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글 모음

흔한 이야기다.


세상에 나타난 변칙개체와 그들을 관리하는 단체.


변칙개체 소녀와 그녀를 담당하는 박사.


자신의 변칙성 때문에 사랑받지 못하고 자란 소녀와, 그런 소녀를 애정으로 보듬은 박사.


단 세줄 만으로도 어떤 이야기인지 짐작이 가능한 평범한 이야기였다.


그렇기에,필시 그 끝도 평범했어야 하리라.


그런데,어째서.


"박사님..."


어째서 이렇게 된 걸까.


빛바랜 채 부서져 흩날리는 도시의 잔해와 주위를 어지럽게 뒤덮은 물감.


그 중심부에 쓰러져 있는 한 소녀.


"........아리아.마지막으로 한번만 더 묻겠는데,도대체 왜 이런 일을 벌인거야?"


"당,신을...사랑하니까."


"......."


-인간형 개체를 관리하는 박사는 절대로 담당 개체와 사랑에 빠져서는 안된다.


재단의 오랜 격언을 되새기며, 쓴맛이 도는 입을 억지로 열었다.


"..팔레트.오픈."


허공으로 떠오른 물감 덩어리가 이내 창의 형태로 굳어지고, 떨리는 손으로 그것을 쥐었다.


"......"


-푹


어째서일까.


평소에는 가볍기만 하던 창이 오늘따라 견딜 수 없게 무거웠다.


*

"여기는 아인 박사. 코드명 '하얀여왕' 의 생포작전을 시작하겠다."


박사라는 단어는 학문을 탐구하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 일텐데,


왜 나는 개인연구 시간보다 공중에서 강하하거나 전투를 벌이는 시간이 더 많은걸까.


출동할 때마다 드는 시덥잖은 생각을 떨쳐내며 허공으로 발을 내딛었다.


"모작.작품명 이카로스의 추락."


어깻죽지에 돋아난 날개가 세차게 퍼덕였다.


그냥 강하하는게 훨씬 빠르긴 할 테지만 이번은 상황이 특수한지라 어쩔 수 없이 번거로운 방법을 택할 수 밖에 없었다.


"자,여왕님 알현하러 가볼까."


*

"아."


울려퍼진 목소리가 더없이 어색했다.


마지막으로 말소리를 들은것도,말을 한 것도 세달이 다 되어가니 그럴만도 하긴 하지만.


그래도 왠지 내게남은 마지막 인간성마저 옅어지는 기분이 들어 불쾌한 감정이 일었다.


"프,프흐흣."


인간성이라.


나같은 괴물이?


색을 잃고 무너진 마을의 전경을 둘러보았다.


"인간은 무슨."


이런 일을 벌인 순간부터, 나는 이미 인간이 아닌거나 다름없었다.


엄마아빠가 괴물이라고 욕할때는 그렇게 미울 수가 없었는데, 이제 와서 보니 그들이 정확했다.


".....미안해요."


누구에게 하는지도 모를 사과를 내뱉던 찰나, 낮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어린애잖아?"


고개를 돌려보니, 목소리가 들려온 곳에는 백색의 가운을 걸친 남자 한명이 서있었다.


"확인완료. 나이는 17~19세로 추정. 변칙성은 현실조작 계열. 나와는 반대로 색을 빼앗는 능력으로 보이는데."


알 수 없는 말을 늘어놓으며 다가오는 남자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흠칫 놀라 소리쳤다.


"다가오지마!!!"


"신경쇠약,영양부족 증상이 보임. 케어팀 준비시켜놔.카운슬러도."


"다가오지 말라고!!!"


내 말을 무시하고 성큼성큼 다가오던 남자의 뒤로, 무채색의 손아귀가 뻗어져 나왔다.


"안돼!!!"


또.


또 내가 누군가를.....


"통제는 완전히 불가능 한듯 한데. 차폐실 준비해. 현장은 내가 처리할 테니까 신경쓰지 말고."


"....어?"


"반가워. 브륀힐트 재단의 아인 박사라고 해."


태연하게 손을 내미는 남자를 보자 알 수 없는 감정이 끓어올랐다.


내가 두렵지 않나?


아까 그런 일을 겪고도 어떻게 그렇게 태연하지?


재단은 또 뭐고?


몰아치는 의문에 멍하니 내밀어진 손을 바라만 보고 있었던 그때, 그가 나지막히 중얼거렸다.


"주변 환경이 이래서 대화가 힘든건가?"


그렇게 말한 그가 발을 살짝 굴렀다.


"모작.작품명 별이 빛나는 밤."


그와 동시에 뻗어나온 남색 빛깔이 무채색의 공간을 집어삼키고, 이내 한폭의 그림과도 같은 경관이 펼쳐진다.


"우와...."


"이제 좀 괜찮아 졌니?"


"...네."


"그럼 다시 소개할게.브륀힐트 재단의 아인 박사라고 해. 이름이..."


"아리아,라고 해요."


"...아리아. 만나서 반가워."


다시금 내밀어지는 손.


나와 닿으면 또 사라지지 않을까 망설이다 이내 손을 맞잡았다.


"앞으로 잘부탁해."


그는 여전히 그자리에 굳건히 서 있었다.


"..저도,잘 부탁드려요."


오랜만에 느껴보는 사람의 온기는 정말 따스했다.



*

그로부터 10년 후.


"박사님!!!!"


"아리아 왔니? 과자 챙겨놨으니까 먹어."


"아싸.히히."


박사님을 따라 얼떨결에 들어온 재단은 꽤나 괜찮았다.


능력의 제어만 가능하고 재단에 협력하기만 하면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도 있고, 필요한건 전부 준비해 주니까.


무엇보다...박사님도 계시고.


"자.정기 상담 시간인데, 뭐 불편했던거 없니?"


"박사님이랑 오래 같이 못있는거요."


"...그건 일이 많아서 어쩔수가.."


"아.몰라몰라몰라!!! 예전에는 하루종일 같이 있어줬으면서!!!"


박사님이 바쁜건 사실이라고 해도, 전보다 같이 있을 수 있는 시간이 많이 줄긴 했다.


"너는 다 큰 처자가 그렇게 드러누워서 때를 쓰니. 이제 곧 결혼도 할 나인데."


결혼?


"난 박사님한테 시집갈꺼니까 상관없지 않아?"


"욘석아. 그런말 함부로 하는거 아냐. 다른사람들이 오해할라."


"진짠데...."


볼을 부풀리고 뾰루퉁한 표정을 짓고 있으려니, 다가온 박사님이 머리를 쓰다듬어 줬다.


"넌 나보다 훨씬 좋은 사람이랑 결혼해야지. 이 아저씨가 뭐가 좋다고."


"흥."


박사님은 내맘도 몰라주고.


...그래도 머리 쓰다듬어 줬으니까 봐주는 거야.


"좀 있으면 일상생활 허가도 떨어질 텐데, 사회에 나가서도 이러면 어떻게 살려고."


나가...?


-쿵


"그게 무슨 말이야? 내가 재단을 나가?"


"몰랐니? 원래 일정수준이상 능력 통제가 가능해지면 사회로 내보내 주는데."


"...그,그럼 이제 박사님이랑 못봐?"


싫어.


그건 싫어!!!


이젠 박사님이 없는 삶은 상상할 수도 없는데.


나더러 박사님이랑 떨어져서 살라고?


그건 절대-


"무슨 소리야? 누가 독립했다고 자식을 집에 못들어오게 하디?"


"...응?"


"그냥 말 그대로 남들처럼 일상을 누릴 권리를 주는거지, 강제로 내쫒는게 아니야. 네가 원한다면 남아있어도 되고."


"..뭐,뭐야!!!놀랐잖아!! 처음부터 말을 그렇게 했어야지!!"


"아니, 말할려는데 네가,잠깐,뼈,뼈맞았어! 아리아 잠,윽."

.

.

.

.

"흐으으으...그럼....이만 가볼게...잘있어."


"잘가.박사님."


"박사님!여기 2-65개체 상태가~"


"지금 격리동에서 573이~"


방을 떠나자마자 박사님한테 달라붙는 사람들을 바라보자 기분이 묘해졌다.


"박사님...인기 많네."


나한테는 박사님 하나 뿐인데.


박사님한테 나는 여럿 중 하나일 뿐일까?


문득 든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박사님도,나만 바라봐 줬으면."


그 말을 내뱉은 순간, 귓가에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럼 그렇게 만들면 되지.


처음 듣는, 어디서 들려오는 지도 모르겠는 목소리 였으나 왠지모를 친근감이 느껴졌다.


"어떻게?"


그래서, 무심코 되묻고 말았다.


-그사람 주변에 너말고 아무도 없게 만들면 되지 않겠어?


"..그건,안돼."


-왜?


"힘을 함부로 쓰는건 나쁜 짓이라고 박사님이 그랬어. 그리고...사람들이랑 같이 있으면 박사님은 행복해보여."


-흐음..뭐,그건 그렇다고 치고. 넌 괜찮겠어?


"뭐가?"


-알잖아. 박사는 널 자식이나 동생 그 이상으로 보지 않는단걸.


"....."


-이대로 가면 분명 박사는 네가 아닌 누군가와 결혼하게 되겠지.


"...그만."


-네가 아닌 다른사람과 입을 맞추고,사랑을 속삭이고,몸을..


"그만하라고,했어."


-....실례. 그래서, 네 마음은 어때?


"모르겠어. 박사님이 행복했으면 좋겠는데...동시에 나만의 것이 되어줬으면 하기도 해. 나만 바라보고,나만을 사랑해주고,나만을...나만을..."


아.


이제야 알았다.


나는 박사님이-


-답은 이미 나온 거 같은데?


"....그러게."


-자.그럼 이쪽으로 와. 내가 도와주지.


"고마워."


-나만의 것이었으면 한다.


행복?


내가 그사람들보다 훨씬 행복하게 해주면 된다.


나는 그럴 수 있어.


그러니까...


"조금만 기다려.박사님."


*

-코드레드.코드레드. 23-5,하얀여왕이 폭주했다.반복한다.하얀......


"이게 무슨..."


울려퍼지는 경보와 무채색으로 변해가는 건물 사이로 내달리며 생각을 거듭했다.


아리아가 갑자기 폭주를?


요즘 이런 일은 없었는데.


전에도 이런 규모의 폭주는 없었고.


...혹시,아리아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겠지?


"아리아!!!!  너 괜찮....."


"아.박사님.왔어?"


멀쩡하다.


자신의 능력을 감당못하고 폭주했다기엔,너무나 멀쩡하다.


심지어 능력이 명확한 의지를 가지고 움직인다.


마치.....


아니,아닐거다.


그럴 리가 없다.


"아리아."


"응.박사님."


"...혹시 이거 네가 이렇게 만든거야?"


"응."


...아니길 간절히 바랐던 대답이 돌아온다.


"....어째서?"


"박사님이 나만의 박사님이었으면 해서."


"....."


"조금만 기다려 줘.이제 정리도 거의 끝나가."


"....모작.작품명 절규."


비틀린 인영이 천지를 울릴듯이 절규했다.


마치, 누군가의 감정을 대신하듯.


범람하는 무채색의 파도와 그것을 밀어내는 포효 사이로 두사람이 격돌했다.


*

-푹


그녀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간 창이 대지에 깊은 상흔을 새겼다.


"...아무리 해도,난 널 죽일 수 없을 거 같다."


"박사님....결국 박사님도 나를..."


"그 대신,너를 가둬놓겠어. 네가 네 죄를 뉘우칠 수 있을 때까지."


".....나보고 당신이랑 떨어지라고? 누가 그런-"


날아든 물감이 그녀의 입을 막았다.


물감으로 능력도 봉인했으니 한동안은 저항하지 못하겠지.


"모작.작품명 몽유도원-"


-툭


"잡았다."


"...어떻게?"


"글쎄,누가 힘을 빌려줬다고 할까?"


그녀의 손이 등에 닿았다.


불러내던 그림이 흩어지고, 이내 육체를 두르고 있던 물감도 색을 잃는다.


이제 이곳에 남은것은 무력한 사내 한명 뿐.


"드디어 박사님이 내 것이 된거야..드디어.."


몸을 겹쳐오는 그림자를 바라보다가, 이내 정신을 잃고 말았다.



"이제 당신은 내거야.도망칠 수 없어."


영원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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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어디서 본 미다스의 손 소재로 회로 좀 돌려봄

히히 얀챈 첫 글이 소설이라니 히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