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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드라마속의 서민의 삶이라는 놈은 사실 현실과는 동떨어진 판타지 어딘가에 존재하는 삶이다.


아니면 서민의 삶이 아니던가.


만약 그게 정말로 서민의 삶이라면 우리집은…


음... 그래.


저기 어디 시궁쥐나 다름없는 삶이 아니었을까?


아니, 아니지.


20년도 전에 지어진 주공아파트의 15층이었으니 시궁쥐가 아니라 까마귀의 집이라고 보는게 맞겠군.


일주일 중 5일은 엘리베이터가 고장나는 주공아파트의 15층 20호.


17평의 좁아터진 집에 8명이 모여사는. 그곳이 바로 우리 집 이었다.


빈말로라도 행복한 가족은 아니었다.


항상 외지에서 일을 하시던 아버지는 집에 돌아오실 때 마다 밤이 늦도록 어머니와 싸우기 일쑤였고, 할머니는 그 아픈 몸을 이끌고 식당에서 일을 하셔야만 했다.


집에서 공부를 하면 집안일 하기 싫어서 공부하는 척 한다고 얻어맞고, 집안일을 하면 공부하기 싫어서 집안일 하는 척 한다고 얻어맞는.


그렇다고 성적이 오르면 ‘공부를 했는데 당연히 올라야지!’라면서 얻어맞고, 전교에서 손에 꼽는 등수를 유지하면 ‘공부를 했는데 점수가 오르지를 않네!’라면서 얻어맞게 되는, 그런 삶 이었다.


여름철에 모기가 듫끌지 않는 것이 위안이었다.


장맛바람이라도 불어닥치면 신문지를 잔뜩 바른 베란다 창문이 부서지지 않을까 덜덜 떨었고, 학교에서 돌아왔을 때 아무도 없는 집에서는 외로움이 아니라 바퀴벌레와 쥐가 나를 반겼다. 한달에 20일은 고장나는 엘리베이터 덕분에 15층 계단을 걸어오른 지친 몸이 식사와 샤워 이전에 살충제와 파리채를 먼저 손에 드는것이 당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절을 낭만 가득하고 행복한 삶으로 기억하는 것은 밥상에 올릴 쌀이 부족해서 집에서 쫓겨났을 때 미안한 얼굴로 교회를 찾아가면 언제나 웃는 얼굴로 반겨주시던 목사님이라거나, 가족들의 빨래를 하는 날에 부서진 옥상문을 열고 올라가 푸근한 햇살을 만끽하며 빨래를 널고, 또 이따금 뒷산에서 뜯어온 쑥과 남은 쌀을 버무려 만든 쑥떡, 방앗간에서 얻어온 엿기름을 쥐어짜 만들어낸 조청을 나눠먹던 기억들이 있기 때문일테다.


당시에야 어땠을지 몰라도 지금에 와서는 그저 미소짓게되는.


그런 순박하고 사랑스러운 나날들이 그 시간속에 박혀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래.


그렇게 추억속에 박제되어 있어야 했다.


그런 추억들이었어야만 했을테다.


“그동안 수고했어.”

“…….”


어머니.


나의 사랑 어머니.


“네가 이렇게까지 고생해줘서 우리가 이렇게 잘 먹고 살 수 있는거야.”


당신께서는 이렇게까지 당신의 아들을 이용하셔야 했습니까?


끼릭-


“그러니까 한번만 더… 이제 정말 마지막이거든.”


어머니께선 당신의 손에 쥐인 도자기병을 기울여 술잔을 반쯤 채웠다.


소주잔보다 조금 작은 잔에서 옥색 액체가 찰랑였다.


“조금만 더 하면 우리 가족. 정말 행복하게 살 수 있어.”


어머니께 술잔을 건네받았다.


“네가 한번만 더 고생하자.”


손에 들려있는 반투명한 파란색 알약을 물끄러미 내려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어머니는 올곧은 눈으로 나를 내려보고 계셨다.


액체와 함께 알약을 삼켰다.


“크, 으으….”


타는듯한 통증과 함께 시야가 흐려진다.


어머니의 입이 개... 혹은 늑대처럼 툭 튀어나온 것 처럼 보였다.


회색과 노란빛이 섞인 털에 송곳니.


늑대인간?


농담도 아니고…


시야가 어두워졌다.


아.



-속보입니다. 집안에서 마약에 중독된 채 조모를 살해 후 식인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







조만간(아마 10년 내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