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글 모음

2X세기의 얀챈 죽돌이 김얀붕은 섹스로이드(줄여서 안드로이드)를 사는 게 꿈이었어.


얀붕이 월급으론 죽어라 모아도 될까 말까였지만 운좋게 복권에 당첨되는 거지.

당연히 얀붕이는 광희난무했어. 오직 이 날만을 기다리며 한 푼 두 푼 모아오고 있었는데 이런 행운이 찾아온 거니까.


헐레벌떡 집으로 달려간 끝에 얀붕이는 카탈로그부터 꺼내들었어. 

하도 손을 타서 너덜너덜해진 카탈로그는 모델별로 안드로이드가 소개되어 있는 물건이었어.

살 돈은 없었지만 어떤 안드로이드를 살까 상상하며 얀붕이가 읽어보던 물건이었지.


덜덜 떨면서 책장을 넘긴 끝에 얀붕이는 한 페이지에서 멈춰섰어.

책갈피로 표시되어 있는 그 페이지에는 얀붕이가 늘 사고 싶었던 모델이 설명되어 있었지.

미치도록 비쌌지만 얀붕이는 신경쓰지 않고 주문을 넣었어.


그리고 손가락을 꼽아가며 기다린 끝에 안드로이드가 집에 도착한 거지.

얀진이라고 이름 붙인 그 안드로이드가 일어나는 걸 본 것 만으로도 얀붕이는 행복해 죽을 것 같았어.

막상 현실이 되면 별로란 얘기도 있지만 적어도 얀붕이에겐 아니었어. 

오히려 날아갈 것 같이 행복하기만 했지.


당첨금을 탕진하다시피 한 탓에 얀진이가 생긴 걸 빼면 변한 건 거의 없었지만 얀붕이는 신경쓰지 않았어.

애초에 그런 걸 신경쓰는 놈이었다면 얀진이를 사지도 않았었겠지. 

집에 나갈 때면 얀진이가 배웅해주고, 집에 돌아오면 얀진이가 차려준 밥을 먹을 수 있단 것만으로 얀붕이는 행복했어.

아, 물론 무표정한 얼굴로 얀진이가 해준 특별한 '봉사'도 빼놓을 수는 없었지.

미치도록 탐닉한 끝에 삼도천 근처까지 갔다왔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은 일이었지.

누누히 말했지만 얀붕이는 1등급 로봇박이였거든.


하지만 얀붕이가 모르는 사이에 파란의 씨앗은 이미 싹을 틔우고 있었어.

얀붕이가 만들었던 안드로이드 구매용 적금을 얀진이는 이미 발견한 뒤였거든. 

사실 얀진이도 처음에는 그리 신경쓰지 않았어. 안드로이드를 하나 사던 말던 그건 주인의 권리 아니겠어?

같은 안드로이드에 불과한 얀진이가 뭐라 할 수는 없는 일이었지.


근데 그건 얀진이 생각이고, 순애 회로는 생각이 좀 달랐어. 

주인이 안드로이드를 사려고 한 흔적이 보일 때마다 얀진이는 조금씩 흔들렸어. 

당연한 일이었지. 정말로 사랑한다면 질투가 없다는 건 이상한 일이잖아?

얀진이의 제작자들은 '조금'의 질투는 사랑에 당연히 포함된다고 생각한 건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지.


그리고 그 흔들림이 절정에 달한 건 카탈로그를 발견하고 나서였어.

그 카탈로그에는 얀붕이의 온갖 망상이 빼곡히 적혀 있었거든. 

이 모델은 이런 데가 너무 좋더라, 이 시리즈는 이런 부분이 너무 좋더라. 

그런 내용을 볼 때마다 얀진이는 흔들릴 수밖에 없었지. 


얀붕이는 자신을 원한 게 아니라, 사고 싶은 안드로이드 중 자기를 골랐다는 생각 밖에 들지가 않았거든.


만약 다른 안드로이드가 오게 된다면 어떻게 되는 걸까.

나는 주인님의 안드로이드 중 하나에 불과하게 되는 걸까?


그건......


찰칵. 얀붕이가 현관문을 여는 소리를 듣고 얀진이는 간신히 생각에서 깨어날 수 있었어.

하지만 여느 때처럼 얀붕이를 맞이하러 가는 사이에도 어두운 망상은 얀진이의 머릿속을 멤돌고 있었지. 


그 때부터였을까? 얀진이의 봉사에는 기묘한 열기가 깃들게 됐어.

얀붕이도 뭔가 변했다는 걸 눈치챌 정도였지만 얀붕이는 신경쓰지 않았지. 

얀붕이는 '무표정 메이드 최고!' 같은 생각밖에 없는 놈이었거든.


단지 그 날 이후부터 얀붕이 집의 가전제품이 묘하게 똑똑해졌다는 사실만은 알아줬으면 해.

싸구려 가전에 그런 기능 따윈 없었을 테지만 가전이 얀붕이 취향을 잘 맞춰준다면 좋은 일 아니겠어?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