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에 본 글인데 원 출처를 찾아보니까 2000년대 초반에 쓰인 글 같음


원 출처 : https://m.cafe.daum.net/tooth8020/FDTm/179


대략 베트남 전쟁 때 포로로 잡힌 미군 포로들이 존재를 잊힌 채로 2000년대 초까지 억류되어 있었다는 괴담임



근 20년 넘게 노스캐롤라이나 하원의원인 빌 헨돈은 베트남전 당시 미군포로에 대해서 줄기차게 의문을 제기해왔다. 작년에 St. Martin’s Press에서는 거대한 범죄(Enormous Crime)라는 이름으로 조사결과를 책으로 발표해 이 사건에 정점을 찍었다. 이 책에는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의 어길 수 없는 미군포로에 관한 명령이 있다: (미군을) 산 채로 잡아라. 나중에 효용가치가 있을 것이다.


1972년 워터게이트 폭풍이 워싱턴에 몰아칠 때, 닉슨과 키신저는 이제 베트남전에 관해 자포자기 상태였다. 평화회담은 키신저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힘들었다. 북베트남은 끈질기게 보상을 요구했고, 미군포로들은 그 거래의 교섭품처럼 생각했다.


결국 키신저는 포로를 귀환시킨다는 협정에 서명을 했지만, 월맹측에 포로가 몇 명인지 한 번도 물어보지 않았다. 공개되지는 않았

지만 전쟁에 대한 피해에 대가로 비밀문서에 키신저가 서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노벨상 협회에서 파리평화회담을 평화상 수상자로

선정하자 월맹의 레 덕 토는 협정에 완전히 만족할 수 없다는 이유로 수상을 거부했다. 이후 카터 대통령이 베트남과 전쟁 이전의 관

계로 돌아가자고 해 관계가 진전되는 듯 했으나 카터가 피해 보상금 지불을 거절하자 관계는 다시 단절된다.


레이건 대통령이 취임하자 헨돈 의원은 행정부에 포로문제에 관한 보고서를 올렸다. 미 정보부가 전쟁 후 공산주의 국가 감청에서 미군포로에 관한 정보가 흘러나왔고 첩보위성에서 찍은 사진에 남겨진 미군포로 정황이 있다는 내용이었다. 정보부 증거는 라오스 중부에 포로수용소가 있다고 판단했다. 1981년, 살아 있는 미군포로에 대한 새로운 정보가 펜타곤에 들어온 것으로 안다. 1982년 레이건 정부는 라오스에 의료를 포함한 인도적인 지원을 할 때 살아 있는 미군포로가 있다면 협조를 요청했다. 당시로써는 미국이 공산주의 국가에 이례적으로 요청한 외교 교섭이었다.


1982년 초에 다시 살아 있는 미군포로에 대한 믿을만한 정보가 펜타곤에 도달했다. 7월에 당시 국방장관인 와인버거는 POW/MIA 가족들을 불러 연례 미팅을 하면서 이런 언급을 했다.


“우리는 인도차이나에서 아직도 살아 있는 미국인 몇 명을 데려오려고 교섭을 진행하고 있다.” Army Times도 와인버거의 말을

인용하면서 “그러나 이 문제는 국가 최고 지도층이 판단한 문제”라고 썼다. 이 놀랄만한 와인버거의 말은 펜타곤과 행정부에 급속도로 퍼져 나갔고 대통령이 라오스 공산주의자들과 교섭을 차단했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와인버거가 포로/실종 가족들에게 말을 한지 6개월이 지난 1983년, 생존 미군포로를 찾던 와인버거와 관계자들은 심각한 딜레마

에 빠졌다. 2월 초에 언론에서 한 그린베레 출신 남자가 라오스에 침투해 포로구출 임무를 수행하다 실패해 돌아오다 태국 당국에 체포되었다는 뉴스가 도배된 것. 이 보도에 미 행정부는 당혹스러웠다. 레이건 대통령이 허가했다고 언론이 추측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워싱턴 포스트는 그린베레 대원이 직접 대통령이 허가한 임무라고 말했다 기사를 썼다. 생존 미군포로 단 한 명이라도 데리고 나오는 조건이라고 했다. 당시 중앙아메리카에는 소련의 지원을 받은 공산주의자들이 엘살바도르와 온두라스에서 활동하기 시작했고 니카라과에는 소련이 핵미슬 기지를 설치한다는 루머가 돌아 미군을 투입해 긴급하게 진화하고 있었다.


그러자 여론은 Operation Homecoming이란 명칭으로 동남아시아 정글에서 남져진 미군 생존포로를 한 명도 데려오지 못했는데, 와인 버거는 다시 중남미의 정글로 미군병사들을 보내고 있다는 두려운 딜레마에 빠진다. 일단 미국은 중앙아메리카 일부터 처리해야 했다. 이 일이 마무리 되자 레이건은 동남아시아의 미군기 추락장소 등을 대상으로 조사를 시작한다. 그러나 점차 의원들과 미군 참전자들은 와인버거의 생존 포로 생환에 관한 발언에 책임을 지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여전히 생존포로에 관한 정보는 펜타곤으로 계속 들어왔다. 쉬운 문제가 아니었다. 결국 압박을 받은 행정부와 펜타곤은 이후로 일절

생존 포로에 관한 언급도 하지 않고 귀중한 정보도 숨기기 시작했고 심지어 파기하기까지 했다. 이 문제는 1983년 이후 전혀 언급되지 않게 된다.


Since 1983: 은폐


1992년 미 의회에 POW/MIA Affair의 담당 하원의원들이 일급 기밀에 접근할 수 있게 된다. 이때 분석관들은 당시 와인버거가 인용했던 미군포로 목격 사례 보고서가 모두 사라졌다는 걸 깨달았다. 단 한 건도 없었다. 와인버거가 거짓말을 했거나 정보문건이 파기된 것 둘 중 하나였다. 심지어 이 문제에 관한 회의록과 속기록도 모두 사라졌고 자필로 쓴 메모 한 장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결국 이 문제 담당 하원의원들은 오히려 기밀이 해제된 문건들을 뒤지기 시작했고 거기서 300건에 달하는 보고서를 발견하고 경악했다. 이것은 중대한 범죄(Enormous Crime)행위로 의원들은 규정했다. 그중 일부인 13건은 1983년 중반에 올라온 미 국가정보국(DIA)에 올라온 것으로 분석은 1984년 12월에 한 것으로 나와 있었다. 아래는 그 중 1983년 중간에 올라온 세 개 문건이다:


Case 1792:


American POWs Seen Carrying Logs At Dong Tien


[미군포로들이 동 티엔에서 통나무를 운반하는 것이 목격되다]


1983년 5월 6일 태국 방콕에 있는 연합사상자해결센터(Joint Casualty Resolution Center : JCRC)는 정부에서 고용한 고용인들이 미군 생존자를 찾던 가운데 한 보고를 들었다. 이 고용인들이 말레이시아에 있는 베트남인 피난민 수용소에서 들은 증언으로, 한 베트남인이 1978년 11월에 동 탑 지역의 동 티엔에서 적어도 10명이 넘는 백인(Caucasian)이 통나무를 운반하는 걸 봤다고 했고 여성 증언자는 그들이 미군포로라고 증언했다. 동 탑 지방은 공산화되면서 이름이 바뀐 것으로 과거에는 클렌 퐁이란 명칭이었으며 사이공 서쪽의 갈대가 무성한 평원 지역이다.


이 피난민 증언자는 29세의 여성으로 재봉사 일을 하다가 베트남을 탈출했고, 당시 그녀의 친척들은 집과 물건을 공산당에 몰수당했고, 시장에 가서 물건을 구입하던 도중 서양인을 보고 놀랐다고 한다. 그래서 근처 공장에 일하는 사람에게 물어보니 ‘미군포로니까 그런 거 물으면 안 된다’라는 답변을 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문제가 될까봐 이후로 미국인에 대해 관심을 거두었다고 한다.


재봉사였던 그녀는 동 티엔 항구 목재상에서 일하는 미국인 포로를 10명정도 봤고, 이 문건은 ‘Dong Tien lumber market was ass-igned case #1792’로 분류되었다. 심문자는 이 여성의 증언이 믿을 만 하다고 기록해 놓았다. 이 #1792호 건은 이후 10년 동안 분석관실에 있었다. 의회조사는 총 679일 동안 진행되어 84년 6월까지 갔다. 결국 이 보고서는 86년 4월에 조사실로 다시 반송되었다. 분석관은 이후 이렇게 보고서에 기재했다:


- 이 베트남 피난민 증언자의 친척은 1979년 말 그 시장에 다시 몇 번 방문했는데, 그때는 그 어떤 서양인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이 베트남 피난민 증언자는 동 티엔 시장에 1976-80년 동안 방문했는데, 친척들과 달리 자신은 서양인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 이 피난민 증언자는 동 티엔 시장에 1978-85년 동안 간헐적으로 방문했지만 그 어떤 서양인도 보지 못했는데, 미국인 소년 두 명은 본 적이 있다고 증언했다.


미 국가정보국은 이 문건에 관하여 1987년 5월 아래와 같이 판단했다:


Details: 1792건의 증언자는 1977-78년 동안 수감되었고, 풀려나 집으로 가니 집이 공산당에 의해 징발당해 다른 사람이 살고 있었고자신은 공산당에 주민등록도 안 되어 있었다. 78년 중순에 나온 그녀는 새로 집을 짓기 위해 동 티엔 항구의 목재상을 갔는데, 그 때 통나무를 지고 가는 서양 백인 남자 10여 명을 목격했다고 말했다. ‘이 정보는 소문으로 보이며 더 이상 정보로서 효용가치가 없음.’


 Analysis: 우리는 동 탑 지역에서 살던 4명을 인터뷰했는데 1792 문건과 같은 증언은 없었다. 그런데 한 명은 서양인 소년 두 명을 목격했다고 했고 한 명은 백인 한 명은 흑인이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들은 미군병사의 자식으로 볼 수 있고, 증언에 따르면 이 아이들은 부모인 미군과 같이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이들의 아버지인 미군들은 아이를 데려가지 않고 그냥 미국으로 귀국한 것으로 보인다.


 평가 : 미 국가정보국은 이 1792호 문건의 내용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나 서양 소년에 대한 것은 사실에 입각한 것으로는 간주했다. 그러나 미국계 소년들이 생존해 베트남에 존재하는 미군 포로에 대한 증거로 간주하지 않았다. 1987년 5월 14일의 결론이었다. 두 미국계 소년은 백인과 흑인의 피를 50%씩 정도 받은 혼혈의 모습이었고 15세 정도였다고 한다.


Case 3055: 쇠사슬에 연달아 묶여 있던 미군 포로들


1984년 11월 말, 노스캐롤라이나에서 사는 거주민 한 사람이 사무실로 찾아와 1983년 여름 사슬에 묶인 채로 일을 하는 미군포로 무리를 봤다고 증언했다. 장소는 호아 빈 지방으로 공산화전의 지명은 하 손 빈으로 하노이 남서쪽이다. 이것을 목격한 것은 그리스 상선을 타고 베트남에 도착해 유람을 하던 선원이었다. 포로들은 보초가 붙어 있었다고 했다. 소문에 의하면 한 미군포로가 그 선원을 향해 자신의 이름과 군사계급을 고함으로 질렀고, 그러자 보초가 개입하여 구타했고, 선원에게는 일대를 떠나라고 명령했다고 한다.


증언자는 자주 보던 그 그리스 선원이 자신에게 직접 해준 이야기라고 했으며 신뢰할 수 있는 인물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 선원과 연락할 수 있는 사이는 아니라고 헸다. 결국 센터는 증언을 추려 아래와 같은 내용이 나왔다:


그는 선원으로 그리스 선적 산(san) 디미트리스를 타고 1983년 8월 동안 하이퐁 항에 도착했다. 곡물류를 싣고 갔기 때문에 항구에 8일 정도 있었고, 하루는 시간을 내서 하노이 남쪽 2킬로미터 정도 호나빈 지방에 관광을 나섰다고 한다. 그는 오토바이를 빌려 호나 빈 시 남쪽으로 2킬로미터 이상을 달렸고, 거기서 턱수염이 난 서양인 포로 무리가 보초 감시 하에 도로가에서 일하는 것을 목격했다고 한다.


그때 한 포로가 선원을 보았고, 그 포로는 육군 군복 바지를 입은 상태에서 소리를 질렀다고 한다. “I am Major Kane from the camp in Borikhan.” 즉각 보초가 달려들어 포로의 얼굴을 개머리판으로 때렸고 선원에게 당장 떠나라고 무서운 소리를 질렀다. 두려움을 느낀 선원은 호나 빈 시를 향해 오토바이를 몰았다. 그렇게 돌아서 출발하는데 뒤에서 총성이 들렸고 등 뒤에서 포로들이 영어로


“Go! Go!” 소리쳤다고 한다. 보초는 제지하지 않았고 선원은 아무런 해를 입지 않고 호아 빈 마을에 도달했다. 그는 버스를 타고 하노이를 거쳐 하이퐁으로 돌아왔다. 다음 날 배는 항구를 떠나 그리스로 향했다고 한다.


분석관은 재빨리 분석을 시작해 리차드 케인이라는 소령을 발견했다. 그는 해병대 항공기 조종사로 1967년 남베트남 영토에서 격추되어, 실제로, 실종된 사람이었다. 퍼즐의 조각은 미군 포로가 말한 내용에 있었다. “from the camp at Borikhan”란 말은 라오스에 있던 포로수용소를 의미한다. 미국은 그곳에 미군포로가 전쟁 동안 있었다고 간주했으나 거기서 풀려난 포로는 아무도 없어 정확한 정황은 알 수 없었다. 이곳 때문에 미 첩보위성이 일대의 방대한 지역을 촬영하기 도 했었다.


미국 정보부가 조사를 해 본 결과, 그리스 수송선 드미트리스라는 상선은 실제로 존재했으며, 1983년 6월 13일 수에즈 운하를 통과한 기록이 있었고 목적지는 인도였다. 그리고 다음 기록은 이 배가 7월 10일부터 8월 28일 동안 인도의 항구에 있었던 것으로 되어 있는데, 미 해군 정보부는 체류 기간이 과도하게 길다고 판단했다. 그러므로 ‘배가 인도 항구를 떠나 다른 곳에 갔다가 왔을 수 있다’는 추측을 했다. 3055호 문건에 따르면, 케인 소령과 함께 다른 미군포로들이 쇠사슬에 묶여있는 것을 1983년 8월에 봤다고 한다.


1985년 1월 말, 아테네에 있는 미 대사관 직원과 전화로 연결해 선주를 수소문해서 확실한 정황을 듣고자 했다. 그러나 전화로 연결된 트미트리스의 선주는 자신의 배가 하이퐁에 들어간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당시 미국이 설정한 베트남과의 무역 입출항 금지를 어길 수는 없다고 했다.


 그러나 미국법으로 베트남에 대한 무역금지는 1983년 당시 이미 해금되었고 그 어떤 국가 선적의 배도 베트남에 들어갈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이어 해당 선원과 다른 선원을 인터뷰하려 했으나 모두 증언을 거부했고, 자신이 말한 케인 소령의 이야기는 자신이 꾸며낸 것이라고 선언했다. 미 정보국의 확인결과도 당시 83년 8월에 드미트리스는 하이퐁 항에 없었던 것으로 결론을 지어 결국 허위사실로 결론 내렸다.


Major Richard Kane’s name appears on Panel 26E, Line 61 of the Vietnam Veterans Memorial in Washington, D.C. Case 0558, 1228, And 1723: 동 바이(Dong Vai ) 감옥 미군포로에 대한 보고들


1983년 8월, 미 중앙정보국(CIA)은 국가정보국(DIA)에, 18개월 전인 1982년 3월에 북베트남 동 바이 지방의 탄 호하에 있는 캄 투이 최고형량감옥으로 이감되어 들어온 미군포로로 보이는 서양인 4-50명이 목격되었다는 첩보를 전달했다. 미 중앙정보국은 포로를 싣고 운송했던 운전사의 증언이라고 정보의 근원을 밝혔다.


탄 호아에 있는 캄 투이 최고형량감옥은 캄 추 감옥으로도 불리며, 미국 정보부에서도 잘 알고 있던 감옥이었다. 캄 투이는 송 마 강

에서 상류로 65킬로미터 떨어져 있었고, 과거 1968년 미 정보부는 첩보위성 촬영으로 이 감옥 내에서 수갑을 찬 서양인 포로 여섯 명이 관측되었다고 보고된 바 있었다. 주기적으로 미군포로 목격이 올라오던 감옥이었다. 그러나 이후 Operation Homecoming [평화협정 체결 직전 미군포로 송환]작전에서 이 감옥에서 나온 미군 포로는 한 명도 없었다.


1976년, CIA는 1975년 첩보위성에 찍힌 동 바이 사진을 분석하다가 조종사 구난신호(pilot distress signal)로 보이는 문양을 감옥 지붕에서 발견했고 이를 내부 극비로 처리하여 보관했다. 1976년 초에는 동 바이 감옥에서 매우 마른 미군 조종사들이 넝마 같은 줄무늬 죄수복을 입은 상태로 목격했다는 증언이 나왔고, 그안에 50-60명이 있을 거라고 증언자는 말했다. 1979년에도 줄무늬 죄수복을 입은 서양인 약 30명을 목격했다는 증언이 나왔는데, 목격자들은 그들이 미군 조종사들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증언에도 불구하고 이 두 감옥에서 송환된 포로는 한명도 없었다. 분석관들은 이 CIA 보고서를 읽고 그게 누구인지 조사하지 안했고 결국 ‘확신이 없는 허위사실’로 잠정 결론 내리고 더 이상 조사하지 않았다. 이후 9년이 흘러 1992년 6월 5일, 미 하원의 POW/MIA 조사단은 미국 첩보위성이 동 바이 감옥 상공을 통과하면서 촬영한 사진을 봤는데, 감옥에서 120미터 떨어진 곳에 추락되어 실종된 미 공군 장교의 이름이 쓰여 있는 것을 발견했고, 그 아래는 암호가 적혀있었는데 이는 확실한 이는 도피 및 탈출(escape and evasion) 암호였다. 이와 가까운 들판에도 다른 실종 조종사를 뜻하는 분명한 글자 4단위 개인 인증 암호가 쓰여져 있는 것이 촬영되었는데 이 또한 도피/탈출 암호가 같이 적혀 있었다.


동 바이 들판에는 실종된 미 공군 장교인 Serex가 쓰여 있고 확실한 E&E code인 “TA”가 그 아래 적혀 있었다. 그러나 국가정보국이 다시 이 장소를 촬영하여 분석한 결과 이 문양이 사라진 것을 깨닫는다. 그 다음에 발견된 들판의 4단위 개인 암호와 도피탈출 암호는 특별한 수정 암호로 “GX”가 쓰여 있었는데 E&E code는 다른 표현으로 “G walking X”로도 표현되며 4단위 암호는 “2527”로 쓰여져 있었다. 이 2527은 미 공군 장교 Peter Matthes로 실종자 명단에 있었다. 국가정보국 전문가는 이를 “G walking X 2527”라고 명명했으나‘이것은 사람이 그린 것이 아니고 자연적으로 형성된 명암효과’ 라고 결론 내렸다. 실종자와 일치한 2527은 그냥 간단히 ‘우연의 일치’라고 결론 내렸다.


Lt. Col. Henry M. “Mick” Serex’s name appears on Panel 2W, Line 128 of the Vietnam Veterans Memorial. Capt. Peter Matthes’s name appears on Panel 16 W, Line 118. The Final Nail


동 티엔 목재소, 케인 소령, 보아 빈 감옥과 동 바이 감옥를 포함한 보고서를 읽은 하원 조사위원회는 국가정보국의 결론을 받아들였다. 국가정보국에는 베트남전 이후 동남아시아에 생존 미군포로 목격보고서가 약 100 여건이 올라와 있었다. 4개 숫자(문자)로 된 암호가 라오스 북부에서 19건이 촬영되었으나 정밀 조사를 하려고 시도했을 때는 문양이 사라진 뒤였다. 라오스 북부에서 글짜 “WRYE”와 4개 숫자 암호가 정글 개활지에서 발견되었으나 국가정보국은 ‘그림자에 의한 자연적인 문양’으로 결론 내렸다. 이 글자와 일치하는 Blair C. Wrye 소령은 1966년 8월 12일 북베트남 상공에서 종적이 사라졌다. 이건은 추적하기로 결정이 났던 사안이다. 라오스 중부에서 한 감옥의 마당에 도피 & 탈출 암호와 함께 ‘감옥안에 미군포로 52명이 있다’는 문양이 촬영되었으나 ‘밭고랑에 의한 불규칙한 문양’으로 처리되었고, 이런 결론은 국가정보국의 마지막 결정 회의에서 대부분 그대로 통과되어 분류되었다.


역시 라오스 북부 논에서 발견된 “USA”란 문양은 약 12미터 길이로, 폭까지 하면 꽤 큰 문양으로 그 밑에 도피 & 탈출 암호로 유명한 “walking K”가 표식되어 있었다. 이 내용 역시 국가정보국인 ‘라오스의 어린 소년이 손으로 그린 문양’이라고 결론지어 분류되어 끝났다. 전쟁 후에 미 정보국이 (라오스 공산당) 페테트 라오의 무선통신을 감청했는데, 내용 중에, 언제 어디서 얼마나 어떻게 미군포로를 모아 이동시킬 것인가‘에 관한 내용이 감청되었고, 이 내용을 정밀 분석하면 라오스 내에 미군포로가 약 1백 명이 있다는 결론이 나왔다. 국가정보국은 또 대다수가 찬성? 미군포로 이동에 관한 무선감청은 없었다고 국가정보국은 밝혔다.


전쟁 이후 첩보로 들어오고 증언된 총 925건의 미군포로 목격 보고서들은. 상당히 많은 숫자의 증언이 같은 장소 같은 시기 같은 감옥에서 반복되어 목격되었다는 증언인 것이 특징이다. 그 925건 모두 거짓말인지 조사하는 사람들은 혼란스럽다고 국가정보국은 공식적으로 말했다. 하원 조사단도 뭐라고 할 수가 없었다.


미군포로가 아닌 어린 아이가 그림을 그렸고, 증언이 조작된 허위사실이며, 들판에 그려진 이름이 가짜고, 그려진 암호가 있어도

자연적인 그림자 문양이라니. 1993년 1월 14일 보스톤 글로브지는 ‘하원 조사단은 실종자 중 생존자의 증거가 없다고 결론내다’라고 기사를 올렸다. 같은 날 하원 조사단의 마지막 보고서에는 “하원 조사원들 동남아시아에 미군포로 흔적을 찾지 못하다” 라고 쓰였다고 워싱턴 포스트가 같은 날 발표했다.  월 스트리트는 “하원의 조사로 생존한 미군포로는 없다는 결론이 나왔다” USA Today는 “하원 보고: 정부는 미군포로를 방치한 적이 없다.” 워싱턴 타임즈 “어려운 조사를 통해, 이제 아시아에 남겨진 포로는 없다고 한다.” 살아 있는 미군포로에 대한 믿을만한 보고서는 국가정보원에 오늘날까지도 들어온다. 그 은폐는 1983년부터 시작되었고 1993년 하원 조사단이 이를 인정하면서 공고한 결론으로 자리 잡았다. 


베트남 전쟁이 끝난 지 공식적으로 30년이 넘게 지났는데 아직도 동남아시아에 미군포로가 살아서 존재한다는 새로운 증거들이 있다. 1971년 작전 중 실종된 미군포로에 관한 편지가 최근에 가족에게 도착했다. 아들이 외딴 지역에 아직도 투옥된 상태로 살아있다는 것. 수년간 역사학자, 학술조사자들, 그리고 독립적인 저널리스트들이 베트남전의 미군포로들이 냉전 시기 동안 소련과 중공과 북한의 중노동 수용소로 끌려갔다는 주장을 하고 있고 이는 천여 명이 달한다고 말한다. 실종자 수색센터는 눈에 안대를 풀고 그들을 찾아야만 한다. 그러나 조 밀러(Joe Milliner)와 그의 아들에 관한 믿을 수 없는 이야기는 버지니아 주의 포로/실종자 가족협회에서 6월 2일 털어놓으면서 알려졌다. 이를 통해 사람들은 버려진 1천 명의 미군포로를 미국이 방치한 것이 아닌가 의심을 하고 있다.


 


아버지 밀러의 아들이자 미 육군 준사관 윌리엄 P. 밀러는 1971년 3월 6일 AH-1G 코브라 헬기에 부조종사로 탑승했고 구름이 잔뜩 낀 그날, 라오스 내의 전투작전 지원임무를 수행하다 라오스에서 사라졌다. 당시 밀러 준사관은 20세. 육군은 수색구조작전을 펼쳤으나 조종사인 존 F. 흄멜과 함께 밀러는 모두 사라졌고 결국 수색은 중단되었다. 몇 년이 지나도 가족은 아들 밀러가 발견될 거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그러나 다른 실종자 가족들처럼 찾을 가망은 안 보였고 정보는 군에서 차단했다. 그러나 최근의 일로 밀러의 운명은 재조명되었고 밀러가 여전히 동남아시아에서 노예 같은 노동자로 생존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추측되었다.


희망을 품게 만든 첫 번째로 공개된 문서는 펜타곤에서 가족에게 준 것으로, 서류상으로 보면 1989년 10월 4일, 태국인 사업가가 증언한 것으로 “William P. Milliner”를 포함한 미국시민들이 매우 위험한 라오스 산악 무인지대에 지역 군벌의 손에 잡힌 상태로 통제되고 있다는 말이었다. 태국인 사업가는 그들에게 미국 정부가 포상금을 줄 경우 윌리엄은 풀려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미 정부에 대한 돈 지불을 전혀 논의 하지 않았고, 그것이 사실일 경우 살아 있는 미국인을 죽인 것과 같은 행동이다. 펜타곤의 문서에는 미국 정부가 태국에서 그 사업가와 만나 대화를 했으며, 그 대화록을 50년간 열람금지로 묶어 놓았다.


미국의 아버지 밀러는 계속적으로 서류를 추적했고, 결국 다른 문서 에는 고작 1,800달러만 지불하면 자기 아들이 풀려날 수 있다고 쓰여 진 것을 보게 된다. 그러나 정말로 결정적인 증거는 작년 말(2007)에 캄보디아에서 일을 하는 한 의사가 보내온 편지였다. 아버지 밀러에 따르면 그 의사가 자신의 아들 밀러를 정글 어딘가에서 아직도 살아 있는 상태라고 썼다고 한다.


2007년 9월, 아버지 밀러가 받은 편지는 자신을 캄보디아와 라오스에서 일하는 의사라고 밝힌 사람이 보내왔으나, 편지에 자신의 실명을 밝히지 않았다. 그 의사가 편지를 쓴 것은 9월 초로 자신은 한 미국인을 치료해주었다고 했다. 그 미국인은 한 팔이 절단된 상태로 고생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 미국인은 그를 둘러싸고 있는 감시인을 두려워했다고 하며, 미국인은 정글에서 아주 오래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의료치료도 거의 못 받은 것으로 보였다고 썼다. 


감시 보초는 그를 아주 가까운 곳에서 감시했고, 잠시 틈이 났을 때 그 사람이 완벽한 영어로 말을 했는데 영어에 베트남 억양이 섞여있었고, 자신은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잡혀있다는 의사표현을 했다고 한다. 아버지 밀러에 따르면 그 의사가 공포심을 가지고 있었고, 이제 자신이 노출될 수가 있어 이제는 숨어 살아야 한다고 썼다고 한다. 공화당 대통령 후보였던 존 맥케인과 존 케리는 아직도 풀려나지 않은 미군포로를 위해 중대한 결정을 해야 한다고 했었다. 


아래는 아버지 밀러가 받은 편지 내용이다. 발신자는 익명이다. 분량과 읽기 명료하게 하기 위해 본 편집자가 편지를 약간 구성했다:


[편지 내용]


난 정부 소속으로 일하는 의사로 캄보디아와 라오스에서 일했습니다...  3주 전인 9월[2007]에 나는 눈에 안대를 하고 먼곳으로 갔고, 정부 관계자는 거기서 그 누구라도 너무 오랫동안 보지 말라고 말했습니다...난 정부 관계자를 따라 젊은 사람 네 명이 있는 어느 마을의 한 오두막으로 갔습니다. 한 사람은 왼쪽 팔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의 팔은 수평으로 정확하게 절단 되어 달려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난 그렇게 장비도 많지 않았고 그래서 평상시와 같이...[그는] 정말로 마르고 수염이 엄청나게 길더군요. 그의 머리에는 머리칼이 약간 밖에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그의 혈압이나 다른 기타는 정상이었습니다. 내가 보기에 그는 분명히 일하는 일꾼이었습니다.


[내가 떠나기 전에] 그가 내 상의를 붙잡더니 나에게 미국인이냐고 묻더군요. 그래서 내가 “맞습니다”했더니 “오스트레일리아 출신인가요?” 묻더군요. “아뇨, 난 켄터키 출신이예요”했더니 그가 말했습니다.


“제발 내 어머니에게 연락해 주십시오. 내 아버지에게 연락해 주세요.제 상관에게 연락해 주십시오. 제발.”이라 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여기서 왜 이러고 있냐 했더니, 그들이 자신을 놔주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또 말했습니다. “나는 여기서 아주 오래 있었고, 러시아에서 지하에 다리를 놓는 일도 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다른 사람들이 더 있는가 물었더니, 대부분이 삼 누아 [Sam Neua: 라오스-베트남 국경지대 외딴 지역]의 동굴에 있고 호치민 시의 지하에도 있다고 했습니다. 자신의 친구 중에서 톰 Hert 혹은 Hart가 캄보디아로 탈출했으며, 한국전쟁에서 온 반 플리트가 자신과 같이 있다(Van Fleet from the Korean War are with him)고 했습니다. 그는 영국인과 태국인들도 있으며, 도니 우드와 Hrlka 혹은 Hrdlika가 탈출했다고 했습니다. [아래를 보면 알겠지만 Hrdlika를 안다는 것은, 이것이 위증일 경우 전사를 충분히 공부하고 계획적으로 해야 가능하다. 잇빨 주] 그 사람에게 이름을 물었고 그는 리차드 밀리노 혹은 밀러라고 한 것 같습니다. 그는 영어와 베트남 말을 섞어서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베트남 말도 아주 잘했어요. 정부 관계자가 “이리로 와요, 거의 다 끝났죠?” 물었고 난 조금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그 남자가 “날 죽여주시오. 나 더 이상 못버텨요”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그러면 안되요. 내가 정부에 연락을 할 게요.”라고 대답했죠. [. . .] 그는 울면서 말했습니다.


“my daddy [is] a soldier. Tell him! Oh god.” 그는 소리를 지르며 내 팔을 움켜쥐었고 그런 기분은 나도 처음이었습니다. 젊은 감시병이 와서 크게 화를 내더니 그 사람을 움켜쥐고 쇠사슬로 묶더니 질질 끌고 갔습니다. 정부 관계자가 “차로 돌아갑시다”하더군요. 그 사람이 한 보초에게 주먹을 날리고 달아나려 했으나 결국 그들이 잡아 그를 트럭 안으로 던졌습니다... 그때 그의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내 부모님에게 사랑한다고 전해주세요! 제발, 부모님에게 내가 살아 있다고 전해주세요!”


그 후에 난 라오스의 미 대사관으로 가서 반 대머리의 한 나이 든 취조관에게 다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다르게 말하더군요.

“아냐, 아니라고. 그건 완전히 돌아버린 캐나다 (출신) 병사야. 그 친구는 전쟁 후에 자기가 남겠다고 해서 남은 거야.” 내가 말했죠.


“그 사람 말로는 당신이 진짜 미친사람이라고 하던데.”


Col. David Hrdlicka Captured Alive May 18, 1965 in LAOS



1965년 5월 18, 45세의 미 공군 데이빗 L. Hrdlicka 대령은 F-105 전폭기 선도기를 몰며 라오스 북부를 통과하고 있었다이때 지상사격이 올라와 대령의 기체가 맞았고 대령은 사출해 낙하산으로 한 마을 근처 계곡에 떨어졌다대령의 윙맨은 낙하산 하강과 대령이 잡히는 것까지 모두 지켜봤다마을 사람들이 낙하산에 몰려들어 붙잡는 걸 모두 봤다그는 [라오스 공산당페테트 라오에게 사로잡혀 본부가 있는 Sam Neua로 끌려갔다.


잠시 후 구조헬기가 땅에 내려 구조대원들이 마을로 갔고 이때 대령이 페테트 라오의 손에 넘어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이후 대령의 포로 소식은 북베트남 신문인 콴 나 단에도 났고그리고 며칠 밖에 지나지 않아베이징에서 대령이 썼다는 편지가 낭독되었고 소련 기관지 프라우다에서는 대령의 사진을 실었다미 국가정보국은 이것이 대령의 사진이 맞다고 식별했다대령의 마지막으로 보도된 내용은 분명히 살아 있었으나대령은 돌아오지 않고 영원히 사라졌다.

 

[이 글에 실제 서류들이 굉장히 많이 올라 있으나 생략합니다. 잇빨 주]


문제는 위와 같은 불분명한 서류로 대령이 1969년 라오스의 한 동굴에서 건강한 상태로 목격되었다는 것이다이 증언은 소련의 베트남전 통신원 이반 로보다가 작성한 것이다

 

단체 자유의 종을 울려라(Let Freedom Ring)의 의장인 애토니아몬드 L. 벨저가 1994년 전직 소련 전쟁통신원인 이반 로보다를 인터뷰했는데그는 그때 1969년 라오스의 동굴에서 대령을 봤다고 맹세를 했다대령이 살아 있다는 목격자 증언은 정말로 엄청나게 많았고 그런 증언은 1990년대 말까지 지어졌다새로운 정보로는 2009년 것으로 대령이 살아 있으나 완전히 정신착란 상태에 이르러 미국인 동료들을 기억도 못하고 글도 쓰지 못한다는 거였다.

 

[자유의 종을 울려라 : 미군 포로/실종자 송환을 위한 민간 단체. 잇빨 주]

 

위의 서류는 1993년 소련 통신원 이반 슈드로프가 대령의 부인인 캐롤 여사에게 보낸 편지로자신은 대령이 라오스에서 봤다고 하는 증언이다그러나 1993년은 이미 미국 정부가 대령을 이미 'KIA'로 분류한 상태였다.

 


 

보안 처리 된 상태로 발견된 대령에 관한 보고서

 

아무도 듣지 않는 지상의 표식들!

 

* 1973년 라오스 중부 사진. 4자 식별암호와 함께 "TH" 글자가 보인다이는 조종사가 곤란에 처했을 때 쓰는 신호 암호다.

 

* 1975년 베트남의 감옥 사진. CIA는 이 감옥 지붕에서 좀 이상한 marking들을 발견했다. CIA는 믿기 힘들었으나 마킹은 letter   "K"로 Morse code로 풀이하면 "K"는 조종사의 조난신호였다.

 

* 1980년 라오스 사진숫자 "52"와 함께 글자 "K"가 있었다.

 

* 1988년 라오스 계곡 사진논에 "USA" 즐자 형태로 파여져 있었고 그 밑에는  "K"와 비슷한 형상이 있었다. K는 지형에서 나온 흔적  같기도 했다.

 

* 1992년 6월 베트남 감옥 사진희미하게 "GX 2527"가 보였다. 이를 종합하면 1969년 라오스에서 실종된 한 조종사의 개인 암호가 되고 또한 조종사 구난신호가 된다.

 

분석회의에서는 그것이 사람이 만든 암호인가 그늘이나 지형이 만든 형상인가 의견들이 일치하지 않았다. "TH" + 1973과 "USA" 두 가지 경우는 모두 인간이 만든 것으로 의견이 일치했으나 일부 다른 해석도 있었다미 국가정보국은 "USA" 심볼을 산악족인 지역 몽족이 만들었다고 생각했고 미군포로와는 관련이 없다고 생각했다. "TH"도 역시 몽족이 했을 거라 생각했다. (Note: "USA"는 라오스 Sam Neua 근처 벌판에 나타났고 글자 크기는 하나 당 3.5미터다그 아래 "Walking K" 암호 같은 글자가 있었고 이는 조종사 구난신호다누가 농담을 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근처 종족이나 종족 어린이들이 학교에서 영어를 배우고 또한 비밀 암호까지 배웠어야 가능하다는 말이다또한 USA에 대단한 팬이어야 하며자기 나라 땅에 다른 나라를 열렬히 사모하는 문양을 새긴다는 게 이해하기 쉬운 것인가?

 

하원의원 조사팀이 1992년 바로 라오스의 논에 직접 방문했다TH와 USA가 새겨진 4년 뒤였다이곳을 방문한 조사팀은 그 땅 주인을 찾아 그 주인이나 아들이 "USA 심볼과 다른 문자 같은 것을 새긴 일이 있는물었다.




이 문양이 미군 암호가 맞다면, 이 개인번호는 앞의 윌리엄 밀러로 추정되는 사람이 의사에게 말했던 대화에 등장하는 인물 하트 (토마스 하트의 개인식별 암호 숫자)와 일치한다. 윌리엄 밀러로 추정되는 사람이 톰 하트가 탈출했다고 말했다고 하니, 모든 말이 맞다면 탈출 후에 만든 'TH' 약어와 마찬가지로 도피/탈출 중에 문양을 만들었다는 내용과 논리적으로 일치한다. 즉, 문양과 증언 둘 다우연의 일치로  사실이 아니거나 둘 다 진실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잇빨 주]

 

 Andre Guillet Missing in Laos since May 18 1966

 

앤드레 귈넷은 미 공군 점프스쿨에서 점프하던 중 3천 피트 상공에서 고장 난 낙하산으로 뛰어내려 기적적으로 살아난 인물이다그리고 포로가 되고 나서 44년 동안 살아 있을 가능성이 제기된 인물이다미 국방성에서 작성한전쟁 후에도 라오스에 미군 포로들이 억류되고 있다는 내용이 담긴 서류. (사진 생략) 수십 년 동안생존 미군포로에 관한 잇따른 정보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생존포로가 있을 거란 사실에 비웃움으로 대신했다만약 살아있는 게 사실이라면 이는 모욕적인 일이다닉슨 정부 아래 세 명의 국방장관이었던 멜빈 레어드제임스 슈레징거엘리옷 리차드슨은 미 하원 포로/실종자 위원회에서 전쟁 후 버려진 포로가 존재할 수 있을 거라 믿는다고 한입으로 증언했다백악관에서 포로 문제로토론했던 내용이 녹음되어 있을 거라고 했으나 닉슨은 증언을 거절했고다른 테이프인 워터게이트 테이프로 대신되었으리라.

 

무하마드 알리와 캐롤 HRDLICKA - HUE VIETNAM


Carol Hrdlicka는 포로가 된 데이빗 Hrdlicka 대령의 아내로 아놀드 베이저와 무하마드 알리와 함께 1994년 베트남을 방문

했다캐롤은 실종된 조종사이자 남편에 대한 답을 구하고 싶었다 


아래의 message는 라오스를 여행하다 미국인 포로들을 봤다는 편지를 캐롤 Hrdlicka 부인이 최근에 받은 내용이다남자는 포로나 죄수가 분명했고 시골에서 보초와 동반해서 목격했다고 한다여행자는 보초들이 잠시 정신을 파는 사이 한 포로에게 노트를 찢어 주면서 미국으로 갈 것이니 뭔가 쓰라고 했다거기에 쓰인 영어는 매우 급하게 갈겨 쓴 필체로 그것을 분석해본 결과 그것이 David Hrdlicka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 캐롤 부인에게 보낸 것이다.

 

 

오른쪽이 미군포로 추정자가 쓴 메모고, 왼편에 글 내용을 풀이한 주석이 있습니다.

그림 밑에 간단한 해설.

 


 

내용 1: 정치적으로든 우리 아버지에게 연락하든 나는 페테트 라오 손에서 나가야 합니다.

내용2: 앨리슨이란 사람도 같이 있었습니다.

내용 3: 린든 존슨은 우릴 꺼내줘야 합니다.  밥 도넌에게도 연락 하십시오.

          도와주지 않는다면 모두 지옥에 떨어질 것입니다.

내용4: 어머니 항상 그리워요. 미 공군과 레드 화이트 블루(미국)의 나라는 라오스를

          포기하면 천벌 받을 겁니다. 누군가 도울 수 있습니다.


 대령과 관련된 사람이 한 명 있다전직 하원의원인 밥 도넌으로 그는 같은 전대에서 복무했던 조종사 출신이다실종 전에 캘리포니아에서 같이 근무하기도 했다. Hrdlicka 대령은 라오스 영토를 관통해서 날아가는 비밀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아래 노트에서 “alisan”...은 데이빗 레이 앨리슨이며 격추된 미군 조종사로 이미 미국 정부가 베트남에서 KIA로 규정한 상태였고 밥 도넌과는 비행학교 동기다메모에 따르면 앨리슨은 전사한 것이 아니라 라오스에 Hrdlicka 대령과 같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이 조종사 앨리슨의 네 자리 개인암호가 1990년대 초반 미국 첩보 위성에 찍힌 일이 있었다. 이 메모는  너무 휘갈겨 썼고 알아보기 힘드나생존 미군포로를 방치한 린든 존슨에게 지옥에나 떨어지라고 말하고 있다.

 

[이 내용이 사실이라면  대령은 닉슨의 당선과 이후 미국 상황을 모르고 있다는 말이  된다. 대령은 1965년 격추되었다. 잇빨 주] [베트남전이 미국의 오판과 오만 어쩌고를 떠나서, 이 대령이

 아직도  살아 있다면 49년 째 억류 중이라는 말이다. 잇빨 주]

 

2012년 9월 19미 전쟁포로관리국(Defense Prisoner of War)은 미 국방성에 정식으로 서류를 제출했는데, ‘정확히 추산할 수는 없으나’ 오스에 적어도 314의 미국인이 아직 존재할 가능성을 제기했다육군 108해군과 해병대와 미 공군 합계 약 200이는 전쟁 동안 방대하게 넓은 라오스에 대한 제공권을 장악하기 위한 이유에서 그렇게 되었다.

 

미 전쟁포로관리국이 제시한 라오스 영토 내의 314명이 모두 현재까지 살아 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전쟁이 끝나던 시점에서 라오스 무력에 생존한 채로 넘어간 사람들을 의미하는 것이다당시 라오스는 북베트남이 쥐고 통제하고 있던 것이나 다름없다.

 

아마도 항공기 추락에서 전사했거나 매복을 당했거나 도피/탈출 중 정글에서 사망했을 수도 있다그러나 시체가 발견되지 않았으니 배제할 수가 없다잡히자마자 바로 즉결처형으로 살해당했을 수도 있특히나 미 육군 특전단은 그들에게 그런 대상이었다.

 

생존한 채로 라오스 어딘가에 남겨진 숫자는 아마도 착오로 빠진 사람도 있을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라오스 사람들과 대화를 나눠본 사람들은 전쟁포로관리국 명단 외의 사람도 있을 거라고들 한다적어도 나에게는 분명히 가능성이 있다는 생각이다.

 

나는 중구난방 식의 페테트 라오의 조직이 1973년 모든 미군포로를 북베트남에게 인계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미국은 베트남에서 마구 엉킨 것을 당시 풀고 있었고 또한 북베트남과 협상을 하고 있었그리고 페테트 라오도 미국의 대상 중 하나였다페테트 라오는 오지의 정글에 흩어져 있어 정확히 어떤 정보를 취득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다그리고 그들 여러 조직 대부분이 포로들을 따로 데리고 있었다당시는 페테트 라오가 라오스 영토 전체를 장악하지 못한 상태였다이런 상황에서 전쟁이 끝날 당시 라오스에 남겨진 포로가 없다는 것이 오히려 더 믿을 수 없는 말이다.

 

얼마나 남겨졌는가?

 

누가 알겠는가그러나 대충 짐작컨대 한 100이란 일반적인 오류에 속하는 말이 될 것이다정확한 숫자를 그 누가 알겠는가그러나 단 한 명이 남겨졌다고 해도 이건 끔찍한 비극이다전쟁 뒤에 라오스에 남겨진 운명을 생각해보라난 생각보다 굉장히 많을 거라고 추측한다.


난 여기에 와서 Vieng Xai 동굴들을 방문할 것이라고 말했다난 다른 예들에 의존하지 않고 개인적으로 라오스에 전쟁 후에 어떤 일이 있었을까 궁금하고포로에 관해서는 1970-80년대가 궁금하며일부가 지금까지 살아 있을지 알고 싶다.

 

Are they still alive?

 

나 개인적으로는 현 시점에서 라오스 내에 미군포로에 관한 흔적은 정말 못 찾을 거라고 확신한다라오스 정부도 이 문제에 관해서 굉장히 접근을 제한하고 있다그러므로 나는 내가 보고 느끼는 것만을 기술할 수밖에 없다.

 

아직도 포로라고 간주되는 외국인을 목격한 사례들이 보고되고 있다그러한 경우 실제 외국인으로 밝혀졌으나 미군포로는 아닌 경우가 있었다그들은 자기 나라에서 유죄선고를 받은 도피자들선교사들종 지원단체에 속해 정글에 일하러 왔거나혹은 속세를 떠나 은둔하는 사람도 있다불행히도 최근에 살아 있는 라오스 미군포로 목격 증언은 없다. 1980-90년대에는 계속 새 증언들이 올라왔었다내가 아는 건도 하나있는데 난 그 건이 살아있는 상태는 아니라고 보였다라오스 정부도 사실 잘 모르고 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