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글 모음

* 이 회차는 빌드업 중이라 아직 얀데레가 없음. 



***

그대가 어느 날 있어야 할 곳에 있지 않게 되고, 있어서는 안 될 곳에 있게 된다면, 그대는 응당 그곳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대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있는 힘을 다해 행할 것이다.

낯선 곳에 살아남는다는 것은 곧 그 환경에 적응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적응함이란 결국 그 곳에게서 배워야만 한다는 것.

- 우리는 원한다. 일곱 개의 통곡을.
- 우리는 기억한다. 예리코의 화두를.

내가 그 곳에서 첫 걸음마를 미처 떼기도 전에, 어째서인지 알고 있었던 두 줄의 짧은 문장은 나로 하여금 이 곳의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도록 도왔다.

감사하게도 이 곳은 일궈지지 않은 황무지의 한복판이 아닌 문명이 있는 도시였으며, 더욱 감사하게도 이 도시의 주민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이방인인 내게 과분하리만치 자애로웠다.

물론 빛이 돋보이기 위해서는 응당 어둠이 있어야 하듯이, 이 도시도 완벽한 지상낙원은 되지 못했다.

여기는 야생의 짐승들이 가진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 대신 화약 냄새가 진동하는 무기물 덩어리들이 발에 채이는 곳이었고, 내게 자애를 베푼 은인들마저도 삼켜버리려는 악인들이 그 무기물 덩어리들을 난사하기도 하는 곳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시간이 흘러 얄쌍하던 내 허벅지에도 살이 오르고, 무심결에 머릿속으로 '있어서는 안 될 곳까지는 아니지.' 라는 문장으로 초심의 불안을 반박할 수 있게 되었다면, 나는 충분히 이 곳에서 잘 살고 있는 사람이 되었다고 볼 수 있겠다.

''선~ 생~ 님~!! 또 업무에 집중하지 않으시고 무슨 딴 생각하고 계시는 거죠~? 예!?''
''힉! 깜짝이야! 아, 하하하. 유우카였구나.''
''아하하하가 아니죠! 오늘 처리해야 할 업무가 몇 개인데 또 딴청이나 피우시면 어떻게 하시려고요! 네!? 이러시면 또 저번처럼 당번 학생들한테 잔업이나 떠넘기시게 될 거라구요! 학생들한테 미안하지도 않으세요!?''

잠시 상념에 젖어 있던 사이, 수상할 정도로 질량이 많이 나갈 것 같은 한 여학생이 잔소리를 퍼붓기 시작했다.

''하하하.. 물론 내가 자주 잔업을 남겨서 야근하게 되는 건 사실이지만, 내가 학생들한테 떠넘긴 적은 없을 텐데...''
''선생님이 일을 남기시면 그게 곧 학생들한테 떠넘기시는 거나 마찬가지라고요! 정말 몰라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학생들의 선의를 이용하는 것과 전~혀 다를 바 없는 행동을 하시고 계시다구요!''

너 이 녀석, 학생이 선생님한테 어찌 그런 모진 말을 퍼부을 수 있단 말이냐!

하지만 나도 오늘만큼은 당하고만 있지 않아!

''흠! 그렇다면 이건 어때? 난 이미 오늘 할 업무를 전부 처리해놨다는 사~실!''
''네. 그야 당연히.... 예?''

잔소리쟁이 당번 학생의 입을 막기 위해, 그리고 퇴근을 서두르기 위해 나는 자신만만히 처리가 전부 끝난 서류들을 가리키며 외쳤다.

그러자 역시 잔소리를 퍼붓던 그 귀여운 입술이 조용히 닫히더니, 이내 그 위에 달린 총명해보이는 짙은 보랏빛의 두 눈이 하나하나 서류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녀의 두 눈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동그래졌고, 괄괄한 잔소리만 나올 것 같았던 입술에서는 떨리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이.. 이럴 수가... 이럴 리가 없는데....'' 
''잠깐, 그게 무슨 뜻이지? 나 같은 사람은 일을 훌륭하게 처리해서는 안 된다는 것처럼 들리는데? 이거 아주 상처받는걸?''
''그, 그게 아니라...! 아니, 잠깐! 그러면 그 동안은 도대체 어째서 일을 미루시면서 잔업을 늘리신 거예요? 그런 지금까지의 시간낭비는 제가...'' 
''아아아! 어쨌든 오늘 할 일은 전부 끝났고 추가 업무는 없으니, 난 딴 생각도 해도 되고 칼퇴를 할 거라는 말씀이야! 그럼 이만 너희도 빨리 집에 가고! 내일 보자!''
''선생님! 제 말씀이 아직 끝나지 않...!''

- 호다닥.

쓸데없는 잔소리의 폭격을 피해 집무실을 뛰쳐 나온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샬레의 정문을 향해 달렸다.

그리고 그 문을 통해 나와 근처의 정류장으로 달려가 지하철역으로 가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평소라면 퇴근하고 곧장 집으로 돌아가 이른 휴식을 즐겼겠지만 오늘은 조금 다른 날이다.

나는 지금, 밀레니엄으로 간다.



***

사람은 배가 부르고 등이 따스우면 무릇 딴 생각을 하게 되기 마련이다.

졸부들은 제 것이 아닌 돈까지 탐을 내려 들고, 군인들은 더 큰 힘을 가지고 싶어 쿠데타를 일으키기도 한다.

나도 만일 그런 위치에 있었더라면 그런 본받을 가치 없는 행동을 보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나의 위치는 교사이며 월급쟁이로, 나의 욕망 또한 그에 걸맞게 소박하다.

''흠~ 흠흐흠~''
''어? 이거 샬레의 선생님이 아닌가?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는가 보군?''
''아, 티났나요?''
''그렇게 콧노래까지 부르는 것은 처음 보는 것 같아서 말이지. 무슨 좋은 일인지 물을 수 있겠나?''
''하하하. 특별한 건 아니고, 전부터 가지고 싶던 것이 있었는데 이제 손에 넣을 수 있게 되어서요.''
''그래? 뭔지는 몰라도 축하하네! 잘 됐어!''
''하하! 감사합니다!''

그래, 내 욕망은 소박하다.

배도 부르고 등도 따스하니 이제 좀 놀고 싶어진 것뿐이다. 문제될 것은 어디에도 없다. 불법적인 놀잇감도 아니고 아이들 보여주기 뭣한 것도 아니다.

나는 그저...

'안내 말씀 드립니다. 다음 역은 밀레니엄, 밀레니엄 지하철역입니다.'

아, 슬슬 내릴 준비를 할 시간이다.



***

밀레니엄 사이언스 스쿨. 정문 앞 캠퍼스.

''으아악! 도대체 우리가 왜 여기 청소를 하고 있는 거냐악!''
''음... 아무래도 메이드이니만큼 당연한 것 아닐까요?''
''뭐가 메이드냐! 그건 걍 위장신분일 뿐이잖아!''
''아하하하! 선배가 또 화났어!''

붉은 머리카락을 짧게 다듬고 메이드복 위에 스카잔을 덧입은 묘한 복장의 소녀가 캠퍼스 한복판에서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C&C가 청소부라고 진짜 낙엽이나 쓸고 닦는 줄 알아!? 이딴 개떡같은 짓거릴 왜 하고 자빠져 있는 거냐고!''
''아하하하! 난 이것도 재미있는데?''

붉은 숏컷의 스카잔이 도저히 학생이라고는 보기 힘든 발육상태의 후배와 상극적인 대화를 나누고 있는 사이, 묵묵히 바닥을 쓸던 검은 피부의 메이드는 문득 익숙한 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눈에 들어오는 것은 저 멀리서 이쪽을 향해 오는, 자신들이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어른이며 진심을 다해 섬길 수 있는 주인님.

헌데 특이한 점은 평소답지 않게 얼굴을 붉힌 채로 황급히 달려오는 모습이었다는 것.

특히 그 붉게 달아오른 얼굴의 색채는 어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티 묻지 않은 소년의 그것에 더욱 가까웠던 탓에, 검은 메이드는 무심결에 입 밖으로 본심을 흘려버렸다.

''귀엽다....''

그리고 점차 자신의 동료들과 선배 역시 기척을 느끼고 자신과 같은 방향을 바라보더니, 이내 제각각의 소리로 그 반가움을 표출했다.

''아앗? 주인님이다! 주인님! 안녕!''
''아앙? 선생이잖아? 왜 저렇게 뛰는거지?''
''어머. 마지막으로 만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이렇게 우리들을 찾아주실 줄이야...''

누군가는 환하게 웃으며 팔짝팔짝 뛰었고, 누군가는 포근한 미소를 흘리며 매무새를 다듬었으며, 누군가는 아닌 척 하면서도 내심 기뻐했고, 누군가는 의아해하면서도 씨익하고 웃으며 손님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

그런데 누군가는, 그 모든 반가움을 본 척도 하지 않고 그들 옆을 달리던 모습 그대로 지나쳐버렸다.

''아?''
''흠?''
''엇?''
''앙?''

아스나의 환한 웃음도, 아카네의 고급진 미소도, 카린의 서투르지만 다정한 진심도 전부 무시하고, 그저 앞을 향해 달려나가기만 했다.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사람이기라도 하다는 듯, 그대로 선생은 C&C의 곁을 지나쳐 밀레니엄 사이언스 스쿨의 본관으로 쏙 하고 들어가버렸다.

그 발칙하고도 얄미운 뒷모습에, 네루의 입에서 이 모든 황당함을 한데 모아담은 한 마디가 툭 튀어나왔다.

''하!?''


***

밀레니엄 엔지니어부.

세 명의 소녀가 커다란 기계장치를 눈앞에 두고 마지막 점검을 하고 있었다.

''소프트웨어는 전부 확실하게 저장되어 있지?''
''물론, 하나도 빠짐없이.''
''그뿐만이 아닙니다! 이 마이크 내에 부착된 코일은 무려 2만 헤르츠의 소음도 거뜬히 견뎌내고 약 15헤르츠의 작은 소리마저도 감지해 낼 수 있는 특수 무빙코일이라고요! 아, 마이크의 코일에 대해서 설명드리자면! 이 마이크는 무빙코일형 마이크로 세상에서 가장 먼저 발명된 형식의 것으로...'' 
''코토리, 그만 진정해. 너무 흥분했어.''

그녀들이 한참 시끌벅적하게 점검하고 있는 이 수상한 기계장치는, 오늘 이 자리에서 만나기로 한 다른 누군가를 위해 그녀들이 손수 만들어 낸 것이다.

그 누군가는 그녀들에게 있어 가장 감사하고 있는 은사이기도 하고,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어른이기도 하며, 또한 차가운 기계만 만지던 그녀들의 손을 아름답고 따뜻하다 여겨줄 거라 생각되는 단 한 사람이기도 하다.

- 벌컥.

''얘들아, 나 왔어! 내가 너무 늦지는 않았지?''

그리고 그 사람, 여기 등장.

''어라?''
''어머, 선생님이네.''
''오오, 선생님! 약속했던 도착 시간보다 무려 14분 38초나 일찍 도착하셨습니다!''
''헉헉... 그래. 그렇다면 늦지는 않았겠구나. 으.. 미안해라. 노크도 안 하고... 혹시 내가 너무 일찍 와서 민폐였니?''

선생은 조금 전까지도 뛰어오고 있었다는 것을 온몸으로 드러내며 그녀들에게 자신의 무례함을 사과했다.

그리고 그녀들은 선선하게, 또는 명랑하게 웃음을 지었다.

''아니, 전혀.''
''마침 우리도 마지막 점검을 하고 있었거든.''
''그러니? 아이고... 평소에 운동 좀 해 둘 걸..''

한껏 달리고 숨이 벅찰 때마다 늘 하던 말을 하며 숨을 몰아쉰 선생은, 이내 눈을 빛내며 그녀들에게 달려들었다.

''그래서! 내가 부탁한 물건은?''
''진정해, 선생님. 너무 흥분했어.''
''후후후후!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이  <뉴크박스 싱잉모델 No.4>는 저희 엔지니어부가 심혈을 기울여서 온갖 최첨단의 기능을 탑재시켜 만든 자신작 중의 자신작이니까요! GPS부터 전용 AI, 외부 통신기와 홀로그램 상영기에 컵 홀더까지 없는 게 없....'' 
''그 정도로 과하게 준비해 줄 필요는 없었는데! 어쨌든 고마워!''

- 슝.

평소답지 않게 학생의 말을 끝까지 경청하지도 않고 당장 제 볼일부터 보러 가는 선생의 모습은 그가 이 기계를 얼마나 학수고대해왔는가를 그대로 보여주었다.

하지만 이는 동시에 그를 따르던 학생들의 여린 가슴에 얕은 상처를 남기는 행동이 되기도 했다.

''서.. 선생님께서 제 설명을 다 듣지도 않으셨습니다! 어떻게...''
''진정해. 코토리. 그만큼 기다리셨다는 거지.''
''흐음... 하지만 조금 당황스럽네. 평소답지 않게...''

강아지 귀 소녀가 못내 섭섭하다는 듯, 선생이 뛰어들어간 기계 장치의 대문을 빤히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 문은 이미 굳게 닫혀있었다.


***

내가 이 키보토스에서 어느 정도 발 뻗고 지낼 수 있게 되었을 무렵, 내 안에서는 한 가지 욕망이 부글대며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자제해보려 했지만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은 시간이 지날수록 나를 괴롭히기 시작했고, 결국 나는 이에 굴복하여 내가 원하는 것을 구현해 낼 수 있을 능력이 있을 만한 학생들에게 내가 원하는 것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물론 공짜로 그녀들을 부려먹을 생각은 아니었다. 유우카 몰래 엔지니어부에 부비를 조금씩 더 얹어주었으니까.

그녀들 쪽에서 한사코 거부했으나, 나는 기어이 그 푼돈이나마 억지로 그녀들의 손에 쥐어주었다. 내 사적인 욕구를 그녀들의 선의로 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서두가 길었으나 어쨌든, 내가 그토록 바랐던 이 물건은 나의 욕구를 충족시켜줄 것이다.

''오오... 진짜 있어... 전부 있어....! 백X산에서 데X식스까지 전부!''

그녀들이 날 위해 손수 만들어 준 만큼 특별한 물건이지만, 결국 이것의 본질은 노래방 기계에 불과한 특별할 것 없는 기계다.

다만 그냥 노래방 기계가 아니라, 하나뿐인 노래방 기계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이 기계에 담긴 노래들은 전부 지구에서 나와 함께한 내 핸드폰에 담긴 지구의 노래들이니까 말이다.

키보토스에서 찾을 수 없던, 내 고향 행성의 노래.

''크흠흠. 아, 오랜만에 부르려니 긴장되는데. 어디 그럼 목 풀기로 이거 한 번 불러 볼까?''

선곡이 끝나고 마이크를 집어드니, 그리운 느낌이 손끝을 타고 온몸으로 스며든다.

아아, 오랜만이군.

이 서늘하고도 묵직한 감각.

구독자 47만 X튜버 '조니비굿'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 

''으으으으...! 선생님께서 제 말을 중간에 끊으시고 그냥 노래나 하러 들어가셨습니다! 이러신 적이 지금껏 한 번도 없었는데!''
''흐음, 확실히 조금 얄미웠어. 선생님.''
''후후후. 아주 간절하게 기다렸던 모양이네. 저렇게 뛰어들어갔던 것을 보면.''

화장기 없이 수수한 미를 뽐내는 보랏빛 장발의 미소녀가 은은한 미소를 띄우며 조용히 노래방 기계상자를 바라보았다.

그런 분위기와는 정반대로, 밝은 노란색의 단발 곱슬머리를 한 통통한 소녀는 씩씩대며 자신의 섭섭함을 여과 없이 토해내고 있었다.

''참을 수 없습니다! 학생의 말을 무시하는 나쁜 선생님에게 벌을 드려야겠어요! 우타하 부장!''
''후후, 설마 그걸 쓰려는 거야? 선생님한테 미움받을지도 모르는데?''
''글쎄, 애초에 처음부터 쓰려고 달아놓은 기능이었는데. 선생님이 먼저 동기를 제공했으니 우리에게는 명분이 있다고 볼 수 있지 않겠어?''
''그 말이 맞습니다! 이 전쟁은 선생님께서 먼저 시작하셨다고요! 마치 제 2차 세계대전이 독일군이 폴란드를 먼저 침공해서 일어난 것처럼 말이지요! 참고로 제 2차 세계대전은 1939년에 시작되어 6년 동안 전 세계를 통틀어 일어난 전쟁으로, 이 전쟁의 근원을 파악하려면 먼저 이전 세계대전인 제 1차 세계대전의 여파가 독일에 남아있던 것을 먼저 이해해야 하는데요...''
''엇차, 부장. 준비됐어.''
''히비키 씨마저도!?''

코토리의 끝을 모르는 부연설명이 지겹다는 듯 히비키가 그 사이를 끊고 들어오자, 코토리의 얼굴은 이내 울상이 되었다.

하지만 히비키는 코토리가 그러거나 말거나 자신의 손에 들린 기계장치만을 만지는데에만 열중했다.

''자, 선생님. 우리의 설명을 끝까지 듣지 않은 대가를 치뤄줘야겠어. 결국 자업자득일 뿐이야.''
''후후. 선생님은 우리가 외부 통신 기능을 왜 설치했다고 생각한 걸까? 너무 급해서 제대로 듣지도 않은 것 같지만.''
''그럼 시작합니다! 선생님의 노래 합법 도청하기! 이 장치에는 통역 기능까지 추가되어 있어 만들 때는 무슨 뜻인지 몰랐던 노랫말을 이제는 알아들을 수 있게 되었다고요!''

- 삑.

버튼이 눌리자, 엔지니어부의 스피커에서는 노래방 내에서만 들려야 할 노랫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렇게 초반의 전주 멜로디가 흐르고, 이내 그 안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을 단 한 사람의 음성이 그 잔잔한 멜로디 위에 얹어져 흘러나왔다.

- 술에 취한 네 목소리, 문득 생각났다던 그 말...

그리고 그들은 그 날 처음으로, 자신들이 항상 보고 만나던 선생의 음성이 그렇게나 감미롭다는 것을 알아버렸다.



***

''정~~말이지! 선생님은 항상 제멋대로시라니까! 매번 업무를 철야까지 남겨놓으시더니 오늘은 또 칼퇴근해버리시고! 칠칠치 못하게 자산 관리도 못하시면서 이것저것 사들이시고! 심지어 며칠 전에는 엔지니어부에만 부비를 더 얹어주셨다니까?''
''후훗, 하지만 그런 점도 포함해서 선생님의 매력이라고 생각되지 않나요? 그렇기 때문에 유우카쨩도 항상 선생님을 보좌해드리고 있는 거잖아요.''
''으...읏! 누가 그렇기 때문이야? 난 그저 저러다가 총학생회가 전보다 더 망가지는 게 걱정되서...!''

밀레니엄 사이언스 스쿨의 복도 한쪽으로, 학생회의 회계와 서기가 잡담을 나누며 함께 걷고 있었다.

대화는 주로 하야세 유우카가 선생에 대한 불만을 늘어놓으면 우시오 노아가 부드럽게 그녀를 달래는 척 놀리는 것이 이어지는 식이었다.

그렇게 세미나실로 향하던 그 때, 그들은 복도 반대쪽에서 다가오던 다른 무리를 마주하게 되었다.

''아앙? 뭐야. 세미나 녀석들이잖아? 어이, 네 녀석들 혹시 선생을 보지 못했나?''
''C&C? 그것보다 선생님이라니? 선생님은 방금 전 샬레에서 일찍 퇴근하고 돌아가셨는데?''

네루의 물음에 의아함을 표하는 유우카에게, 아카네가 주석을 덧붙여 주었다.

''주인님께서 조금 전에 이곳 밀레니엄을 방문하셨습니다. 뭔가 급한 일이라도 있으신 듯 뛰어서 건물로 들어가시더라고요.''
''그래, 뭐가 그리 급했는지 우리 인사까지 전부 무시하고 들어갔다고. 만나기만 해 보라지. 우릴 무시한 이유가 납득되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을 테니...!''

C&C의 설명에 세미나의 서기 노아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상하네요. 분명 오늘은 선생님께서 방문하실 날이 아닌데...''
''그러게? 일찍 퇴근하신 날에 무엇하러 밀레니엄까지 오셨지?''

노아의 의문이 지당하다는 듯 유우카 또한 그녀에게 동조했다. 하지만 C&C가 그녀들에게 거짓말을 할 리도 없으니 선생이 밀레니엄에 왔었다는 것은 사실일 확률이 더 높았다.

의아함과 투덜대는 소리가 교차하는 가운데, 문득 카린의 옆구리에서 특유의 밝은 음색이 들려왔다.

- 아하하! 여기는 콜사인 제로원! 응답하라!

''여기는 콜사인 제로투. 아스나 선배? 갑자기 또 언제 사라진 거야?''

- 아하하하! 주인님을 찾았어! 엔지니어부에 있던데?

''아앙? 거긴 또 왜 가 있는 거야?''

- 쉿! 그러지 말고 여기 빨리들 와 봐! 진짜 재미있는 게 기다리고 있으니까!

그 말을 마지막으로 콜사인 제로원과의 통신은 차단되었다.

이에 네루가 짜증을 한 바가지 쏟아내기는 했으나, 아스나의 단독행동이야 흔히 있는 일이고 또 선생을 찾았다니 모두 군말 없이, 또 호기심과 의문감을 한데 가득 안고 엔지니어부로 향했다.

그리고 그들이 엔지니어부 문 앞에 도착하자마자 마주한 것은 문에 귀를 대고 얼굴은 붉게 물들인 채 바닥에 철퍼덕 앉아 있는 콜사인 제로원의 기이한 자세였다.

이런 아스나의 모습에 그녀의 선배인 네루는 다시 눈살을 찌푸리며 짜증을 뱉었다.

''하? 또 무슨 이상한 짓을...''
''쉬잇! 선배, 그러지 말고 이리로 빨리!''

하지만 아스나가 제법 진지한 태도로 자신을 부르자, 호기심이 짜증을 이겨버린 네루도 똑같이 후배를 따라 문에 귀를 대 보았다.

그러자 작게 들려오는 것은, 한 남성의 청량한 노랫소리.

- 사랑한다는 마음으로도, 가질 수 없는 사람이 있어—

처음 들어보는, 하지만 어째선지 익숙하고 포근한 음성에 네루는 잠시 큰 충격을 받았다.

- 나를 봐. 이렇게 곁에 있어도, 널 갖진 못하잖아—

하지만 계속되는 노래에, 네루는 무심결에 그 용의자로 추정되는 자의 정체를 입 밖으로 뱉어버렸다.

''...이거 설마 선생이냐?''

그리고 그 한 마디는 자기 뒤에서 기다리던 이들에게도 호기심을 증폭시켰다.

''뭐야. 선생님이 뭘 하고 계신 건데?''
''주인님의 비밀 취미인가요?''

결국 세미나와 C&C의 전 인원이 문에 귀를 대 보았고, 그들 모두가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시원하게 퍼져 나가는 성량, 깊이 있게 울리는 음색, 흔들림 없이 탄탄한 발성의 삼박자가 갖춰진 선생의 노래는 이미 잘 부른다는 수준도 아득히 넘어선 경지의 무언가였던 것이다.

이윽고 첫 노래의 멜로디가 끝이 났고, 선생이 두 번째 노래를 선곡했는지 새로운 멜로디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러자 엔지니어부의 문이 소리 없이 천천히 열렸고, 문에 귀를 대고 있던 불청객들 역시 숨소리 하나 흘리지 않고 조용히 그 안으로 들어갔다.

그 문을 누가 열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상관없었다. 누가 열었다 해도 이상할 것이 없는 분위기였으니까.

그저 그들은 선생의 노래를 더욱 또렷한 소리로 듣고 싶었다.

그 소리가 어찌나 매력적이었는지 엔지니어부조차도 불청객의 존재를 깨닫지 못하고 멍하니 앉아있기만 했다.

만일 누군가 바닥에 헤어핀 하나라도 떨어뜨렸다면, 그것은 그들에게 폭탄 테러가 일어난 듯한 소리와도 다를 게 없었으리라.


같은 시각, 밀레니엄 사이언스 스쿨의 베리타스 동아리실에서도 같은 이유로 넋을 놓아버린 학생이 한 명 더 발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