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글 모음


의식주에서 가장 중요한 걸 꼽으라면 당연히 '식'이다.


집이 없으면 처량하고, 옷이 없으면 부끄럽겠지만, 


밥을 못 먹으면 그건 생명에 지장이 생기니까.



그런 논리적인 이유가 아니라도, 나는 먹는 걸 좋아했다.


폭식을 하거나 그런 게 아니라, 그냥 순수하게 맛있는 걸 먹는 걸 좋아했다. 


집이 엄청 잘사는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가난한 것도 아니라서 이런저런 맛있는 걸 먹는 게 삶의 행복 중 하나였다. 



그리고, 어느 날 아무런 계기도 없이 나는 미소녀가 되었다. 


원래 삶이 불만족스러운 건 아니었고, 외모도 남자치고 아주 봐줄 편은 아니었는데.


그 전 삶과 비교하는 게 실례일 정도로 아름다운 여자가 됐다. 


그리고 돈이 엄청 많았다. 


물론 계좌를 확인한 건 아닌데, 딱 봐도 돈 많은 집 여자애였다. 


혼자 쓰는 침대는 사람 과장 좀 보태서 네다섯이 자도 넉넉할 크기.


혼자 사는 방은 어느 집 거실만한 크기인데다가 빠짐 없이 가구와 장식이.


영화 드라마에서나 보던 메이드, 집사들이 상시 대기 중인데다가 


가장 중요한 건, 누구도 내게 정체를 캐묻는 다거나 그러지 않는다는 점이다. 


기억이 되돌아왔냐는 부모나, 자기가 누군지 알아보겠냐는 자칭 남편, 그런 게 없었다.


사실 그거 걱정을 엄청 많이 했는데. 게다가 전자면 몰라도 후자면 진짜 아찔하단 말이야.


이 정도면 TS물 보는 사람들도 이건좀할정도로  너무 편의주의적이지 않을까 싶은 상황.  


그게 나였다. 모든 사람들의 로망. 돈 많은 백수. 근데 예쁘기까지 해. 


하여튼 간에, 이런 몸이 되었고 또 별 걱정도 없는 상황이라는 걸 확인한 나는


"흠, 흐흥."


내가 정말로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오늘은 뭘 먹을까~"


그래. 앞에서도 설명했다시피 난 먹는 걸 좋아한다.


여자가 되었다고, 미소녀가 되었다고 해서 인방? 연애? 자위...?


그런 건 모르겠고, 중요한 건 돈이 많다는 거였으니까. 


연애는 해본 적 없고, 인방도 잘 모르니까. 자위는... 그 궁금하기는 한데....


아, 아무튼 가장 중요한 건 내가 먹고 싶은 걸 아무 제약 없이 먹을 수 있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여기는 알지도 못하는 중세나, 판타지 세계가 아니라 21세기 대한민국이었다. 


내가 아는 음식을 고를 수 있었고, 또 그걸 간편히 배달할 수 있는 세상.


그저께는 치킨을 먹었다. 그것도 두 마리나!


어제는 초밥 한 상을 먹었다. 종류 별로, 두 피스씩.


내일은 일주일 전부터 주문했던 방어회를 먹을 계획이다.


소박하다고 하더라도... 난 이게 좋은 걸? 천국이 있다면 이게 천국 아닐까? 먹고싶은 걸 내키는 대로 먹을 수 있는 삶. 


"흐, 흐흥."


거대한 침대에 엎드려 배달 어플을 뒤적였다.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두 다리를 느긋하게 휘적거리며.


침대 이불도 그렇고 잠옷, 방 구석구석까지 모두 분홍색인 것, 지금 엎드린 상태에서 짓눌리는 가슴의 무게. 이런 것도 조금씩 익숙해지더라.


그나저나 뭘 먹지? 내일 방어회니까 어류는 그렇고. 치킨은 그저께. 양식은 지난 주. 중화요리도 먹어봤고. 돈까스도 일식 치즈돈까스, 경양식 돈까스 모두 먹어봤고. 좀 익숙한 걸로 해볼까. 음. 으음...


직장인들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최대의 고민, '오늘 뭐 먹지?'

그래도 고민하는 자에겐 답이 있나니. 한껏 고뇌하다가 번뜩이는 생각이 스쳐갔다.


아!


"저기요! 밖에 있나요?"


말 없이 천천히 한 사람이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아가씨."


아가씨. 다른 건 슬슬 익숙해지려는데 이 호칭만큼은 아직도 낯간지럽다. 게다가 나는 저 분 이름도 모르고, 호칭도 애매하게 부르는데 말이야.


어쨌건,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 지금 내가 배고프다는 거였고, 내가 '이걸' 먹고 싶다는 거였다.


"저, 혹시 라면 끓여주실 수 있을까요?"


말해놓고나서 조금 긴장됐다. 워낙 고가의 음식들만 배달시켜먹다가 뜬금없이 라면이라고 하니까. 

그런 거 먹는 거 아니라고 막으려나? 설마, 여태까지 다 시켜줬잖아. 이제와서 그럴리라고...


"알겠습니다. 하나만 끓여드리면 될까요?"


아싸! 속으로 환호를 울리며 당당히 옵션을 부탁했다.


"두 봉지로! 맵게! 달걀은 풀지 말고! 그렇게 부탁드릴게요!"


쾌활한 주문에도 예의는 빠뜨리지 않았다. 고개를 끄덕이고 들어왔던 것처럼 조용히 물러난다.


역시, 부잣집이라고 해도 라면은 못 참지. 서민들의 음식이라곤 해도, 사실은 전국민의 음식 아닐까?


안그래도 요새 비싼 음식들만 골라먹다보니까, 아직 남아있는 내 정신이 슬슬 평정을 찾아야할 시기이기도 했다. 

치킨이며 양식이며 피자, 그런 거에 슬슬 속이 니글니글하기도 했고. 

다음에는 김치찌개나 된장찌개를 부탁해볼까? 아니면 백반?그래. 부잣집 집밥은 어떠려나?


침대 모서리에 걸터앉아 이런저런 실없는 생각을 하던 사이. 익숙한 매운 냄새가 느껴졌다. 


서둘러 방 안에 식탁을 폈다. 앉은뱅이 식탁. 

근데 규모가 좀, 많이 큰 식탁.


"맛있게 드세요."


"잘 먹겠습니다!"


킁킁. 와아. 이게 얼마만의 라면이야. 젓가락도 센스 있게 목재로 준비해주셨네.


황금빛 양은냄비의 뚜껑을 열었다. 허연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라온다. 


먹기 전에 머리칼을 한 쪽을 쓸어넘겼다. 이 몸 예쁘고 그런데 이건 불편하단 말이야. 가슴도 그렇고.


젓가락으로 면을 한 움큼 집어서.


"후우, 후우우. 스읍."


와, 이 맛이지.


잠시 동안 잊고 있었던 이 특유의 얼큰함. 첨단과학기술로 만들어진 이 감칠맛. 

맵게 해달라는 말에 조금 걱정하긴 했는데, 딱 알맞을 정도로 매웠다. 

달걀도 모양 잘 잡힌 채로, 아슬아슬하게 완숙인 상태.

 

땀이 송글송글 맺혔다. 방 안에서 자꾸만 입김을 불게 했다. 


숟가락으로 국물도 한 모금 마셨다.

맛있어. 역시 라면이야. 


"후우, 후우... 아?"


그래, 김치. 

어쩐지 뭐가 허전하더라. 


식탁에 라면과 함께 놓여진 김치를 집었다. 


새빨간 배추김치. 젓가락을 뒤적거려본다.


"이파리 없나...?"


줄기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지만 이파리가 더 좋은데. 


굵은 김치 중에서도 얇팍한 거 하나만 겨우 골랐다. 


"움, 냠냠..."


흐음.


뭔가 아쉬워. 물론 없는 것보다 좀 나은데, 뭔가 아쉬워.


"아, 파김치!"


김치를 즐겨먹는 건 아니지만, 라면을 먹을 땐 김치가 있으면 좋았고, 그 중에서도 파김치가 딱 좋았다.


그 파김치는.


"엄마가 담가주신... 파김치."


아.


어쩐지. 


김치가 생각이랑 좀 다르더라.


파김치가 좋은데. 


"...흐읍."


입안이 얼얼하다. 김치는 생각보다 덜시원해서 얼얼함이 가시질 않았다. 라면 특유의 기름기도 새삼스레 느껴졌다. 


파김치가 딱인데.


"엄마의, 파김치..."


한 말을 반복했다. 파김치. 라면 먹을 때 늘 같이 먹었던 그 파김치. 엄마의 파김치. 엄마의 파김치. 엄마...


"...엄마."


왜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을까.


주변을 돌아봤다. 


방 한 구석에 놓인 큰 거울이 눈에 들어왔다. 저 앞에서 내가 얼마나 예쁜지 들여다보곤 했었다.


이제는 슬슬 익숙한 아름다운 미소녀가, 처음 보는 표정을 짓고 있다.


젓가락을 들고서는 입 가가 벌개진 상태로, 눈가에 물기가 맺혀 울상이었다.


라면이 너무 맵기라도 한 걸까. 혀를 씹기라도 한 걸까.


나는 소녀가 울먹이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엄마..."


한 번에 두 세 개는 넉넉하게 끓일 라면과, 취향에 맞게 라면을 끓여주는 사람은 있었지만.


라면에 곁들일 파김치를 담가주시는 우리 엄마는 없었다.


파김치 뿐만이 아니었다. 


방어회가 그렇게 별미라고 말씀하셨던, 이게 어느 생선 초밥인지 알려주시던, 


"닭은 목이 가장 맛있다"면서 일부러 다리를 내 앞으로 밀어주던 아빠가 없었다.


속이 더부룩했다. 미소녀의 몸으로도 한 번에 라면 두 개는 버거운 걸까. 


아직 냄비 속엔 면이 적잖이 남아있었다.


"끄, 끄윽, 흐읍."


억지로 숨을 삼켰다. 매운 기운에 코가 더욱 찡해졌다.


아까웠다. 


아까워할 필요가 없는데.


그저께 치킨을 남겼을 때도 그런 생각이 안들었는데.


라면도 그렇고, 내가 먹을만큼 먹고도 남는 게 아까워서,


나눠주고 싶었다. 나눠먹고 싶었다.



분홍색 칠한 앉은뱅이 식탁은 넓은데, 그 위를 음식만으로도 한 가득 채울 수 있는데.


같이 앉을 사람이 없었다.


나는 나눠주고 싶은 사람을 불렀다.


"...어, 엄. 엄마... 아, 압..."


입이 매워서. 


숨 쉬기가 어려워서.


눈물이 자꾸만 차올라서.


이런 식으로 불러본 적이 없어서.


불러도 듣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니까.


"흐윽... 흐, 흐윽...."


먹고 싶은 걸 마음대로 먹을 수 있는 천국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 천국이 마냥 행복하지만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에,


나는 서럽게 눈물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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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면 먹다가 갑자기 눈물 흘리는 튼녀는 허접이지 않을까요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