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글 모음

꽤 오랜시간동안 기다렸지만 초조함따윈 느껴지지 않는다.


오랜만에 찾아온 호기심

천천히 즐기는것도 나쁘지 않다.


... 드디어 왔나?


모습을 드러내는 당찬 후배는 방금 헤어졌을 때의 모습 그대로 

내 앞에 천천히 다가왔다.


"이야기는 끝난건가?"


"네, 선배. 오래 기다리게 했군요."


"상관없다. 내가 멋대로 널 따라다니기로 한거니까 미안해 할 필요는 없어."



아야노코지가 내 옆을 지나가자 나도 곧 뒤따라가 아야노코지와 나란히 걷는다.



"왔던 길을 돌아갈 생각인가?" 


"원래는 다른 곳으로 갈까했는데 내일 첫 지정구역을 대비하려면 

아까 그 장소로 돌아가는게 좋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그 거친 후배가 아직 있을지도 모른다." 


"방금 GPS서치를 사용했을 때 호센은 그 자리에 없었어요.

정신을 차리고 어디론가 이동했겠죠." 


"그래?" 



한동안 대화없이 우리 둘은 나란히 길을 걸어간다.

원래 말이 많은 후배는 아니지만 

이정도로 대화가 끊어지는 간격이 길다면 뭔가 생각에 빠져있다는 거겠지.

 

침묵을 깨고 내가 먼저 말을 걸었다.



"꽤나 침착해 보이는구나 아야노코지. 

그다지 낙관적인 상황은 아닌 것 처럼 보인다만.." 


" .. 왜 그렇게 생각하죠?" 


" 네가 고작 그 고릴라같은 후배가 신경쓰인다는 이유로 점수를 버리면서까지 

GPS서치를 쓸거라는 생각은 안 든다.

너희반 리더와 얘기를 나누면서 그 기능을 썼다는건 뭔가 중요한걸 알아내기 위해서 

혹은 긴급하게 알아볼 것이 생겼다는거지,

그런걸 감안하면 별로 좋은 상황은 아닐거라는 느낌이 든 것 뿐이다, 

틀린가?" 


내 말에 나를 향해 고개를 돌리고 내 얼굴을 빤히쳐다보는 아야노코지,

나 역시 그를 똑바로 쳐다본다.


표정의 변화는 없지만 분명 놀라고 있다.


그건 그렇고   이녀석, 눈동자가 짙고 생기가 없다.


그렇다는건,



"선배는.. 재미있는 분이네요." 


 "훗, 후배한테 칭찬을 듣는 것도 기분이 괜찮구나." 



아야노코지의 깊고 짙은 눈동자가 뭔가를 알아내려는 듯이

나에게서 떨어지지를 않는다.


허나.. 그 정도로는 내 속을 볼 수 없다.



"왜 그러나? 

그렇게 빤히 쳐다보면 나에게 흑심을 품었다고 오해할지도 모르겠구나 " 



미소를 지으며 시덥잖은 얘기를 늘어놓자 그제서야 시선을 거둬들인다.



"선배의 말대로 지금 저희반의 상황은 그다지 좋지않네요" 


"호오. 그런 말을 나에게 해도 괜찮나?" 


"선배에게 뭔가를 숨기는건 무의미할거란 생각이 들었어요." 


"그럼 어디 얘기를 들어볼까?" 


"저희반 동급생이 속한 2개의 그룹이 사고를당해서 그룹멤버들이 리타이어했어요.

그 그룹에 속해있던 저희반친구 2명은 각각 혼자가 되어버렸죠.

그 친구들을 구하기 위해 그룹확장과제에 도전하고 있지만

3학년 선배들이 견제하고 있어서 쉽지 않네요." 



아야노코지는 순순히 자기 반의 사정을 털어놓았다.



"그런가. 나구모녀석, 내 충고를 전혀 듣지 않았다는 거네." 


"이대로라면 홀로 남아버린 두 친구는 리타이어되거나 최하위로 떨어질거에요." 


"확실히 곤란하게되었구나. 그래서 어쩔생각이지?" 



잠시 멈칫하던 후배의 행동을 난 놓치지 않았다.



"행동방침은 리더가 정합니다. 전 거기에 따를 뿐이고요." 



이 어줍잖은 말은 아야노코지의 습관인가?

여전히 서툰회피를 고집하는군.



"그럼 질문을 바꾸지, 그 '리더'는  어떻게 할 생각이지?" 



나를 속이는건 불가능하다는걸 깨닫게 하기 위해

다시한번 날카로운 말로 후배를 찔렀다.



" ... 내일 하루 지켜보고 어떻게 할지 결정하기로 했어요." 



처음부터 그렇게 얘기하면 되었을 것을


여전히 날 경계하고 있는 모양인데,

뭐. 당연하겠지만서도..



"아직까진 이렇다 할 대책은 없는 모양이군.

내일 너의 행동에 따라 어떻게 할지 정한다는 말이구나. 

게다가 같이 다니는 내가 신경쓰이기도 할  테니까 

지금은 섯불리 뭔가를 말할 수 도 없겠지."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는 후배는 정면을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재미있군. 

속을 간파당하면서도 뒤로 물러서는 기색을 보이지 않는건 칭찬할 만하다.

더 놀아주고 싶지만 이대로는 내 재미가 줄어들 염려가 있으니

이쯤에서 물러서 주기로 할까.


"아야노코지.  내일 하루 지켜보고 어떻게 할지 결정하는건 나도 마찬가지다.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저에게 무엇을 기대하시는지 모르겠지만, 나쁜 쪽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어쨌든 최선을 다해보죠." 


"그걸로 충분하다."


우리는 어느새 아까 결투가 있었던 장소에 도착했다


"그럼 이만 쉬도록 할까요?"


"알겠다. 내일 아침 이곳에서 기다리지.

내일의 데이트 기대하고 있으마."


그 말을 남기고 나는 후배와 멀어졌다.


내일이 기대되는걸.. 부디 내 기대에 부응해주길 바란다, 아야노코지.





텐트에 누웠다.


혼자있는 시간이 길어지면 쓸데없는 생각이 늘어난다 

사색에 빠지는걸 싫어하진 않지만

오늘만큼은 별로 좋은 느낌이 아니다.


늘 혼자였었는데


혼자가 편하고 남들과 관계를 맺는 것 따위 무의미하다고 생각해왔건만


지금의 내 모습은 전혀 그렇지않다


이 학교에 와서 많은 것이 변했다


고1동안 친구의 존재와 자신의 감정이 피부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 덕분일까? 1학년의 끝자락에 다다르고 나서야 겨우 오빠의 진심을 알게되었다


그리고 오빠에게 다다르는 과정에서 난 깨달았다.


남들보다 다소 우수하다고 자만하며 혼자만의 세계에 갖혀 있었다는걸.


나는 생각보다 나약한 인간이었다.



그리고 이번 시험에서 나는 진짜 고독을 느꼈다.


다른사람들과 함께 있던 공간에서의 혼자와

아무도 없는 공간에서의 혼자는 

전혀 다른 차원이었다.


내가 원했던 건 이런 고독이 아니었다.


지금은 그걸 알 수 있다.


생각해보면 당당하고 남들 위에 서있던 오빠도 늘 누군가와 함께 있었다.


나는.. 고독함과 고고함을 착각하고 있었다.


혼자를 추구하던 내가 

지금은 다른사람과 함께하길 바라고 있다. 



나를 이렇게 변하게 만든 그 남자는 


여전히 그 모습 그대로다.


모두가 조금씩 변하고 있는데 그만은 변하지 않고 있다.


아니.. 그건 나의 착각이려나..

내가 모르는 방향에서 변화가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그에 대해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건 특별한 감정이 있어서가 아니다.


다만... 

아야노코지라는 인간이 내 상식으로 이해되지 않는 존재이기 때문.

그가 어떤 인물인지 1년 반이 넘은 지금까지도 아직 겉모습밖에 보이지 않는다.


방금 전에도 나는 그의 속생각을 눈치채지 못한채 그를 보내버렸다.





북쪽하늘을 쳐다보던 아야노코지군은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나와 그 사이의 거리는 몇 발자국 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데 


어째서인지 상당히 멀게 느껴진다.



이윽고 그의 입에서 무거운 목소리가 들려온다.



"호리키타. 반을 부탁한다."


"잠깐,  설마 당신.. 아무런 조언도 안해줄 셈이야?"



내 말은 아랑곳 않고

그냥 내 옆을 지나쳐서 가버리는 아야노코지군의 등을 향해 소리쳤다.



"아야노코지군! 뭔가 얘기를 하고 가야.."


"호리키타"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계속 말했다.

쫓아가려던 나의 발걸음을 그의 목소리가 막았다.



"내가 일일이 설명하지않아도 넌 어떻게 행동해야할지 알고 있을거야."


"뭐?"


"다만.. 내일 하루동안 상황을 지켜보고 나서 행동해줘."



그 말을 끝으로 아야노코지군은 사라졌다.


나는 그저 망부석처럼 아야노코지군이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았다.



'반을 부탁한다'는 무거운 말 한마디에서


작별을 고하는 듯한 느낌도 든다.

나에게 기대하는 듯한 느낌도 든다.

뭔가를 준비하려는 듯한 느낌도 든다.


그런 다양한 감정이 밀려 들어온다.



대체 너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아야노코지군..


그의 생각을 알고싶다.



아니 틀려




그에게 인정받고 싶은걸지도..



아니  그것도 틀려




그와 나란히 서고 싶다.




나는 언제쯤, 그의 생각을 알 수 있게 될까?



오늘밤은 그 어떤 날보다도 생각이 많은 밤이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