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글 모음

9편: https://arca.live/b/reader/39548141?p=2


오랜만에 읽을 거리가 생긴 한수영은, 여유롭게 첫 장을 펼쳤다. 

그리고는 첫 문장을 보자마자 훗- 하고 자그마한 미소를 띠었다. 

소설을 준 그 남자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어쩐지 너무나 익숙한 문장이었다. 


「이 이야기가 너를 살릴 수 있다면.」


그 미소를 입가에서 떠나보내지 않은 채로, 한수영은 가만히 책장을 넘겼다. 

사락- 사락- 종이가 가만히 부딫히는 그 따스한 소리만이, 한동안 그녀의 병실을 채웠다. 

웃기도 했고, 울기도 했다. 

자신은 전혀 모르는 이야기였으나, 어째서인지 읽으면 읽을수록 뭔가가 기억나는 듯한 이질적인 느낌에 한수영은 잠시 자신의 머리를 부여잡았다. 


"하아.. 하아.."


곧이어 쨍한 아픔이 자신의 머리를 침식하자, 한수영은 새된 신음을 흘렸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아픔을 잊으려 그녀는 또다시 자신의 손에 들려 있는 종이더미를 넘기기 시작했다. 

재미는 없었다. 

고리타분하고 시시콜콜한 이야기였으며, 필력 또한 갓 소설에 입문한 초보가 쓴 듯 엉망진창이었다.

게다가 설정 놀음은 또 얼마나 자세한지 보고 있으면 머리가 다 아플 정도였다. 

본래의 한수영이였다면, 그냥 몇 문장 읽다 말았겠지만, 어째선지 그 글은 그만 읽고 싶지가 않았다. 


"푸훗."


읽으면 읽을수록 사람을 더 끌어들이는, 말마따나 '흡인력'이 있는 소설이었다.

아포칼립스 속에서 존재하는, '스타 스트림'이라는 시스템이 내리는 시나리오를 따라 살아가는 세 명의 이야기를 담은 소설.

주인공 패왕, 작가 흑염마황, 독자 구원의 마왕.

뭔가 유치한 이름에 어디선가 본 듯한 이야기들이었지만 한수영은 아주 오랜만에, 그것을 재밌게 읽었다. 

그리고 중반부에 들어선지 얼마나 되었을까, 흑염마황이 시나리오에 덫에 걸려 73번째 마왕이 되어 사망하는 그 씬에서, 한수영의 눈에서 투명한 액체가 또르르 흘러내렸다. 


뭐야.

나 왜 이래.

별 것 아닌 이야기잖아.

어느 소설에서나 있는, 등장인물이 대신 죽는.. 그저, 그런 이야기일 뿐이잖아. 

그냥 3류 소설의 주인공이 죽었을 뿐인데.. 나 왜 자꾸, 울음이 나지..?


「아마 이 때쯤 왔으면, 기억이 났을 거라고 생각해요. 누나랑 나만 아는 이야기니까요. 참. 이젠 누나도 아닌데. 내가 누군지 궁금할 거에요, 그렇죠? 그건.. 아마 엔딩 끝에 있을 거에요. 그렇다고 건너뛰진 말아요. 짤릴 각오 감수하고 쓴 거라고요.」


하는 주석 같지 않은 주석을 읽고 나자, 한수영은 뭔가를 알 것만 같았다. 

그래.. 분명히 그 때 어디선가 봤던 인상이라 생각했었는데. 

더 이상 한수영은 책장을 천천히 넘기거나, 문장을 음미하거나 하지 않았다. 

그저 탐욕스러운 포식자처럼 계속 읽고, 읽고, 또 읽을 뿐.


촤라락- 


책장이 넘어가는 소리의 간격이 점점 좁혀져왔고, 중반부를 독파한지 채 3시간도 되지 않아 한수영은 책의 에필로그에 다다랐다. 

에필로그.

시나리오를 모두 클리어하고, 방주 탈출을 막은 후.

이 세계의 진실을 파헤치러 발걸음을 옮기는 3명의 주인공. 

도깨비 왕을 쓰러뜨리고, 최후의 벽에 기록되는 죽음의 설화를 막아내고, '구원의 마왕'의 안에 있는 도서관에 들어간 그들이 본 것은. 

어린 '구원의 마왕'이었다. 


"하하.."


허탈했다.

자신이 보아온 그 비극들이, 겨우 한 아이의 현실 부정에 의해 만들어진 거였다니.

이만큼 허탈하고 슬픈 진실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한수영은 눈물을 짜냈지만, 그럼에도 책장을 넘기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힘들고 고독한 독서였지만 마침내 그녀는 끝에 도달했다.

회귀한 일행들이, 마지막으로 희생한 구원의 마왕을 구한 후.

깨어난 구원의 마왕이 희게 미소를 짓는 씬과 함께, 한 문장을 마지막으로 소설은 끝이 난다. 


「이 것은, 단 한 사람의 독자를 위한 이야기이다.」


그 '단 한 사람의 독자'.

그것이 누군지를, 한수영은 이미 알고 있었다. 

소설은 끝이 났지만 아직 종이는 계속 이어졌다. 


「안녕. 결국엔 다 읽었나 보네. 재미는 없었을 거야. 나름 재밌게 쓴다고 쓴 건데, 누나 눈엔 당연히 부족하게 보이겠지. 솔직히 지금쯤이면 알아냈을 거라고 생각은 하는데, 혹시 모르잖아? 10년 전에, 누나한테 인생을 구원받았던 조그만한 아이 기억해? 왜, 몸은 맨날 멍투성이에다 눈에는 묘하게 생기가 없고..」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그 아이가 떠난 이후로부터, 그녀의 세계 또한 마찬가지로 멸망한 세계였는데. 

알지.

왜 몰라.

하는 말을 속으로 삼키며, 한수영은 책장을 계속 넘겼다. 


「.. 삶을 선사받았다가, 송두리째 빼앗겨버린 그 아이는 처음에는 절망했어. 매 밤마다 누나가 죽는 꿈을 꾸었고, 아무리 발버둥쳐봐야 바뀌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내곤 절망했어. 그리고는, 색이 없는 아이의 삶은 20년간 쭉 이어졌었지.」


나도..

나도 그랬어.


「그리고,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던 그 아이는 다 커서 28살이 되었어. 넥타르라는 해동제를 발견한, 천재 연구원이란 타이틀도 쥐었고. 그리고 그 아이가 처음으로 구원하겠다고 마음먹은 건, 자신을 구원해준 그 사람이야. 맞아. 누나. 누나를 줄곧, 구원해주고 싶었어.」


그 문장을 읽은 순간, 한수영의 머리에는 온갖 생각이 휘몰아쳤다.

너였구나.

그래 너였어.

그때 그 아이가, 바로 너였어. 


「일주일 후에 병문안 갈게. 그러니까, 기억은 안 나더라도 그 때까지 기억하도록 노력해 줘. - 김독자」


한수영은,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왜 그랬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렇게 하염없이 펑펑 울었다. 

하늘에서는 첫눈이 내리고 있었다. 



나 뭘쓴거냐.. 뭐쨋든 맛있게들 머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