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글 모음

해당 시나리오는 발매가 무산된 게임, "말기 소녀병"의 홍보용 소책자에 수록된 시나리오 일부의 번역본입니다.

자살을 위한 101가지 방법의 한글화가 기술적 문제로 계속 딜레이되고 있는 까닭에 자살 101 한글화 내부에 포함하기로 한 말기 소녀병의 번역본만이라도 이렇게 먼저 공개합니다...


번역해주신 @Rinoass 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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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자동차는 세계의 끝을 향한다


차에서 흘러나오는 라디오 속 남자가 말한다.


 「올겨울 유행하는 색은 파란색입니다」


 그 화제는 내 마음을 기묘한 방향으로 미끄러지게 한다. 불안정한 어딘가로 데려간다.

유리창 너머는 섭씨 34도의 세계에, 겨울의 도래는 아코디언 모양으로 접힌 열기 저 너머에 있는. 여름.

완벽한 여름이 거기에 있다. 상징으로서의 여름도, 형이상적으로서의 여름도, 시적인 비유로서의 여름도 아니다. 현실적이고 심플한 여름. 액셀을 밟으면 시속 90km 뒤로 흘러가는 여름.

그래도 라디오 속 남자는 예언한다.


「올겨울 유행하는 색은 파란색입니다」.


이런 참.

난 생각한다.

우리를 둘러싼 많은 것들이 대부분 그러하듯(혹은 우리 자체가 그러하듯) 곧 다가올 겨울의 유행하는 색깔 또한 정해져 있구나.


「올겨울 유행하는 색은 파란색입니다」.


그건 정확히 말하자면 예언이 아니라 예정인 것이다.

핸들을 손가락으로 두들기면서──툭 툭 툭──개인적 영위와 절대적 운명의 상극에 대해 생각한다. 그 혹독한 경쟁 속에서 내가 그에 어울리는 자아를 얻을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생각한다. 물론 잠깐만이다.

담배 한 대 피울 시간. 그 이상 생각해 봤자 다다를 수 있는 곳은 정해져 있다. 왜냐하면 모든 건 예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겨울에 유행하는 색처럼 정해져 있다.

오케이.

제군, 록을 하지 않겠는가.

자동차 라디오를 튼다.

아나운서 목소리가 잡음에 섞이고 대신 기타의 음색이 밤안개처럼 스피커에서 흘러나온다. 아주 옛날 민중가요. 록이라고 부르기엔 너무 포크스러운데.

뭐 아무렴 됐나, 라고 난 생각한다.

뭐 아무렴 됐어. 자아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거에 비하면야 상당히 건강하고 드라이브적이야. 예스. 모든 건 비교의 문제야. 뭐가 더 나은가? 뭘 더 오랫동안 참을 수 있는가? 토사물과 배설물 중 어느 쪽이 더 시적인가 하는 의미에서 그건 무의미하고 한정된 선택인 것이다.

무의미하고 / 한정된 / 선택. 툭 / 툭 / 툭.


  라일리・R을 죽인 건 누구야?

  왜, 어째서지?

  15명의 기술자가 나에게 말한다


  「알겠어? 양 딜런

  인생은 언덕길에서 일어나는 사고 같은 거야

  통제할 수 없는 비극의 연속 속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너무나도 적어

  그렇다면 있지 양 딜런

  라일리・R은 로스트 하이웨이로 갈 수밖에 없다는 거야」


 현실적인 내 세계에 대한 인포메이션.


F현 I시. 도쿄에서 차로 3시간. 우리(그러니까 나랑 내 차)는 시속 90킬로미터로 고속도로를 이동하고 있다. 쭉 뻗은 하이웨이. 칼 루이스가 전력을 다해 라인을 달렸던 것처럼 쭉. 보이는 한 치 앞 다른 차의 모습은 없다. 우리 전용 잃어버린 하이웨이다.

하이웨이의 양쪽엔 홀로코스트를 방불케 하는 황야가 펼쳐져 있다. 모든 게 희뿌연 자갈로 덮여 있다. 논밭은커녕 나무도 풀도 없다. 신호등도, 민가도, 편의점도, 이상한 교통 표어 간판도 없다.

──이거 봐, 양 딜런. 교통 표어 간판조차 없다니까?

『꽉 조이는 / 몸과 마음의 / 안전벨트』.

지극히 완벽에 가까운 형태의 무의미. 그리고 여기엔 그런 무의미조차 없다. 100퍼센트의 황야.

30분 전에 버려진 원자력 발전 시설 옆을 지나갔다.

폐쇄된 지 꽤 오래됐겠지. 일찍이 시설이 안고 있었을 터인 엄청난 에너지는 빨아버린 청바지처럼 표백되어 버렸다. 그건 거대한 동물의 사체를 생각나게 했다. 힘겨운 숨을 한 번 내쉬고, 다음 순간 어이없게 죽어버린 생물. 그리고 그건 시체적인 동시에 묘비적이기도 했다.

울적한 광경이었다. 세계에 움직임이란 없고, 평평한 균일성 위에 여름만 가득했다. 시간조차 죽어버린 것 같았다. 모든 게 몸을 굳히고, 숨죽이고 있었다. 하늘은 잿빛으로 어둡고 검은 구름이 엄청난 기세로 이쪽저쪽 흘러가고 있었다.


  근사하고 멋진 로스트 하이웨이

  헤이 미친 거위한테 달려들어

  근사하고 멋진 로스트 하이웨이

  헤이 멋진 핸들을 잡는 거야


 ──세계의 끝.

나는 그런 말을 생각한다. 혀에 얹어, 목소리로 바꿔본다.


「세계의 끝」


 나쁘지 않다.

 그건 시속 90km로 여름을 지나가는 내 차 안에서, 멋지게 울려 퍼진다.

리리컬하다.

시적으로 리리컬하고, 불량 식품처럼 팝하다.

LYRICAL하고 POP 한 WORLD'S END──.


「세계의 끝」


 하지만 한 번 더 입 밖으로 꺼내 버리자, 그건 더 이상 조금도 리리컬도 팝도 아니게 돼버렸다. 마법은 사라져 버렸다. 그저 김빠지고, 허망할 뿐이었다.

 어째서일까?

물론──나는 알고 있다──세계의 끝 같은 건 사실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다다른 순간, 세계의 끝은 사실적인 프런티어로 변신한다. 우린 거기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 시점에서 이미 거긴 『여기가 아닌 어딘가』──세계의 끝이 아니게 돼버린 것이다. 우리가 도착할 때마다 세계의 끝에선 세계의 끝의 기질이라고 불러야 할 신비가 사라진다. 한 걸음 앞으로 나가면 그 한 걸음 더 앞으로. 뻗은 손 바로 앞에 있는데도, 절대 잡을 수 없다.

혹은 우리 자신이 정점 없는 세계의 끝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앞으로 나아간다. 세계의 끝도 다시 앞으로 나아간다. 거북이를 이기지 못하는 아킬레스처럼, 우리는 세계의 끝에 도달할 수 없다. 그것은 즉, 우리는 우리 자신을 잡을 수 없고, 우리 자신으로부터 도망칠 수도 없다는 거겠지.

컬링처럼 시크하고, 철인 3종 경기처럼 하드한.

즉 현실적이라는 거다.

이런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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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카르마오토시(カルマ落とし)

 - 해석하면 "업보 해소", "영혼 정화"란 뜻.


「오차노미즈라는 동네를 좋아했어요.

조금 발걸음을 옮기면 아키하바라라던가 고라쿠엔 유원지라던가 있어서 떠들썩하지만, 저는 오차노미즈의 조용함이 좋았거든요.

특별히 특징이 있는 동네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요, 큰길가에서 좀 안쪽으로 가면 사람이 많은 곳──니콜라이 성당이라던가. 그 주변 공기를 좋아했거든요. 세련된 시골이라고 해야 하나, 촌스러운 도시라고 해야 하나. 비교적 꽤 초록색이 남아 있거든요. 아, 이런 말 안 해도 잘 아시겠죠, 도쿄에 살고 계시니까요.

어느 동네든간에 그 동네에서만 느껴지는 공기 같은 게 있잖아요. 그 공기가 사람마다 맞기도 하고 안 맞기도 하고 그렇죠?

오차노미즈에서는 공기가 맞았던 거예요. 그러고 보니까, 친구랑 『동네 색』에 대해 얘기한 적이 있었거든요. 동네마다 고유의 이미지 컬러가 있지 않아? 라고요. 이케부쿠로는 파랑, 아키하바라는 빨강──어째서였을까요? 빨간 네온사인이 많아서인가? 아하하...... 어지간하면 의견이 맞지 않았지만 「오차노미즈는 초록」이라는 의견은 어째 딱 맞았지 뭐예요. 갑자기 그게 생각나네요.


그 근처는──JR 스이도바시역 주변은 특히──언덕이 워낙 많아서 자전거가 별 쓸모가 없었거든요. 그래서 오토바이 면허를 땄어요. 대학교 1학년 여름방학이 됐고, 행동 범위가 넓어졌죠. 이것만 있으면 어디든 갈 수 있고요──. 괜히 주변을 막 돌아다니고는 했죠. 날이 더워지면 서점에 들어갔어요. 책을 읽으면서 땀이 식기를 기다리고......

 책은 그다지 많이 읽는 편은 아니에요. 베스트셀러라던가, 잡지라던가, 그런 거나 가끔 읽지.

죄송합니다.


 도쿄의 밤은 무덤 같잖아요.

낮에는 그렇게나 시끌벅적하고 사람으로 가득한데 밤이 되면 아무도 없어요. 그게 마치 축제 끝난 삭막한 풍경 같아서 싫더라고요. 슬픈 기분이 드니까. 신주쿠에서 술자리 때문에 막차를 놓쳐서 집까지 걸어온 적이 있었는데──되게 슬펐어요. 슬퍼서 울고 싶을 정도였어요. 핵전쟁 이후 세계에서 혼자만 살아남아 버린 것처럼 슬펐어요. 편의점은 열려 있었더라고요. 하지만 편의점 형광등도 되게 하얗게 보였어요. 분리됐다는 느낌. 고독하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죠.

하지만 오차노미즈의 밤은 그렇지 않았어요.

물론 사람이 없는 건 마찬가지고, 조용해요. 하지만 슬픈 고요함은 또 아니에요. 생생하고 의연한──낮의 덤 느낌이 아닌, 그런 밤. 상냥한 밤.

집세는 싸진 않았어요. 그래도 부모님이 어느 정도 지원해 주신 덕에, 절반 정도인 6만엔은 그걸로 충당하고 있었어요. 나머지는 알바비로 채우고요. 친구는 연선 쪽으로 이사 가라고 자꾸 조언해 줬지만, 그래도 오차노미즈를 참 좋아해서.

그날도 아르바이트하러 가는 길이었어요. 신주쿠에 ××라는 이름의 찻집. 영업사원이 미팅 용도로 사용하는 찻집인데──웃기죠? 다들 웃더라고요. 아재 냄새 난다고.

츄오선을 탔는데요 그게 자주 지연되거든요. 그 뭐야, 인명 사고라던가 여러 가지 있잖아요.  그날도 뭔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요요기 앞에서 멈춰버린 거 있죠. 10분 정도 지연됐었나? ......아니, 그 낮이니까 딱히 붐빈 것도 아니라서 힘든 건 아니었는데요. 그냥, 알바 시간에 늦을까 봐 초조해하고 있었어요. 시간은 칼같이 지키니까요. 단 한 번도 지각한 적 없었어요. 그런 거 엄청 싫었거든요. 딱히 제가 착실하다거나 꼼꼼한 성격은 아니었지만, 늦는 건 아무래도 그렇잖아요. 그래서 마음이 막 조급했어요.


그러자, 가슴 부분에 철퍽, 하는 소리가 나더라고요.

처음엔 뭔 야구공이라도 부딪힌 줄 알았어요. 액체라기보단 고체가 부딪힌 느낌이라서. 근데 가만히 보니 아, 이거 페인트 같은 건가 라고 깨달았죠.

산 지 얼마 안 된 흰색 티셔츠기도 했고──얜 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 라고 진짜 화가 나더라고요. 그래서 앞에 앉은 애를 째려보니까, 걔도 절 쳐다봤어요. 눈과 눈이 마주쳤어요. 고딩처럼 보이는 남자애였죠. 그 순간, 되게 쫄렸어요. 맞는 거 아냐? 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유는 모르겠는데 그런 생각이 팍 들었어요.

그리고 뭔가 걔, 새빨갰거든요. 목 밑부터 바지까지 새빨갰어요. 목에서 울컥울컥 솟구치고 있었어요. 마치 스프링쿨러처럼......아, 피다, 라고──.

손잡이를 잡고 있던 손이 완전히 얼어붙어서 도망칠 수도 없었어요.

그래서 살려달라고 소리쳤어요. 손이 안 움직여요, 살려주세요, 라고.

주변 사람들은 제 목소리로 정신을 차린 것 같았어요. 비명이 들리고, 옆 칸으로 도망가는 사람이라던가, 구에엑 토하는 사람이라던가. 저는 얼어붙은 채로 눈을 감으며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라고 외쳤죠.

그랬더니 훅, 하고 절 껴안는 게 아니겠어요.

심장이 멎는 줄 알았어요.

반사적으로 눈이 뜨였어요.

피투성이인 그 애가 자리에서 일어나 절 껴안고 있었어요.

귓가에서 소리가 들렸어요.


「중얼중얼중얼중얼」


 이라고 들렸어요.

그래서


「뭐?」


라고.

그러자 큰 소리로──.


「잊어버리지 마!」


라고 큰 소리로 외치는 거 있죠──」


× × ×


 의뢰인은 거기까지 말하곤 깊은 침묵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녀의 시선은 테이블 위 머그컵에 가만히 고정되어 있었다.

 머그컵 안 커피는 완전히 식어, 표면이 막이 찌그러져 있었다. 도쿄를 떠날 때 가지고 온 것 같은 테이블이나 소파는 고급지고 세련됐다. 하지만 오렌지나 노란색의 발랄한 가구는 이 일본식 방에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았고, 어딘가 현실성이 결여되어 있었다. 본디 여기 있어서는 안 되는 것들. 모종의 슬픔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에어컨이 지나치게 쌩쌩하게 틀어져 있었다. 마치 괜찮은 냉동실에 들어가 있는 것만 같았다.

 말을 마친 그녀는 폭삭 늙어 보였다. 나를 맞이하고, 커피를 타고, 소파에 앉았을 때부터 2시간 정도밖에 안 지난 것 같은데, 벌써 200살은 더 늙어 버린 것 같았다. 그녀는 머그컵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사실 머그컵도 아니고 어디에도 없는 공간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것이었다. 그녀의 눈엔 아무것도 비치지 않았다. 어두운 우물 같은 어둠만이 뻥 뚫려 있을 뿐이었다.

사실은 매력적인 여성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차노미즈의 언덕에서 스쳐 지나가던 사람들에게 봄날의 이슬 같은 미소를 짓게하는 여성. 하지만 지금의 그녀에게선 그러한 종류의 미덕이 모조리 사라져 있었다. 심지어 그녀는 인간으로조차 보이지 않았다. 불쌍한 미라처럼 말라 비틀어져 기력이 싹 다 빠져 있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인랑윤회교회가 그녀에게 건 저주인 것이다.


 인랑윤회교회.

 저렴하기 짝이 없는 이름이다. 그들은 당연히 가지고 있어야 할 교회도 없고, 윤회 따위는 믿지도 않았다. 물론 인랑조차 아니었다.

그 이름에서 절절 흘러넘치는 허세가 본질적인 그들의 저렴함을 말해주고 있다. 단연 이들은 인터넷상에서만 존재하는 소년 소녀 컬트였다. 전뇌 컬트 인랑윤회교회. 진짜 웃기네. 그리고 인랑은 제력 2002년의 여름──7월 1일 정오 정각에 여러 장소에서 일제히 목을 베어, 스스로의 저렴함을 완벽하게 완성한 것이었다.


『서로 얼굴조차 모르는 소년 소녀들이──』

『데이트 약속이라도 하듯 서로 미리 짜고 같은 시간에 목숨을 끊는다』

『핸드폰으로 주고받는 겉치레뿐인 커뮤니케이션에 불안을 안고──』

『거짓말이 난무하는 사회에 공감하지 못하고──』

『전뇌 상의 유사 커뮤니티에서 거처를 찾은 소년 소녀──』

『그리고 그것을 영원토록 하기 위해선 죽음을 고를 수밖에 없었다──』


인랑들은 울트라 빈티 나는 순교자였다.

수 없이 널린 현대사회가 만들어낸

흔하디 흔한 피에로였다.

많은 인간은 놀라는 동시에 질색했다.


「참내」

라고 생각했다.


「왜 이리 바보 같은 거지?」


그들은 멍청이들이었다. 하지만 자신들의 의사 표명이 바로 잊힌다는 것쯤은 이해하고 있었다. 그 고귀함에 걸맞지 않게, 자신들의 행위가 아침뉴스 하천에서 흘러 사라지는 수많은 가십거리 중 하나로 전락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인랑은 개인에게 저주를 내린 것이었다.

사회에 이름을 새길 수 없다면, 개인에게 그것을 새기자.

낯선 사람들 앞에서 갑자기 목을 긋는다.

상대의 눈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잊어버리지 마」라고.


그들은 그녀들에게 혁명에 참여하도록 강요했다. 방관자로서 지나치고 잊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공범자로 만들었다. 그들은 죽었다. 그러나 0이 되지는 않았다.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는 모르고, 알고 싶지도 않다. 하지만, 그 상념은 분명히 남았다. 적어도 내 눈앞에서 허공을 바라보고 있는(혹은 그녀 자체가 이미 허공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의뢰인 마음에는 깊은 상처로 자리 잡았다.

저주라는 건, 자고로 그런 것이다.


나는 아타셰케이스를 무릎 위에 올려놓고는 잠금을 풀고 작은 병을 3개 꺼내 책상 위에 쭉 늘어놓았다.

어둑어둑해진 방 안에서, 작은 병은 보석처럼 빛나고 있었다.

의뢰인의 얼굴에 복잡한 빛이 떠 있다.

이 사람은 초조한 게 아닐까?

그리고 나 또한 초조해지고 있는 게 아닐까?


「안심하세요」


 라고 나는 말했다.


「월식 카르마수가 당신의 부정을 정화할 것입니다. 당신을 구하고, 구원할 영수죠. 당신의 부정──카르마는 꽤 상당합니다. 하지만 중화할 수 있어요. 보아하니 3병 정도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 이 정도만 두고 갈게요. 혹시 부족하거나 하시다면 또 저를 불러서 이야기해 주시면 됩니다」

「저기──」

「사용법은 이 종이에 적혀 있습니다. 위험한 건 아니지만 잘못 사용하면 효과가 없어요. 제대로 읽어보시고 사용해 주시면 됩니다」

「저──」

「병당 3만 엔 되겠습니다」


 환한 미소.

거울로 몇 번이나 연습했던 눈웃음.


안심하세요.

아무 걱정도 하실 필요 없습니다.

제가 당신을 구제해 드리겠습니다.

나쁜 건 당신이 아닙니다. 나쁜 건 부정입니다. 카르마입니다.

자, 부정을 제거합시다.

카르마를 해소합시다.

괜찮습니다.

제게 맡기면 다 잘될 거니까요.


미소지으며, 나는 생각했다.

누나도 이렇게 웃었을까──?

누나.

백엔샵에서 산 비닐 끈을 목에 묶어다가 다리에 매달린 누나.

아아, 누나도 이런 식으로 웃었을까......?


월식 카르마수를 팔기 시작한 건 누나였다.

누나는 큰 단지 오른쪽 끝에서 왼쪽 끝까지 한 집 한 집 초인종을 누르고 다녔다. 운 좋게도 누군가가 문을 열어 줬을 땐,


「혹시 물 필요하신가요?」


라고, 활짝 웃으며 말을 꺼내는 것이었다.


「──아니 아니, 정수기가 아니에요. 나쁜 걸 정화하는 특별한 물을 파는 것뿐이라고요? 세제처럼 싸악~ 정화돼요. 홈쇼핑에서 독일제 카왁스 바르는 거 보셨죠? 그 정도로 부정한 게 떨어져요. 진짜 슈우욱, 떨어져요. 큰 소리로 말할 순 없는데, 그 뭐야 월식 카르마수라는 게 있거든요. 카르마라고 아세요? 자세히 이야기하고 싶은데......아아, 덥네요. 어우, 너무 덥다. 더워도 너무 덥네. 저기, 괜찮으시다면 잠깐 안에 들어가도 될까요?」


물이 많이 팔린 날엔, 누나는 나와 리우를 패밀리 레스토랑에 데려다주었다.

그녀는 점원에게 여왕처럼 굴었다. 모두가 우리를 의아하게 보았다. 난 쪽팔려서 어쩔 줄 몰랐다. 팔꿈치로 쿡쿡 찌르면서 누나 그만해, 라고 말했지만, 누나는 결코 그만두지 않고 여왕처럼 나를 야단치는 것이었다.


「이 사람을 위해서 이러는 게 아냐! 저기, 알고 있지 당신? 당신한테 하는 말이야. 당신, 언제까지 레스토랑에서 주문이나 받으면서 살래? 좀 더 세상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해야지. 뭐 때문에 태어났는지 모르겠다니깐. 어휴, 정말, 그치!」


× × ×


누나가 월식 카르마수를 팔기 시작한 건, 부모님이 돌아가셔서다.

부모님은 시속 900km의 속도로 인도양에 처박혀 죽었다. 결혼 30주년 기념으로 첫 해외여행 중 일어났던 비행기 사고였다. 항공사가 보낸 작은 상자에는 유골 대신으로 보이는 얇고 넓적한 직사각형 화강암이 들어 있었다. 젊은 시절 부모님이 첫 데이트로 본 영화는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였다.

그런 거다.


× × ×


장례식.

나는 조문객과 친척을 대하느라 정신이 팔려 슬퍼할 겨를조차 없었다.

백부도 숙모도 다들 우릴 데려가는 걸 주저하고 있는 것 같았다.

우린 유전학적으로 그들의 일족이 아니었다──라고 사태를 끝맺는 건 부조리할지도 모른다. 나도 리우도 그렇지만 누나도 그때는 아직 학생이었다. 학생을 갑자기 셋이나 키우는 건 애를 셋 낳는 거랑은 차원이 다른 문제다. 거기엔 인생 계획의 수정이라던가 가치관의 재구성 같은 문제가 있다. 만만하게 볼 일이 아니다.

어쨌든──나는 바빠졌다.

리우는 방에 틀어박혀 울 뿐이었다. 누나는 영정사진 앞에서 털썩 주저앉아 무표정하게 경제 신문을 보고 있었다. 주식 시장의 어려운 숫자나 기호가 즐비한 페이지만을 노려보고 있었다. 곧 누나는 고개를 들어, 툭툭 말을 내뱉는 것이었다.


「알겠어. 전부 다 알겠어」


× × ×


난 누나가 하는 괴상한 일이 싫었다.

물론 누나가 가짜 물을 팔아다가 우리를 먹여살리는 것에 대해선 감사하게 여기고 있다. 하지만 누나가 가지고 있다고 자칭하는 『힘』 따위, 단 한 번도 믿어본 적 없었다.

도피. 모든 게 도피의 여러 모습이라는 걸 난 이해하고 있었다.

모든 게, 무서웠다.

인생이 현실적이라는 게 두려워 견딜 수가 없었다. 뭔가 꿈같은 부조리에──안티리얼에 기대고 싶었던 것이었다. 예를 들면 신에게. 예를 들면 카르마수에. 누나는 약자들의 희생양이었고, 누나 또한 약자였다. 즉 그런 것이다.


× × ×


누나가 근처 할인점에서 6병 600엔의 『자연 명수 패트병』을 박스째로 사는 걸 맑은 날 저녁에 종종 보고는 했다. 나를 눈치채면 누나는 쑥스럽다는 듯이, 그리고 조금은 슬픈 듯이 웃는 것이었다.


「신이치, 이거 좀 같이 들어줄래?」


× × ×


나는 지금 리우와 나 자신을 부양하기 위해 월식 카르마수를 팔고 다니고 있다. 깨끗하고 작은 병에 할인점에서 산 물을 가득 채우고, 검은 아타셰케이스에 담는다. 홍보는 하지 않는다. 입소문만으로 장사를 한다. 누가 부르면 F현까지 운전한다. 이야기를 듣는다. 3만 엔에 월식 카르마수를 판다. 그냥 물이다. 그런데도 몇몇은 「구원받았다」라며 눈물을 흘린다. 오늘 의뢰인처럼 나랑 자려는 사람도 있다. 

누나는 죽고, 리우는 유산하고, 나는 물을 팔고, 그래도 세계는 멈추지 않으며, 인생은 흐른다.


× × ×


누나는 종종 「신」에 대해 얘기하곤 했다.


「신은 하늘 위에 없어. 그건 거짓말이야. 신이 하늘 위에 있다고 말해대는 종교는 전부 사이비지. 후후후. 신은 말이지, 우리 안에 있어. 누나의 경우는 말이지, 돌체가 신이야. 돌체 기억나? 죽어버린 우리가 키웠던 아메리칸 숏헤어 있잖아. 부모님이 사주신 돌체. 폐렴으로 죽었지. 그래도 나에게 있어선 신이야. 정말이지, 인생이라는 건 알 수가 없다니까. 근데 말이야 근데, 신에게 있어서 신이란 누굴까?」


× × ×


누나가 남긴 유서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나는 신을 증오해」


× × ×


카르마오토시를 끝내고 밖으로 나오자, 주위는 완전히 밤에 삼켜져 있었다.

바람은 촉촉하게 빗기를 머금고 있어서 젖은 종이처럼 피부에 착 달라붙었다. 3시간 닫아놨던 차내는 약간 이동식 사우나로 둔갑되어 있다. 나는 시동을 걸고 나서야 에어컨이 마침내 죽어버렸다는 걸 깨닫는다.

에휴 정말이지. 세상 모든 게 나만을 조직적으로 괴롭혀서 날 지치게 만드려는 것 같아.


역까지 운전하면서 의뢰인이 소개해 준 가게를 찾는다. 쿠사모찌가 맛있는 이 동네 맛집이라나 뭐라나.


「빨리 안 가면 가게 문 닫을걸」


그녀는 말했다.


「도쿄랑은 다르게 여긴 밤이 빠르니까」


작은 상가를 걷는다.

끝에서 끝까지 3분이면 가고도 남는 전형적인 지방 역 앞 상가다.

야채가게. 정육점. 문구점. 양품점. 가전제품 매장. 술집. 자전거와 오토바이를 파는 가게. 셔터를 내리고 있는 가게도 보이고, 이미 내린 가게도 보인다.

어느 가게나 숙명적인 권태감을 풍기고 있다. 느릿한 단념 같은 공기가 지층처럼 쌓여 있다. 이 상가는 10년 전에도 이런 모습이었겠고 아마 10년 후에도 이런 모습일 것이다. 그런 예감이 들었다. 정체가 초래하는 침전물. 그건, 어디에도 갈 수 없는 꽉막힘이다.

나 말고는 단 한 명도 쇼핑하러 온 사람이 없다.

쿠사모찌를 파는 가게는 찾을 수 없다. 못 보고 지나치기라도 했나? 상점가 끝에 있던 개가 내 얼굴을 보고 느릿느릿 일어나 녹아내리듯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그렇게 상가는 완전히 문을 닫은 것이었다.

텅 빈 역 앞 상가에, 나는 홀로 덩그러니 남겨져 버린 것이었다.

역신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내가 온다. 셔터가 닫힌다. 내가 떠난다. 셔터가 올라간다......

「환영・만남의 거리 상가」라고 적혀 있는 가로등이, 내 그림자를 아스팔트에 비추고 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가로등이 꺼지면 나 자신도 사라져 없어지지 않을까? 올려다보면 가로등은 신경증적인 소리를 내며 밝아졌다 어두워졌다를 반복하고 있다. 날벌레라던가 가방이라던가 하는 기분 나쁜 벌레가 떼 지어 춤추고 있다. 그리고 아무런 예고도 없이 커다란 감정의 물결이 내 마음을 산산조각 낸다.

무릎 아래가 산산조각이 난 느낌.

서 있는 것조차 쉽지 않다.

비틀비틀 길 가장자리에 털썩 주저앉는다.

무릎과 무릎 틈으로 머리를 파묻는다.

숨을 죽인다.

어찌할 바 없이 춥고, 슬프고, 무섭다.

이런 게 무슨 의미가 있지?

나는 생각한다. 이런 게 무슨 가치가 있냐고. 난 세계의 끝의 사기꾼이다. 그 어느 누구와도 이어져 있지 않다. 어디에도 이어져 있지 않다.

차라리 전뇌 컬트에라도 빠져버렸으면 좋겠다. 쌩판 남에게 카르마를 떠넘기고 영원한 자기만족에 젖어 죽었으면 했다.

하지만 그 정도로 바보는 아니다.

「인생을 바꾸는 101가지 방법」

「긍정적인 마인드를 위한 30가지 제안」

「누구나 알면서도 실천하지 않는 69가지 진실」

──이딴 것들에 계몽될 만큼 멍청하지 않다는 거다. 나는 알고 있다. 그런 걸로 세계는 변하지 않는다. 월식 카르마수가 누나를 구하지 못한 것처럼. 나는 그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그런데도 나는 어떻게 해야 세계를 혁명할 수 있을지 모른다.

나약함에 잠길 정도로 약하지 않고, 굳세게 살아갈 정도로 강하지도 않다.

나는 어디에도 갈 수 없다. 갈 수 있다고 한들, 로스트 하이웨이 뿐이다. 불쌍한 라일리・R이 갈 수밖에 없었던 장소. 내적 지옥. 혹은 외적 지옥. 모든 건 정해져 있다. 그렇다면 저기, 양 딜런. 이런 거에 무슨 의미가 있는 거야?


괜찮아.

괜찮다고 스스로에게 타이른다.

늘 하는 거잖아.

이건 그저 일시적인 감정의 혼란이고, 곧 스쳐 지나갈 거야. 언제까지나 널 괴롭힐 순 없고, 계속 널 붙잡지 않을 거야. 그냥 가만히, 이 감정의 파도가 지나가기를 기다리면 돼.

그리고 이 말은 곧 그대로 일어난다.

몇 분 후, 난 완전히 나를(혹은 나라고 믿고 있는걸) 되찾아가고 있다. 남은 건 약간의 피로와 기분 나쁜 땀방울뿐이다. 오케이. 난 충분히 쿨하고 팝해.

오케이.


난 죽어버린 상가를 뒤로 하고, 차에 생명의 불꽃을 킨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나는 시속 90km로 미나카미 나츠키를 들이받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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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미나카미 나츠키


 혹은 난 정말로 미나카미 나츠키를 시속 90킬로미터로 받아 버렸고, 제력 2002년 여름, 나를 마법의 나라로 이끈 여자는 유령인지 뭔지였을지도 모른다. 지금도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나는 살아있어」


 하지만 조수석에 앉은 미나카미 나츠키는 손바닥을 살짝 내 무릎 위에 올려놓는 것이었다.


「이렇게 생생하게 살아있어」


 그녀의 손가락은 가늘고 길쭉하며, 밀랍처럼 하얗다. 손등엔 시퍼런 정맥이 희미하게 보인다. 손톱 끝까지 완벽하게 손질되어 있다. 뭔가 전혀 인간의 손이라고 생각되지 않았다. 손이 숙명적으로 안고 있는 종속성이나 기능성으로부터 독립해서 이미 손 그 자체인 것만으로도 완결된 존재인 것 같았다. 세계미손경연대회라는 게 있다면, 그건 틀림없이 상위 랭킹에 기록될 손임이 분명했다.


「손이 예쁘네」


나는 말했다.


「손이 예쁘네」


 그녀는 그대로 돌려주었다.


「손을 칭찬받는 건 싫어하지 않아. 고마워」

「천만에」

「당신 무릎도 나쁘지 않아」

「무릎」


 나는 말했다.


「세계 무릎 콘테스트에 나가면 틀림없이 상위 랭킹에 기록될 무릎이야」

「이상한 사람이네」


 그녀는 작게 웃었다.


× × ×


길은 밤중에 완전히 가라앉아 있었고, 전조등만이 미적지근하게 세계를 갈랐다(말할 것도 없이, 로스트 하이웨이에 가로등 같은 연약한 건 없다). 순간, 리어 윈도우에 뭔가 그림자가 스쳐지나갔다. 그리고──그때까지 사람을 차로 들이받은 적은 없었지만, 만약 사람을 친다면 아마 이렇게 되겠다, 싶은 충격이 나와 내 차를 뒤흔들었다.

급브레이크. 고무 타는 냄새. 공포. 초조함. 후회.

차가 멈춰도 난 밖에 나갈 수 없었다. 시트에 머리를 기대고 무의미한 심호흡을 몇 번이고 반복했다.

위는 목까지 차올랐고, 심장은 찰리 와츠의 드럼 솔로 같은 상태였다. 그렇기에


「──태워줄 거야?」


라는 말을 문 너머로 들었을 땐 마음속 깊이 두려움을 느껴, 실제로 좌석에서 펄쩍 뛰어오르기도 했다. 열린 사이드 윈도우 너머로, 여자 얼굴이 들여다보이고 있었다.

짧은 검은 머리가 그린 듯한 눈에 덮여 있었다. 밤의 어둠보다도 더 깊은 검은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그것이 미나카미 나츠키였다.


× × ×


 미나카미 나츠키는 어째서 한밤중의 하이웨이를 혼자 걷고 있었던 걸까──내가 차로 들이받은 것의 정체와 마찬가지로, 그건 아직도 깊은 비밀의 그림자 안에 있다. 그녀는 단지


「산책」


이라고만 말할 뿐, 그 이상으로 말하려 들지 않았다. 젊은 여자가 심야의 하이웨이를 산책한다는 건 생전 들어본 적도 없었지만, 난 굳이 그 이상 캐물어 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나에게 남이었고, 나 또한 그녀에게 남이었다.


「당신 신부님이야?」


 라디오 전원을 끄면서, 미나카미 나츠키가 뜬금없이 말했다.


「신부님이라니?」


 나는 말했다.


「그 옷 말야. 신부님이 입는 옷 아냐?」

「아아 그치. 근데 난 신부님이 아냐. 영업사원이지」

「성경이라도 파는 거야?」

「아니」

「그럼 십자가?」

「십자가도, 은제 탄환도, 면죄부도 안 팔아. 물을 팔지」

「물」

「1리터당 100 엔으로 사서 병당 3만 엔에 팔아」

「그거 완전 사기 아냐?」

「글쎄다. 못 믿을지도 모르겠지만 이 물로 구원받았다는 사람도 있어. 일부러 도쿄에서 이런 외진 곳까지 출장까지 올 정도니까. 그리고 성심성의껏 상대방의 이야기 들어줘, 에어컨은 고장나, 기념품으로 사려고 한 쿠사모찌는 사지도 못해. 그런 점을 감안했을 때, 완벽한 사기는 좀 가혹한 평가라고 생각하는데」

「끝없이 완벽에 가까운 사기잖아」

「그게 맞는 평가겠다」

「가짜 물을 파는 사람 차를 타는 건 살면서 처음이야」

「나도 귀신 태우는 건 처음인데」


 후훗, 거리며 그녀는 작게 웃었다. 침묵이 가득했다. 한동안 그녀는 창밖을 바라보다가, 이윽고 툭, 


「처음으로 섹스한 사람은 집 돌면서 성경 파는 남자였어」


 라고 말했다. 어둠을 응시한 채, 그녀는 계속 말했다.


「어렸을 때 집 보고 있었는데 그 남자가 찾아왔어.

『부모님 계시니?』

『안 계셔요』

『실은 말이지, 좋은 말이 잔뜩 적혀 있는 책을 나눠주고 있거든. 아가씨, 책 좋아하니?』

『좋아해요』

『그러면 얘기를 잠시 들어주지 않을래?』

『잠시라면 좋아요』.

더운 여름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가 되었다──. 어때, 재밌지?」

「그거 진짜야?」

「설마」


 미나카미 나츠키는 깔깔 웃어댔다. 그러다 갑자기


「──세계의 끝」


 이라 말했다.


「저기, 여기가 마치 세계의 끝 같지 않아?」

「세계의 끝 같은 건 없어」


 나는 말했다.


「있다면 그건 우리 자신이야. 우리 자신이 정점 없는 세계의 끝이야」


 정신 차리고 보니, 미나카미 나츠키는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데려다줄게」


 그녀는 말했다.


「데려다 줄게. 세계의 끝에」


라고 미나카미 나츠키의 손이 차 안 어둠속을 뻗어──그건 그때까지 아름답고 완벽한 손이었다──핸들을 잡더니......

다음 순간, 세계가 빙글 돌았다.

차는 완전히 제어를 잃고 있었다. 나와 내 차와 미나카미 나츠키는 고삐풀린 말 같은 댄스를 로스트 하이웨이 위에서 추며, 갓길에 올라선 뒤, 아스팔트 위를 몇 바퀴 돌면서 보기 흉한 마무리를 지었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 나는 『붉은 방』에 혼자 서 있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