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글 모음

억지 설정이 있을 수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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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평범한 배달부다. 그리고 오늘도 나는, 평범한 배달을 한다. 수많은 우편물들을 싣고서, 오늘도 수많은 집들에 들린다.
 배달을 받는 사람들은 대부분 얼굴이 익숙하다. 자주 시키는 사람이 아닌 이상, 배달부가 필요할 정도로 애매한 짐을 잘 시키지 않는다.

 우체부가 아닌 배달부라면 크기가 크지만, 상단이나 사업체같은 규모가 큰 길드에서 주문할 정도로 대량이면 배달부가 아니라 직접 마차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나같은 개인 배달부가 배달하는 짐들은, 적당히 크고 적당히 무거운, 애매한 짐들 뿐이다.
 나는 오늘도 애매한 짐을 들고서, 언제나 첫번째로 찾아오는 집에 들려 문을 두드린다.

"배달입니다~!"
"나가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안에서 대답이 들린다. 그리고 몇 초 지나지 않아, 다급하게 안에서 달려오는 소리가 나고선 문이 열린다.

"이른 시간에 실례합니다. 주문하신 물건 배송입니다. 확인서에 사인해주실 수 있을까요?"

 나는 그녀에게 물건이 담긴 각진 상자와, 물건 수령 확인서를 내밀었다. 원래라면 펜도 함께 내밀겠지만, 그녀는 펜이 필요하지 않다.

"네, 잠시만요."

 그녀는 자신의 주머니에서 접이칼을 꺼내 펼치더니, 망설임 없이 자신의 엄지 끝을 그었다. 피가 주르륵 흘러내리는 엄지 손가락을, 그녀는 확인서에 대고 꾹 눌렀다. 일 초 가량 누른 뒤에 뗀 자리에는, 선명한 진홍색 지장이 찍혀있었다.

"자꾸 이러시면 다른 종이랑 달라붙는데, 다음부턴 간단하게 펜으로 사인해주시면 안 될까요?"
"헤헤, 연금술사에게 사인해달라 하셨으면서, 평범함을 기대하신 거예요?"
"참, 라부아지에 님도......."

 나는 머리를 긁적이면서, 종이를 펄럭였다. 이래야 종이에 묻은 피가 빨리 굳는다.
 그녀의 이름은 마리 라부아지에, 연금술사이다. 

 연금술사는 금을 만든다는 목적을 이룬 뒤로도, 명맥이 이어지고 있다. 돌멩이를 금으로 만드는 방법 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것을 다른 것으로 바꾸는 방법으로도 그들의 지식이 빛을 발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연금술사들은 대체로 위대한 발명가이기도 하며, 뛰어난 천재들이기 때문에 모두에게 선망과 두려움을 동시에 받는다. 그들 또한 그것을 알기 때문에, 자신감과 고집에 둘러싸여있다, 라고 그녀가 일러주었다.
 하지만 그녀는 다르다. 스스로 말하기를 덜떨어진 반푼이 연금술사. 최초로 금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는, 즉 최초의 연금술사의 피를 이은 '라부아지에' 가문은 대대로 명성이 자자한 연금술사들을 배출해냈다. 아무리 길거리의 무지렁뱅이라도 그 이름을 알 정도로.

 그런 가문에서 태어났음에도 그녀는 별다른 업적을 내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의 연구에 필요한 재료도, 이렇게 애매한 만큼만 사는 것이다.

"에휴, 어쩔 수 없죠. 매일 감사합니다."
"로랑 씨도 매일 감사합니다~!"

 나는 짧게 인사를 하고, 뒤돌아서 다음 목적지로 향한다. 라부아지에 씨는 방긋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시곤, 곧 다시 문을 닫고 집 안으로 들어가신다.

 오늘도 첫 손님이 그녀이니, 하루가 상쾌할 것만 같은 기분이다.




 내가 출근하자 처음 들은 상사의 말은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리였다. 왜냐하면, 언제나 맑은 날이었다고 생각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갑자기 날벼락이 떨어질 거라고, 흐린 날이 될 거라고 누가 생각했을까.

"미안하지만, 우리 사정이 굉장히 좋지 않아졌네. 안타깝지만, 우리도 살아남아야 하지 않겠나. 유감을 표하네."

 나를 포함한 스물 남짓의 우체부가 들었던 말이다. 앞으로도 더 많은 우체부들이 저 말을 듣게 되겠지.
 불행한 일이었다. 어느 한 연금술사님께서, 자신의 역작을 아주 싸게 생산하는 데에 성공했다고 한다. 그래서 다들 그 대단한 역작을 쓰게 되었고, 그것이 널리 퍼지자 마자 우리같은 우체부는 일자리를 잃게 되었다.

"네, 이해합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나는 그 동안 써왔던, 내 개인 옷보다도 더 익숙한 제복을 깔끔하게 우체국에 넣어두고, 무거운 발을 옮겼다. 국장 또한 그다지 좋은 표정은 아니었다. 우리가 해고된 건 단순히 압박 때문이 아니라, 전달한 편지의 양 자체가 엄청나게 줄어서, 우리가 할 일이 없기 때문이니까.
 그래, 전부 다 그 저주받을 물건 때문이다. 전화라니, 대화를 전달해줘서 전화라니! 저건 그런 상냥한 이름 따위로 불려선 안 될 물건이다.
 길거리의 어디를 가도 전화가 보인다. 모두가 전화를 사용하고 있다. 보는 것만으로도 미칠 것 같은 저 끔찍한 전화로부터 도망치고 싶다.

"전화......!!"

 울화가 터졌다. 저 작딸막한 고철 덩어리가 미칠듯이 원망스러웠다. 도망치듯이, 괴물로부터 도망치듯 마구 거리를 내달렸다. 땀 때문에 비 맞은 듯 옷이 젖었고, 나는 나조차도 눈치채지 못한 사이에 내 집에 돌아와 있었다.

"하아, 하아, 하아......!"

 불을 하나도 켜지 않아 어두운 집 안에서, 겨우 나는 다시 생각이라는 이성의 끈의 끝자락이나마 잡을 수 있었다.

"씨발, 어떻게 얻은 직장인데, 씨발......!"

 이 도시에서 백수가 새로운 직업을 구한다는 건 하늘의 별을 따는 거나 마찬가지인 일이었다. 좋게 말하면 영원의 도시, 나쁘게 말하면 변화 없는 지루한 도시에서는, 직업이란 건 부모의 직업을 자식이 이어받는 것이었다. 자식이 다른 일을 하며 살기를 원한다면서 저 멀리 나가버리지 않는 한, 말이다.
 우체부같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조차도, 거의 일 년을 기다려 겨우 따낼 수 있을 정도로, 이 곳에선 해고는 곧 죽음이다.

"씨발......."

 마지막으로 내 입에서 내뱉은 욕설 뒤로는, 어떤 말도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 이젠 서른을 바라보는 내가, 가진 거라고는 배달을 하면서 다져진 체력 뿐인 내가, 이 도시에서 새로운 직업을 얻을 수 있을까? 이성이든 감정이든, 둘 다 절대로 그러지 못할 거라고 머릿속에서 웅성이는 듯 했다. 
 불도 켜지 않은 채로 침대까지 기어가서, 침대에 몸을 뉘이지도 못하고 바닥에 앉은 채로 침대 옆면에 몸을 기대었다. 어제 먹다 남은 술병이 뚜껑만 닫힌 채 침대 옆에 세워져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천천히 술병에 손을 뻗고, 뚜껑을 딴다. 한번 땄던 뚜껑이라 그런지, 온 몸에 힘이 빠져 있어도 쉽게 열렸다. 그 뒤로, 눈 앞이 흐릿해졌다. 머릿속에도 안개가 낀 듯이 무언가 생각하기가 힘들어졌지만, 조금씩 몸이 가벼워지는 기분만은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언제부턴가 눈을 감고 있던 건지도 모르고, 내가 언제부터 침대가 아니라 그 옆에서 앉아서 자던 건지도 모르겠다. 눈을 뜨고 고개를 돌려보려 하자, 미칠듯이 깨질 것만 같은 두통이 덮쳐서 다시 눈이 감겼다. 고개를 살짝 돌린 것만으로도 온 세상이 빙빙 도는 것처럼 느껴졌고, 그만큼이나 내 뱃속도 뒤집어지는 것 같았다.
 도저히 움직이지 못할 것 같아서 다시 눈을 감자, 문을 통통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하, 저게 내가 이 지독한 고통 속에서도 눈을 뜨게 된 이유로구나. 나는 마치 위대한 진리를 깨달은 학자라도 된 듯한 기분으로, 조심스레 몸을 일으켰다.
 문을 향해 다가서자, 다시 한번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내 머릿속을 미친듯이 울렸다. 뱃속에서 역류해 나올려는 무언가를 억눌러 겨우 진정시키고, 천천히 문고리에 손을 얹었다.

"으윽...... 라부아지에 씨?"

 문을 열자 보인 건, 내가 늘 하루를 시작하면 가장 처음 마주하는 얼굴이었다.

"로랑 씨! 아아, 살아계셨군요, 감사합니다! 일주일이나 보이지 않으셔서, 돌아가시기라도 하신 줄 알고......."
"그, 좀 안 좋을 때, 우욱, 오신 것 같은데......."

 속에서 무언가가 자꾸만 자신이 들어왔던 입구를 두드린다. 일어나 서 있는 것만으로도 내장이 거꾸로 비틀리는 기분이다.

"괜찮아요! 반푼이지만 저도 연금술사랍니다!"

 그녀는 품 속을 뒤지더니, 금세 약 한 병을 내게 내밀었다. 붉은 빛을 띤 투명한 약이었다.

"쭉 들이키세요. 한동안 술만 잔뜩 드셨죠?"
"우으윽... 감사합니다, 염치 불구하고, 그럼......."

 나는 별 생각 없이 쭉 받아마셨다. 그녀는 내가 비워버린 약병을 보고선 싱긋 웃더니, 집으로 들어오려는 듯이 발을 내딛었다.

"자, 잠깐만요. 지금 집이 많이 더러워서......"
"괜찮아요. 그럴 생각으로 왔으니까. 어때요, 머리가 싹 맑아졌죠?"
"어, 네에, 정말 감사합니, 아니 틈을 타서 들어오려 하지 마시고......."
"칫."

 틈을 타고서라도 어떻게든 들어오려는 그녀를 겨우 몸으로 막아세우자, 아쉽다는 듯이 혀를 차며 그녀는 다시 몸을 세웠다.

"머리는 완전히 산발이고... 어우, 눈도 퀭하시네. 그거 아세요? 지금 해가 뜬지 벌써 다섯 시간이 넘게 지났어요."
"다, 다섯 시간이요?"

 나는 다급히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해가 거의 하늘 꼭대기에 걸려선, 찬란히 빛나고 있었다. 구름도 별로 보이지 않는 맑은 날씨였다.

"이, 이럴 때가 아닌데, 출근을..."
"잠깐만요! 정신 차리세요. 로랑 씨, 정신 차리세요. 세상에, 이렇게 될 때까지 술을 마신 거예요?"

 평소의 술을 거하게 마시긴 했지만, 이렇게 될 때까지라니 말이 너무 심한 것 아닌가.

"그, 제가 술을 좀 마시긴 했는데, 하루 정도 취해서 뻗은 것 가지고 그러시는 건 좀......."
"하루요? 하루? 로랑 씨는 지금 저랑 얼굴을 마주하는게 일주일 만이란 말이에요!"
"일주일이요? 하하, 농담도..."

 허나 그녀의 얼굴은 전혀 농담이 아니라는 듯이 굳은 채로, 날 똑바로 올려다 보고 있었다. 걱정 어린 화가 그녀의 얼굴에 은은히 퍼져있었다.

"...그런 것 같네요. 후우......."

 울음이 터져나올 것만 같은 기분을 최대한 억누르고, 깊은 한숨만을 내쉬었다. 사람 앞에서 할 짓은 아니었지만, 나는 당장에라도 속을 풀어내지 않으면 터질 것만 같았다.
 술이 확 깨고, 라부아지에 씨와 대화를 하면서 조금씩 기억이 나기 시작했다. 나는 실직 때문에 술을 퍼마셨고, 세상 하직하기 직전까지 미친듯이 술을 마시고 기절하고를 반복했다. 그게 일주일 째일 줄은 몰랐는데.

"후훗, 드디어 기억이 나셨군요."

 그녀는 웃으면서도 살며시 뜬 눈커풀 사이로 나를 바라보는 듯 보였지만, 다시 보니 그녀의 눈은 미소짓고 있는 탓에 뜨이지 않고 있었다. 대체 내가 무슨 착각을 한 건지, 이것도 다 술 탓이다.

"그렇게 빤히 바라보시면 조금 부끄러운데요......."
"아, 죄송합니다. 저도 모르게 그만......."
"괜찮아요. 그럼..."

 머쓱해서 뒷머리를 긁적이는 사이, 그녀는 또 잽싸게 내 옆을 지나 기어코 집 안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보나마나 술병만 잔뜩 쌓여있고, 일주일을 안 씻었으니 악취가 가득할 텐데.

"으아아, 라부아지에 씨!"
"와, 진짜 일주일 내내 술만 드셨나봐요? 그러다 돌아가시면 어떡하시려고 그러셨어요?"
"그, 그것까진..."
"로랑 씨, 슬픈 마음 다 이해해요. 실직하셨죠?"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럴 의도가 없었을 거라는 건 알지만, 마치 명치에 쑥 들어오는 펜싱 칼처럼 그녀의 한 마디가 내 가슴을 깊숙히 찔렀다.

"이런, 실언을 했네요."
"...... 지금 누구 놀리세요?"

 싱글벙글하고 있는 그녀의 모습에, 내 한심함이 겹쳐져 기어코 심한 말이 나와버렸다. 그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그녀가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는데, 어쩐지 나는 그녀의 말에 깊숙히 찔렸고, 나 또한 지금 그녀를 찌르려 하고 있었다.

"실직했죠. 그러니까 일주일 동안 술이나 퍼먹고 있었지. 자기는 그럴 일 없다고 비웃으려고 오셨나요? 귀하신 발걸음 옮기면서?"
"... 로랑 씨."
"연금술사는 확실히 평생 실직할 일은 없으셔서 다행이네요. 저같이 배운 것도 없고, 가진 건 몸밖에 없는 머저리랑은 다르시잖아요."
"로랑 씨."
"아는 것도 많고, 돈도 많고, 술이나 먹으면서 낭비할 시간 말고는 뭐든지 가질 수 있잖아요? 이야, 부러워라."
"로랑 씨!!"

 그녀가 기어코 소리를 질렀고, 나는 입을 멈추었다. 왜 그랬는지, 뒤늦은 후회가 파도처럼 밀려와 내 심장을 덮쳤다. 헝클어진 머리 사이로 보이는 그녀는 눈물을 눈가에 매달고 있었다. 방울진 눈물이 금방이라도 고운 뺨을 타고 흘러내릴 것만 같았다.

"... 죄송합니다."

 비겁하게도 나는 거기에 사과를 하고 말았다. 그녀에게 내 용서를 조용히 강요했다. 사과하면 받아줄 줄 알아야 한다고, 누가 그랬던가. 어릴적에 들었던 얘기지만 참 무책임한 소리란 생각이 들었다.

"조수가, 흑, 조수가 필요해져서, 혹시 다른 직장을 이미 찾으셨는지, 직업이 필요하시면 제 조수라도, 흐끅, 조수라도오... 여쭤볼, 흑, 여쭤보려 했는데에......."

 기어코 나는 그녀를 울리고 말았다. 일주일만에 만난 그녀와의 재회는, 참으로 복잡한 최악이었다. 그녀에게서 나온 말은 내게는 참으로 좋은 기회였다. 그리고 나는 방금, 그 기회를 내 손으로 갈가리 찢어버렸다.

"이젠, 흐끅, 저도 몰라요...!"

 끝내 그녀는 눈물이 흐르는 모습을 내게 보이지 않고, 고개를 돌려 도망치듯이 달려나갔다. 끝내 내게는 약한 모습은 보이지 않겠다고, 그렇게 말하는 것만 같은 그녀의 등이 저 멀리 떠나갔다. 정말이지, 비참한 기분이다.

"......미안합니다."

 들리지는 않겠지만, 나는 가슴에 차오르는 그 말을 입 밖으로 토해냈다. 후회하고, 그러면서도 쫓아갈 용기도 없는 내가 할 수 있는 마지막 행동이었다. 전해지지 않았을 것을 알면서도, 나는 그 말이 전해지기를 감히 바라면서, 다시 짙은 어둠이 드리운 내 집 안으로 몸을 옮겼다.





 이제는 술도 떨어졌고, 다시 술을 가지러 갈 기운 조차 없었다. 어째선지 화끈하게 타오르는 듯한 기분이 드는 눈두덩이를 억지로 감고서, 지난 시간 동안 내내 그랬던 것처럼 침대 옆에 기대어 있었다.

'로랑 씨도 참, 저는 연금술사라고요!'

 그녀가 내 이름을 불러주었던 첫 마디였다. 그래, 나는 그 때부터 일하는 것이 즐겁기 시작했다. 당황스럽게도 사인란에 도장이나 사인을 하는 게 아니라, 망설임 없이 손가락을 그어버리곤 그 피로 지장을 찍었다. 듣도보도 못한 사인에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쳐다보는 내게, 그녀가 그렇게 말했었다.

"......미안합니다......."

 문득 떠올렸던 과거 탓에 더 비참해진 기분이 된 나는, 자연스레 또 말을 뱉어냈다. 무심코 팔을 움찔거리자, 근처에 있던 술병에 팔이 닿았다. 나는 그 술병을 빤히 쳐다보았다.
 온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고, 뭔가를 하고 싶다는 생각은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은 지 오래 되었다. 그럼에도 어째선지 나는 그 술병을 향해 자연스레 고개를 돌렸다. 내 주변에 남은, 딱 하나 뿐인 술이 든 술병이었다. 그렇게 사람을 울리고도, 내 인생이 재기하기는 커녕 점점 더 바닷속으로 가라앉는 걸 알고도, 나는 그 쓰디 쓴 음료에 손을 뻗었다.

"아직도, 술을 못 끊으셨군요."
"그런 셈이죠. 하하, 이게 제 마지막 술이 될 것 같네요."

 나는 내가 한 때나마 관심을 두었던 여자의 목소리에 웃으며 대답했다. 그 목소리가 왜 들렸는 지는 관심도 없었다. 내가 상상했을게 뻔한 목소리니까. 그래서 더 서슴없이 대답했다. 진짜 그녀가 왔더라면, 창피해서 대답은 커녕 고개만 떨구고 있었을 테니까.

"건배~."

 우스꽝스럽게 술병을 치켜세우고, 병의 뚜껑을 빼낸다. 이 방 전체에 지독하게 퍼져 있는 술 냄새 탓에, 병 속에서 흘러나오는 술 냄새는 느끼지도 못했다. 아쉬움에 입맛을 한번 다시고, 그대로 병목을 입에 가져갔다.

"그만, 거기서 병을 기울인다면, 그땐 진짜 끝이에요."

 나는 고개를 돌려보았다. 그곳엔 내가 한 때 호감을 품었던,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이 있었다. 술에 잔뜩 취해있음에도 그녀의 모습은 한 치의 흐트러짐이 없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붉은 기운이 감도는 금발, 주근깨 없이 뽀얀 피부, 머리카락과 반대로 반짝이는 푸른 색의 눈동자. 그리고 그녀가 늘 입고 다니는 특유의 헐렁한 연금술사의 복장. 허리춤에 매인 파우치와 그 끈에 묶여 달랑거리는 유리 시험관들.

"이젠 꿈에서밖에 볼 수 없겠어요. 정말 미안했어요."

 너무나도 현실 같은 환영에게, 나는 진심으로 말을 걸었다. 그리고, 내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보는 것이 그녀라면, 나는 웃으면서 갈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로, 네, 죄송했습니다."

 꼴사납게도 나는 그녀의 그림자에게 마저, 내 머릿속의, 상상 속의 그녀에게 마저 사과 말고는 할 말이 없었다. 이렇게라도 그녀가 사과를 받아주고, 다시 내게 웃어줬으면 하는 바람이었을까.

"정말로 사과를 하고 싶으시다면 그 술병부터, 내려놓으시겠어요."

 짐짓 화가 난 듯한 목소리. 끓어오르는 듯한 분노를 어떻게든 차분히 가라앉히려 애쓰는 그 서리 낀 목소리에, 나는 술병을 가만히 내려놓았다. 내 상상 속의 그녀는 여전히, 나를 봐준다는 사실이 못내 기뻐서.

"도저히 못 봐줄 꼴이네요. 이것부터 드세요."

 그녀는 내게 그 날 봤던 것과 똑같은 약을, 똑같은 양만큼 내게 내밀었다. 다른 점은, 그것 말고도 다른 하나를 더 내밀었다는 것이다.
 정말 실감나는 상상이다. 그녀라면 정말로 그리 했을 것이다. 그리고 나 또한, 그런 그녀의 호의를 마다하지 않는다. 그 때의 실수를 되돌릴 수 있다면, 없던 것으로만 할 수 있다면, 말이다.

"미안합니다. 저는, 이런 걸 받을 자격이 없네요."

 나는 딱딱한 얼굴로 애써 웃어보이며, 손을 휘저어 보이며 그녀의 약을 거절했다. 당신의 호의를 짓밟은 사람에겐, 그런 건 과분하지.
 그녀는 딱딱하게 굳어선, 입술을 깨물며 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녀에게 나는 어떻게 비춰지고 있을까. 지금이야말로 가장 우습게 보이지 않을까.

 그때보다도 더, 비참하게 보이지 않을까. 이런 모습은 보이고 싶지 않았는데. 나는 언제나 그녀의 앞에서, 웃으며 맞이해주는 한 명의 우체부로 남고 싶었는데.

"저는 말이죠, 늘 당신이 저를 보며 웃어줄 때가 기뻤습니다. 그것이 하루의 살아갈 이유이고, 힘이었어요. 제겐 휴일이 더 괴롭고 지루한 나날이었습니다."

 나는 조용히 가슴 속에 묻어놨던 말들을 파내어 늘어놓기 시작했다. 진짜 그녀에겐 들리지 않을 텐데도, 이렇게라도 그녀가 조금이나마 나를 용서해주길 바라서. 그런 이기적인 바람을 담아서 나만의 고해성사를 시작했다.

"연금술사님께선 스스로를 반푼이라 하셨지만, 반푼이면 어떻습니까. 일개 우체부보다는 훨씬 나은 삶을 살고 계실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착각이 당신을 빛나게 만들었고, 저는 그 빛을 좇는 날벌레였습니다. 

 하지만 곧 저는 날개를 잃었습니다. 비루한 몸이나마 먹여살리던 직장을 잃고서 당신을 보았을 때, 저는 견딜 수 없었습니다. 날벌레였던 제가 당신에게 다가갈 수 있었던 건, 오로지 그 작아서 보이지도 않던 그 날개 덕분이었으니까요. 

 그 작은 날개를 잃은 저는, 더더욱 멀리서 희미한 빛이나마 보는 것으로 만족하려 했습니다."

 눈가가 화끈거리는 것이 느껴졌고, 동시에 물기가 차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이 취기 탓인지, 울음기 탓인지, 알 수 없었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런데 당신을 눈 앞에서 보자, 오랫동안 보지 못한 환한 빛이 저를 덮치는 듯 했습니다. 태양이 내리쬐면 눈을 찡그리듯, 저는 그 때의 당신을 밀어내고 말았습니다. 조금만 더 익숙해질 시간이 있었다면, 제가 바라던 빛이었다는 것을 알아채고, 감사했을 텐데 말이죠."

 기나긴 고백이 끝나간다. 그녀는 여전히 나를 굳은 얼굴로 바라볼 뿐, 무언가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그저, 그저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정말, 죄송했습니다. 그것만이 제가 드릴 수 있는 모든 말씀입니다."

 무릎을 꿇지도, 그녀를 바라보지도 않았다. 내 몸은 침대 옆에 기대어 앉아있고, 고개는 바닥을 쳐다보며 내리꽂힐 듯이 기울어 있다. 내 가슴 속에 묻어두었던 모든 감정을, 모든 죄를 파내어 낱낱이 드러내었다. 이젠, 조금이라도 지옥을 피할 수 있겠지.

"...... 저는 용서할 수 없네요."
"네, 이해합니다."
"아뇨, 절대 이해 못하세요. 제가 왜 당신을 용서할 수 없는지."

 그녀는 딱딱한 표정으로 무릎을 꿇고, 내게 눈높이를 맞추었다. 그리곤 그 보드라운 손길로, 내 머리카락을 거칠게 붙잡아선 억지로 고개를 뒤로 젖혔다. 힘이 빠진 몸이 그녀의 손길에 따라 움직이고, 자연스레 벌어진 입으로 그녀의 물약이 흘러들어왔다.

"제게선 빛이 나지 않아요. 당신이 멋대로 그 빛을 봤다고 착각했을 뿐이죠."
"네, 그렇죠."
"근데, 설마 로랑님의 착각이 그것뿐이라고 생각하신 건 아니겠죠?"

 마지막 말을 할 때의 그녀는, 살며시 입꼬리를 올려보이며 내게 잔잔한 미소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 미소는 아름다워 보이면서도 이유 모를 오한을 안겨주었다. 술을 너무 마셔서 몸이 제대로 망가진 탓인지, 아무것도 없는 데도 몸이 절로 덜덜 떨렸다.

"많이 떨고 계시네요. 몇날며칠을 이불도 없이 쓰러져 계셔서 그런 거예요. 이러면, 이것도 드셔야겠네요."

 그녀는 망설임없이 허리에 달린 파우치를 열어, 새로운 약병을 꺼냈다. 마치 그 효과를 알리려는 듯이 밝은 주황색을 띠는 물약은, 먹기만 하면 몸이 한결 따뜻해질 듯 했다.

"그럼, 진심을 들려주셨으니, 지난번의 무례는 용서해드리죠. 사실 별로 화도 안 났어요."
"감사합... 윽!"

 그녀는 다시 한번 거칠게 내 머리를 잡아당겨, 고개를 뒤로 홱 젖혔다. 그리곤 다시 물약병을 입에 꽂아, 약을 입 안으로 들이부었다.

"제 이야기를 한번 해볼게요. 저는 늘 남들에게서 빛을 보았답니다. 환하게 빛나는 그 찬란한 사람들을 수없이 보아왔어요. 

 그런데, 어느날 깨닫고 말았죠. 그건 그들이 빛나는 게 아니라, 다른 빛을 반사시키고 있을 뿐이라는 걸. 그들은 태양도, 불꽃도, 전구도, 하다못해 흔한 반딧불이 조차도 아니었어요. 그저 저 널려있는 술병들 처럼, 환한 빛이 들어오는 걸 비춰보이고 있었을 뿐인 거죠."

 나는 약을 마저 삼키고,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약이 내 몸 안으로 들어가는 건 느껴졌는데, 어째선지 오한은 줄어들지 않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몸의 떨림은 조금씩 잦아들었다. 따뜻한 기운도 몸을 조금씩 덮어갔다.

"그러던 어느날, 미약하지만 그럼에도 자기만의 빛을 내는 자그마한 날벌레 씨를 찾았어요. 그 빛은 제가 낸 빛도, 다른 곳에서 나온 빛도 아니고, 오로지 그 날벌레의 꽁무니에서 나오고 있었죠. 날벌레는 자기 꽁무니를 보지 못했던 것 같지만."

 그녀가 내게 호감을 가져줬단 얘기를, 그녀의 입으로 듣기 전까지는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그렇게나 눈치가 없을 줄은 상상도 못했었는데.

"그래서 저는 반딧불이에겐 그 누구에게보다 상냥하게 대해줬어요. 늘 보고 싶어서 물건을 주문할 때에도 일부러 양을 쪼개서 여러번 주문하고, 다른 그 누구에게도 보여준 적 없던 환한 웃음과 친절함을 보여주었죠.
 그런데 어느날, 반딧불이는 사라졌어요. 칙칙한 딱정벌레가 대신 기어들어왔죠. 저 또한 빛을 좇던 안쓰러운 처지였기에, 자그마한 빛을 찾아서 돌아다녔죠. 다른 벌레에겐 관심도 없었거든요."
"그 반딧불이는, 찾으셨나요."

 자그맣게 물은 질문 한 마디에, 그녀는 언제나처럼 생긋 웃어주었다. 내가 늘 찾던, 햇살처럼 눈부신 그 빛이 내리쬐는 기분이 드는 미소였다.

"그럼요. 연금술사는 고집이 세서, 원하는 건 반드시 찾아내거든요. 겨우 찾은 반딧불이는 자기가 빛을 내는지도 모르고선, 날개를 잃어버렸다며 울더군요. 반딧불이는 빛을 내기만 하면 알아서 짝이 찾아오는 법인데."
"그것 참, 꼴사납네요."
"예, 적어도 귀여운 반딧불이는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네요."

 그녀는 내게 손을 뻗었다. 그리고, 양 볼에 그녀의 양손이 닿았다. 그녀는 엄지로 살며시 내 눈가의 물기를 훑어주었다.

"자아, 어여쁜 반딧불이 씨. 당신도 제게서 빛을 보시고, 저 역시도 당신께 빛을 봤네요. 이젠 제 곁에서 함께 해주시겠어요?"

 그녀는 내 눈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나 역시도 그녀의 눈길을 피하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망설이고 있었다. 술이 다 깨고도 여전히 선명히 보이는 그녀가, 내 고개를 좋을대로 움직이고선 물약도 흘려넣어준 그녀가, 진짜이기를 바라면서도 한편으론 여전히 내 망상에 그치기를 바라고 있었다.
 나는 아직, 그녀에게 용서를 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그녀와 함께할 수 있다면, 다시 없을 과분한 기회일 것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붙잡아야만 한다.

"대답이 늦네요. 단적으로 다시 말씀드리죠. 제 조수가 되어주시겠어요? 이번엔 대답이 늦어도 기다려드리지 않을 거예요."
"저라도 괜찮으시다면, 부디."
"얼마든지 환영이예요. 제 작은 반딧불이 씨."

 그녀는 환하게 웃으며, 나를 꼭 끌어안았다. 무릎을 꿇고서 나를 끌어안은 그녀의 품은, 너무나도 따스하고 마음을 벅차오르게 해주었다. 마치 태양빛이 내리쬐는 초원에 드러눕자, 대지가 나를 안아주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렇게 대답해주실 거라 믿었어요. 그렇지 않았더라면, 정말 망가질 지도 몰랐거든요."
"하하...... 과분한 관심이세요."

 정말이지 따스하고도 강렬한 빛이라, 나는 감히 그녀를 똑바로 쳐다볼 수 없었다. 몸이 전부 타지는 않더라도, 그녀를 바라보는 눈 만큼은 다시 뜰 수 없게 될 것처럼 밝고 강렬한 빛을, 나는 피할 수 밖에 없었다.

"로랑 씨, 이젠 저희 집에서 지내실 거죠?"
"네? 무슨 말씀을?"

 정말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말하자, 그녀는 나를 껴안은 팔의 힘을 더 강하게 주었다. 가녀린 그녀의 팔에서 나오는 힘이라기엔 너무나 강력해서, 잠깐이지만 갈비뼈가 부러질 지도 모른다는 착각이 들었다.

"로랑 씨, 연금술사와 과학자의 차이가 뭔지 아세요?"
"으으, 그, 라부아지에 씨, 제가 조금 아파서 그런데, 조금만 힘을 빼주시겠어요?"
"과학자는 이미 존재하는 세상의 규칙들을 밝혀내고, 이용하죠. 그 과정에서 인간들에게 유리한 규칙만을 취사선택할 뿐, 규칙 자체는 건드리지 못해요. 

 오히려 불리한 규칙이 있는 데에도 불구하고 이득을 위해 손해를 감수하고 규칙을 이용하는 경우가 더 많아요."

 그녀는 내 말을 무시하고 여전히 나를 꽉 껴안은 채로, 내 어깨와 목덜미 사이에 고개를 파묻은 상태로 말을 이어나갔다.

"연금술사는, 존재하지 않는 규칙을 세상에 만들어 씌워내요. 실력만 받쳐준다면 과학자들을 단 하루만에 전부 바보 천치로 만들 수 있죠. 그런 연금술사는 이 세상엔 단 한 명 뿐이지만."
"라, 라부아지에 씨...?"

 그녀는 조용히,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들어올렸다. 나 또한 그녀와 고개를 마주보려 했으나, 공간이 모자라 겨우 눈만 그녀를 향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내가 아까부터 느끼던 몸의 떨림은, 그 어느 때 보다도 강렬하게 내 온몸을 지배하게 되었다.

"로랑 씨, 당신은 운이 없게도 이 시대 최고의 연금술사의 눈에 들고 말았네요."

 라부아지에 씨가 말을 끝낸 순간, 갑작스럽게 온 몸에 힘이 풀려 축 늘어졌다. 분명 나는 힘을 주려고 애를 쓰고 있는데, 실이 끊어진 듯 몸이 끊어져선 움직이려고 하질 않는다. 단지, 그럼에도 그녀의 체온과 향기는 오히려 더 선명하게 느껴진다.

"자, 다신 의문 따위 품지 못하게 해드릴게요. 저만의 사랑스런 반딧불이 씨. 영원히 저만의 벌레장 속에서, 꺼지지 않는 빛을 보여주세요."

 그녀의 말이 머릿속에서 울리는 것만 같이, 몇 번이고 뇌리를 맴돌았다. 이제는 마지막으로 버티던 눈커풀마저 내 통제를 벗어나, 힘없이 떨어져 시야를 가렸다. 그것을 마지막으로, 내 기억은 끊어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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얀챈 첫 글인데 재밌게 볼 수 있는 글이라면 좋겠다.


얀순이 시점: https://arca.live/b/yandere/108934696?p=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