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글 모음



이것은 나라는 죄인이 단죄되기까지의 이야기이다.



***



'내 이름을 D라고 해두자.'


그는 서른이 넘은 직장인이었다.

그는 스스로를 D라 부르는 이유는 어쩌면 그가 지금 막 Deprecated 되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는 조금 전, 오랫동안 다니던 직장을 스스로 그만두었다.

그가 직장을 그만둔 이유는 스스로 지쳤다고 느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는 항상 최선을 다했다.

그렇다고 생각해 왔다.


그의 최선이 독이 되어 스스로에게 돌아오기 전까지는.

그에게 돌아온 것은 몰이해에 가까운 무언가.

그렇기 때문에 그는 쉬기로 결정하였다.


그늘이 드리워가는 오후의 태양 아래.

그의 몇 안 되는 짐이 든 가방이 무겁게 느껴졌다. 노트북과 두터운 연습장, 만년필.

그리고 누군가에게 주려고 남겨두었던 작은 선물만이.


그의 긴 회사 생활을 마무리 짓는 마지막 짐이었다.



---



D는 한낮의 거리를 그늘 속에서 걸으며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찌뿌둥한 D에게 있어서 지금의 태양이 너무나도 눈부셨기 때문에 그늘 속을 거닌 것일지도 모른다.


눈 부신 태양 아래로 나다니는 것은.



'창년들.'


진짜 화냥년들인지는 알 길이 없었으나. D가 생각하기에 길 건너편에 서 있는 여자들은 D에게 있어서 창년들이나 다름없었다.

컬러풀한 머리카락, 짧은 옷차림.


지금 직장을 다니는 직장인일 리가 없은 듯한 차림새.

자기처럼 지금 막 직장을 그만두고 나온 퇴사자도 아닐 텐데.


그저 이 거리를 즐기기 위해 남들이 헌신하는 시간 속을 노다니는 쏙독새들.


D는 젊은 여자를 혐오한다.

자신은 죽어라 투쟁하고 있을 때, 그년들은 자기 앞에 놓여진 일 하나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고.

감정적으로 받아치고, 여차하면 우는 것으로 도망치기까지.


그런 꼴을 지긋지긋하게 봐왔기 때문에 D는 지쳤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평소엔 하지 않았던 생각조차 강렬한 워딩으로 내뱉은 것일지도 모른다.

입에 담지는 않았지만.


문득 D는 생각했다.

만약 내가 저런 년들 같았더라면.

저렇게 생각 없이 나다녀도 된다면?


그랬다면 그 때 불합리한 일을 당하지도.

혼자 그런 수모를 겪지 않았더라도.

아버지에게 얻어맞지 않...


D는 거기에서 생각을 멈추었다.

밝은 태양 아래. 그가 선 그늘을 비추듯 푸른 신호가 짧게 점멸했다.


쓸데없는 상념을 멈추고 앞으로 나아갈 시간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제 더 볼일이 없어진 회사를 등지고 나아갔다.


작달막한 서류 가방만 쥔 채로.



---



"에스프레소."


"...네?"


"에스프레소요."



짜증 섞인 목소리.

오랜 피로가 눌러앉은 목소리로 D는 다시 이야기했다.


'에스프레소 마끼아또까지는 바라지 않더라도. 에스프레소 정도는 바로 알아들어도 되지 않나?'


자기네 가게가 파는 메뉴조차 기억하지 못할 줄이야.


뒤늦게 자기 머리 위에 있는 메뉴판의 영어로 적힌 ESPRESSO를 확인하고 아 하며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남자 매니저를 향해 달려가는 여자 알바생의 모습.



'... 젊은 여자들이란.'


그 모습을 바라보며 D는 짧게 혀를 찼다.

조금 어려운 일만 생기면 누군가에게 달려가는 게 전부인가?


스스로 해결할 생각도 안 하고?

그것이 자신의 능력이며 무기라 생각하겠지.


D의 피로가 찌든 혐오.

차마 입 밖에 담지 않은 것이 D의 마지막 경계선이었으리라.


D가 모든 여자를 혐오하는 것은 아니었다.

D가 만났던 업계의 강자들.

D가 투쟁하여도 쟁취하지 못했던 것을 가볍게 경험으로 해결해내던 그녀들.


그녀들은 D에게 있어서 강자였고.

여자가 아닌 존경하는 어른이었다.


그래, 마치 D의 어머니처럼.

은퇴가 가까워지더라도 일을 멈추지 않던 모습.


D는 그 어머니를...



"주문하신 에스프레소 나왔습니다!"


거친 남자의 목소리에 D의 생각은 다시 끊어졌다.



---



D의 주문을 받은 여자 직원 대신 나타난 젊은 남자.

어수룩해 보이는 남자는 아직 결제를 받지 않았단 것조차 몰랐던 것인지.


조금 떨어진 곳에서 자리를 바꾸어 이쪽을 흘긋 바라보는 어리석은 여자의 눈빛을 보고.

뒤늦게야 건네는 D의 카드를 받아 계산을 마치고 작은 쟁반을 D에게 건네주었다.



'여자에게 이용이나 당하는 병신.'


D가 생각하기에, 이 남자도 역시 어리석었다.

하지만 더 이상 볼 사이는 아니기에 D는 마음속으로만 평가를 멈추고 쟁반을 받아 자리로 이동했다.


쟁반을 받아 D가 앉은 곳은 해가 들지 않는 구석진 자리에 앉았다.

D가 밝은 태양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시끄러워.'


가장 밝고 화사한 자리에 앉은 젊은 여자... 창년들.

그 높은 음역대의 웃음 소리가 D의 심기를 거스르고 있었다.


D는 쟁반을 탁자 위에 내려놓고 서류 가방을 뒤져 가장 손이 잘 닿는 위치에 있던 무선 이어폰을 꺼내어.


꾹.


양쪽 귀를 틀어막았다.


-.


소리가 멎는다.


노이즈 캔슬링.

소음을 다른 소리로 상쇄하는 기술이 D의 스트레스를 낮추었다.


만약 노이즈캔슬링이라는 기술이 여태까지 없었더라면.

D는 언젠가 출근길 속에서 자신의 귀를 만년필로 파내어 버렸을지도 모른다.


D는 그런 미쳐가기 직전의 인간이었다.



지익.

쟁반에 같이 올라간 작은 설탕 스틱의 끝머리를 찢어서.

설탕을 작은 잔 안에 반만 부어 넣고.


옆에 놓인 티스푼은 무시한 채 D는 작은 잔을 쥐고 첫 모금을 들이켰다.



"...좆같네."


고요 속에서 입 밖으로 나온 D의 소감이었다.


강한 워딩.

험한 스피치.

D가 싫어하는 일이었지만.

몇 년간 들고 있던 일을 내려놓은 D에게 그런 것은 더 이상 대수롭지 않았다.


조금 더 신경을 썼더라면 개같다고 돌려 말했을 수도 있었겠지만.

D는 이딴 가치도 없는 한 잔에 좋아하는 개를 들먹이고 싶진 않았다.


그렇기에 저곳에 떨어져 자신이 무슨 소리를 했는지도 모를 음역대로 떠드는 창년들이 없는 신체 부위를 들먹이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저 여자들이나 사진이나 잘 찍힌다며 커피는 뒷전으로 둔 채 사진이나 찍어대는 카페.

이런 곳에서 D가 바라는 수준의 에스프레소가 나올 리는 전무했고.


커피도 내릴 줄 모르는 주제에 그저 메뉴 이름은 자기네들도 잘 읽지 못하는 언어로 박아두는 병신놈년들이란.

D는 작은 잔을 더 이상 음미하지 않고 입안에 털어놓았다.


밑바닥에 가라앉은 설탕의 단맛을 느낄 새도 없이.

D는 그대로 가게를 나왔다.


지난 출장.

이국에서 보낸 그 길고 긴 시간들은 D에게 고난이었고 좆같은 시간들이었지만.

그곳에서 마셨던 에스프레소만큼은.


벌써 그리워졌다.



---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내내 D의 기분은 좋지 않았다.


조금 전 마셨던 어수룩한 놈년들이 찍어낸 에스프레소가 최악이어서?

아니면 집에 돌아가는 게 얼마 만인지 기억도 나지 않아서?


둘 다 아니었다.

어딘가 가슴 속 깊이 올라오는 스멀거림.


불쾌함의 경계선을 자꾸 넘으려는 듯 넘지 않으려는 울렁거리는 듯한 느낌.



'약.'


D는 서류 가방에 손을 넣어 자신이 상비하고 다니는 여러 종류의 진통제와 약이 담긴 작은 파우치를 뒤적거리다가.



'이런데 드는 약은 없겠지.'


체념하고 다시 손을 꺼냈다.

이국에서 돌아와서 아직까지 병원을 가본 적도 없었다.


예전에, 지난번 출장보다 더 더 지난번 출장을 떠나기 전에 받았던 약으론 지금의 불쾌함에 듣지 않으리라.



"...으윽."


약간 핑하고 도는 어지러움과 함께 약한 토기에 D가 입을 손수건으로 막자.

그곳엔 검붉은 핏자국이 찍혀 있었다.


비강을 찌르는 듯한 아릿한 통증.

가슴을 건드리는 듯한 비릿한 내음.


코에서 나온 것인지 입에서 묻어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입안을 감도는 혈향.


D는 이제 시간도 많아졌겠다.

내일은 꼭 병원에 가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손수건을 서류 가방에 대충 던져넣었다.


이제는 아파도 언제든 말이 통하는 사람에게 진료를 받을 수 있다.

말이 통하는 곳이야말로 내가 있을 곳이 확실하다는 철학자의 말을 떠올리며.


손수건에 붉게 접힌 혈흔의 데칼코마니를 무시하고 그는 마침내 집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어제처럼 짐만 던져두고 잠든 일시적인 귀환이 아닌.

얼마 만인지 모를 진짜 귀가를.


마침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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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관에 놓인 은색의 금속 캐리어.

몇 번의 출장을 다니며 컨베이어 벨트에서 생긴 여러 상처와.

그 위를 억지로 덮은 작고 파란 토끼 스티커가 가득한 알루미늄 캐리어를 발로 툭 밀치고.


D는 마침내 집으로 한 발자국을 들였다.

이 발자국은 작은 한 걸음이지만. D에게 있어선 정말 오래간만의 귀가였다.


비록 맞이하는 사람은 없는 홀로 지내는 집이었지만.


D는 마침내 약간이나마 평온을 얻었다.

가슴을 쓰리는 듯한 불쾌감은 여전히 남아있었지만.


이런 약간의 불쾌함은 무시해도 되겠지.

이제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많다.


D는 서류 가방을 살포시 내려놓고.

몇 개월 만에 시간에 쫓기지 않는 샤워를 마쳤다.



'물도 좋았어.'


필터를 갈아 끼워도 일주일도 안 돼서 노랗게 뜨던 그곳과는 다르게 이곳은 물도 깨끗했다.


샤워를 마치고 D가 자신의 핸드폰을 확인하자 그곳에는 몇 개의 알람이 울려있었다.

직장과 자신의 직업에 대한 이야기가 몇 번 울려있었는데.


D는 그런 메세지를 덮은 채 자신이 읽고 싶은 알람만을 골라 읽기 시작했다.



D는 작은 취미를 여러 개 가지고 있다.

그중 하나는 자신의 비뚤어진 생각을 표현하는 글쓰기.


에고가 강한 자신의 글을 자유롭게 소설 투고가 가능한 사이트에 올린다.

제목도 내용도 어중간한 타협도 하지 않은 채 오로지 자신만의 만족을 위한 글쓰기.


그러나 자신만을 위한 글이었지만.

D는 그것을 누군가 알아봐 주기를 바라며.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몇 번씩 글을 써서 올렸다.

비록 D를 망가지게 했던 출장의 연속으로 그 즐거움은 중단되었지만.


이따금 감상을 공유하는 사이트에 D의 글에 대한 감상이 올라올 때마다.

D는 그 소중하며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켜 주는 감상을 놓치지 않도록 자신이 아는 모든 사이트에서 자신의 글에 대한 키워드를 감지할 수 있도록.


재능을 살려 자신의 핸드폰에 알림이 오게끔 만들어두었다.



이번에도 그 작은 희열을 주는 감상이 올라온 것인 줄 알았지만.

이번에 울린 알림은 감상이 아닌 사이트 앱 자체의 알림.


자신이 문의한 내용에 대한 답변이 달렸다는 작은 알림이었다.


D는 기대와는 다르긴 했지만, 자신이 물어본 일이므로 그에 대한 답변을 기대하며 책상 앞에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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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가 문의한 내용은 사이트에 대한 취약점 보고였다.

작은 글을 올리는 D의 소중한 정원에 기어들어 온 해충.


자신이 글을 올릴 때마다 자동으로 달리는 글을 읽지도 않은 주제에 작성되는 댓글.

감상도 아닌 데이터 찌꺼기.


D는 마치 자기 집의 초인종을 누르고 도망치는 듯한 그 알림이 싫었다.

 

처음엔 해당 유저를 처벌해달라는 내용이었지만, 고객센터는 그 답변을 대수롭지 않게 넘겼고.

D가 글을 올릴 때마다 1분도 안 되어 울리는 그 알림은 D에게 있어 짜증 나는 파리와도 같았다.


자동화된 파리를 보며 D는 생각했다.

지금은 대수롭지 않은 스팸봇 하나이며 운영팀은 이것을 막을 생각이 없지만.


만약 이 파리가 불어나서 한 마리의 파리가 아니라.

여러 마리의 파리가 되어서 D의 정원뿐만이 아니라 모든 곳을 건드리기 시작한다면?


한 마리가 아닌 여러 마리. 아니 수 백마리의 파리의 반복적인 날개짓은.

언젠가 D의 정원을 포함한 이 곳을 망가뜨릴지도 모른다.


D는 이 위험성을 지적하여 선심을 쓰듯.

원래 같더라면 D가 재직하던 회사에 의뢰하여야 받을 수 있는 전문 솔루션을 제공하였다.


그 선심에 대한 답변은 어땠을까?


서두는 길었지만.


'해당 부서에 전달하였습니다.'



지난번과 똑같은 대답.

D의 불쾌감이 경계를 넘어와서 울렁거렸다.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면."


D는 자신의 모니터 아래에 놓인 손때가 조금 탄 파란 토끼 인형을 집어 들었다.

지난 출장 기간을 같이 이겨내준 소중한 동료에게 이런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다는 듯 등을 돌려둔 채.

발아래 PC 본체 위에 올려두었던 하얀 복면을 집어 들었다.



"내가 왜 경고한 건지 보여줘야겠지."


안경을 벗고 얼굴을 덮는 복면을 뒤집어 쓴 채.

눈구멍도 뚫려있지 않아 숨이 가빠지는 면직물을 뒤집어쓰고.


이것이 자신이 저지르는 범죄에 대한 의식이라도 되는 것 처럼.


D는 자신이 만들어둔 코드를.

자동화된 실행파일을.


실행.



"...푸억."


하지 못했다.


하얀 복면을 덮는 붉은 방울.

입가부터 번져 올라오는 붉은 파문은 검붉은 얼룩이 되어 얼굴 위를 올랐다.


면을 타고 흐르는 붉은 자국은 곱게 접힌 나비의 형상이 된 채.



D는 그렇게 뒤로 쓰러지며...


이국에서 돌아온 D는.

자신이 아끼던 정원을 불태우기 위한 횃불을 든 채.


그대로 죽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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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