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글 모음

"저질렀다..."


망했다. 완전히 망했어.


아무리 귀엽다 해도, 그대로 집까지 데려올 줄이야.


이만큼의 작은 아이가 낯선 집에서 깬다면 얼마나 무서울까.


어쩌면 이 상황, 납치범으로 오해받아 감옥에 갈 수도 있는 게?


'늦기 전에 경찰이라도 불러야...'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그러고는 소녀의 동태를 힐끔 살폈다.


슬프게도 이미 소녀의 몸은 꼼지락대며 움직이는 상태.


숨막힐듯한 정적 속, 소녀가 눈을 떴다.


"으에...?"


***


낯선 천장이다.


분명 나는 밖에서 쓰러졌을텐데.


여긴 어디지? 설마 죽은 건가? 천국?


멍하니 상황을 되짚다가, 발바닥에 난 상처가 욱신거렸다.


"아으윽!"


그 뿐만이 아니다. 


추위속에 메말라 갈라진 피부.


아직도 부르르 떨리는 몸.


어렴풋이 느껴지던 죽는다는 공포감에 몸을 끌어안았다.


덜덜 떠는 도중, 옆에서 들려오는 사람의 목소리.


"아, 일어났다..."


내 모습을 보며 멍한 표정을 짓는 여자.


분명 저 실루엣은 쓰러지기 직전 보았던 환상이었다.


그렇다는 건, 저 여자가 날 구해준 것일까?


평생 본 적도 없는 나를?


그 순간 기분이 화악 달아올랐다.


마치 활활 타들어가는 불꽃을 체내에 위치시킨 것처럼.


볼이 달아오르며 따스함이 곳곳으로 퍼진다.


이 여자구나. 날 구해 준 운명의 사람이.


여자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 만으로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그, 오해야! 일단은 언니 말부터 한 번..."


"고마워요! 헤헤..."


힘없이 쓰러진 날 옮겨준 사람.


굳이 자신의 소중한 삶을 쓰며 돌멩이만도 못한 목숨을 구해준 사람.


사소한 생명에도 사랑을 주며 아껴주는 사람.


생명의 은인에게 감사인사를 남겼다.


무슨 말을 한 것도 같았지만, 그다지 중요하지는 않았다.


"으, 으응? 고맙다고...?"


여자는 몸을 웅크리고는 자신의 얼굴을 숨기며 방어자세를 취했다.


마치 이 상황의 주인공이 자신이라는 것을 부인하듯.


"네! 구해준 거죠? 바닥에 쓰러져서 얼어죽을 뻔한 저를 지켜주신 거죠? 고마워요. 너무너무 고마워요!"


분명 여자는 부끄러운 거겠지.


봐. 지금도 볼을 약간 붉히고 있잖아.


적어도 내게 품은 감정이 긍정적이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그렇지? 나도 네가 걱정됐으니까."


"그렇죠? 그렇죠? 제가 신경쓰여서 어쩔 수 없이 데려온 거겠죠?"


여자는 내가 얼굴을 들이밀수록 시선을 피했다.


자신이 데려와 놓고도 마주 보지 못한다는 것.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단 하나.


'이 여자는, 날 좋아하는 게 분명해. 날 아껴주려는 거야. 살려주기 위해 굳이 굳이 찾아와서 사랑을 주려는 거야.'


관심이 없는 존재였다면 구하지도 않았겠지.


눈동자를 흘끔흘끔 옮기며 날 살피는 것도 사랑의 증거이다.


이전의 나는 이 세상을 더럽힐 만큼의 보잘 것 없는 존재였다.


그런 내가, 갑작스레 낯선 여자의 마음에 든 이유가 뭘까.


아이러니하게도 날 죽인 이 외모는, 날 살려주는 장치가 되었다.


그나마 잘났다 자부할 수 있는 것이 외형이다.


남자였던 나에 비해 나은 것은 귀여운 외모뿐.


만일 이 여자가 평소 작고 귀여운 여자를 좋아하는 특이성벽이라면, 나는 그것에 맞추어주어야 했다.


'사랑받지 못하면 죽어버리는 걸.'


무조건의 사랑은 달콤한 마약과 같다.


물론 나 스스로도 내가 비정상이라는 것은 안다.


그렇기에 한 가정을 붕괴시키고도 뻔뻔하게 살아가는 거겠지.


그럼에도 나는 살고 싶다.


자신이 행복해지고 싶다는 이기적 소망 정도는 누구나 꿈꿀 수 있는 거잖아.


"아... 아. 일단 제 이름은!"


먼저 활기차게 말을 이어갈 생각이었다.


그야, 혼자 뚱해져 있는 사람보다는 붙임성 있는 사람이 더 취향일 확률이 높을 테니까.


"아, 그, 그러니까..."


그러나 곧 말문이 막혔다.


이미 기존의 자신마저 잃어버린 내가, 부모가 지어준 이름을 사용해도 되는 걸까.


싫어. 이제 그 이름으로 불리는 건 싫어. 새로운 이름이 필요해.


하지만 막상 떠오르는 이름은 없었다.


"떠올리기 힘들면 언니부터 말할게."


버벅거리다 고개를 끄덕였다.


이대로 시간만 끌었다간 미움만 사게 되겠지.


왠지 음침하고 둔한 애라며 버려질 지도 몰랐다.


"언니 이름은 이서현이라고 해. 올해로 스물 세 살이고, 대학생이야. 적당히 서현이 언니라고 불러도 돼."


이름마저도 아름다웠다.


나같은 것과는 궤를 달리 할 법한 이미지.


문득, 내가 같은 공간에 있는 것이 죄스럽게 느껴졌다.


"아으으..."


순식간에 가라앉은 마음.


여자도 내게 이름을 말해 주었는데.


내가 대답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고서, 자신을 속인다고 느끼진 않을까?


"네 이름은 뭐라고 해?"


생글생글 웃는 얼굴이 뇌리에 파고든다.


직접적으로 뇌를 만지작거리듯 찌릿거리는 정체불명의 기분좋음.


"없어요! 언니가 지어줄래요?"


"내가? 그래도 될까? 부모님이 지어주신 이름은?"


"없다니까요! 그렇게 배려해주지 않아도 돼요. 언니가 좋아요. 언니가 지어주는 이름이 좋아. 안돼요? 네? 저 싫어하는 거 아니죠...?"


불안감이 닥쳤다.


설마 내가 부담스러워 피하려는 것일까?


안돼. 그것만은 안돼.


여기서마저 버림받으면 난 더 살아갈 자신이 없는걸.


"아, 아니야. 으음... 설화는 어때? 눈처럼 하얗고 이쁘기도 하고. 꽃밭에 쓰러져 있었으니까."


"설화...요? 그런 예쁜 이름을 제가 써도 되는 걸까요? 꽃들이나 눈들한테 민폐에요... 그런 이름은 어울리지..."


"어울려! 설화는 내 눈에 충분히 예쁜걸."


뇌가 녹아버릴 듯한 행복감이 퍼진다.


예쁘다고 했다. 굳이 부정하는 내 말을 부정해주면서까지.


***


더는 들어줄 수가 없어 설화의 말을 끊고는 반박했다.


너무 큰 소리를 친 것은 아닐까?


갑자기 마음속에 걱정이 닥친다.


그러나, 다행히도 설화는 만족스러운 듯 헤실거렸다.


"헤헤. 언니, 저 한 번만 안아주시면 안 돼요?"


설화는 어느새 순진한 모습으로 돌아와 팔을 벌렸다.


분명 그동안 사람의 품이 그리웠던 것이겠지.


'이름이 없다고 했었지? 부모님이 안 계시는 걸까.'


실언을 뱉었을 때, 설화의 얼굴은 명백히 초조함으로 물들었다.


어째서 그런 걸 묻냐고 따지는 듯한 눈매였지.


'어쩌면 친척 집 같은 데서 도망쳤을 가능성도...'


제대로 된 시설에서 보호받았다면 굳이 저렇게 목숨을 걸고 쓰러져 있지 않았겠지.


작은 소녀가 따스함을 포기한 채 낯선 여자에게 이렇게까지 매달릴 이유가 없다.


단순히 생각한다면 경찰에 신고하는 것이 맞겠지만...


그러기엔 설화의 홱홱 변하는 태도가 마음에 걸렸다.


'처음엔 활발하다 싶더니, 갑자기 침울해하다 또 목소리를 높이니까.모르겠어.'


알 수 있는 것은 설화가 무언가 사정이 있다는 것뿐.


심리적으로 꽤나 불안정한 상태임은 확실해 보였다.


'특히나 계속 그 단어를 강조하듯이...'


사랑. 좋아/싫어의 단순한 이분법적 분류로 계속 이야기했다.


심지어 자신의 목숨은 가치가 없다는 듯이 주변의 모든 것을 치켜세우며 말했다.


'제대로 된 사랑을 받지 못한...'


나로서는 그 마음을 이해해 줄 수 없다.


그야, 나는 멀쩡한 가정에서 사랑을 독차지하며 살아왔으니까.


오히려 아직까지도 아빠의 과보호를 받는 입장인 만큼 설화가 어떤 마음인지는 모른다.


그래도... 아니, 그렇기에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을 해 주기로 마음먹었다.


이 소녀가 법의 사각에서 동떨어져 상처받고 있다면, 치유해주자.


애정을 갈구해 울고 있다면, 따스하게 안아주자.


지켜줄 누군가를 원한다면, 내가 방패가 되어주자.


"이리와."


"흐히히."


설화는 자그맣고 말랑말랑해 안는 감촉도 좋았다.


거대 슬라임을 만지작거리듯 중독되는 느낌.


설화도 기분이 좋은지 고개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숨소리를 흘렸다.


'저 미소를 떠나지 않게 지켜주고 싶어.'


단순한 흥미본위일지도 모른다.


설화에 대해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손을 뻗는 것은 실례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지루함뿐인 세상에 특별함을 주는 존재.


그런 소녀를, 놓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니는, 저를 사랑해 줄 거예요?"


"응. 사랑해. 설화는 내가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줄게. 평생 내 곁에서 떠나보내지 않을 거야."


"그, 그럼 그럼! 나쁜 사람들이 막 설화를 데려가려 하면요...? 경찰들이라거나!"


"경찰들이 나쁜 사람들이야? 왜 그렇게 생각해?"


"절 정신병원으로 끌고가려 했어요... 이제 괜찮다고, 다 이해한다고 하면서...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주제에..."


설화의 얼굴이 다시 분노로 물든다.


생각하기조차 싫은 기억이 떠오른 듯 이빨을 빠득거렸다.


아무리 봐도 이만한 소녀가 지을 표정은 아니다.


반응을 보니 강제성이 있었음은 확실하다.


실적을 채우기 위해 강제로 병원에 끌고 가려 하다니, 인간이 할 짓이 아니었다.


"...지켜줄게. 누가 데려가려고 하면 언니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 줄게. 설화는 언니 거니까. 누구도 손대지 못하게 할게."


"정말이죠...? 제가 어떻게 되어도, 계속 사랑해주고 지켜줄 거죠? 언니, 서현이 언니... 사랑하는 언니..."


스스로의 환시에 주춤했다.


순간 설화의 동공이 하트모양으로 바뀐 것 같았다.


'뭔가 무서운데...'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위화감이 심장을 매만졌다.


다시 눈을 감았다 뜨자, 환하게 웃으며 날 바라보는 설화의 모습만이 보일 뿐이다.


'착각...이겠지?'


정체모를 공포심을 뒤로했다.


그 감각을 잊기 위해 설화의 등을 더욱 강하게 당겨 안아주었다.


"...사랑해."




써도 써도 뭔가 아니다 싶어서 갈아엎기만 3트째.


챌린지 어쩌지. 일단 이것도 지금은 괜찮아 보이는데 내일 일어나도 괜찮아 보이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