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글 모음

여느 때처럼 손아귀에 검은 설화를 덕지덕지 묻힌 채 멍하니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자면, 문득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지금의 나는 얼마나 강한 것일까?


상당히 애매한 질문이었다. 강함이란 상대적인 것이니까. 


가령, 상대가 안드라스라면, 나는 놈과 비슷한 적과 동시에 싸워서 너끈히 이길 수 있었다. 하지만 내 앞을 가로막은 존재가 아가레스라면 . . . 아마 화신체가 두 개 있어도 턱없이 부족할 것이다. 


비교 대상이 누구냐에 따라 주식 시장처럼 오르내리는 변덕쟁이. 강함을 풀어서 설명하면 그러했다. 이런 건방진 녀석을 그나마 객관적으로 가늠하기 위해 관리국이 도입한 개념이 바로 '격' 이었다.


역사 속 위인들이 속하는 '위인급'


신화나 전설에 등장하는 존재들은 '설화급'


그 어떤 별도 범접할 수 없는 설화를 쌓은, 지고한 성좌들 중에서도 극소수만 이를 수 있는 '신화급'.


아가레스와 아바돈을 제외한 마왕들은 전부 '설화급'에 속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또 한 가지 의문점이 생긴다.


같은 설화급 성좌들 끼리의 우열은 어떻게 가려지는 것일까. 


사실 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아마 백이면 백, 이렇게 말할 테니까.


[설화가 모든 것을 좌우한다.]


챙! 


현란한 창술로 '핏빛 손아귀'를 전부 튕겨 낸 아레스가 표정을 찌푸렸다. 내가 느닷없이 뱉은 문장을 해석하느라 버퍼링이 걸린 듯 싶었다. 


[무슨 저의로 한 말이지?]


[그건 . . . ]


투쾅!


문장을 채 끝맺기도 전에 아레스가 다시 창을 휘둘렀다. 허공에 실선이 가득 그어지고, 앞을 가로막는 것들이 전부 산산조각났다. 


[설화, '그리스의 전신'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전쟁을 위해 태어났고, 전쟁을 위해 살아온 존재의 설화. 시체의 거죽 위로 검붉은 핏물로 적어내린 활자들이 투쟁심을 불태우고 있었다. 


아레스의 설화에 자극받았는지, 내 안에서도 한 설화가 간만에 몸을 일으켰다.


[설화, '목숨을 건 사투'가 흥겨워합니다!]


시력에 의존하길 포기하고 손이 가는 대로 움직였다. 채찍처럼 휘둘러진 [핏빛손아귀]가 창의 경로를 틀어막았다. 


캉!캉!


고막을 후벼 파는 날카로운 쇳소리. 불규칙적인 장단에 가끔 지면이 패이고 파괴되는 잡음이 섞었다.


소란 사이로, 희미한 곡조가 들려왔다.


[설화, '목숨을 건 사투'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목숨을 건 사투'가 노래하고 있었다.


「삶은 투쟁의 연속이다.」


파노라마처럼 스쳐가는 기억들. 


「죽음은 언제나 앞에 있있다.」


그 기억들 속에서 나는 수많은 죽음을 보았다. 


「결국 모든 것은 무로 돌아가나.」


발밑에 깔린 무수히 많은 시체들. 그들은 도대체 무엇을 위해 이토록 치열하게 싸운 것일까. 


나는 검은 비가 내리는 황야를 천천히 거닐다가 어느 한 곳에서 멈췄다. 


시체밭을 비집고 피어난 들꽃. 


그것은 새하얀 설화였다. 


「그 과정은 찬란하고 아름답다.」


강풍에 휘청이고, 사정없이 짓밟혀도, 결국 피어나고 마는 들꽃은 아름답다. 

풀내음에 휩싸여 싸앗을 남기고 흙으로 돌아가, 다음 해 다시 피어나는 순환은 위대하다. 


우리는 그 경이로운 설화에 눈이 먼 자들이었다. 설화를 피위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기에, 종국엔 스스로를 불사르는 지경에까지 이른 것이다. 


그 모습이 멀리서 보았을 땐 고고이 빛나는 것처럼 보여 '별'이라 불릴 뿐. 실상은 그저 아름다움에 취해 헤어나오지 못하는 자들이었다. 


나도, 성좌도, 인간도. 


그러나, 충분히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었다. 


「하여 마왕은 투쟁한다. 짓밟고 일어선다.」


기회는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진다. 그렇다면 나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노력할 뿐이다. 내 방식대로, 제멋대로. 


「그것이 - 」


마지막 문장이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나의 삶이다.]


고작 1000년밖에 되지 않는 삶. 족히 수천 년은 살아왔을 아레스와 비교하면 턱없이 모자른 세월이지만, 그 안에 담긴 오기와 근성만큼은 다른 쟁쟁한 성좌들에게도 밀리지 않는다고 자부한다. 


쩌저적. 


[. . . !]


가슴팍에 금이 간 아레스의 갑주가 증거였다. 


그러나 시간의 무게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하아압!]


기세에 밀려 잠시 주춤하던 아레스가 기합을 내지르며 창대를 크게 휘두르자, 하늘이 가려진 곳에 뜬 반월이 궤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소멸시켰다. 


콰콰콰!


끔찍한 불협화음에 노래가 뚝 끊겼다. 이에 아레스가 재차 달려들었다. 마치 내 이야기가 가소롭다는 듯이, 거침없이 전진하면서. 


[설화, '그리스의 전신'이 포효합니다!]


한층 강렬해진 맹공이 [핏빛 손아귀]를 통째로 잡아먹을 듯 쇄도했다. 겉으로 봤을 땐 피말리는 상황이었으나 속으로는 아직 여유가 있었다. 


전황의 자체는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으니까. 아레스가 문득 소리쳤다. 


[감히 내 앞에서 전쟁을 논하는가?!]


아무래도 내 시건방진 설화가 거슬렸던 모양이다. 아레스의 열렬한 반응에 나는 계획을 조금 수정하기로 했다. 마침 놈을 무력화시킬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기도 했고.


지금까지 격노의 마신으로서 싸웠으니, 이제 정욕의 마신이 나설 차례였다. 나는 아레스가 열이 뻗치도록 알밉게 웃으며 대답했다. 


[음, '정의와 지혜의 대변자'면 몰라도 상대가 당신이라면 충분히 가능하죠.]


[너 . . . !]


아레스는 무력에 비해 지혜가 모자란 신이다. 같은 전쟁의 신인 아테나와 비교했을 때, 이는 더욱 두드러진다. 


독선적이고 잔혹한, 전쟁의 불합리함 그 자체라 볼 수 있는 성격. 도발이 가장 잘 먹히는 부류였다. 


[아닌가?]


[어디서 그런 망언을 지껄이는가!]


그리고 사족이지만, 나는 입 터는 데 일가견이 있었다.


[올림포스의 망아지가 할 말은 아니군요. 당신이 그렇게 덜 떨어진 탓에 '사랑과 미의 여신'도 마음 놓고 그대와 관계를 맺지 못 하는 거 아닙니까? 정욕의 마신으로서 애통할 따름이군요.]


[그 입 . . . 다물어라!]


원래 하지 말라면 더 하고 싶어지는 법이지만, 안타깝게도 아레스가 미쳐 날뛰기 시작한 탓에 더 이어가진 못했다. 


[성좌, '흉포의 군신'이 당신에게 강한 살의를 느낍니다.]


츠츠츳! 


아레스의 창에 묵빛 스파크가 발산되기 시작했다. 제우스의 아들이라 그런가. 저 스파크가 단순히 번갯불에 그치지는 않을 것 같았다.


등 뒤로 날개를 펼치고 하늘로 비상한 순간, 아레스의 신형이 빛을 남기며 길게 늘어졌다.


콰앙!


공기를 찢어발기는 소리가 들려왔을 때, 그는 내가 방금까지 서 있던 자리에 도달해 있었다. 아레스의 진로에 놓인 바닥이 깊이 파인 상태. 작은 크레이터 속에서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매우 흉흉했다.


[도망치지 마라, 마왕. 네놈이 피할 곳은 없다.]


나는 주위를 둘러봤다. 출입문 쪽을 보니 용캐 살아남은 성운놈들이 입구를 틀어막은 채 포위망을 좁혀가고 있었다.


아직 이계의 신격도 남아 있는데, 참 잘하는 짓이다. 내가 할말은 아니지만. 


[도깨비들이 네놈들이 순순히 시나리오에서 이탈하도록 허락해주진 않겠지.]


[그렇다고 저 포위망을 뚫기엔 상당히 힘들어 보이는군요.]


[곧 다른 성좌들도 가세할 것이다. 너희는 독 안에 든 쥐야.]


나는 아레스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흘렸다. 대피로는 이미 마련해 놓았으니까. 대신 아수라장이 된 연회장을 응시하다가 아공간 코트에서 수첩을 꺼냈다.


[무슨 짓을 . . . ]


[조금만 기다려 줘요. 잠시 할 게 있어서.]


나는 수첩에 작성된 명단에 만년필를 가져다 대며 덧붙여 말했다. 


[명색이 전쟁의 신인데 기습 같이 치졸한 짓은 하지 않겠죠?]


[ . . . ]


[그런 건 약한 놈들이나 하는 거잖아요.]


당연히 아레스로선 들어 줄 필요가 없는 요구지만, 자존심 강한 놈이 내 말을 무시하고 배길 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곧 아군이 합류하는 이상, 상식적으로 판단했을 때 시간끌기는 오히려 아레스한테 이득이었다.


분노한 와중에도 최소한의 지능은 남았는지, 아레스가 창끝을 내렸다. 


나는 간접 메시지를 참고하여 명단에 줄을 그었다.


인류의 시조


마누


우레를 먹는 새


가루다


바나라의 장군


하누만


.

.

.


중간중간에 마왕들이 당했다는 메시지도 들려왔다.


주로 하위권 마왕들, 그 중에서도 '인장 쟁탈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고 어부지리로 거대설화의 지분을 얻은 족속들이었다. 


벼락부자는 오래가지 못한다더니, 딱 그 꼴이었다. 욕심도 정도껏 부려야지. 


대충 정리를 마치고 나는 수첩을 집어넣었다. 동시에 아레스 몰래 투명한 수갑을 아공간 코트에서 꺼냈다.


절그럭.


본래라면 아레스의 눈을 속이기 어려웠겠지만, 돌발 행동으로 주의를 분산시킨 지금은 문제없이 준비를 마칠 수 있었다. 


나는 아레스를 향해 이죽거리며 말했다.


[전사답게 약속을 지켰으니, 한 가지 재밌는 사실을 알려주도록 하죠.]


[ . . . 뭐지?]


나는 고개를 돌려 전장의 한복판을 응시했다. 하늘하늘한 천을 두른 아름다운 여인이 모략스를 상대로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그녀가 연회에 빠질 일은 없었다. 빼어난 미모의 여신은 자신의 아름다움을 뽐내길 좋아했으니까. 


나와 같은 곳을 바라본 아레스의 표정이 굳었다. 


[설화, '격노와 정욕의 마신'이 킬킬거립니다.]


[애초에 내 목표는 네가 아니었단다, 우둔한 전사야.]


나는 바람을 가르며 '사랑과 미의 여신'이 있는 곳을 향해 쇄도했다. 아레스의 진언이 메아리쳤다.


[아스모데우스!]


[하하하핫!]


광분한 아레스가 질주하기 시작했다. 이에 질세라 나도 속도를 더욱 높였다. 연회장에서 펼쳐진 때아닌 래이스.


승리의 여신은 먼저 출발한 내게 손을 들어줬다.


이미 한낮의 밀회로 소통한 모략스가 길을 비켜줬다. 나는 단숨에 아프로디테에게 접근해 그녀의 손목을 움켜잡았다.


철컥. 


아프로디테의 눈동자가 요동쳤다. 


[너는 . . . !]


[잠시 실례할게요, 여신님.]


그리고 그대로 아프로디테의 허리를 잡고 그녀와 위치를 바꿨다. 자신의 창이 아프로디테를 향하자 당황한 아레스가 어깨를 틀었다. 


콰콱!


덕분에 아프로디테는 꼬치 신세를 면했으나, 억지로 궤도를 비튼 것에 대한 반발로 아레스의 자세가 무너졌다. 나는 이틈을 놓치지 않고 아프로디테의 등 뒤에서 튀어나와 아레스의 손목을 붙잡았다.


철컥.


동시에 아레스도 나를 붙잡아 주먹을 날렸다. 코트가 풀어지고 화신체가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그렇게 천박한 개싸움이 시작되기 직전, 모략스가 내 아공간 코트를 힘차게 잡아끌었다.


촤르르. 


그러자 두 신을 구속한 수갑과 연결된 쇠사슬이 끌려나오더니 종국엔 커다란 침대 하나가 딸려 나와 신들을 덥쳤다. 


한명오가 출산에 사용했던 바로 그 침대였다.


어째서 침대냐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답할 수밖에 없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설화가 좌우하는 법이죠.]


침대에 깔린 아레스와 아프로디테의 얼굴이 흑빛으로 변했다.


두 그리스 로마 신들에겐 침대와 엮인 설화가 하나 있었다. 


[성좌, '화산의 대장장이'가 기시감을 느낍니다.]


아레스와 아프로디테가 간통하는 것에 분노한 대장장이 신 헤파이스토스. 그는 몰래 침대에 그물을 설치했고, 그것도 모르고 사랑을 나누던 두 신들은 그물에 사로잡혀 그야말로 개쪽을 당했다. 


나는 그물을 수갑으로 대신하여 설화를 재현한 것이다.


[다수의 성좌들이 기시감을 느낍니다!]


[무대화가 발동합니다!]


츠츠츳!!


무대화가 발동하면서 수갑은 절대 끊어지지 않게 되었다. 실제 전승에서도 헤파이스토스가 풀어 주기 전까지 둘은 옴짝달싹도 못하고 서로 붙어 있어야만 했다. 꽁꽁 묶인 아레스가 발악했다.


[이 비열한!]


[원래 마왕은 비열하답니다. 속은 성좌가 미련한 것이죠.]


내 뻔뻔한 대답에 모략스가 혀를 내둘렀다. 


[너도 참 대단하다.]


모략스의 칭찬을 듣는 둥 마는 둥, 나는 아레스에게 다가가 갔다. 핏빛 손아귀로 구현한 단검을 역수로 들고 그의 머리맡에서 들여올렸다.


마지막 순간에 그와 내 눈이 마주쳤다. 꺾이지 않은 눈빛이 거슬려 몆 마디 조롱을 뱉었다.


[아이러니하지 않나요? 전쟁터에 나간 인간들은 차가운 흙바닥에 누워 죽어 가는 데, 전쟁의 신이라는 놈은 안락한 침대에 누워 연인과 함께 최후를 맞이하다니.]


울컥한 아레스가 항변하려는 찰나, 나는 검을 쥔 손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이 치욕은 언젠가 - !]


푸슉! 짧은 피륙음과 함께 화신체가 절명했다.


[성좌, '흉포의 군신'이 치명상을 입고 시나리오에서 이탈합니다!]


[무대화가 종료됩니다.]


얼굴에 튄 피를 닦고 옆을 돌아보자, 얼어붙은 아프로디테가 눈에 띄었다. 곁에 다가온 모략스가 심드렁한 어조로 물었다.


[죽일까?]


[딱히요? 뭐, 어차피 죽지도 않잖아요.]


당분간 불구로 살아야 할 뿐이지. 


[히끅!]


내 발언에 아프로디테가 딸국질을 시작했다. 그러다 뭐가 그리도 서러운지 수도꼭지라도 열린 것처럼 눈물을 콸콸 쏟기 시작했다.


나는 그녀의 턱을 잡고 눈물을 닦아줬다. 눈물은 금방 그쳤지만, 몸의 떨림은 더욱 심해졌다. 나는 그녀가 안심할 수 있도록 다정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떨지 마요. 나 그렇게 나쁜 마왕은 아니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