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후회물을 왜 보는걸까?


나는 이걸 피학성애(被虐性愛)와 가학성애(加虐性愛)로 설명해보려고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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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망가지는 이유는 과거에 대한 후회 때문이다’라는 관점은 ‘후피집’ 모두에 적용되는,


어쩌면 가장 기초적인 개념이라고 생각해.


그러니 후회물과 피폐물은 비슷한 성격을 띄게 되는거지.


주연 또는 조연이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후회하며 망가진다는 클리셰를 공통으로 지니니까.


다만 둘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어.


남성향을 기준으로 생각할 경우,


피폐물은 ‘주연이 서서히 망가져가는 그 분위기와 내면의 변화’에 초점을 맞춘다면


후회물은 ‘후회로 망가지는 조연 혹은 히로인’에 초점을 둔다는거지.






그렇기에 ‘남주가 돌이킬 수 없는 실수(ex. 여주를 자기 손으로 죽인다거나)를 저지르고 후회하며 망가져가는 후회물‘은 잘 보이지 않아.


이런건 여성향에 가까우니까.


그렇다면 그 남성향과 여성향을 나누는 기준이 뭘까?


후붕이들은 여주가 후회하는걸 좋아하고 후순이들은 남주가 후회하는걸 좋아하는걸까?


만약 ’후회하는 그 감정과 독백‘이 후회물을 보는 주된 이유라면 이 현상은 조금 이상해.


후붕이가 남주의 감정에 더 잘 이입하고, 후순이가 여주의 감정에 더 잘 이입할 수 있는게 당연하니까,


우리 후붕이들은 여주가 후회하는 모습보다 남주가 후회하는 모습에 더 크게 공감할 수 있을테니 말이야.






그래서 나는 여기에서 생각했어.


우리같은 후붕이들이 남주의 자리에 우리를 투영하고 그 감정에 이입하는 것은 사실이야.


하지만 그 후회하는 감정에 우리를 이입하는 것이라 보기는 어려워.


차라리 ‘여주가 남주를 생각하며 후회하는 상황’에서 ‘남주가 느끼는 감정’에 이입하는 것에 가깝지.


그렇다면 누군가는 남주가 죽는 경우 또한 인기있는 것은 어떻게 설명할 것이냐고 물을지도 몰라.


이건 제 4의 벽과 관련 있는 현상이라고 생각해.


작중의 남주가 아무리 고통받아도 그 고통이나 감정이 고스란히 우리에게 전해지는 것은 아니잖아?


또한 우리는 작품 밖에 존재하니 남주가 죽더라도 ‘여주가 후회하는 상황’에서 ‘남주가 느낄 감정’은 여전히 이입할 수 있어.


그러니 ‘남주의 죽음이나 피폐함’은 ‘여주의 후회하는 감정’의 크기에 비례해 ‘남주가 느낄 감정‘.


즉, ’우리가 이입하는 감정‘을 극대화 시키는 장치로 작동할 수 있는거지.






그러니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종합한다면 후회물과 피폐물은 마조히즘(Masochism)과 사디즘(Sadism)을 통해 설명할 수 있어.


갑자기?라는 생각이 들지 모르겠지만 너희가 생각하는 피학성애(被虐性愛)와 가학성애(加虐性愛), 그러니까 BDSM의 그 마조히즘과 사디즘이 맞아.


사실 마조히즘과 사디즘은 꼭 성관계의 상황에서만 쓰이는 용어는 아니야.


사전적 정의는 ‘특정 상황에서 육체적, 혹은 정신적 고통을 주거나 받으며 성적 쾌락을 얻는 것’이지만 심리학계에서는 그것보다 더 넓은 뜻으로 쓰이거든.


약간은 다른 이야기지만 연세대학교의 전 교수셨던 (故)마광수 교수님은 ‘한국 현대시의 심리비평적 해석‘이라는 논문에서 김소월 시인의 ‘진달래 꽃’을 ‘매조키즘적 쾌락에의 동경’으로 설명하며 문학계에서 천재적인 관점이라는 평을 듣기도 하셨지.


이렇듯 마조히즘과 사디즘은 성도착증이라는 의미보다 더 범용적으로 쓰이는 용어야.


그러니 나는 이를 통해 남성향 피폐물과 후회물의 성격을 정의할게.


피폐물은 ‘독자가 주인공의 피폐한 정서에 자신의 감정을 이입하여 느끼는 정신적 고통’을 즐기는 마조히즘적 성격을 지니고,


후회물은 ‘남주인공에 자신의 감정을 이입하여, 여주인공이 느끼는 정신적인 고통’을 즐기는 사디즘적 성격을 지닌다고 생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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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후회물과 피폐물의 성격을 마조히즘과 사디즘을 통해 설명해봤어.


시험적인 관점이라 너희가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곘다.


다소 거부감이 느껴졌다면 미안해.


이건 어디까지나 나의 개인적인 관점일 뿐이니까 너무 크게 받아들이진 말아줘.


그런데 나는 위의 내 관점에 대한 너희의 생각도 정말 궁금하거든.


그러니까 댓글로 자유롭게 너희 생각을 이야기해주면 고마울 것 같아.


비판도 얼마든지 수용할 생각이니 정말 자유롭게 이야기해줘.


혹시 내 관점에 대해 질문이 있다면 그것도 언제든 환영이야.


그럼 긴 글 읽느라 수고했어.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