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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편: https://arca.live/b/tsfiction/105848244


<1. 시작부터 정조의 위기?!>



 “…가씨….”

 

 깊은 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아가씨, 정신…!”

 

 깊은 물에 빠졌다가 간신히 수면 위로 올라온 것처럼.

 

 “아가씨, 정신이 드십니까? 아가씨!”

 

 시력이, 청력이, 그리고 의식이 서서히 돌아왔다.

 

 “……흐억!”

 

 나는 놀라서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분명 죽었을 텐데.’

 

 살았다.

 

 살아 있다.

 

 “꺄악! 아가씨께서 깨어나셨어!”

 

 “린드버그 선생님을 모셔 와. 얼른!”

 

 그런데 저 아가씨, 아가씨 하는 호칭을 보건대 내가 119에 구조받은 건 아닌 것 같고.

 

 쟁반에 받친 약이며 물수건을 분주하게 나르는, 메이드복을 입은 누나들을 보건대….

 

 “오우 마이 갓.”

 

 아무래도 나는 전생인지 빙의인지, 뭐 그런 걸 해버린 모양이다.

 

 ***

 

 사람들이 죄다 어딘가로 나가버리고, 방에 나 혼자 남은 틈을 타서,

 

 “상태창!”

 

 하고 외쳐봤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흐아압-! 상태차앙!”

 

 단전에 기를 끌어모아도, 손동작을 추가해봐도 변화는 없다.

 

 ‘상태창 없는 전생이라….’

 

 뭐,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갖지 못한 능력에 대한 미련은 깔끔하게 접어버리기로 했다.

 

 그보다 지금 내게 더 중요한 건 정보다, 정보.

 

 여기가 어떤 세상인지, 내가 뭘 하며 굴러먹고 다녔는지는 알아야 할 것 아닌가.

 

 집중하기 위해 눈을 감고 팔짱을 꼈다. 혹시나 원래 몸의 주인의 기억이 팟, 하고 떠오를지도 모르니까.

 

 물컹─

 

 ‘…물컹?’

 

 그런데, 팔짱 끼는 걸 방해하는 부드럽고 묵직한 덩어리가 두 개.

 

 그건 내 가슴이었다. 영어로는 체스트, 전문 용어로는 유방, 유아어로 하면 쮸쮸….

 

 이게 당최 왜 여기 있는가?

 

 ‘그거야 뭐, 이유야 하나뿐이지.’

 

 앞서 말했던 ‘전생인지 빙의인지’ 앞에 한 글자를 추가해야 할 것 같다.

 

 아무래도 나는 ‘TS 전생 어쩌고’를 한 모양이다.

 

 그거야 뭐, 옛날이었으면 몰라도 요즘엔 널리고 널린 게 TS물이니까.

 

 그럴 수도 있지. 사소한 건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린드버그 선생님은 내 주치의였다.

 

 “웨슬리! 사랑하는 우리 딸, 눈을 떴구나!”

 

 그리고 방문을 열고 들어와 내가 누운 침대로 곧장 다가온 중년의 여성.

 

 머리는 붉은색이고, 얼굴에 주름이 깊게 팬 이 사람이 내 어머니인 모양이다.

 

 “웨슬리, 오 웨슬리….”

 

 어머니는 내 뺨을 어루만지며 이름을 불러주었다.

 

 ‘웨슬리? 웨슬리. 웨슬리라….’

 

 어디서 들어본 건가 싶은 이름 석 자를.

 

 ‘아. 기억났다.’

 

 분명 폭군의 뭐가 어쩌구 저쩌구하는 소설이었던 것 같은데.

 

 웨슬리는 거기 나오는 여주인공이다.

 

 몇 화까지 읽으면 준다는 무료 열람권에 코가 꿰여 슥슥 적당히 훑어보다가, ‘서민 가족의 한 달치 생활비는 몇 골드이며 이를 현대 가치로 환산하면 30달러~’ 하는 대목에서 코웃음을 친 기억이 난다.

 

 ‘이럴 줄 알았으면 꼼꼼히 다 읽었지…!’

 

 내가 마음 깊이 후회하는 동안, 주치의 선생님이 나에게서 어머니를 떼어놓으며 말했다.

 

 아가씨는 깨어난 지 얼마 안 돼 불안정한 상태다, 어쩌면 기억에 혼선이 생겼을지도 모르는 일이라고.

 

 어머니보다 한 발 일찍 와서 내린 진단이었다.

 

 주치의 선생님의 말에 어머니는 숨을 헉 들이쉬었다. 충격이 크신 듯했다….

 

 그건 그렇고, 내가 들어온 소설의 원작은 악역 영애가 갱생한다는 내용의, 그저 그런 양산형 로판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여주인공이 원래 장애인이었나?’

 

 아, 비하하려는 말이 아니라 내 처지가 정말로 그렇다.

 

 나, 지금 무릎 아래로 다리가 없거든. 아마도.

 

 누워있기가 답답해서 일어나려고 했는데, 그때 몸의 이상을 깨달았다.

 

 다리 위로 덮인 이불 모양이 이상하더랬다.

 

 발 부분이 튀어 올라와 있어야 하는데, 그냥 평평해.

 

 결국 겁이 나서 이불도 못 들춰보고 있는 상황이다.

 

 ‘다시 살아났는데 성별도 바뀌고, 심지어 걷지도 못해….’

 

 그래도 죽는 것보단 낫다고 봐야 하나? 최악을 경험하고 와서 그런가, 매사에 포지티브해지는 느낌.

 

 그리고 또 한 가지. 소설 속 묘사와도 미묘하게 다른 것이, 지금 내 머리카락 색깔은 연한 분홍색이다.

 

 원작에서는 새빨간 장미에 비유되곤 했는데 말이다.

 

 ‘뭔가 꼬였나?’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하다못해 생김새가 어떤지 살피게, 손 닿는 곳에 거울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나 혼자 아무리 끙끙 고민해봤자 결론이 나지 않는 문제다.

 

 그 뒤로도 가족들이 문병을 와서, 일단은 거기에 집중하기로 했다.

 

 엄마 다음으로 온 건 내 오빠라는 사람.

 

 검은 머리카락에 붉은 눈동자가 인상 깊은, 남자인 내가 봐도 잘생긴 미남이 왔다.

 

 ‘로판 돋네에.’

 

 “웨슬리.”

 

 그때, 그 미남이 내 이름을 부르며 가까이 다가오길래 흠칫 놀랐다.

 

 ‘속으로만 비꼰 건데, 설마 들렸나?’

 

 다행히 그런 건 아니었다. 그는 가까이 다가와 내 이마를 짚더니,

 

 “안색이 나쁘군. 좀 더 안정을 취하도록 해.”

 

 그 말만을 남기고는 뒤돌아 방을 나섰다.

 

 ‘…깜짝 놀랐네.’

 

 내가 속마음이 들리니 어쩌니 바보 같은 착각을 했던 이유는, 그 남자의 목소리가 너무 낮고 딱딱해서 꼭 화가 난 것처럼 들렸기 때문이었다.

 

 다음으로 온 건 남동생이었는데,

 

 “누님… 괜찮으세요…?”

 

 오빠라는 사람과는 정반대로, 크림색 머리카락에 에메랄드빛 눈동자를 가졌다.

 

 ‘귀여운 애였지.’

 

 이름은 그린빌이라고 했다.

 

 목소리를 듣기 전까진 여동생으로 착각할 뻔할 만큼 곱상하게 생긴 남자애였다.

 

 

 가족들의 문병은 그걸로 끝.

 

 한 가지 의문점은, 엄마와 오빠와 남동생의 생김새가 다 제각각이라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뭐어, 로판이니까.’

 

 그냥 그러려니 하기로 하고, 환자는 환자답게 잠이나 자자.

 

 …그렇게 생각했지만 잠을 청하지 못한 건, 우리 어머니가 내 옆에 앉아서, 걱정이 뚝뚝 묻어나는 눈으로 나를 살펴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모르긴 몰라도, 어째 침대에 누워있는 나보다 더 초췌해 보이시는데.

 

 내가 아니라 당장 저 분이 침대에 누워있어야 할 것 같았다.

 

 그리고 그렇게 느낀 것은 나만이 아니었는지, 

 

 “마님, 이만 돌아가서 주무셔요. 마님께서 먼저 기운을 차리셔야죠….”

 

 메이드들이 엄마를 모시고 떠나가고, 내 곁에는 메이드 한 명만이 남았다.

 

 그 메이드는 검은 머리에, 한눈에 보기에도 말수가 무척 적어 보였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저기, 커튼 좀 쳐줄 수 있어? 졸려서 그런데.”

 

 하고 말했고.

 

 메이드 누나는 꾸벅 고개를 조아리더니, 창문 커튼을 치고 방 문을 닫고 나갔다.

 

 ‘로판 돋네에.’

 

 말없이 내 곁을 지키던 흑발 쿨계 메이드 눈나에게 ‘응애 나 애기영애. 불 꺼조’를 시전한 기분은 뭐랄까.

 

 말로 하기 어렵지만 나쁘지는 않았다.

 

 ‘전생에 혹시 귀족이었나. …아니지, 이 경우엔 전생이 아니라 전전생인가.’

 

 속으로 쓸데없는 생각을 하다가 깜빡 잠에 들었다.

 

 ***

 

 ─뚜벅, 뚜벅, 뚜벅…

 

 발소리가 들려 잠에서 깼다.

 

 낮 애매한 시간대에 잠들어서 그런가, 밤이 되어 사위는 어둡고 조용했다.

 

 ─끼이익…

 

 또렷한 발소리가 문 앞에서 멈추고, 낡은 경첩이 밀리는 불길한 소리가 났다.

 

 ‘누구지? 불침번 같은 건까?’

 

 아가씨가 잘 주무시나 확인하러 들어온 걸까.

 

 태연하게 그런 생각이나 하고 있었을 때였다.

 

 ─쿵.

 

 ─찰칵.

 

 문이 닫히고 잠기는 소리가 들린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흐읍!”

 

 “쉿, 조용히 있어!”

 

 침대까지 한달음에 거리를 좁힌 침입자의 굵직한 손이 내 입을 틀어막았다.

 

 놀라서 버둥거리는 내 배에, 남자의 주먹이 수직으로 꽂혔다.

 

 “케헥-!”

 

 곧 팔다리의 힘이 빠져, 나는 더이상 아무런 저항도 못하고, 나를 덮친 남자의 체중이 더해져 침대에 푹 파묻히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