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글 모음

불이 다 꺼진 가정집.


열려있는 베란다로 들이치는 찬바람을 맞았다.


나 자신이 송장이 되어버린 듯한 무력감.


"아... 배고프다."


얼마나 누워 있었을까.


시간개념마저 무너져 바닥과 일체가 된 듯, 찐득함이 몸을 감싼다.


이상하다. 분명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았는데.


"읏차."


몸을 힘겹게 일으켰다.


바로 옆으로 놓인 전신거울이 내 모습을 비추었다.


상당히 이국적인 흰 머리.

150 근처로 보이는 작은 키.

아직 발육이 진행중인 듯한 작은 가슴.

그러나 그렇다고 마냥 어려보이지는 않는 신비로운 분위기.


유일하게 스스로를 위로할 수 있는 요소가 귀여운 여성의 모습이었던 만큼, 단번에 마음이 차올랐다.


귀여워. 귀여워! 오늘도 역시 귀여워.


머리는 감지 않아도 전혀 떡지지 않는데다, 벌써 하루는 넘게 쓰러져 있었는데도 더러워 보이지 않아.


"뭐가 문제였을까..."


무심코 바닥에 굴러다니는 뚜껑따인 페트병을 손으로 들었다.


갈증을 해소하고자 쭈욱 들이키니 뭐라 표현 못할 텁텁함과 찝찝함이 퍼졌다.


...이렇게 보니 꼭 오줌을 마시는 것 같네.


불과 하루 전까지만 해도 이것이 탄산음료였다 주장해도 아무도 믿지 않을 것 같았다.


"푸하...!"


그래도 좋았다. 적당히 갈증은 채웠으니.


묘하게 머리에 피가 돌며 이유없는 자신감으로 무장한다.


소파에 던져져 있던 휴대폰을 집어들었다.


이미 액정은 물론, 모서리마저 박살이 난 상태.


어제 화를 참지 못하고 이빨로 모서리를 깨문 탓에 생긴 자국이었다.


"부재중..."


알림에는 어제 걸려왔던 부재중 전화와 메세지가 떠 있었다.


둘 다 같은 전화번호.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누구인지는 뻔히 알 수 있었다.


ㅡ 꺼져


ㅡ 부탁이니까 좀 꺼져 연락하지 말고 씨발년아


어제 이후로 온 문자는 단 두 통.


그러나 그가 내게 향하는 악의는 다분했다.


억울하다. 난 그냥 사랑받고 싶어서, 사랑을 주었을 뿐인데.


우울감이 다시 전신에 퍼졌다.


독처럼 신경 마디마디에 스며들어 꼼짝도 할 수 없게 될 때쯤, 다시 정신이 돌아왔다.


'그래. 어제는 좀 싸움이 났을 뿐이야.'


날 제일로 사랑해 줄 수만 있다면 다른 애인이 있어도 된다고 말했던 것은 나다.


그는 그저 갑작스레 두번째 여자친구에게 내 사진이 들켜 당황했을 뿐이야.


내가 조용히 있었으면 알아서 잘 정리했을 여자.


초조함에 배신당했다 믿었다.


그의 집에 찾아가 적당한 돌로 문을 몇번이나 내리찍었던가.


그깟 여자에게 내 사진이 조금 들키면 어떻냐며 "사랑해 준다고 했잖아." 라고 연이어 소리쳤다.


문자 두 통 위로는 대부분 내 문자들.


이번엔 정말 날 사랑해 주는 사람을 찾았다 싶었는데.


'아니야. 아냐. 이 사람은 정말 날 사랑하는 게 분명해.'


어제는 놀랐을 뿐이야.


그도 분명 지금쯤 내게 심한 말을 내뱉고서 경찰을 부른 걸 후회하고 있을걸.


아직 차단당하지 않았어.


전화도 받진 않지만 제대로 걸리고 있어.


다시 찾아가자. 그 여자가 문제였다고 말하고 미안하다고 사과하자.


찾아가서 차분하게 설명하면, 오해는 다 풀릴 거야.


'그래. 지금 당장.'


"가자! 가보자! 힘내자! 아자!"


스스로를 향한 힘찬 응원.


잔뜩 기분좋아진 정신을 빌려 곧바로 신발을 신었다.


빨리 가고 싶었기에 씻는 시간도 아끼고 현관을 열었다.


손에 들린 휴대폰이 내 발을 두 배는 무겁게 하는 것 같아 대충 거실 구석에 집어던졌다.


"어."


아슬아슬하게 한계를 버티던 휴대폰이 부서진다.


별로 신경쓰지 않아도 되겠지.


지금 나에게는 저런 휴대폰 따위는 중요하지 않아.


어차피 앞으로 이 집에 들어오지도 않을 텐데.


먹은 것도 없었으나, 신기하게 기운이 났다.


걸어서 1시간 반 정도의 거리.


신나는 마음에 계단을 폴짝폴짝 뛰어내리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아, 까먹을 뻔 했다."


그러고보니 몇달 전부터 계속 연습하던 게 있었지.


지금같은 순간을 위해 몇번이나 거울을 보고 웃으며 연습했던 말.


계단을 반층 내려와, 몸을 빙글 돌렸다.


그리고는 조금 과장스럽게 큰 동작으로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엄마, 저 가볼게요. 헤헤!"


차오르는 눈물을 뒤로하고는 걸음을 재촉했다.


굳게 닫힌 철문은 대답해주지 않았다.


***


항상 같은 풍경에 똑같은 일상.


창밖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눈은 빛을 잃은 채였다.


'재미없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실컷 일을 하다 지친 듯 어두운 밤.


모두가 피곤한 얼굴을 하고 있는 버스의 내부.


한 겨울의 추위가 무서워 푹푹 찔 정도로 틀어진 히터가 답답해 창을 열었다.


"으으... 아직 엄청 춥네."


사무치는 한기가 창을 넘어 버스를 덮쳤다.


바람이 꽤나 강했기에 주변의 사람들이 표정을 찡그린다.


특별히 주변을 신경쓰지 않았다.


눈치도 살피지 않고서 오로지 자신의 추위 때문에 창을 닫는다.


특별히 쓴소리를 건네는 이는 없었다.


그야, 이런 세상이니까.


모두가 개인만을 위하는 이기적인 사회에서는, '잠시의 추위'라는 문제점이 '창문을 닫는다'는 행위로 해결되었으면 그만이었다.


"여보세요?"


휴대폰이 울렸다.


이윽고 그것을 받아 통화를 시작했다.


"아, 서현아. 잘 들어갔어? 늦게 갑자기 불러내서 피곤했지? 미안해. 요새 주문이 많아서 혼자 감당하긴 힘들더라구..."


전화를 걸어 온 주체는 내가 일하는 가게의 사장, 농소아.


시내에서 작게 옷가게를 하는 40대 여성으로, 주로 아동복을 수제작해 판매하는 '아이좋아'라는 상표명을 쓰고 있었다.


"사장님. 괜찮아요. 저도 어차피 돌아가서 할 것도 없었고. 시급은 두 배로 쳐준다고 하셨으니까."


"응응. 그건 맞는데, 8시부터 갑자기 나와줄 줄은 몰랐거든. 덕분에 안 팔리는 재고도 팔았고... 진짜 진짜 고마워!"


가게에서 하는 일은 단순한 접객업.


기존에는 사장이 홀몸으로 제작과 판매를 담당했으나, 어느 날을 기점으로 인기가 올라 판매원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고용한 것이다.


게다가 소형 브랜드라도 대우는 대형 브랜드의 직원 못지 않았다.


비록 표면적으로는 알바도 뭣도 아닌 도움의 개념이었기에 주휴수당같은 개념은 없다.


나오기만 하면 반드시 최저시급의 2배를 쳐 주었다.


주 5일을 한 달 내내 8시간 근무했다 치면 대략 300만원.


근로가 아니었기에 세금을 떼는 것도 없이 그 거금이 그대로 통장에 가는 것이다.


하물며 오늘은 그 금액의 2배니, 총 4배에 달하는 시급.


'그만큼 오늘일은 쉽진 않긴 했지만...'


일 자체는 평범하며 쉽다.


그저 무표정하고 사무적으로 접객을 하면 그만.


그러나 이 일이 이만큼의 돈을 주는 이유 또한 있었다.


'설마 오늘은 산타복이라니... 그것도 쇄골이나 옆구리가 다 드러나는 걸...'


선전을 목적으로 아이좋아의 유니폼은 시즌의상이나 악성 재고의 확대판으로 만들어졌다.


예쁜 성인 모델이 입은 모습을 보고 자신의 아이에게도 동일한 옷을 사주겠다는 심리를 노린 전략.


실제로 그 전략은 효과적이었다.


다만 예상과는 다른 방향성.


자신의 아이들에게 저런 옷을 입힐 수 없다는 부모님을, 환상에 반해버린 아이들이 설득하고 조른다.


좋은 모델과 파격적이고 개방적인 디자인은, 어른보다도 아이의 눈길을 사로잡는 법이었다.


"근데, 일 할 때 말고도 언니라 불러달라 했는데에..."


사장님이라고 불리는 것이 싫은지 불만을 토로하는 사장님.


그러나 그런 투정도 슬슬 피곤할 뿐이었다.


'끈질기네. 진짜.'


매일 듣는 푸념에 매일 듣는 요구.


슬슬 포기해주었으면 하는 마음을 담아 차갑게 내뱉었다.


"사장님은 이제 40대잖아요. 저희 엄마 친구뻘인데, 언니는 좀 그렇죠?"


"너무해...! 그렇게 말할 건 없잖아!"


"돈도 많겠다, 어린 여자애들 뒷꽁무니는 그만 쫓아다니고 결혼정보나 알아보는 편이 좋지 않아요?"


"그, 그치만 남자는 귀엽지 않고... 아, 10살 밑으로는 귀엽긴 하지만."


결국 사장님은 이것이 문제였다.


지독할 정도로 어린 여자를 좋아한다는 것.


그 정도는 단순한 집착을 넘어선 광기.


실제로 만드는 아동복들마저 성인 코스튬의 축소판이라 불릴 정도였으니까.


실제로 이 가게와의 접점 또한 중학생 시절, 사장님이 먼저 알바를 제의하며 시작된 것이었다.


"쯧. 더러운 소아성애자."


"응? 뭐라고 했어? 잘 안 들려서."


"소아언니 파이팅. 이라고 했어요."


"응! 서현이도 파이팅!"


그 말을 끝으로 전화가 끊어졌다.


[다음 정류장은, XX입니다.]


그 사이 버스가 집 근처의 정류장에 멈춰섰다.


언제나처럼 지루한 골목을 지날 생각에 한숨을 내쉬었다.


놀라울 정도로 흥미가 가는 것이 없는 세상.


'그래도 사장님은 삶의 즐거움이라도 있지.'


무심코 사장님을 부러워하며 천천히 길을 걷던 그때.


저 멀리 공원에 쓰러진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사람...?'

'아니, 그보다 여자애?'


지금껏 부모님 외엔 흥미를 가진 것이 없었다.


그런 내가 처음으로 자신의 흥미에 이끌려 움직인다.


걸어가던 발걸음은 호기심에 종종걸음으로.


곧 전력질주가 되어 쓰러진 소녀의 곁에 섰다.


'...예쁘다. 엄청 예뻐.'


거의 맨몸에 맞지도 않는 흰 셔츠 하나.


온몸은 상처투성이에 일그러진 광소를 담으며 눈을 감은 모습.


벌벌 떨며 양손으로 상체를 지탱하는 끔찍한 자태.


그러나 느낀 첫인상은 연민도 무심도 아니었다.


'사람? 아니, 천사일까?'


키는 중학생 쯤 되어보이는 흰 옷의 여자가 꽃밭에서 흰 머리를 휘날리며 웃고 있다.


눈으로 받아들인 정보는 현실과는 동떨어진 시야.


철저히 자기중심적인 사고는 보고 싶은 것만을 왜곡해 보고 있었다.


"이렇게 있으면 감기걸릴 텐데."


조용히, 소녀가 깨지 않게 허리와 허벅지에 손을 감아, 공주님안기로 끌어 안았다.


어쩌면 지금이 사람들이 없는 밤중이라 다행일지 몰랐다.




벌써 이것만 3번째 뜯어고치는중.


백합 어려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