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글 모음


"차에 꽃다발을 두고 왔구나"


나는 우편물을 찾기 전에 차 안에 두고 온 꽃다발을 챙겼다.

꽃이랑은 별로 친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선물로 받은 건데 이렇게 내 팽개쳐서는 안될 것 같아 이렇게 챙겨왔지.


차고 바깥으로 나오니 예진(호칭을 뭐라 할지 몰라서 일단 예진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부회장이라는 표현은 좀 딱딱하지 않은가….)

이 차고를 향해 엄지손톱만 한 리모컨을 한번 꾹 하고 누르니 차고의 입구에서 셔터가 내려와 쿵 하고 닫혀버렸다.


기술이 좋아져서 이제는 셔터맨 같은 건 필요가 없는 세상이 온 것인가!!!


어릴 적에 아빠가 가게 문을 닫을 때 쓰던 연탄집게 같은 셔터 잡히는 이제 추억의 박물관으로 가게 되는 그런 시대가 이제 찾아온 것이다!

... 사실 뭐 이렇게 좋은 곳에 사는 사람이 직접 셔터를 여닫을 필요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바로 앞에 우리와 이야기를 한 말총머리 여자가 사다리를 들고 와서 정원의 나무를 손질하고 있었다.

아마 정원사인 거겠지? 자기 몸만 한 은빛 가위로 나무 가지를 치는 모습이 퍽 인상 깊다.


싱긋-


그때 나무를 자르던 정원사와 내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나무를 자르다 말고 내게 미소를 보여주었다.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할지 몰라 다소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그녀의 말 없는 인사를 받아주었다.

저런 서비스직의 친절한 인사를 받아본 게 언제이었더라….


이제는 가물가물하다, 그래픽카드 하나 가지고 용팔이랑 멱살 잡고 싸운 게 엊그제 같은데, 인제 와서는 그 용팔이의 얼굴도 잘 떠오르지 않는다.

여기 오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래픽카드 하나, 그리고 램 하나, 엑조디아의 팔과 다리를 모으는 것처럼 조립식 컴퓨터의 부품을 모으기 위해서

또 정말로 일을 하지 않으면 자취를 할만한 생활비가 나오지 않아서 정말 먹고 살기 위해서 택배나 각종 아르바이트를 뛰고는 했지만, 


이제 와서는 그런 내 노력 하나하나가 전부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안녕 내 고급 컴퓨터야.


아마 내 자취방 앞에 가지런히 놓여 있을 내 소중한 그래픽 카드…. 그걸 살려고 각종 똥구멍 쇼를 얼마나 벌였는데

제대로 만져보지도 못하고 이렇게 이 세계에 떨어지니 기분이 매우 슬펐다.


치안도 별로 안 좋은 동네라서 집 앞에 택배가 며칠 동안 방치되어 있으면 분명 높은 누군가가 내 택배를 훔쳤을 가능성도 있을 텐데

어쩌면 내 소중한 그래픽 카드는 웬 얼굴도 모르는 깡패 새끼에게 붙잡혀서 비트코인이나 채굴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왜 그러니?"


내가 아무 말 없이 정원사 쪽을 바라보자, 예진이 내 어깨를 붙잡았다.

손이 매우 차갑고, 무게감이 있었다.


뒤를 돌아보자 예진은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미술관의 석고상처럼 딱딱한 얼굴, 웃음기 하나 없는 진지한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예진은 나보다 키가 큰 편에 속해 있었다. 내 키가 한국 남성의 평균 키인 173이라면 그녀는 어림잡아서 178? 177? 여자치고는 매우 큰 키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큰 키를 가진 그녀가 나를 내려다보는 그 시선은 솔직하게 말해서 썩 기분 좋지만은 않다.


위압 당하는 기분, 알맞은 표현이라고 하기에는 어렵지만, 굳이 비유하자면 마치 초등학교 때 골목길에서 중학생 양아치형들을 만난 것 같은 그런 느낌.


주머니를 뒤져서 10원이 나올 때마다 한 대씩 두들겨 맞을 것 같은 그런 기분이 들었다.

본능적으로 발걸음을 한 발짝 뒤로 물린다. 자연스럽게 올라가기 시작하는 팔이 본능적으로 명치와 배 부분을 가렸다.


"아니, 그냥 뭐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무것도 아니긴, 너 저기 정원사랑 무슨…. 이야기라도 한 건 아니야?"


"아니 이야기는 무슨…. 저 아무 말도 안 했어요 정말인데요."


"그래…?"


다시 뒤를 돌아보는 예진…. 또 칼부림 일어날까 봐 너무 무섭네! 진짜 무서워서 뭔 말을 못하겠네.

아까는 커피도 사주고 꽃도 사줘서, 좀 좋게 흘러가나 싶었는데 내가 보기에는 별것 아닌 거 가지고 나를 위협하는 모습이 예사롭지 않다.


분노 조절 장애 그런 건가?? 솔직히 저번 회귀 때도 그렇고 지지난번 회귀 때도 그렇고 다짜고짜 사람을 칼로 푹푹 찔러 죽이는 게 정상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뭐 굳이 따지고 보면 두 번이나 자신을 죽인 사람을 졸졸 따라다니는 나도 그렇게 정상은 아니다.


그래도 뭐 어쩌겠는가? 도망쳐봐야 부처님 손바닥처럼 귀신같이 내가 어디 있는지 알아내는 마당에 굳이 모험할 필요가 있을까?


내가 이 세계에서 살아남는 데 필요한 정보가 너무나도 부족한 상황 속에서 굳이 내게 불리한 도박 같은 건 별로 하고 싶지 않았다.

적어도 내가 어디에 있는지를 귀신같이 알아맞히는 방법이 뭔지 알아내지 못하면 그녀에게서 벗어날 일은 불가능해 보였다.


그건 그렇고 저렇게 큰 덩치를 가지고 나에게 다가가는 그 느낌이 예사롭지가 않았다.


뭔가 어린 시절부터 이런 식의 위협을 뭔가 많이 해본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든다. 뭐 부회장씩이나 올라갔으면 아랫놈들 등골 좀 꽤 부셔 먹기는 했을 것 같다만….

예진은 현관문의 잠금장치를 풀기 시작했다. 비밀번호를 누르고 현관문을 열고는 내게 입을 열었다.


"들어와"


0605…. 0605 0605 0605 0605, 0605 0605 0605


머릿속으로 0605를 외워 놓았다. 다행히 비밀번호가 4자리라서 외우기 쉬울 것 같다.

이 집에서 살고 있는데 비밀번호를 모르는 건…. 누가 봐도 수상한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으므로 나는 비밀번호를 재빠르게 머릿속으로 외워놓았다.


집에 들어오니 탁 트인 천장이 일단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거의 웬만한 집의 두 배 정도 되어 보이는 높은 천장 때문인지는 몰라도 실내는 매우 넓고 쾌적해 보였다.


신발을 벗고 본격적으로 집을 돌아다니니 모델 하우스처럼 가지런히 정리된 살림살이가 인상 깊었다.

굳이 구체적으로 표현하자면 소파에 놓인 쿠션이라던가, 탁자에 얌전히 올려져 있는 잡지 같은 것들이 정리되어있는 모습이 보기가 좋았다.


이런 건 본보기 주택에나 볼 수 있는 것들인 줄 알았는데, 이런 집을 유지하고 관리 할 정도의 능력이면 부회장 정도는 돼야지.


꼬르륵-


그때 타이밍 좋게 배꼽시계가 울리기 시작했다.

누구나 다 알 수 있을 정도로 크게 울리기 시작하는 배꼽시계의 주인은 나였다.


그야 뭐 지금까지 먹은 거라고는 커피 두 잔이 전부였으니까. 당연히 먹은 게 아무것도 없으니까- 배가 굶주린 소리를 내는 건 당연하다.

근데, 솔직히 좀 부끄러운 일이기는 하지. 좀 시선이 끌린다고 해야 하나.


"기다려, 내가 맛있는 거 해줄게."


"네 고맙습니다"


예진은 입고 있던 베이지색 외투를 벗어 거실에 있는 옷걸이에 외투를 걸었다.

그리고는 외투의 안 주머니에 있던 머리띠를 꺼내 자신의 허리까지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가지런히 한 곳으로 정리하고는 주방 의자에 걸려 있는 앞치마를 두르기 시작했다.


뭐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며 내가 머뭇거리고 있을 때-


"옷이라도 갈아입고 있어, 도와줄 필요는 없어"


속을 알 수 없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을 하는 예진, 옷이라 하면 잠옷을 말하는 거겠지?


이건 그녀의 정체와 나와의 관계에 대해서 알아낼 수 있는 기회였다. 

이 집을 둘러볼 기회가 생겼다- 그렇게 생각하며, 주방을 빠져나가려던 순간 다시 한 번 예진이 입을 열기 시작했다.


"그 꽃은 2층에 네 방에 놓으면 되겠다. 그렇지?"


"그렇네요, 그것참 좋은 생각이에요"


시발…. 2층 어디에 내 방이 있다는 거지? 물어볼까?

아니, 물어보면 이상하게 바라볼 게 분명한데. 어쩌지….


머리가 핑핑 돌면서 가슴이 어지럽다.

생각지도 못한 난관을 맞닥뜨리자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도 잡지 못할 만큼 머리에서 열이 나기 시작한다.


"...아니면 안방에 놓아도 되고"


"...일단 보고요"


꽃다발을 들고 나는 주방을 나섰다. 일단 2층에 있는 내 방을 갈까. 아니면 1층을 둘러볼까 고민을 한다. 어차피 아는 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나에게 있어서 이득이라는 생각으로

나는 일단 1층부터 둘러보기로 했다. 


좋아 여기는 일단 화장실이고…. 화장실이 내가 살던 방만하네….

욕조에서 자도 되겠다.


여기는 다용도실인가…? 가루 세제나 휴지, 아직 쓰지 않은 치약이나 칫솔 같은 것들이 가득 쌓여 있는 걸 보니까 다용도실이네, 그리고 저 구석에 있는 건….

보일러 조절기인가…? 좋아 다음 방으로 가보자.


나는 걸음을 옮겨 방문을 한번 열어보았다.

드넓은 창문으로 가을 햇살이 방안을 비추고 있었다. 햇살의 가운데에는 정말로 넓은 침대가 하나 놓여 있었고 침대의 머리맡 부분에는 커다란 액자가 걸려 있었다.


...? 저건 나잖아.


하얀색 정장을 입은 나와 지금 주방에서 요리를 하는 예진의 모습이 액자에 박혀있었다.

액자의 왼쪽 구석에는 사진사의 논평이 적혀있었다. 나는 액자에 가까이 다가가 뭐라고 적혀있는지 한번 확인해 보았다.


19년도 1월 3일. 한아름, 이예진 둘의 결혼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고영우 사진작가 백-


19년도 1월 3일??? 코멘트를 바라보던 시선을 위로 옮겨 다시 사진을 바라보았다.

19년이면... 작년이잖아?

분명 나는 이 세계에 온지 일주일도 지나지 않았건만, 사직 속에 있는 남자의 모습은 누가 봐도 내 모습이었다. 그리고 왼쪽 구석에 박혀있는 그 이름- 한.아. 름은 분명 내 이름이었다.


이건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았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니 이게 가능한 일인가???


19년도 1월 3일…. 이 세계 전이 같은 게 아니었어….

나는 왜 내 주머니 안에 듣지도 보지도 못한 DJ 로고가 박혀있는 휴대전화가 있는지 이해를 할 수 없었지만, 이제는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빙의…?


아니 솔직하게 말해서 정말로 믿을 수 없는 일이긴 한데…. 나는 이 세계의 한아름에게 빙의를 한 건가??

그거 말고는 도저히 답이 나오지 않았다. 솔직히 지금까지의 일로 예진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막상 눈앞에 이 일이 닥치니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퍼럼 얼떨떨하기 그지없다.


평행 세계의 나에게 빙의를 한 거였다니….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예전의 나였다면 분명 이런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겠지만, 요즈음에 너무 많은 일을 겪은 탓일까?


나는 빙의를 했다는 것에 그렇게 놀랍지 않았다.

아니 뭐 회귀-까지 겪은 마당에 다른 사람의 신체에 빙의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닌 일이지만.


"아름아- 많이 멀었니?"


저 멀리서 예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머릿속이 복잡하지만 일단 나중에 다시 차근차근 생각하기로 하고, 나는 침대 옆에 있는 화분에 꽃들을 꽂아놓고는 다시 주방으로 걸어갔다.

주방에 있는 예진은 검은색 앞치마를 두른 체 요리를 하고 있었다. 프라이팬에 작게 썰린 소고기를 볶아지고 있었고, 고기가 구워지는 동안 그녀는 감자와 당근 껍질을 벗기고 있었다.


이거 도와야 하나?? 이 세계의 한아름이라면 대체 어떤 행동을 했을까…?


나는 의자에 앉는 것도 아니고 일어서는 것도 아닌 엉거주춤한 자세로 그녀를 바라보다, 다시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머리가 아팠다. 분명 제대로 된 휴식을 취하지 못해서 그런 게 분명했다.


잠이라고는 아까 차를 타면서 깜빡 존 것 외에는 제대로 된 잠을 깊이 자지 못했으니까, 이렇게 피곤한 건 당연한 결과였다.

꼬르륵-


다시 한 번 배에서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피곤하고, 배고프고- 여기서 추운 것만 더해지면 완벽한 삼박자나 다름없었다.


"기다려, 맛있는 거 해줄게."


무뚝뚝한 목소리에서 왠지 모를 애정이 묻어나온다고 느껴지는 건 순전 나의 착각인 것일까?


왠지 모르게 뭔가를 만들기 시작하는 그녀의 뒷모습이 즐거워 보였다.

....그냥 저렇게 얌전하게 있으면 예쁜데….


이번 회귀 때 예진과의 만남은 최악이나 다름없었다.

솔직히 두 번이나 자신을 살해한 사람을 보면 누구나 겁에 질릴 게 분명하지 않은가?


뭐 나도 당연히 사람이니 잔뜩 쫄긴 했지만..... 이제 와서 왜 나를 두 번이나 살해했는지에 대한 정확한 이유가 밝혀지니, 예진에 대한 오해가 조금은 풀리는 것 같았다.


솔직히 말해서 마누라가 다른 놈이랑 떡 치고 있으면 그건 칼부림 각이지.

진짜로 한건 솔직히 오버긴 하지만서도...


... 의부증 뭐 그런 건가? 아무리 그런 식으로 생각해도 첫 회귀 때 내 몸을 칼로 마구잡이로 쑤신 건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너무 그녀가 급발진한 것 같은 느낌이 있긴 하지만….

이 세계의 내가 어떤 식으로 행동했는지 모르니까, 답답하네-


일기장 같은 게 있으면 편하련만-


그럼 적당히 이 세계에서 녹아들 수 있을 것 같은데- 뭐 그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새 요리가 완성되었는지 주방용 장갑을 낀 체 냄비를 든 예진이 내게 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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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중 아름이의 나이는 21살로 바꿀게요~~~~ 그냥 만으로 20살이라 퉁칩시다.

19년도 1월 3일에 군대를 가서 18개월 복무하고 20년 6월 2일에 전역했다고 합시다.

생일이 12월 생이라고 치면... 만으로 아직 20살이잖아요! 


솔직히 설정 구멍이긴 한데.. 죄송합니닷! 명목 없습니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