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글 모음

"그렇게 저는 성녀의 육체를 빌려 이 땅에 내려온 것이랍니다."


"......"


용사의 반응이 미묘하다. 괴상한 소리를 들었다는 듯한 표정.


큼직한 사건들을 해결한 뒤 큰맘먹고 고백한 이야기.

그래도 이 세상에서 가장 마음을 터놓을 수 있을만한 친구라고 생각해서 기껏 얘기했건만.


시뮬레이션으로 만든 세계가 돌아가는걸 보고싶어서 먹고자는것도 잊은채로 프로그래밍하다 과로사했다-는걸 이쪽 세상에 맞게 끼워맞춰서 말해줬는데.

내가 생각해도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생각하지만 살짝 서운한 감정이 드는 것은 어쩔수없다.

내 말은 뭐든 찰떡같이 믿어주던 용사도 믿기 힘든 소리라는 걸까.


"역시 믿지 못하겠나요...?"


"아니, 믿고 말고가 아니고 하아-. 솔직히 말하자면 믿기 어려운 얘기도 맞는데, 그게 지금 아...."


횡설수설 하던 용사는 이내 깊은 탄식과 함께 양손으로 마른 세수를 한다.


"...끝나고 고백할 거리가 있다길래 왔더니."


"네?"


"아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럼 성녀님...?의 말씀대로라면 지금 몸에 창조신께서 강림해 계신다는 말씀인지?"


"아! 아뇨, 이 육체는 처음부터 제가 사용하기 위해 만든것이라서. 본래 인격이 있는 몸에 빙의한거나 일시적인게 아니라 처음부터 제가 움직이고 있던거랍니다. 프레이아- 폴른- 크리에타 라는 제 이름도 그런 의미가 담긴 이름이에요."


"아... 예."


쓰러지기 직전, 이세계 전생을 직감한 내가 마지막 힘을 다해 집어넣은 이름뿐인 객체. 

[NAME: player_fallen_creator_human0000.dll]

혹시 몰라서 시도했던 것이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신의 한수가 아닐 수 없다.

내가 만든 세상을 구경만 하는게 아니라 직접 어울리며 느낄 수 있다니. 처음엔 매순간순간이 행복했었지.


.

.

.


정말이지 사람 속도 모르고.


용사는 또 신나서 떠들기 시작하는 성녀를 바라보다 또 다시 차오르는 갑갑함에 몇번째인지 모를 한숨을 내쉰다.


평소에도 4차원적인 면모가 있긴했지만. 자신이 창조신이고 세상의 모든것을 만들었으며 너무 몰입한 나머지 몸을 돌보는것도 잊고있다 힘이 다해 쓰러졌다니.

아무리 성녀라지만 누가 들었다면 이단이라고 경을 칠 노릇이다.


......

하지만 그동안의 성녀의 태도를 생각해보면 마냥 거짓말이라고는 생각되지 않기도 했다.


성녀는 세상을 너무나도 사랑했다. 박애주의자라는 말로도 부족할 정도로.


성녀는 어린이나 동식물은 물론, 질 나쁜 양아치나 흉악범들을 보아도 안타까워할 뿐 혐오한다거나 거부하는 기색을 찾아 볼 수 없었다. 심지어 마족들까지도. 오히려 죄책감마저 느끼는 듯 했다.

자연환경이나 돌멩이 같은 무생물들을 볼때도 종종 어린아이처럼 기뻐하기도 했다.


그동안은 괜히 성녀가 아니라고, 성녀란 원래 이런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녀가 주장대로 자신이 창조한 피조물들이라면 그럴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범죄자나 마족들도 그렇다.

아무리 나쁜짓을 저질러도 자기 자식을 미워할 만한 이가 얼마나 있겠는가. 심지어 그들이 그렇게 되는것이 자신이 마련해둔 운명이라면?

세상에 선한 이 만이 존재할 순 없다. 어쩔수 없이 어두운 그늘로 존재할 수 밖에 없는 이들을 자신의 손으로 만들었다면 죄책감을 느낄 법 하다.

그러고보면 그때도......


터무니 없는 말이라고 생각했던 말들에 설득력이 생기기 시작하자 용사의 얼굴이 심각해진다.


한창 신나서 떠들던 성녀는 용사의 기색이 이상한 것을 눈치채고 다가온다.

성녀가 얘기를 멈추고 다가온 것도 모르는 채로 인상을 쓰고 있는 용사.

안색도 먼가 칙칙하고, 열이라도 있는게 아닌지 손을 뻗는다.


챡-


"!?"

"아."


이마에 느껴지는 갑작스러운 냉기에 화들짝 놀란 용사가 물러선다.

성녀가 코앞에 있다. 어느새?


눈앞에는 새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

안그래도 큰 눈망울이 놀라 더 커진 성녀가 콧김이 닿는 착각이 들 정도의 거리까지 와있다. 


자신을 살짝 올려다 보는 키.

어깨를 타고 흐르는 윤기나는 흑단. 

빛을 받아 반짝이는 피부의 솜털.

톡 튀어나온 앙증맞은 코.

그 아래에 존재감을 나타내는 분홍 빛의...


성녀의 입술이 오물거린다.


"괜찮으세요? 안색이 안좋길래."


"아."


화끈하게 오르는 열감을 애써 무시하며 묻는다.



"그,창조주님...? 이라고 부르면 되겠습니까?"


"그냥 부르던 대로 불러도 괜찮아요. 프레이아나 폴른이라고 불러도 좋구요."


"그럼 프레이아님."


"네 용사님."


꼴깍


"말씀대로라면 프레이아님의 모든이에게 보내는 무한한 애정도 이해가 갑니다. 자신이 좋아서 만든 것들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리가 없지요."


"믿어주시는 건가요!?"


확 밝아지는 표정, 다가온 프레이아의 얼굴에 용사는 한순간 표정이 무너질 뻔 했지만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질문을 이어간다.


"이 세상의 모든것을 창조하셨다고 하셨죠."


"네. 정말 힘들었어요. 다 좋아서 한 일이었지만."


"그렇다면 다른이들이 프레이아님에게 보내는 애정도... 제가 성녀님에게 느끼는 이 감정도 전부 말이 되는군요."


"......네?"


......?


"일방적인 사랑보다는 자신도 돌려받고 싶으셨던 것이겠죠."


"????"


"자신의 피조물들에게 사랑받기 쉬운, 그런 식으로 설계를 하신게 아닙니까? 제가 성녀님을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옥죄어 오고 얼굴을 보면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짓도록!"


"네? 네!?"


"그게 아니라면 어찌 여성이 여성을 사랑할 수 있단 말입니까!"


새빨개진 채로 소리치는 용사와 당황해서 마구 흔들리는 성녀의 눈동자.

둘 사이엔 용사가 숨을 고르는 소리 밖에 들리지 않는다.


허억 허억...


억겁과도 같은 침묵속에 




용사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떨궜던 성녀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정적을 깬다.



"그,그런 기능...은, 없는 데요......시간이 없어가지고... 이름도 겨우..."


중얼중얼


가지런히 배꼽앞에 모은 두 손을 꿈지럭 거리던 성녀가 용사를 살짝 쳐다본다.

검은 폭포수 사이에 튀어나온 귀가 터질것 같이 달아올라 있다.


"저... 용사님은 저를, 그런식으로 보고 계셨나요..."


"......"


망했다.


하지만 성대하게 자폭하고 나니 오히려 머리가 냉정해진다.

그리고 확신도 생겼다.

성녀는 그 어떤 이들이라도 사랑한다, 그렇다면.


"그으... 용사님?"

"프레이아님."


"네, 네헷!"


눈치를 살피던 성녀는 단호한 용사의 부름에 하마터면 혀를 깨물뻔 했다.


"창조주와 피조물사이의 관계는 마치 부모와 자식과도 같다고 생각합니다."


"음, 비슷한 구석이 있긴하지,요?"


"그렇다면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의 사랑은 당연한 것이군요."


"네? 아니 그야 그렇지만."


"그렇다면 당신이 창조주라면 피조물인 저로서는 당신을 사랑할 수 밖에 없군요."


"그,그건! 아니 비유가 이상하잖아요! 부모와 자식이라면서 윤리적으로오옷!!"


성큼 다가온 용사에게 손목을 덥썩 잡힌 성녀의 목소리가 성대하게 이탈한다.


"당신도 저를 사랑해주시고 저도 당신을 사랑한다면. 문제될 건 없군요."


"잠깐만요! 잠깐만요! 그건 어디까지나 부모! 부모로서 자식을 바라보는, 부성! 아니 모성!같은거니까요!"


"저는 성녀님의 자식이 아닙니다만."


"용사님이 한 비유잖아요! 아니 잠깐만! 아아아! 얼굴 들이밀지 마시고!"


성녀의 머리가 핑핑 돈다. 

용사의 팔에 허리를 붙들리고 앞은 탄탄한 복근과 적당히 보기좋게 부푼 언덕이 자신을 짓누른다.

태양과 같은 체향이 확 풍겨온다.


용사는 새 이불을 만끽하듯 머리칼에 코를 박고는 살짝 비비다가 입을 연다.

성녀는 말소리와 함께 정수리 부근에서 진동을 느낀다.


"오히려 안심했습니다. 저의 이 감정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순전히 저의 것이었다는 것에, 그리고 당신도 저를 거부하지 않을것이라는 것에."


"아...!"


정수리에 있던 용사의 머리는 서서히 내려와 목덜미로


"그러니까 프레이아."


"저! 저! 여기 오기전에 남자였어요!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여자가 아니에요!"


아래로 내려가려는 용사의 머리가 내려가지 않게 다급하게 손으로 볼을 잡고 소리쳐보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는다.

오히려 무슨소리를 하는거냐는 듯한 얼굴로


"원래 사랑은 남성과 여성이 하는것이 일반적입니다만."

"어라?그렇.. 아아아앗!!!"




물끓이러 가야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