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arca.live/b/tsfiction/31098131


[완성됐어.]

[지금 갈게.]

 

밝기를 최소로 한 스마트폰 액정 화면 너머로 연달아 찍힌 문자는 그러한 것이었다. 세이는 손을 통해 전달해오는 스마트폰의 진동을 느끼면서, 그저 망연하게 그 두 문장을 보고 있었다.

 

박진성, 그 녀석이 정말로 약을 만들고 있다는 것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들었으니까. 시중에서 구하기엔 너무 비싸니까. 그 녀석은 그럴 능력이 되니까. 다소간의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고는 하지만, 언젠가는 가능할 테니까.

 

‘언젠가’라는 것은 어렴풋한, 어쩌면 마치 죽음처럼, 실재하지만 영원히 오지 않을 것만 같은 관념상의 사건이었다.

 

진성을 움직이게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죄책감? 부채 의식? 세이로서는 알 수 없었다. 그가 단순히 친구를 위한 애우심, 혹은 우정과도 같은 것으로 움직이는지, 혹은 알량한 정의감, 혹은 봉사의식, 혹은 그로 말미암아 오는 내면의 충족감, 요컨대 자기 자신의 감정적 충족을 위하여 움직이는지, 그것도 아니면…….

 

그러나 이러한 것들을 생각하기에는 너무 오랜 시간이 흘렀다. 

 

세이가 여자로 변하고도 벌써 3년이 흘렀다.

 

격변 이후의 3년은 세이에게 있어 두 번째 사춘기와도 같았다. 스물셋에 찾아온 사춘기라니. 단어 선택은 우스웠지만, 그만큼 그녀의 상태를 잘 나타내어줄 말이 없었다. 

 

어쩌면 있을지도 모르겠다. 세이의 머릿속에서 어렴풋하게, 호숫가의 안개 너머로 뿌옇게 낀 그 언어야말로 세이가 겪은 것을 표현할 단어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녀는, 요 3년간, 그 실루엣조차 보지 못했다.

 

그러니까, 사춘기다.

 

2차 성징이 오고, 가치관이 확립되고, 그렇기에 인생에 있어서 가장 기나긴 순간. 임종의 순간 돌이켜보면 분명, 이후의 그 모든 순간보다도 길게 느껴질 순간.

 

세이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 그녀의 모든 가치관이 다시 한번 재정립되는 순간.

 

우웅-

 

[가도 되지?]

 

대답이 없자, 스마트폰 너머의 상대는 다시 한번 메시지를 보냈다. 그제야 세이는 액정 자판을 두드렸다.

 

[응.]

[오는 길에 감기약도.]

 

우웅-

 

[감기 걸렸어?]

[알았어.]

 

기본 바탕화면으로 되어있는 옅은 하늘색의 메신저 창을 보면서 세이는 생각했다. 김진성과의 대화방. 이곳에서 ‘ㅇㅋ’가 ‘알써’가 되고, 다시 ‘알써’가 ‘알았어’가 된 것은 언제부터였던가. 동시에, ‘ㅇ’이 ‘응’이 되고, 다시 그것이 ‘응응’이 되는 것은 언제였던가.

 

액정에 닿은 엄지 끝에서 맹한 열기가 솟아올랐다. 국부 마취를 한 것처럼 손가락 끝으로 아무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동시에 아무런 감각이 없다는 감각이 느껴졌다. 기이한 열기였다. 나아가 발바닥에도 감각이 없었다. 사지의 감각이 옅어지자 부유하는 느낌이었다. 몸뿐 아니라, 영혼마저도.

 

─감기에 걸려서 그래.

 

억지로 머리를 좌우로 거칠게 흔들자 조금은 안개가 걷히는 기분이었다. 세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후, 그녀가 샤워를 마치고 헤어드라이어로 머리를 말리고 있자니 노크가 방을 울렸다. 헤어드라이어의 강렬한 소음 속에서도 좁은 한 칸 남짓한 자취방 안으로 침범한 노크 소리는 천둥소리처럼 느껴졌다.

 

세이가 문을 열자 머리 하나는 더 높은 곳에서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이 얼굴을 봐온지 어느덧 18년째. 익숙한 얼굴, 익숙하지 않았던, 그러나 다시금, 익숙해져 버린 눈높이.

 

진성은 현관으로 들어오면서 세이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열이 좀 있네. 해열제 사 오기를 잘했다.”

 

세이는 또다시 비슷한 것을 생각했다. 진성이 자신의 이마에, 자신의 얼굴 위에 이토록 자연스럽게 손을 얹기 시작한 것은 또 언제부터일까. 

 

그에게 나는 남자일까, 여자일까. 

그리고 나는.

 

3년의 시간은 그녀에게 해답을 주지 않았다. 3년의 시간이 세이에게 준 것이라고는 오로지 질문에 답하지 않고 적응하는 법뿐이었다. 적응이라기보다는, 순응이라고 하는 것이 가까웠다.

 

“두 가지 약을 같이 먹으면 어찌 될지 모르니까 일단 이것부터.”

 

진성이 가지고 온 두 봉투 중 하나를 흔들어 보였다. 약국 표시가 붙어있는 하얀 봉지는 그가 흔들지 않은 반대쪽 손에 들려있었다.

 

─너에게 나는.

 

세이의 안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진성아, 지금 네가 하는 행동들의 의미를 너는 알고 있니. 너를 움직이게 하는 것은 무엇이니. 최초의 너를 움직이게 한 것은 무엇이니. 그리고 지금의 너를 움직이게 하는 것은 무엇이니.

 

조금 전부터 유난히도 머리가 어지러웠다. 진성에게서 온 그 두 줄의 메시지를 받았을 때부터였다. 물줄기를 맞고 온 지 십 분도 안 지났는데 온몸이 뜨거웠다. 어지러움 속에서도 질문은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진성아, 너는 왜. 진성아, 너는 알고 있니. 네 앞에 있는 나는 누구야. 말해, 나는. 나는.

 

“세이야?”

 

진성의 부름에 세이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그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응. 그것부터 먹어야겠지.”

“3년의 결실이니까.”

 

─감기에 걸려서 이래.

 

“그러고 보니 이거 꽤 쓴데. 세이 너 쓴 거 전혀 못 먹었지?”

“…많이 써?”

“세이 네가 살면서 먹어본 것 중에 가장 쓸걸?”

 

진성이 장난스럽게 미소지었다. 입술이 시원하게 호를 그렸다.

 

“…….”

“사실 걱정 안 해도 돼. 방법이 있으니까. 밥 안 먹었지?”

“…응.”

“오케이.”

 

3년 동안 세이에게 있어 가장 어려운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진성이었다. 동시에 가장 편안한 사람이 있다면 그것 역시 진성이었다. 

 

진성은, 3년 전 세이가 여자로 변하고 나서, 모두가 등을 돌리거나, 현실을 부정하거나, 걱정이라는 이름으로 당장 닥쳐온 현실의 문제를 물색하는 동안 가만히 그녀를 마주한 유일한 사람이었다.

 

─야, 이세이.

─…….

─돌아가고 싶냐?

─말이라고.

─알았다. 기다려 봐.

 

그날 진성을 움직이게 한 것이 무엇이었을까. 세이는 여전히 그 답을 알지 못했다. 다만 그녀가 아는 것은, 그 후로도 3년간, 비록 알게 모르게 사소한 것들이 변하기 시작하여 이제는 너무나도 많은 것들, 예컨대 목소리, 눈짓, 말투, 태도, 몸짓, 손짓, 입술이 휘어지는 방향, 눈이 크게 뜨여지는 빈도, 시선이 마주치는 정도와 같은 것들이 다 변질되어 버렸지만, 그럼에도 진성은 여전히 세이를 세이로 보는 유일한 사람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그는 세이에게 있어 가장 편한 사람이었고, 동시에 가장 두려운 사람이었다.

 

“두부찌개가 좋겠다. 그것 말고는 마땅히 생각나는 게 없네.”

 

멋대로 냉장고를 들여다본 진성은 그렇게 말한 후 홀로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열기 속에서 세이는 다시, 또다시 생각했다. 

 

자신이 아직 살아있는 것은 진성 때문이 아닐까. 

 

그것은 어떠한 추상적인 의미 혹은 로맨틱한 울림도 내포하지 않는 표면 그대로의 의미였다. 

 

세이가 여자가 된 후로 진성은 시도 때도 없이 그녀를 찾아와 식사를 챙기곤 했다. 처음에는 컵라면, 삼각김밥, 햇반.

이후 그것은 시중에서 파는 도시락이 되었고 포장해 온 인근 식당 음식이 되었으며 마침내 그가 직접 만든 요리가 되었다.

 

사람은 먹지 않으면 죽는다. 그러므로, 그 모든 행간과 배경을 벗어던지고서, 식음을 폐하고 방에 틀어박혀 있던 3년 전의 세이의 심리상태라든지, 현실감각이라든지 그러한 것들은 전혀 생각하지 않더라도, 어쨌든 그녀에게 영양을 공급한 것은 진성이었으므로 그녀를 살린 것도 진성이었다.

 

박진성.

이세이의 18년 지기, 박진성.

15년 간은 남자 이세이와 친구였던 박진성. 

다시 3년간, 이번엔 여자 이세이의 친구였던 박진성.

 

“서 있지 말고 누워서 좀 쉬고 있어.”

 

멍하니 서 있는 세이를 뒤돌아보며 진성이 말했다. 

 

세이가 그의 말마따나 베개에 머리를 올렸다. 열기가 침대 아래에서 솟아올라 그녀의 몸을 끌어당겼다. 

몸은 보이지 않는 손아귀에 잡혀 아래로 가라앉고, 또 가라앉고.

 

잠시 후, 어깨를 흔드는 부드러운 손길에 세이는 쪽잠에서 깨어났다.

 

“다 됐어. 밥 먹고 자.”

 

세이가 일어나자 눈앞에는 작은 상과 그 위에 올려진 두부찌개, 그리고 백반 한 그릇이 있었다. 옆에는 진성과 함께 장을 보며 사 왔던 반찬들이 작은 그릇들 위에 덜어져 있었다.

 

세이가 밥상 앞에 앉자 진성이 맞은편에 앉았다. 수저는 한 세트뿐이었다.

 

“너는?”

“난 못 먹지.”

 

그가 가볍게 대꾸했다. 세이는 자신의 앞에 놓인 두부찌개를 내려다보았다.

 

“이건 꼭 물로 먹을 필요가 없거든. 이제껏 좋지 못한 사례도 없었고.”

 

불현듯이 세이의 목에서 기침이 튀어나왔다. 콜록콜록하고, 세이는 한동안 죽을 기세로 기침했다. 목이 따가웠다. 진성이 심각한 표정으로 일어나서는 그녀에게 다가왔다. 한 손으로는 등을 쓸고 나머지 한 손으로는 물컵을 입에 가져다 댄다. 세이는 간신히 기침을 억제하고는 그가 내민 물컵을 받아들었다. 물을 마시는 동안에도 진성은 계속해서 그녀의 등을 쓸었다.

 

“괜찮아?”

“…응.”

 

기침이 완전히 멎자 진성은 반대편으로 돌아갔다.

 

세이는 다시 앞에 놓인 두부찌개를 내려다보았다.

 

“…약효는 언제쯤 나타나?”

“먹고 이틀 정도 뒤.”

 

이틀. 그녀의 3년을 되돌리는 시간에 필요한 것은 단 이틀.

여자 이세이가 다시 박진성의 소꿉친구, 남자 이세이로 돌아가는데 걸리는 시간, 단 이틀.

 

머리가 어지러웠다.

 

“너는.”

 

세이는 말문을 열었다가 이내 우물우물하더니 입술을 꾹 닫았다. 말이 되지 못한 언어는 눈을 통해 새어 나왔다. 좌우로 옅게 흔들리는 세이의 동공을 진성은 가만히 마주 보았다.

 

3년 전 그날처럼.

 

“…세이 너는.”

 

입을 꾹 다문 세이 대신, 진성이 입을 열었다.

 

“지난 2년간 돌아갈 거라고 말해왔지.”

 

진성이 매번 찾아와서 세이의 입에 강제로 숟가락을 물리기를 1년째, 세이는 마침내 그의 방문을 거절했다.

 

─이젠 내가 알아서 먹을게.

 

동시에 세이는 이렇게 말했다.

 

─날 원래대로 돌려준다고 했지? 기다릴게.

 

틀어박혔던 세이의 안쪽을 연신 두드렸던 것은 진성의 요리와 더불어 진성이 매번 건넸던 말이었다. 그는 기다리라고, 자신이 반드시 원래대로 돌려줄 거라고, 그러니까 다 괜찮을 거라고 말했다. 그 진부하고 상투적인 격려가 정말로 상투적이라고 느껴질 때까지, 아예 인사말처럼 여겨질 때까지 그는 1년간 같은 말을 건넸고, 그리하여 남은 2년간, 이번에는 그녀가 그 말을 받아서 앵무새처럼 반복하곤 했다. 난 원래대로 돌아갈 거야. 나는…….

 

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그렇게 말했는데.

 

약이 곧 완성될 것 같다고 그가 말했던 근래의 한 달간, 매번, 아무런 자각도 없이 그렇게 말해왔는데.

 

세이는 고개를 들어 진성을 바라봤다. 진성은 마치 세이가 무어라 말하는지 알고 있는 것처럼 아련한 쓴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먹어도 돼?”

“그건 세이, 네 자유야.”

 

─이젠 내가 알아서 먹을게.

 

먹느냐 마느냐, 그것은 순전히 세이가 정할 일이었다. 설령 그것이 진성이 차려준 요리라 할지라도.

 

사춘기는 영원과도 같다.

2차 성징이 일어나고, 가치관이 확립하고 관념이 격변하는 시기.

기나긴 인생에서 그 무엇보다도 기나긴 시기. 영원과도 같은 시기. 영원토록 기억 속에 남아있을 불멸하는 시기.

 

그렇기에 나의 3년은 영원이었다. 

그 안에 있는 너 역시, 나의 영원이었다. 나의 영혼이었다.

 

세이는 숟가락을 놓았다. 진성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조용히 물었다.

 

“안 먹어?”

 

머리가 어지러웠다. 손발 끝이 국부 마취를 당한 것처럼 아련하게 저릿했다. 감각이 차단되고, 동시에 감각이 차단되었다는 감각이 신경을 타고 올라왔다. 열기가 몸을 감쌌다.

 

사지의 감각이 옅어지자 부유하는 느낌이었다. 몸뿐 아니라, 영혼마저도.

 

─감기에 걸려서 그래.

 

“입맛이 없어.”

“입맛이?”

“응.”

“…그러면 이건 버려야겠네.”

 

진성은 그렇게 말하며 찌개 그릇을 들었다. 그의 3년이 가루가 되어 녹아있는 두부찌개. 그녀의 3년을 앗아갈 진성의 요리를 세이는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았다.

 

“응, 입맛이 없어.”

 

그녀는 진성이 온 이래로 끊임없이 읊조리던 그 말을 다시 한번 중얼거렸다.

 

“감기에 걸려서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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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해서 뭐라도 해야겠다 싶었는데 때마침 대회글이 올라왔길래 단편 하나 쓰고 가네요. 덕분에 시간 잘 보냈습니다.


본인의 의지로 되돌아갈 수 있는 길을 걷어차는 암타의 순간을 포착해서 써봤습니다.


'스마트폰 두 줄의 메시지'가 '임테기 두 줄의 메시지'가 되는 과정도 재밌을 것 같긴 한데, 그러면 너무 본격적으로 길어질 것 같으므로 쓰는 건 여기까지만.


조금 비몽사몽한 상태라서 일단 올리고 나서 이후 조금씩 퇴고를 할 수도 있을 거 같아요. 귀찮으면 안 할 수도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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