염처럼 타오르는 

무시무시한 흉기로만 비칠 따름이었다.


다행스럽게도 그 칼끝이 땅을 향한 덕분에

바지의 청결은 유지할 수 있었으나,

불행스럽게도 높으신 분의 심기를 거스른 죄로

목 위가 가벼워질지도 모르겠다는 걱정 탓에

몸은 뻣뻣하게 굳어버리고 말았다.


기도를 마친 후에도 아래만을 바라보고 있는 

마부의 상태를 눈치챘는지

검의 주인이 그를 향해 목소리를 내었다.



"고개를 드시오."



마부는 그제야 나리의 모습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었다. 



누가 보더라도 귀족 같은 외모를 한 

묘령의 여인이 서 있었다.



그녀의 눈은 여름 햇살 아래의 

호수가 그러하듯 푸르렀고

그녀의 머리카락은 겨울에 

소복이 쌓인 눈처럼 희었다.


아무런 치장도 하지 않아 

골반까지 흘러내리는 흰 머리카락은 

그녀가 걸친 깔끔한 판사 로브의 

어두운 색과 대비되어 

무어라 말하기 힘든 조형미를 더했다.


아름다운 조각상이 떠오르는 법관의 모습은

젊어 보이는 외견과는 반대로 

모든 자세와 행동에 배어있는 

절도로 인해 완성되었다.


그녀는 검은색 폼멜 위에 

양손을 올려놓은 채 곧게 서서 

엄숙한 눈으로 마부를 내려다보고 있었고,


덕분에 차마 법관의 눈을 피할 수 없던 마부는 

그녀를 똑바로 마주 보며

그녀의 오른 어깨에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얹혀 있는 붉은 손이 보이지 않는 시늉을 

이어갈 수 있었다.


나리의 입이 열렸다.



"그대와 계약을 맺을 당시 들은 내용을 

다시 반복할 필요는 없소.


마을에 진입하기 전에 마차가 멈추는 것 또한

이미 예정되었던 바이니, 괘념치 않소."



마부가 감사의 말 비슷한 소리를 

쥐어짜는 사이 법관 나리는 

명명백백한 사실을 선포하듯 말을 이었다.



"그대의 보수는 마차 안에 두었소."



마부의 눈이 빠르게 마차 안을 향한 순간

법관이 대화를 끝냈다.



"오늘은 공사다망하니

이만 그대와 인사를 나누고 가봐야겠소."



법관은 말을 마친 후 일체의 지체도 없이

숲길을 따라 걸어 나갔다.



그 고고한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마부는 

그 뒷모습이 사라지려는 찰나가 되어서야

퍼뜩 정신을 차렸다.


더 늦기 전에 동시에 세 가지 일을 하려던 그는

그만 몸이 하나뿐이라는 난관에 봉착하고 말았다.

결국 마부는 빠르게 우선순위를 정했다.


마부는 제일 먼저 마차 안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단 한 실링의 오차도 없이 

정확한 삯이 남아있었다. 


마도학자의 것이든 사람의 것이든, 

성직자의 것이든 심판관의 것이든 처형자의 것이든,

돈은 돈이다. 


마부는 헤벌쭉 웃으며 돈을 챙긴 후

마차의 방향을 튼 뒤 마부석 위로 올라탔다.


말들은 반대 방향으로 머리를 향하자

언제 반항을 했었냐는 듯 투레질을 하며 

알아서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마부는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말을 흘겨본 후

더 늦기 전에 고개를 돌려 

씀씀이 좋은 법관 나리의 뒤통수를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그대로 쭉 가시면 그 마을이 나올 겁니다!

주님의 은총이 함께하시길!"



마부는 약간의 손익계산과 노파심을 담아

자신이 법관의 모습을 본 

마지막 사람이 되지 않길 바라며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2/✧            

인지



하늘 높이 솟은 태양의 기운을 막는 

우중충한 하늘 아래에서

숲길을 걷던 법관의 눈에

마을의 윤곽이 들어왔다.



아직 맨눈으로 간신히 보일 정도의

거리가 남아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그녀의 주변에는 

해괴한 기운이 팽배했다.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는 깊은 숲속임에도 

새의 지저귐 한 번 들리지 않았고

법관의 눈길이 닿는 곳 그 어디에도 

작은 동물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사람의 발길이 줄어든 숲길은 잡초로 무성해

산 자에게 달라붙는 망자의 손길처럼

법관의 발과 로브에 엉겨 붙었다.


울창하다 못해 우거진 나뭇가지들은 

가뜩이나 어두운 숲길에 

한 층 더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며

음모와 수수께끼에게 자리를 제공했다.


이런 기이하고 기괴한 분위기만으로도

말처럼 섬세하고 겁이 많은 동물은

기피할만하다.



물론, 그 불쌍한 짐승들이 

이곳을 기피하는 이유가

그것뿐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법관은 이미 들어 알고 있었다.



법관이 신중하게 주변을 살펴보는 사이에도

그녀의 다리는 거침 없는 걸음을 이어나가

시나브로 마을에 가까워졌다. 




마을의 윤곽이 선명해질 무렵,

마을 내부에서 드문드문 보이던 인영이

먼 곳에서 다가오던 그녀를 발견했다.



인영 중 일부는 삼삼오오 떼를 지어

낯선 법관의 도착을 기다리듯 서있었고

몇몇이 허둥지둥 마을 어딘가로 떠났다.



그녀가 마을 앞에 다다랐을 무렵에는

아까 떠났던 이들이 부른 것으로 보이는

듬직한 사내가 목례하며 말을 걸었다.



"아이고, 안녕하십니까, 

저는 여기 타뷸라 마을의 촌장입니다.

실례지만 혹시 어떻게 오셨습니까?"



촌장은 일반인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거체에 맞지 않게 굽신거리며 다가오더니

주변을 살피다가 물었다.



"그리고, 설마하니 혼자 오셨습니까?"



법관은 묵례 후 답했다.



"나는 특별 재판소의 대법관, 디케라고 하오.

이 마을에서 보냈다는 전령과 접하였소."



법관의 말에 촌장의 얼굴이 환해졌다.



"아! 그렇다면 그 녀석이 

제대로 전달한 모양이군요!

그렇다면 혹시 다른 분들도…"


"다만, 이는 홀로 근방을 순례하던 중 

우연히 전령과 맞닥뜨렸기 때문이었소.


그 내용이 촌각을 다투는 안건이라 판단했기에

특별 재판소의 공식적인 대응을 기다리기에 앞서

단신으로나마 먼저 오는 편이 

적합하다고 판단하였소."



촌장의 얼굴이 일순간 어두워졌으나

천천히 고개를 주억거리는 사이

점차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바뀌었다.



"아아, 그러셨군요, 

그러잖아도 마을 사람들 모두

전령을 보낸 지 얼마나 됐다고  

바로 와주신 법관 나리 때문에 

다들 놀란 눈치입니다."



그는 자신이 뱉은 말이 

어떻게 들릴 수 있는지 

뒤늦게 깨달은 듯 황급히 덧붙였다.



"물론 저희야 당연히 한시라도 빨리 

와주시기를 바랐던지라

참으로 감사할 따름입니다만,

그래도 그렇지 저희처럼 

아는 것 없는 것들의 생각을 

한참 뛰어넘는 속도이지 뭡니까."


"신속한 정의 집행을 위해선

다양한 수단이 사용되는 법이오."



법관의 변함 없는 답변에 

그녀의 심기가 거슬린 기색이 보이지 않아 

안심했는지 촌장이 다시 굽신거리기 시작했다.



"이야, 역시 귀하신 나리답게 

통찰력이 남다르시군요. 

저희로서는 상상도 못 할 방법이 있으신 거겠죠. 

어깨에 올려놓으신 그 무시무시한 것도 틀림없이

저희가 모르는 무언가 굉장한…"


"쯧."



갑작스레 혀를 찬 법관 때문에

촌장이 우물쭈물하는 사이 

그의 말이 잘렸다.



"내가 주민과의 대화를 즐기는 것은 사실이나 

그대는 내가 이곳에 온 이유를 알고 있을 것이오.

안내하시오."



푸른 눈의 냉철한 직시에

촌장은 입을 다물고 앞장섰다.


쩔쩔매며 걸어가는 거한의 뒤에서

법관은 말없이 주변을 살폈다.



조용하다 못해 황량하기까지 한 마을이었다.



을씨년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마을 주민들은 상당한 거리를 두고

촌장과 법관의 뒤를 졸졸 따라왔다.


자기들끼리 무리를 지어 다니며

흘끗흘끗 법관을 훔쳐보던 주민들은

법관의 시야가 그들에게 닿을 때면

움찔하고 눈을 피하면서 

슬며시 거리를 벌렸다가,

법관이 시선을 거두고 나면

저들끼리 귓속말을 나누며 

은글슬쩍 도로 거리를 좁히곤 했다.


작은 사회에서만 살아온 사람들이 

외지인을 경계심과 호기심으로 대하는 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며,

특별 재판소의 고위직으로서 

유럽 각지를 순례해 온 법관에게는

이미 익히 경험해 온 일이었다.


그러나 그런 그녀의 눈에도 

타뷸라 마을의 경우는 특수했다.


법관은 몇 걸음 정도의 거리를 두고

뒤따라오는 마을 주민들을 눈여겨보았다.



그 수는 예닐곱 정도에,

하나 같이 꾀죄죄한 복장을 했고,

지치고 힘들어 보였다.



촌장만큼은 아니더라도 

다들 키는 시원시원하게 컸으나

동시에 비쩍 말라 보기 안쓰러울 정도였다.



일부는 팔다리가 여위어 있었고,

몇몇에겐 아물지 못한 상처가 있었다.

일반적으로는 병상에 누워

쉬고 있어야 할 상태인 주민도 보였다.


그럼에도 그들 외에는 

마을에 다른 어떠한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무리 촌구석이라 하더라도 

이렇게나 적은 인구수가 정상일 리 없다.



"마을에 사람이 없군."



법관이 먼저 침묵을 깨자

촌장이 기다렸다는 듯 설명했다.



"맞습니다. 지금 보이시는 대로

여기 모인 사람들이 전부죠.


애초부터 그렇게 북적거리진 않았지만

그래도 모두가 있었을 적에는 

적어도 지금의 몇 배는 되었는데,

작금의 사태 때문에……."



촌장이 이를 갈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는 직후 퍼뜩 정신을 차린 듯 

법관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으나, 

그녀에게서 별다른 반응을 읽지 못하자 

어물쩍 말을 넘겼다.



"아무튼, 거듭된 시도에도 저희만으로는 

도무지 어쩔 방도가 없다고 판단되어

도움을 요청하게 된 것이라,

틀림없이 법관 나리 말고도 더 많은 분이 

오실 거라고만 생각했습니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전령은 특별 재판소로 인도하였소.

만일 특별 재판소에서 필요하다고 판단하면 

추가적인 지원도 올 것이오."



법관의 대답에 

촌장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여전히 불안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중얼댔다.



"기왕이면 빨리 와주셨으면 좋겠군요.

전령 녀석이 이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그… '사냥꾼'이 얼마나 무시무시한지 

제대로 전해드리지 못했을까 봐 걱정됩니다."


"이에 대해선 염려할 것 없소.

사태의 심각성은 이미 충분히 전달받았소."


"그렇다면 다행입니다만……."



그 말과 함께 그들은 자그마한 예배당에 다다랐다.


촌장이 예배당의 문에 손잡이에

양손을 올려놓은 채 잠시 심호흡했다.


그는 문을 열기 전 법관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 안에 안치해 두었습니다만, 

그, 괜찮으시겠습니까?"



촌장은 자신의 근심을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으나 그 의미는 분명했다.



'피 냄새가 나는군.'



법관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에 촌장은 법관 뒤에 거리를 두고 있던

마을 주민들을 향해 눈짓했고,

그 의미를 이해한 주민들은 

둘에게서 한 층 더 거리를 벌렸다.


촌장이 힘을 주었다. 

거구의 근육이 도드라지며

예배당의 두터운 문이 열렸다.



그 안에는 외딴 마을의 급박한 요청에 

특별 재판소의 대법관이 나서기 

충분한 사안이 기다리고 있었다.




피로 얼룩진 예배당 안에

성직자 복장의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처참한 몰골의 시체 주위로 

불과 며칠 만에 켜켜이 쌓인 

역한 악취가 맴돌았다.


촌장은 예배당 문 근처에 있는 것만으로도 

고역이라는 듯 한껏 등을 젖혔으며,

그보다도 한참 더 물러나 있던 마을 주민들조차 

코를 쥐어 막거나 뒷걸음질 쳤다.


그러나 법관은 서슴없이 시체에 다가갔다.



심약한 사람이라면 가만히 서있는 것만으로도

실신할 위치까지 다가간 그녀는 눈을 감았다.



피범벅이 되어 흐트러진

사제 형상의 사체 앞에서 

법관은 정갈하게 성호를 긋고 

두 손을 모았다.



짧은 묵념.



법관은 눈을 뜨고 사체를 찬찬히 살폈다.



작은 마을의 앙증맞은 예배당에서 일하는 

성직자들이 흔히 그러하듯

펑퍼짐하고 단출한 수도사의 로브 복장이었다.

굳이 꼽자면 익숙한 솜씨로 

여러 번 덧대거나 기운 자국이 눈에 밟혔다.


그러나 이는 평화로운 마을에서 조용히 일하는

성직자라면 한 번도 겪을 일 없을

얼룩진 피와 찢긴 살점으로 뒤덮여 있었다.


법관이 눈을 떼지 않고 물었다.



"사체의 상체가 적잖이 손상된 것 같소만,

혹 숲의 야수가 건드린 것이오?"



아직 교회의 문가에 서있던 촌장은 

답하기 위해 목소리를 높였다.



"그건 아닐 겁니다, 나리!

마을 근처에는 야수는 고사하고

들개조차 얼씬대지 않습니다!"


"그리 보였소. 

그럼에도 굳이 확인차 다시 묻겠소.

혹시라도 마을에 남아있는 짐승이

사체를 훼손했을 가능성은 없소?"


"적어도 시신을 건물 안에 안치한 후로는

그런 적 없을 겁니다.

시내에는 이미 가축 한 마리도

남아있지 않거든요.

왜 그러십니까?"



촌장의 질문에 법관은 침묵했다.


촌장이 거짓을 고하지 않은 것은 확실했다.

실제로 포식자들이 먹이에 흔히 남기는 

장기가 먹힌 흔적은커녕 

이빨 자국 하나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설명되지 않는 점이 너무 많았다.



사망의 원인으로 추정되는

예리한 관통상에 반하는

투박하고 절제 없는 흉상,


큼직큼직한 상처를 남기며

수도복과 그 아래의 육신을 찢은 

거친 열상과는 달리


하나하나는 작으면서도

치명적인 급소만을 노린 

숙련된 창상의 위치 등,


단순한 변덕으로 인한 차이라고 

치부하기 힘들 정도로 

중구난방인 잔재가 남아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짙고 옅은 색의 핏자국이 섞인 수도복,

별다른 흉터가 보이지 않는 맨발,

어설픈 삭발례 머리 모양까지 

모조리 어색하고 기묘했다.



그때 법관의 눈에

피해자의 목에 남은 흔적이 포착됐다.



"목에 매달고 있던 것이

강제로 끊긴 듯한 자국이 남았군.

고인이 생전에 목걸이를 했었소?"



촌장이 머뭇대며 말했다.



"아… 그가 평소 매고 다니던

물건 말씀이라면 맞습니다.


저희가 구슬을 최대한 찾아서

옆에 모아 두었습니다."



확실히 한 때는 묵주의 일부였을 

흩어진 묵주알 몇 개와 함께

금이 간 십자가가 고이 놓여 있었다.


촌장이 덧붙였다.



"시신을 발견한 장소 근처에 흩뿌려져 있던 걸 

최대한 모으려 해봤습니다만…….

아무래도 많이 빠뜨려 버렸습니다."




법관의 머릿속에 사건의 전말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눈을 감고 숨진 성직자를 위해

조용히 기도문을 외웠다.

그러나 그저 기다릴 수밖에 없는 시간이 불편했는지, 

안절부절못한 촌장이 그녀를 방해하려는 듯 말했다.



"이제 확실해지셨습니까?

저희가 괜히 도움을 청한 것이 아닙니다!


성직자에게도 이런 악독한 짓을 저지르는 

사악한 마귀 같은 녀석이 

저희의 목숨을 노리고 있습니다!


한때 저희의 친구이자 이웃이던 이들이

그 악마에게 몇 명이나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촌장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한시라도 빨리 이 비극을 멈춰주십시오! 

'인간 사냥꾼'이 언제 또다시 습격해 

누군가의 목숨을 앗아갈지 알 수 없습니다!"



촌장은 악취를 뚫고

법관을 향해 성큼 다가오며 외쳤다.



"제발 부탁드립니다! 

저희를 그 악마 같은 존재로부터 구해주십시오!"



법관은 말없이 몸을 돌려 예배당을 나왔다.

그 갑작스러운 행동에 촌장은 뒤늦게서야

허겁지겁 그녀의 뒤를 쫓았다.


법관은 예배당 앞에 옹기종기 모여있던 

마을 주민의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었다. 



두려움에 떠는 것처럼 몸을 숙이며 

그녀를 바라보는 주민들 앞에서

법관은 붉은 검을 땅에 꽂고 말했다. 



"나의 개인적인 욕심대로라면 

그릇된 판결이 내려지지 않도록 

보다 차분하게 현 상태와 위험을 

직접 확인하고 평가하고 싶으나,

경각을 다투는 긴박한 상황에서도 

이를 고집하려는 생각은 없소.


그럼에도 허용 가능한 범위 내에서

최선을 기해야 함에는 변함이 없기에 

전령에게서 전해 들은 내용과

그대들이 직접 겪은 사태에 


불일치가 없는지 확인하고자 하오."



촌장이 법관을 따라잡았을 때

마침 법관은 그녀의 요구를 

세 줄로 요약한 차였다.



"그대들의 이야기를 직접 들려주시오.

오해가 없도록.

이후 행동에 나서겠소."



주민들은 여전히 경계심과 두려움을 

감추지 못하며 움츠러들었다.


그러나 막 법관 뒤에 도착한 촌장은

당장의 불안감을 잊게 해줄 말을 

들은 듯했다.


촌장이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러고 나면, '인간 사냥꾼'을 

죽여주실 겁니까?"



법관은 고개를 돌려 촌장을 보았다.


그녀는 촌장의 눈에 담긴 

검붉은 불꽃을 읽었다.


법관이 다시 주민들에게로 시선을 돌렸을 때,

촌장의 눈에 담겨 있던 바로 그 불꽃이 

그곳에서도 이글거리고 있었다.

주민들이 눈을 피하지 않으며 물었다. 



"그 마귀를 심판해 주실 겁니까?"



어둡고, 짙고, 질척이는 열망이 보였다.


법관은 그녀 뒤에 서있는 촌장과, 

간절한 마음으로 그녀를 주시하는 주민들과,

그들 속에서 타오르고 있는 복수심에게 

답했다.



"판결이 내려지고 나면

정의가 집행될 것이오."




3/✧         

기소



타뷸라 마을은 척박한 땅 위에 지어져 

숲에 크게 의존하고 있던 마을이었다.


최초의 희생자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 죽었다.



다음 날

두 번째 희생자는 

최초의 죽음이 자신과는 

관계없으리라 믿다가 죽었다.



그 다음 날

최초의 생존자가 말했다.


"이 숲속에 사냥꾼이 있었어."


그리고 최초의 생존자는 

세 번째 희생자가 되었다.



일련의 죽음이 단순 사고가 아니라는 사실이

명백해지자 모두는 다 같이 힘을 합쳐 

타파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어째서 곧장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소?"


"원체 이렇게 고립되고 외딴곳은

도움을 요청하더라도 사람이 언제 도착할지는

아무도 모르기 마련이니까요.

저희 문제는 저희끼리 힘을 합쳐 

알아서 해결하는 일이 일상입니다. 


애초에 마을 밖으로 도움을 요청하더라도, 

사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자 중에서

보답으로 드릴 것도 마땅하지 않은 저희를 

선의만으로 도와줄 이가 있기나 할지,


운 좋게 그런 분들이 계신다 하더라도

전령이 그분들을 찾아낼 때까지 

우리들끼리 숲에 출입을 금한 채로 

버틸 수 있을지…….



그런 못 미더운 시간낭비를 할 바에는 

차라리 다 같이 힘을 합쳐 숲을 수색하자,

같은 의견이 대세였습니다."




비록 전례가 없던 고약한 사태였지만

충분히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다.


함께 세월을 겪으며 능력을 증명한 동료들과

목숨도 믿고 맡길 수 있는 끈끈한 정이 있었다.


떠올릴 수 있는 모든 방안을 시도해 보았고,

성과가 있던 날도 분명히 있었다.


그중 가장 큰 성과는 바로 

사냥꾼의 오두막을 발견한 것이었다.



사냥꾼이 단순한 허구 속 망상이나 

괴담 속 괴물이 아닌 

실체를 가진 존재라는 것이 분명해졌을 때, 

모두의 사기가 들끓어 올랐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였을 뿐, 

사태는 해결되지 못했습니다."



촌장의 말은 설명보다도 넋두리에 가까워졌다.



"그 악독한 녀석은 마치 신기루 같았습니다.

코 앞에서 일렁이면서도 

정작 붙잡을 수는 없었죠.


작정하고 오두막을 에워싸서 포위를 시도하면

어느 틈엔가 인원이 하나둘 죽어 나가 

진영이 붕괴하기 일쑤였고,


소수 정예를 엄선해 오두막에 침입을 시도해도 

그 안에 들어가서 살아나온 사람은

한 명도 없었습니다."




사냥꾼은 오히려 자신의 오두막을 미끼로 삼아 

그들을 농락하는 것 같았다.



기댈 수 있던 이웃과 친우들이 목숨을 잃었다.


앞장서서 사건을 해결하려던 자부터 

싸늘한 시체가 되었고,


내일은 오늘보다 나아질 거라는 기대가 

무너지는 나날이 반복됐다.


언제부터인가 그들 사이에서

무력감이라는 역병이 퍼지기 시작했다.



'사냥꾼은 어찌할 수 없는 존재다.'


'우리로선 아무것도 할 수 없다.'


'포기해야 한다.'




"절망에 빠진 이들이 숲을 기피하기 시작하자

모두 서서히 말라 죽어 가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나마 기운이 남아있던 친구들은 

어린 아이와 노약자를 데리고

아예 다른 살 곳을 찾아 피난을 떠났습니다.


유일한 살길은 그것뿐이라고 하면서요.


이제 마을에는 

떠날 수 없는 이들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이곳에 때아니게 가족을 묻어야만 했던 

사람들 말입니다."



굳게 쥔 촌장의 주먹이 새하얗게 변했다.


마치 주민들을 이끌어 온 이로서 줄곧 벼려왔던 

분노와 원통함이 배어 나오는 것 같았다.



"저 건물에 누워있는 친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모든 형제자매를 사냥꾼에게 잃은 후 

무슨 수를 써서라도 손수 

그 마귀를 없애려던 녀석이었죠.


마지막의 마지막까지도 

우리 숲에 무지한 이방인들이 

우리를 도울 수 있겠느냐,


심지어 사냥꾼을 잡고 나서 우리끼리 처단해야 하니 

도움을 불러선 안 된다는 

얼토당토않은 고집까지 부릴 정도였습니다.


그 마음은 백분 이해했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고

결국 사냥꾼은 잡겠다면서 홀로 숲을 돌아다니다… 

유명을 달리하고 말았습니다."



촌장이 고개를 떨궜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이렇게 금방 와주실 줄 알았다면

진작 도움을 요청했어야 했습니다.

이제는 너무 늦어버렸지요."



촌장의 우울한 눈길이 예배당을 향했다.



"녀석이 살아있다면 동의하지 않았겠지만, 

이렇게 바깥의 도움을 빌려서라도

원한을 갚고 싶습니다."



촌장이 무릎을 꿇었다. 


그는 법관을 올려다보며 빌었다.



"그러니 나리,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제발 저 사악한 사냥꾼을 없애주십시오.

어두웠던 나날을 씻어내는 

한 줄기의 빛이 되어 주십시오!"



이에 다른 주민들도 다 같이 머리를 조아리며

한 마디씩 덧붙였다.



"그 잔혹한 살인광에게 복수해 주십시오!"


"나리만이 저희에게 남은 유일한 희망입니다!"


"파괴와 살육만을 일삼는 '인간 사냥꾼'에게

심판을 내려주십시오!"



그들의 절박한 외침은 

차라리 울부짖음에 가까웠다.


그들의 울음소리를 들은

법관의 입이 열렸다.



"그대들의 요청을 이해했소."



법관으로서 할 수밖에 없는 말이었다.



"그대들이 사냥꾼에 대해 

아는 바를 전부 고하시오."




그렇게 주민들의 설명이 시작됐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의 적시보다는

심신미약 상태의 생존자가 

본인이 겪었던 가혹한 재해를

되짚을 때 흔히 그러하듯 

심히 뒤틀리고 왜곡되어 있었다. 


그들의 설명은 괴담의 형식을 띠고 있었다.




길쭉한 전나무와 

새콤한 검은 산딸기를 품은

숲속 깊은 곳에는

한 채의 오두막이 숨어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침엽수들끼리

속삭이는 비밀이 들릴 듯한 그곳에는

한 명의 사냥꾼이 산다.


단 한 명이라도 더 많은 

희생자를 죽이기 위해서 

살아가는 인간 사냥꾼이.



인간 사냥꾼의 살인은

정신 이상자가 머릿속 목소리의 

명령에 따라 살육을 벌일 때처럼

비논리적이고 흉포하지도,


악마 숭배자들이 그들의

주인에게 제물을 바칠 때처럼

거룩하고 잔혹하지도 않다.


사냥은 오로지 냉철하고 무정하게,

효율적이고 빈틈없이 이뤄진다.



인간 사냥꾼에게 있어 사냥은 

오로지 수단에 불과한 까닭이요,

언제나 빠르고 확실하게 

인간의 목숨을 앗아가는 것이 

사냥꾼의 숙원이기 때문이다.



악의로 빚어진 탄환이

사냥꾼의 엽총에서 벗어나

비명을 지르며 달음박질치고 나면


인간 사냥꾼의 비밀을 

숨겨주는 전나무들은

조용히 총성을 삼키고

시체를 뱉는다.


살의로 벼려 서슬 퍼런

사냥꾼의 예리한 날붙이가 

은은한 달빛을 조각내면


희생자의 육신은 가시덩굴의 거름이 되고

피는 산딸기의 영근 과즙이 되어

영영 숲에서 돌아오지 못한다.




주민의 괴담이 끝났다.


그 속의 진위를 가려내는 것은

법관의 몫이었다.


법관에게 떠넘긴 일에 아랑곳하지 않고

촌장이 필사적으로 덧붙였다.



"아침부터 이곳까지 오시느라 

피곤하시리라 생각합니다.


어쩌면 아직 정확한 상황 파악을 할 수 없어

거부감이 드실 수도 있겠습니다.


그럼에도 저희는 아무쪼록 빠른 결단을 

내려달라고 부탁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감성에 호소하는 촌장의 눈에는

만감이 교차하고 있었다.



"머뭇거릴 시간이 없습니다!


마을의 평화를 위협하는 불경한 자를 

한시라도 빨리 퇴치하지 않으면 

무고한 이가 언제 또 목숨을 잃을지 

알 수 없습니다!


저희가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나리의 인도에 따를 테니, 

부디 한 시라도 빨리 

숲속의 사냥꾼을 퇴치해 주십시오!"




촌장의 고발이 끝났다.


마을 안은 다시 고요해졌다.


모두가 숨죽여 법관의 대답을 기다렸다.



침묵.



분명 일반적인 대화 중에도 종종 보이는 

짧은 공백의 순간에 불과했으나,

평소 찰나처럼 느껴졌던 시간이

지금 이 순간만큼은 영원처럼 늘어졌다.


유구한 시간 동안 

줄곧 침묵을 유지하던 법관은

영원의 끝에서 

마침내 입을 떼었다.



"마침 그대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있소."


"무엇이든지요! 말씀만 해주십쇼!"



잔뜩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촌장이

황급히 답하자 

법관은 기다렸다는 듯 요구했다. 



"오두막의 위치를 알려주시오."



촌장과 주민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렇다면……!"


"판결이 내려진 것은 아니오.

그러나 한 가지는 약속하겠소.

정의는 구현될 것이오."



촌장과 마을 주민들은 앞다투어

오두막의 위치를 상세히 설명했고,

법관은 즉시 걸음을 숲으로 향했다.


그녀의 뒤로 감사와 찬양을

담은 목소리가 쏟아졌으나

법관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없이 나아갔다.



한참 후, 

피비린내 나는 마을을 벗어나 

혼자만 남은 디케는 

한숨을 내쉬며 조용히 뇌까렸다.



"세상에 의롭지 않은 일들이 많군."




4/✧        

수사



황금의 왕좌를 백은이 물려받고,

계승 과정은 먹구름 장막 뒤에서만 

은밀하게 치러진 하늘 아래에서,

법관은 숲속을 걷고 있었다.



그 순간 법관의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던 생각은, 

굳이 오두막의 위치를 물어볼 필요가 있었는가 

하는 의문이었다.


마치 동화 이야기 속 헨젤과 그레텔이

조약돌로 그들이 가야 할 길을 표시했듯

죽 늘어져 있는 묵주알들이 

피해자가 어디서부터 옮겨졌는지

낱낱이 표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묵주알들은 서로 상당한 간격을 두고

초목 사이에 띄엄띄엄 흩뿌려져 있었으나

남다른 관찰력과 추리력을 바탕으로 

진범과 무고한 이를 밝혀내는 직종에 

임하고 있는 법관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법관은 묵주알의 안내를 받으며 

숲을 가로지르는 한편

아직 확실히 풀리지 않은 의문점들과 

주민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곱씹었다.


그녀의 어깨에 올라가 있는 손이 슬며시 흩어지며 

마치 계곡 사이를 가로지르는

음침한 바람 같은 소리를 냈다.



"정숙하시오."



법관의 한마디에 손은 침묵을 되찾았으나,

그 선사 시대의 유물이 보인 반응은

법관의 의심에 확신을 더했다.



촌장은 순수한 진실만을 말하지 않았다.

오히려 진실 사이에 거짓을 섞어

그녀를 기만하려는 의도가 엿보였다.



그러나 법관은 딱히 배신감 따위를 느끼진 않았다.



특별 재판소의 대법관으로 일하면서 

무고한 마도학자들을 구하는 동안

감성적인 마도학자들의 설명과 변명에 

한 톨의 기만도 섞여 있지 않는 편이

도리어 드물었다.


마도학자든, 인간이든, 초자연자든,

말이 통하는 상대를 언어로 기만하여

자신의 안위를 보전하려는 행위는

순진무구한 아이들조차 쉽게 저지르는 불의였다.



중요한 것은 그녀가 거짓 속에 숨겨진

진실을 밝혀낼 수 있느냐, 

그로써 정의를 집행할 수 있느냐는 점이었다.



바쁘게 돌아가는 법관의 머리와 마찬가지로

그녀의 다리 또한 거침없는 걸음을 이어갔다.


각국의 지리에 능통한 그녀가 이제는 슬슬 

타뷸라 마을보다도 인근의 다른 마을에 

더 가까워질 정도로 멀리 왔다고 생각할 때쯤,

묵주알의 흔적이 끊겼다.



대신 저 멀리 말라붙은 핏자국이 보였다. 



법관은 사방에 퍼진 핏자국에게 다가가 

주변을 쭉 살폈다.


온갖 곳에 남아있는 각양각색의 두터운 털,

구석에 얌전히 모여있는 신발,

나무와 지면에 남아있는 거친 전투의 잔재,

그리고 사나운 맹수만이 남길 법한 자취.



법관은 손을 뻗어 털을 집었다.

먹구름 사이의 흐릿한 달빛만으로도

그 정체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길고 두꺼운 늑대의 털이었다.


그러나 평범한 늑대의 것은 아니었다.



굳이 높이가 2미터에 육박하는 

나뭇가지 위에 남아있지 않았더라도 

마도학자인 그녀는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 털의 주인은 마도학계의 기준으로도 

최상위 포식자 중 하나이자 

최악의 인간 사냥꾼으로 꼽히는 존재,

늑대인간의 것이었다.



법관이 마지막까지 보류하고 있던 의문들이 

확신의 실마리가 되어 풀렸다.


낱낱이 뿌려졌던 구슬들이 

하나의 실로 꿰어지는 것처럼.



단순히 음습하기 때문이라고 치부하기에는

훈련된 말조차도 접근을 꺼리던 마을,


걸어오는 내내 지나치게 고요하던 숲,


냉철하고 효율적인 인물이 저질렀다고 

치부하기에는 지나치게 흉폭했던, 

마치 짐승이 남긴 것처럼 보였던 상흔.


여태 명확한 이유가 밝혀지지 않았던 

'인간 사냥꾼'의 살해 동기.




그 순간 하늘에서 빗방울이 떨어졌다.


법관은 그녀의 뺨에 닿은 감촉에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조금만 늦게 도착했더라도 

증거물을 휩쓸어 없앴을

밤하늘을 확인한 법관은 피식 웃었다.



"비 오는 날이라 화형 기둥 아래 

불의의 불꽃이 아직 피어오르지 않았군. 

아직 늦지 않았어."




그 순간, 총성이 울렸다.



법관과 어깨 위의 손이 반사적으로 

검을 뽑아 급소를 보호하기가 무섭게

둔탁한 충격이 그녀의 전신을 감쌌다.


탄환이 검에 튕겨 날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법관은 곧장 전투 자세를 가다듬었다.


그녀는 탄환이 날아온 방향을 향해 

검을 겨누었다.


검 끝이 가리키는 곳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



총성과 목소리가 들려온 그곳에,

우거진 전나무와 산딸기 덩굴 너머에,

오두막이 있었다.


구름 사이를 비집고 드러난 달빛 한 자락에

'인간 사냥꾼'의 모습이 드러났다.



밤하늘보다 어둡고 

노을보다 붉은 사냥꾼에게서

영영 지워지지 않을 것 같은 피비린내가 났다.




5/✧      

심리



어둠이 드리운 숲에서 

숲을 더럽히는 불경한 존재를

직접 제 손으로 처단하기 위해 

촌장이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무모하게도 단신으로 인간 사냥꾼을 

마주하려 드는 법관을 도와 

마을의 평화를 쟁취하기 위함이었다.


그의 의도를 법관에게 솔직하게 밝힐 수도 있었으나, 

그러지 않았다.


어린 나이에 자신만만하고 당찬 법관에게

인간 사냥꾼의 위험성을 강조해 봤자

귀 기울인 척도 하지 않을 것 같았기에

몰래 뒤따라가는 편이 낫겠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기실, 이는 법관에게 차마 고할 수 없던

그의 악랄한 본심을 숨기기 위함이기도 했다.


촌장은 인간 사냥꾼을 직접 처치하거나,

하다못해 그의 최후를 

자신의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보고 싶었다.



그러나 비바람이 몰아치는 밤의 숲은 

굳건한 그의 결의를 꺾으려 했다.


나뭇잎들이 서로 비비는 소리와

빗방울이 바닥을 때리는 소리에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두려움과 섬뜩함이 그를 삼켰다.


무언가가 들린 것 같아 

불현듯 돌아봤지만 마주한 건 

옅은 달빛뿐이었고,


무언가에 닿을 것 같아 

슬며시 손을 뻗어도 

닿은 것은 절망뿐이었다.



그러나 촌장은 마음을 다잡았다.



우울한 어둠이 그의 목을 조르고 

울퉁불퉁한 나뭇가지가 

그의 발목을 채는 손아귀가 되었지만

이 모든 것을 뿌리치고 앞으로

나아가게 해줄 불길이 그의 심장을

태우고 하고 있었다.



복수심.



당한 대로 되갚아주려는 이 성미는

타뷸라 마을에 남아있는 모든 동료가

공유하는 공통점이었다.



그리고 촌장은 그들을 이끄는 자였다.



촌장은 한 치 앞도 보기 힘든

구불구불한 숲길을 서슴없이 헤쳐 나갔다.



숲 한 가운데에 도사리고 있는

'인간 사냥꾼'의 진정한 정체가 무엇이든, 

그 오만한 법관의 도움과 함께라면  

쓰러트릴 수 있으리라.



모두가 나날이 더 여위어지고 힘겨워지는

하루하루가 계속되고 있었다.


법관의 말처럼 추가적인 인원이 온다 한들 

모두가 그때까지 멀쩡히 버틸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없었다.


그 때 와서 구제의 손길이 닿아 봤자

마을의 기사회생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지금을 놓치면 

이보다 더 최적인 기회는 

영영 오지 않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다른 어중이떠중이라면 몰라도 

촌장인 그라면 이 절호의 기회를 

움켜쥘 수 있으리라.



그가 자신 있게 한 걸음 더 

앞으로 내디딘 찰나, 

벼락이 세상을 갈랐다.



세계가 하얗게 물든 그 순간,

그의 눈앞에 예상치 못했던 존재가 서있었다.



대지에 검을 꽂고 

양손을 그 위에 올린 채

조각처럼 우뚝 서있는 법관이.




콰르릉




천둥이 울렸다.


촌장은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었다.



어째서 이곳에?


아무리 걸음이 늦어졌더라도 

진작 오두막 근처까지

도착했어야 하지 않았나?



다시 번개가 내리쳤다.



그의 혼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꼿꼿이 서 있는 법관의 모습은

마치 고고한 사자와도 같았다.



콰르릉


"재판을 시작하겠소."



천둥과 함께 법관의 목소리가 

숲속에 울려 퍼졌다.



"원고는 지난 한 달여 사이

타뷸라 마을에서 뜻밖의 죽음을 맞이한

모든 마을 사람이오.


그러나 그들은 죽음으로 침묵하게 되었기에

내가 그들의 대리인으로서 원고의 직무를 대행하겠소.


피고는, 

촌장인 그대를 대표로 하는

현 마을 주민 전원이오."



믿지 못할 광경과 이해 못할 말이 섞인

초현실적인 상황에 

촌장은 어안이 벙벙했다. 


그러나 일시적인 감성이 가시고

법관의 말을 곱씹기 시작하자

몽롱했던 기분이 가라앉고

피가 거꾸로 솟기 시작했다.


울컥한 촌장이 고함쳤다.



"그게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입니까! 

설마 사냥꾼 때문에 죽은 친구들을 제대로

보호하지 못한 죄로 저희를 탓하시려는 겁니까?

그런 걸 따질 생각이라시라면…!"


"정숙하시오."



법관은 검을 들어 올렸다 내리꽂으며

촌장의 말을 끊었다.


법관의 언행에는 알 수 없는 힘이 실려 있었다.


마치 율법을 집행하는 그녀에게

거스를 수 없는 마법이라도 걸린 것처럼.



"우선 첫 번째 증거품을 제시하겠소."



법관은 검 손잡이에 올려놓고 있던 한 손을 떼더니 

무언가를 건네듯 손바닥을 위로 펼쳤다.


그 위에는 작은 묵주알 하나가 놓여 있었다.



"그대들은 예배당에 안치된 이가 이 묵주를

목에 매달고 다녔다고 주장하였소."


"……."


"그러나 묵주는 목에 걸고 다니는 것이 아니오.

불신자들 사이에서 흔한 오해이지만.

그리고 목에 걸고 다니는 십자가인 

펙토랄레에는 묵주알을 넣지 않소." 



촌장은 침묵했다.



"이외에도 유사한 근거는 많소.


마을의 누구도 성호를 긋지 않았고, 

예배당의 정확한 명칭을 언급하지 못했소.


사체는 관 안에 안치되거나 

가지런히 손이 모아져 있는 대신

단순히 건물 안에 널브러져 있었지.

사망 장소조차 아니기에

현장을 보호할 필요가 없음에도.


이는 마을에 거주하던 이 중 누구도

가장 기초적인 종교적인 가르침조차

숙지하지 못하였음을 증명하오."



법관의 논지에

촌장이 즉각 반론했다.

마치 이미 준비했던 것처럼.


"그건 그저 저희가 아무것도 모르는 

무지렁이들이라서 그렇습니다!


매일 먹고 살기 힘든데 

어떻게 그런 걸 배우고 삽니까!


저희가 종교의식에 무지몽매하다는 것이

모든 잘못을 뒤집어써야 할 이유가 됩니까?"



법관은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말하지는 않았소.


그러나 종교인의 복장을 한 피해자와 

긴 세월 공동체를 유지했다고 주장하던 이들이 

기본적인 교리에 완벽하게 무지하다는 사실은

어떤 가능성을 시사하오.


고인도, 그대들도 종교인이 아니오."



촌장이 반박하려는 듯 입을 벌렸으나

법관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대들은 살해당한 이가 종교인이라면

도움을 요청하기 수월하다는 것을 알기에 

이에 맞춰 사후 위장하였소.


고인의 엉성한 삭발례가 이를 뒷받침하오.

죽은 자의 피부에 흉터가 남지 않게 삭발하려면

어쩔 수 없었을 테지.


그대는 선의로 도와주려는 이를 기만하여

거짓된 이유로 그대를 돕게 하려 했소.


그대들은 이 죄를 인정하시오?"



촌장은 나오려던 말을 삼켰다.


그는 짧은 고민 끝에 

쉽게 반박될 수 있는 변명보다는

차라리 솔직한 심정을 고하기로 했다.



"…그만큼 급한 상황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의 상태를 보면 아시잖습니까!

도움을 받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해야만 했습니다!


종교가 있든 없든 도움만 받을 수 있다면 

상관이 없을 만큼 절박했습니다!"



감정적인 촌장의 고백에도

법관은 덤덤히 말했다.



"재판을 계속하겠소."



그리고 지나가듯 첨언했다.



"덧붙여, 재판 진행 중에는 혼동을 일으키지 

않을 명칭을 사용해 주기 바라오.


그대가 줄곧 입에 담던 

마을 '사람'이라는 명칭은

정확한 표현이 아니오."



촌장이 눈이 가느다래졌다. 

비단 빗줄기를 피하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법관의 말이 이어졌다.



"사체가 훼손된 모습 중에 

거대 야수에게 상체를 뜯긴 듯한 모습이 있었소.


그러나 그대가 고했듯 마을 내외에도,

심지어 이렇게나 깊은 숲속에서조차

어떠한 야생 동물의 흔적은 찾아보기 힘드니,

하물며 이들을 포식해야 할 

거대 야수는 말할 것도 없소.


그리고 결정적으로, 

늑대의 것과 극히 유사하지만 

그 크기에 있어서 월등한 털이 

살해 현장 근방에 지천으로 깔려 있었소."



법관은 묵주알을 보인 손과

대칭이 되도록 반대쪽 손을 펴 보였다.


천칭의 형상으로 펼쳐진 

그녀의 손 안에는

여러 색의 털이 들려 있었다.


촌장이 뿌득하고 이를 갈았다.



"이것이 두 번째 증거품이오.


이 털은 늑대인간의 것.


다양한 색상이 증명하듯

다수가 무리를 짓고 있소.


그리고 그 수를 유지하기 위해선

먹이도 상당량 필요하겠지.


이토록 넓은 범위의 숲에서 

야생동물의 씨가 마른 것도

이와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오."



법관의 푸른 눈이 촌장을 꿰뚫어 보았다.



"사체에 남은 큼직한 상흔 또한

사후 늑대인간에 의해 생긴 것이었소.


사냥꾼의 영역 내에서 사망한 고인을 

급하게 옮기던 중 생겼거나, 

혹은 그 과정 중 생긴 흔적을 묻기 위해

의도적으로 상처를 크게 낸 것으로도 볼 수 있소."



촌장은 갈리는 이 사이로 짓씹듯 말했다.



"늑대인간이…

굳이 그런 짓을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늑대에게도 동료의식은 있기 때문이오."



법관은 노려보는 눈에도 주저하지 않았다.



"고인은 타뷸라의 늑대인간이었소.

그대들과 마찬가지로."



법관와 촌장 사이의 빗줄기가 굵어지기 시작했다.



"이는 그대들이 일반인이라면

당연히 알 법한 가장 기초적인 교리조차 

이해하지 못하여 어설픈 흉내만 냈던 

이유를 설명할 수 있소.


그대들이 사냥꾼이 두려워 숲을 피하자

마을에 닭 한 마리 남지 않고 사라진 것도 

설명되오."



달빛 아래에서 번뜩이는 촌장의 안광이 

차츰 더 날카로워졌다.



"고인이 사냥꾼에게 죽은 후

사체를 굳이 마을까지 옮겨온 것도,


이후 목걸이로 착각한 묵주를 

굳이 사체의 목에 걸고 뜯어낸 후

묵주알을 오두막 방향으로 뿌려놓은 것도,


전부 나처럼 도움을 주려던 이방인을

기만하여 사냥꾼과 맞붙이기 위함이었소.

다소 어설픈 부분은 많았지만."



촌장의 덩치가 꿈틀거리며 

한층 더 부풀어 올랐다. 



"처음에는 단순히 이방인을 먹잇감 삼아 

유인하려던 술책일 가능성도 고려했으나,

이미 마을에 진입했던 내게 

그대들이 요청한 바를 고려하면,

'늑대'인간 사냥꾼이 그대들에게 

큰 위협이라는 것은 사실이었을 것이오.


실제로 목숨을 잃은 무리의 일원이 많다는 것도.


사냥꾼을 향한 그대들의

적대감과 공포는 거짓이 아니었소.


고인의 성향과 행적 또한 

사실이었으리라 짐작하오.


그는 인간의 모습을 취한 채로

오두막 근방까지 접근한 후, 

신발을 벗고 늑대의 형상으로 

바꾼 후 사냥꾼의 오두막을 급습했소.


그 결과 오두막 근방에 남겨진 신발은 

가지런히 모여있었고,

인간의 모습으로 죽은 사체의 맨발에는 

숲속을 돌아다닌 흔적이 남지 않게 되었소."



촌장의 전신이 털로 뒤덮였다.



"그럼에도 고인은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했소.


도저히 그대들만으로는 사냥꾼에게

복수할 수 없으리라 판단한 그대들은

인간들이 흔히 우러러보고 따르는

성직자의 모습으로 고인을 꾸몄지.


다만 사체와 숲속에는 갖은 조작을 

저지를 수 있었으나 살해 현장만큼은

섣불리 건드릴 수 없었소.


그 위치가 사냥꾼의 오두막에

지나치게 가까웠기에,

가까스로 고인의 사체를 회수한 후로는

근처엔 얼씬도 하지 않았을 것이오.


그 결과 본 재판에 사용한

갖가지 증거물이 남게 되었소.


그대들은 이 죄를 인정하시오?"



촌장의 모습을 포기한 늑대인간이

낮게 으르렁댔다.


이제 와서 발뺌하기엔 

증거와 확신이 지나치게 쌓였다.


그녀가 아직 언급하지 않았을 뿐인

조작의 흔적도 있으리라.


어쩌면 늑대인간의 존재를 

단순 괴담으로 치부할 인간이 아닌 

마도학자를 불러들였다는 점부터

패착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든 

진실이나 거짓, 핑계나 변명 따위가 

중요한 시점은 지났다.


지금부터 중요한 것은 

법관이 그의 요구를 따라

사냥꾼을 공격하는가였다.


긍정적으로 생각해보자면,

더는 회유와 호소 따위에만 

의존할 필요가 없었다.



"우리의 정체를 까발렸다고 해도 

바뀐 것은 없다!


우리 동료의 사망 자체는

결국 사냥꾼에 의한 것임을 깨달았을 것이다.


우리의 기만을 인정할 테니 

앞서 우리 무리의 일원을 무참히 사냥한

'인간 사냥꾼'부터 심판하라!


네년은 제 입으로 정의를 집행하겠다고 

선포하지 않았는가!"



법관은 고개를 들어 올려

그녀의 신념을 악용하려는

늑대인간의 우두머리와 눈을 맞췄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우두머리의 눈이 희번덕거렸다. 

법관이 부연했다.



"남의 목숨을 앗아가려던 자는

자신의 목숨을 잃더라도 

불평하여선 아니 될 것이오."



늑대인간 무리의 우두머리가 짖어댔다.



"우리의 목숨을 먼저 

일방적으로 앗아간 것은 사냥꾼 쪽이었다!

우리는 당연한 보복을 하려는 것에 불과하다.


입으로는 정의를 운운하면서도

결국은 추잡하고 야비하게 동족 편을 드는 위선은

인간의 방식 아닌가!


아니면, 우리의 정체를 알고 나니 팔이 안으로 굽던가?


학살범인 늑대인간 사냥꾼에게

정당한 복수를 요구하는 것조차

인두겁을 쓰지 않으면 안 되는가?"



인간 사이에 만연한 마도학자 차별을 들먹이며

그의 무리를 도울 것을 종용하는 우두머리의 발언에

법관은 이전과 다를 바 없는 목소리로 반문했다.



"기존에 타뷸라 마을에 살던 

사람들은 어찌 되었소?"



그녀의 어투는 늑대인간의 정체와 행적을 

짐작하기 전과 후에 그랬던 것처럼 한결같았지만

방금까지 말이 청산유수처럼 흘러나오던 우두머리의 입은

굳게 닫힌 채 허연 입김만을 내뿜었다. 



"타뷸라는 그대들이 세운 마을이 아니오.

그랬다면 예배당을 건축했을 리 없지.

묵주 같은 물건을 사들였을 리도 없고.


반면 그대들이 위장을 위해 고인에게

입혔던 수도복에는 고인의 피 말고도

한참 전에 묻은 것으로 보이는,

한층 더 짙은 색의 피가 묻어 있었소.


마치 과거 그 복장으로 피를 흘린

피해자가 있던 것처럼 말이오."



천칭을 이루던 법관의 양손이 

검 위로 되돌아가

무기를 움켜쥐었다.



"앞서 사체에 남은 큼직한 상흔이 

사망한 고인을 급히 옮기다가 생겼거나, 

그 흔적을 가리기 위해 상처를 키웠을

가능성만을 언급했으나,

이 외에도 다른 가능성이 있소.


이미 수도복에 남아있던 자국에

맞추기 위해 일부러 동료의 사체를

훼손했을 가능성 말이오."



늑대인간의 우두머리가 질문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



법관이 답했다.



"재판을 시작하며 선언했을 것이오.


본 재판의 원고는 

타뷸라 마을에서 뜻밖의 죽음을 맞이한

모든 마을 사람이며,


재판의 피고는 그들을 습격해 자리를 꿰찬

늑대인간인 그대들이라는 것을.



동족을 학살한 늑대인간 사냥꾼에게

복수를 천명한 피고의 대표로서

그대는 피고가 저지른 

타뷸라 마을 사람들의 학살을 변호할 수 있겠소?"



늑대인간의 우두머리는 

별것도 아닌 딴지라고 말하는 것처럼

코웃음을 치며 장난치듯 말했다.



"자연의 섭리, 약육강식은 어떤가?"



법관은 고개를 저었다.



"가축과 야생 동물도 잡아먹는 그대들이

굳이 인간의 포식을 고집할 이유는 

없기에 변호로는 충분하지 않소."



우두머리는 조롱을 이어가듯 물었다.



"굳이 편리와 미식을 포기할

이유가 느껴지지 않았다면?"


"그렇다면 이는 자연의 섭리와는 무관한

자의적인 판단에 따른 살인과 식인이니,

인간의 율법에 따라 그 결과 또한

마땅히 받아들여야 할 것이오."



법관의 무던한 답변에

우두머리는 흥미를 잃은 기색으로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학살 같은 말을 입에 담은 것치고는

줄곧 무덤덤해 보이길래 우리의 정체를 안 후에도 

함께 힘을 합쳐 인간 사냥꾼을 죽일 생각이 

있었나 싶었는데, 괜한 시간 낭비였군.

더는 말을 섞을 가치가 없다."


"피고 측의 추가적인 변론이 없다면 

변호의 포기로 간주하여 판결을 선고하겠소."



우두머리는 전신을 부풀리려는 것처럼

크게 숨을 들이켰다.


이미 그녀와 힘을 합치는 계획이 엎어진 이상,

더는 재판이니 판결이니 하는

헛소리에 어울려주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또한 위법성 및 책임의 조각사유가

불충분함을 인정하는 것으로 간주하며,

통칭 '사냥꾼'을 먹이로 노려 선제공격하던 중

'사냥꾼'이 행한 정당방위를 일방적인 습격 및

살해로 취급하려던 시도 또한……"



눈앞의 여자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가고 있었지만

우두머리의 귀에는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 지금 중요한 것은 단 하나,

이번 외지인의 도움을 받는 것은 실패했다는 점.


이미 실패로 결론이 났다면 아쉽더라도 

다음 사람이 더 쓸모 있길 바라면 될 뿐이다.


물론, 뒤처리를 겸해서 

오랜만에 식사부터 즐기고.


최소한 다음 지원이 오기 전까지

전력을 보존하는 데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테다.



결정을 내린 우두머리를 향해

법관의 마지막 말이 이어졌다.



"…이에 따라 본 재판정은 피고에게…"



문명과 예의범절의 시간은 끝났다.

이제부터는 야만과 사냥의 시간이었다.



"…사형을 선고하오."

아우우우우우!



법관의 선고는 우두머리의 포효에 묻혔다.


줄곧 숲속에 몸을 숨긴 채 우두머리의 뒤를 쫓던

늑대인간 무리가 우두머리의 신호를 듣고

어둠 속에서 안광을 빛냈다.



사냥꾼과 법관이 격전 후에도 공멸하지 않았을 시

생존자에게 회복할 틈을 주지 않고 

곧장 힘을 합쳐 죽일 수 있도록 

함께 왔던 주민들이었다.


아무리 비바람이 몰아쳐

그들의 후각과 촉각을 마비시키고 

잊을만하면 내려치는 번개와 천둥이 

그들의 시각과 청각을 방해하더라도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눈앞의 여자가 설령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단신으로 외지를 돌아다닐 만큼

자신만만한 것만큼이나 

능력이 뛰어난 마도학자라 할지라도,

조건이 같다면 머릿수에서 우세하고 

익숙한 환경을 활용하는 측이 

유리한 것은 당연했다.


이 숲은 말 그대로 

늑대인간의 앞마당이며

그들의 영역이었다.



우두머리는 익숙한 손짓으로 

법관을 가리켰다.


정확한 뜻을 모르는 법관에게조차

그 의미는 분명했다.



'죽여라.'



법관은 비소를 지었다.



"무리를 지어 위협하는 건가?… 훗."



우두머리의 명령에 따르는

늑대인간들이 법관을 덮쳤다.


법관은 그들의 아래에 파묻혀 육편이 되리라.


늑대인간의 그림자들이 쏜살같이 

하나둘씩 법관에게 몰려 들었다.



하나, 둘, 셋…… 

셋?


겨우 셋?



마을에 남아 있던 무리 전원을 

끌고 온 것을 기억하던 우두머리가

의문에 빠진 순간,



"형의 집행은 맡기겠소.

그대의 희망대로."



우두머리의 의문은

법관의 말에 들려오는

경악스러운 대답과 함께 풀렸다. 



"망할 늑대 같으니라고, 죽어라."



총성이 울렸다.




6/✧✧    

집행



전나무와 산딸기의 냄새 사이에서 

화약과 피의 비린내가 진동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한 발의 은 탄환이면 됐다.



그것만으로도 늑대인간들은 이미 

사냥꾼이 아닌 사냥감으로 전락해 있었다.



번쩍하고 다시 밤하늘이 밝아졌다.


우두머리의 명령대로 

법관에게 덤벼드는 것조차 잊은 채

혼비백산한 늑대인간들 사이로

사냥꾼이 파고들었다.



그녀는 그 사이에서 도끼와 총이 

합쳐진 것 같은 기이한 모양의 '손도끼'를 

크게 휘둘렀다.


춤사위와도 같은 그녀의 움직임이 끝났을 때,

파티의 군중이 찬사의 의미로 

무용수에게 장미를 던지듯 

사냥감들도 그녀에게 선혈을 뿌렸다.


늑대인간 사냥꾼은 능숙하게 

그들의 환호를 망토로 받았다.


빨간 망토가 또 한 번 피의 색으로 덧칠됐다.



찢긴 몸으로도 안식에 도달하지 못해

죽음의 문턱에서 생존을 바라며 휘두른 

늑대인간의 필사적인 반격은 허공만을 갈랐다.


이미 그곳에는 빨간 망토의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곳에는 흉포함도, 잔혹함도, 자비도 없었다.


오로지 묵묵하게 효율적으로 치러지는 

사냥만이 있었다.


세상에 태어난 지 10년이 채 안 되었으나

몇 세대에 걸친 원한과 증오를 먹은

늑대의 악몽이 현현했다.




천둥이 울렸다.



소리가 빛에게 뒤처진 짧은 간격 사이에

더는 우두머리가 아니게 된

일개 늑대인간에게는 신호탄과도 같았다.


그는 뒤도 안 돌아 보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오판이었다.


오두막과의 거리는 충분히 멀다고 생각했던

이곳까지 사냥꾼이 나설 줄은 몰랐다.



그는 실패를 인정했다.



하지만

무리는 새로 만들면 된다.

복수는 나중에 하면 된다.


당장은 무리더라도,

힘을 길러서 다시 무리를 짓고

외딴 마을에 둥지를 틀면

수를 불리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



늑대인간의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인간 마을을 거점으로 삼아

근처 숲에 사는 동물도 잡아먹고

인간 여행자도 유인한다는 

그의 천재적인 발상에는 문제가 없었다.


그저 운이 없었을 뿐이었다.


하필이면 점령했던 마을 근방에

어처구니없는 실력의 늑대 사냥꾼이

살고 있었을 뿐이다.


하필이면 용병 겸 간식으로 부른 심판관이 

남다를 정도로 눈치가 빨랐을 뿐이다.



산소가 부족해진 늑대인간의 머리가 

핑핑 돌기 시작했다.



이번 실패를 교훈 삼는다면  

다음엔 반드시 성공할 수 있다.


한때 40마리가 넘는 

거대한 무리를 통솔했던 그에게

이런 것쯤은 그저 사소한 실수,

일시적인 후퇴에 불과했다.


살아남는다면,

살아남기만 한다면, 

다시 무리를 모으고 힘을 길러

언젠가는 반드시 피의 보복을……



늑대인간의 장대한 계획은

귓가에서 들려온 

소녀의 속삭임과 함께 끊겼다.



"지옥에나 떨어져라."



그날 밤, 빨간 망토의 색이 

한층 더 붉게 물들었다.




7/✧   

후속조치



비가 그치고 구름이 걷혀

조각난 달빛이 비정한 밤을

관통하는 숲속에서

두 마도학자가 마주 보고 있었다.



"예고 없던 방문과 요청에도

흔쾌히 사형 집행의 대리인으로서

나서준 것에 감사를 표하오." 



법관의 말에 사냥꾼이 고개를 저었다.



"나야말로 늑대 위치를 알려줘서 고마워.

……피는 피로 갚아야 해."



법관은 그녀의 눈에서 익숙한 검붉은 불꽃을 보았다.


사냥꾼과의 첫 만남 때부터

그녀가 단순한 쾌락 살인마 따위는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불꽃이었다.


법관과 그녀의 어깨 위 손 모두

비난하지 않는 감정이었다.


그러나 사냥꾼의 눈에서 타오르던 불꽃은 

우울한 빛 아래로 사그라들며

사냥꾼의 눈이 아래로 깔렸다.



"나쁜 늑대가 옆 마을에도 왔을 줄은 몰랐어.

알았더라면 이 마을 사람들도 

지킬 수 있었을 텐데."



법관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대는 따로 지켜야 할 마을이 있었고,

늑대인간 무리의 수가 너무 많았소.


그대는 단신으로 이룰 수 있는 

최선의 방위를 펼쳤소.


그대가 보호하는 마을에 

단 한 명의 희생자도 나오지 않은 것이 

이를 증명하오."



사냥꾼이 고개를 들어 법관을 바라보자, 

그녀가 덧붙였다.



"만일 그대가 없었더라면

늑대인간들은 두 마을을 거점 삼아 

더욱 수를 불리고 영역을 넓혀나갔을 것이오.


그러면서 인간과의 접촉이 늘어

문제가 발생하더라도 이번보다 훨씬 더

영악하고 음험한 기만을 펼칠 수 있었겠지.


이에 이르지 않을 수 있었던 건

전적으로 그대 덕분이오.


그대는 많은 목숨을 구했소."



사냥꾼이 말없이 법관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꼬리가 살짝 내려간 것에 불과했으나 

법관은 순간적으로 사냥꾼이 눈물을 쏟을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지나치게 긴 노역에 마땅한 보상을

어느 날 갑자기 전부 받아버린 사람처럼.


아니면 줄곧 차곡차곡 쌓인 물에 

버티지 못한 둑이 터지는 것처럼.


그러나 사냥꾼은 어린 나이에도 

암석처럼 단단하고 강인했다.


그녀는 조그마한 균열조차 내비치지 않고

인사하듯 빨간 망토의 두건을 

살짝 아래로 잡아당겼다.



"고마워." 



피에 물든 도끼날을 닦고

까매진 총구를 만지작거리는 사냥꾼을 보며,

법관은 이번 심판의 사형 집행자인 동시에 

이웃 마을의 파수꾼이 알아 마땅한 정보 또한 

전할 필요를 느꼈다.



"늑대인간 무리의 잔당 또한 염려 마시오.


전령은 이미 특별 재판소 쪽으로 보냈으니 

마도학자를 동원하여 생포하라 일러두면

그를 통해 잔당을 추적할 수 있을 것이오.


그들 모두 받아 마땅한 처벌을 받을 것이니

그대가 번거로워질 일은 없을 것이오."



사정을 이해한 사냥꾼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그럼 난 이만 가볼게.

아직 밤이니 보초 서는 곳으로 돌아가야 해.


나쁜 늑대는 아직 많이 남아 있어."



언제라도 자리를 뜰 것 같은 사냥꾼의 말에 

법관은 일순간 고민했다.


그리고 같은 마도학자로서

신중히 단어를 골라 질문했다.



"방금 전투를 마쳤는데, 괜찮겠소?

나의 치유 마도술이 부족하지는 않았소?"


"괜찮아. 훨씬 좋아졌어." 



비에 젖은 두 마도학자 사이로 바람이 불었다.


괜찮지 않았다.


법관이 보기 드물게 사용하는 치유 마도술은

약자를 위한 것이었다.


비록 늑대인간의 수가 많았다고 하지만 

암살과 기습으로 피해 없이 형을 집행한 사냥꾼이

법관의 마도술만으로 눈에 띄게 편안해졌다는 것은

오히려 사냥꾼이 그만큼 피폐한 상태라는 반증이었다.


다만 지난 몇 주 동안 밤마다 늑대인간 무리와 

혈투를 겪었음에도 법관의 설명을 듣자마자 

기꺼이 늑대의 몰살에 자원한 후,

이를 빈틈없이 완수한 천부적인 사냥꾼의 판단이라면 

법관으로서는 무어라 더 말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디케는 굳이 입을 열었다.



"그대와의 교류 중 인상 깊은 점이 있었소."



사냥꾼은 호기심 어린 눈길을 보냈다.

마주 보고 있는 디케의 눈에는 

존중이 서려 있었다.



"그대의 녹슬지 않는 결의를 보았소.


그대는 어린 나이에도 짧지 않은 세월 동안

늑대에게서 마을을 지켰겠다고 판단되오.


그대가 무기를 다루는 방식도 

늑대에 한해서라면 

누구도 견줄 자가 없으리라 믿소."



이는 칭찬이나 사탕발림이 아닌 

담담한 사실의 토로였다.



"그러나 그 대가는 무엇이었소?"



디케의 눈에 어두운 빛이 스쳤다.



"비록 짧은 만남이었으나

늑대를 향한 그대의 복수심은 자명했소.

그대는 원한을 연료로 삼아 늑대를 죽이고 있소.


하나 모든 일에는 결과가 따르는 법이오.

모든 천칭이 종국에는 제자리를 되찾듯이."



달이 아직 흩어지지 않은 먹구름 뒤로 숨었다.


디케는 어둠 속에서 말을 이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이는 세월에 휩쓸려 흔히 오용되는 문구이지만 

이 해묵은 율법의 진의는 

결코 난폭한 보복이 아니오. 


눈을 멀게 한 자는 오로지 눈만 멀게 할 것,

이를 부러트린 자는 오직 이만 부러트릴 것을 

종용하는 것이 최초의 취지였소."



밤바람이 숲의 나뭇가지를 흔들며

소스라치는 소리를 냈다.



"그러나 복수심에 몸을 맡긴 자는

이를 따르지 못하오.


그들은 적의 눈을 멀게 하고 

이를 부러트리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소.


양 눈을 터트리고, 턱을 박살 내고,

살을 찢고 뼈를 부숴도 

복수심은 거세게 타오르기만 할 뿐 

만족할 수 않소.


사사로운 복수는 정의롭지 않소."



언어로 표현되지 않은 경계심이 

어둠 속에서 디케를 향했다.


그러나 디케의 목적은 

빨간 망토의 폄하가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복수심의 불길은 

종국에 복수자 본인마저 삼키기 마련이오."



디케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부드러워졌다.



"몇십 일에 걸친 혈투 후,

하룻밤에 예닐곱 마리의 늑대인간을 몰살하고,

그 후에도 휴식을 취하지 않은 채 

곧장 보초를 서려는 것은

언제라도 단명할 것을 각오한 

복수자의 생활방식이오.


오랜 세월에 걸쳐 

마을을 지킬 수호자가 아니라."



바람이 그쳤다.


길다면 한없이 길고

짧다면 한없이 짧은 고요가 

두 마도학자 사이에 깔렸다.


디케는 어쩌면 사냥꾼의 총구가 

말없이 그녀를 조준하고 있어도 

알 수 없겠다는 생각을 했다.


어둠 속에서 소녀의 목소리가 물었다.



"그럼 수호자의 생활방식은 어떤데?"



여인의 목소리가 답했다.



"수호자의 생활방식은……

투창 선수와도 흡사하오.


이루고 싶은 일과 목표는 뚜렷하게 보일 것이오.


더 멀리, 더욱 높게,

누구나 가능만 하다면 본인이 던진 창이 

영원토록 하늘 위를 날길 바라기 마련이지.


그러나 손을 떠난 창은 

언젠가 땅에 떨어지기 마련이오.

선수의 염원이 아무리 강렬하더라도

창이 영원히 하늘을 가로지를 수는 없소.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힘이 닿는 한계까지 최선을 다하는 것,

그리고 이후 나오는 결과에 승복하고 

다음 차례가 올 때까지 몸과 마음을 추스르는 것이오."



분명히 어둠만이 있어야 할 숲속에서

디케의 어깨에 올라탄 혼령이 

붉게 빛나는 듯했다.



"그대의 삶은 복수귀로서의 것뿐만이 아닐 것이오.

마을의 수호자로서 살아가는 이상,

전자의 책무에 매몰되어 

후자를 도외시하지 않길 바라오."



다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달을 가리던 구름이 걷히자

월광을 받는 검은 적안이 

그림자 아래의 하얀 벽안에게 답했다.



"난 모두를 지킬 거야.

이 빨간 망토를 걸고."



애초에 빨간 망토를 놓기를 바란 것은

아니었던 디케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복수 하나에만 연연하는 것보다

훨씬 건강한 목표라고 생각하오."



디케는 익숙하지 않은 조언은 마치기로 했다.

사실 이번 일의 가장 큰 피해자나 마찬가지인

소녀에게 그녀의 사상을 강권할 생각도 없었다.


애초에 심판과 무관한 장소에서

남의 인생에 왈가왈부하는 것부터

그녀의 바람이 아니었다.



"부디 그대의 이름처럼

달빛이 그대의 앞길을 보우하길 바라오."



가호의 말을 끝으로 디케는 입을 다물었다.

대신 법관으로서 말했다.



"타뷸라 마을의 장례와

뒷수습을 관장할 지원은 내가 부르겠소.


그러니 그대는 안심하고 

그대의 책무를 다하시오."



사냥꾼은 말 대신 행동으로 답했다.


월하의 그녀는 순식간에 그림자 사이로 사라졌고,

법관은 부지불식간에 혼자가 되었다.



법관은 타뷸라 마을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 순간 예상치 못했던 돌풍이 

그녀의 얼굴을 때려 

잠시 눈을 감았다.



둘은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유럽 각지를 돌아다녀야 하는 마도학자와

외진 마을을 홀로 지켜야 하는 마도학자의

길이 몇 번씩이고 겹치기란 어려울 것이다.


시대가 뒤흔들릴 정도의 이변이 없는 한.



그렇다면 만에 하나,

먼 훗날에라도 달이 구름에 삼켜져,

곧게 뻗어나가던 달빛이 뒤틀리고 왜곡된다면,

핏빛이 감돌 붉은 달은 

화염검으로 끊어내는 수밖에 없을까?


달이 본연의 은빛을 잃지 않도록 

도울 방법은 더 없는 걸까?



디케는 눈을 떴다.



나무 사이로 고요한 밤바람이 

스쳐 지나가는 소리만 남았다.


비탄에 잠긴 이들의 울음소리도, 

불행에 빠진 이들의 비명도 들리지 않았다.



구름과 나뭇잎 사이로 

부서진 은색 달빛이 힘겹게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바람은 계속해서 불고 있었다.


머잖아 구름은 걷히고 동이 트며

달은 무거운 책무를 

잠시나마 내려놓을 수 있으리라.



당장은 그것이면 충분했다.


창은 이미 그녀의 손끝을 떠났다.


법관은 마을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후기


디케와 빨간 망토의 인게임 및 공식 홍보 자료,

챈에서 번역본이 올라온 디케 사이드 스토리 등의 인용부터


타뷸라의 늑대, 하스스톤, 슬레이어즈 주문, 

고블린 슬레이어, 눈물을 마시는 새 등등

본인 취향의 오마쥬까지 잔뜩 숨겨 놓았으니 

숨은 패러디를 찾는 재미라도 있었길 바람.


긴 글 읽어줘서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