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글 모음

 

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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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의 향기가 퍼지는 축제가 한창인 도시. 그 절경이 한눈에 담기는 곳에서 나는 눈물을 머금는다.

 

“커헉! 에, 에이르...”

 

증오와 당혹감, 그리고 슬픔이 서린 두 손으로 너의 목을 붙잡는다.

당장이라도 정신을 잃을 거 같은 두통이 몰려와 방해하지만, 역으로 나는 입술을 깨물며 손아귀에 힘을 불어넣는다.

 

“나쁜 새끼! 죽어! 죽어! 죽으라고!”

 

괴로워하는 네가 발버둥 치는 모습에 나는 폴리모프를 일부 해제하였다.

새하얀 손에서 용의 발톱과 붉은 비늘이 드러난다. 

평범한 인간이라면 견디기도 힘든 용의 힘으로 너의 가는 생명이 오가는 통로를 우악스럽게 움켜쥔다.

 

“어째서...”

 

괴롭다는 듯 사색으로 변한 너는 바닥을 기는 벌레처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너무나 화가 났다. 어째서냐니? 왜 내가 이러는지 너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거야?

아니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빼앗는 게 너한테는 아무런 일도 아니라는 거야? 그런 거냐고.

 

“너 같은 걸... 너 같은 걸 믿는 게 아니었어...”

 

그렇게 사랑스러웠던 너의 목소리와 말이 배신감으로 변해 내 속을 태운다.

아직도 이 모든 게 꿈이길 바라지만, 이건 모두 잔혹한 현실이다. 

그 사실이 너무나도 괴로워 죽을 거 같던 나는 울분을 담아 소리를 질렀다.

 

“살려내. 우리 엄마 살려내라고! 이 개 같은 쓰레기 새끼야!”

 

“커.. 커헉...”

 

드디어 한계가 도달하였는지 목을 부러뜨리는 걸 계속해서 방해하던 너의 손이 고통에 찬 목소리보다 더 힘없이 늘어진다.

지금 이 목을 부러뜨리지 않으면, 영원히 나는 괴로울 거다.

엄마를 죽인 너를 원망하면서도 너와 함께 한 행복한 기억에 허우적대던 나는 다짐한 듯 두 팔에 온 힘을 불어넣는다.

 

“죽……!”

 

하지만, 그런 내 다짐은 보기 좋게 깨졌다.

마치 누가 뒤에서 망치로 머리를 때리는 것처럼 눈앞을 뒤흔드는 격렬한 두통.

그것을 견디지 못한 나는 손을 풀어헤치고선 그대로 쓰러졌다.

안 돼. 빨리 눈앞의 이 녀석을 죽이지 않으면……

 

“……어?”

 

순간, 두통이 사라지면서 흐렸던 세상이 맑아진다.

죽여? 눈앞의 이 녀석을? 헤른을? 내 손으로? 왜? 엄마를 죽여서? 엄마는 아빠와 1년 전에 그림자에게 죽었어. 그럼 저기 누워 있는 건? 분명, 엄마가 아니야. 그렇다면 뭐야? 적? 그림자? 그렇다면 도플…….

 

질퍽.

 

실타래처럼 뒤엉키고 끝이 없는 생각을 손끝에서 느껴지는 비릿함, 끈적임, 따뜻함이 끊어낸다.

 

천천히 시선을 내려 손을 바라본다.

 

피가 묻어있다.

 

헤른에게서 흘러나온 피가.

 

내 손에.

 

피? 헤른? 헤른? 헤른?! 대답해줘. 어떻게 된 거야 이게? 왜 쓰러져 있어? 내가 했어. 내가 직접. 도플갱어한테 속은 나를 피투성이의 몸으로 구해준 헤른을. 내게 남은, 그 무엇보다 소중한 사람을. 목의 살갗을 찢을 정도로 졸랐어. 내가. 내가.. 내가...

 

헤른을 죽이려 했어.

 

 

 

 

***

 

 

 

 

 

제정신을 차린 나는 우선 치료 마법을 사용하였다. 

당장이라도 멎을 듯한 작은 숨소리. 나 때문에 이렇게 된 헤른을 두고 볼 수는 없었기에.

 

“헤른. 헤른... 제발 눈 떠. 제발...”

 

하지만, 마법이란 것은 어디까지나 사용자의 정신과 마나를 통해 세상을 변화시키는 기술.

도플갱어의 기억조작, 거기에 그 무엇보다 소중한, 삶의 목표나 다름없는 헤른을 죽이려 했다는 것에 정신 상태가 크게 흔들린 에이르가 마법을 원만하게 쓸 수는 없었고, 헤른의 상처는 조금도 낫질 않는다.

 

“제발... 나아. 나으라고. 나으란 말……! 커헉! 콜록! 콜록!”

 

급기야 용언 마법까지 써가면서 헤른을 치료하려 하지만, 불안정한 정신과 함께 이전의 무리로 인해 안 좋은 몸 상태가 겹쳐 이 또한 실패.

겨우 아물었던 목의 상처가 다시 벌어진 에이르는 피를 쏟아낸다. 허나, 그녀의 눈에 자신의 피 따위는 조금도 들어오지 않았다.

헤른의 등에서 흘러나오는 피. 생명을 상징하는 붉은색이 차갑게 식어가고 있었으니까.

 

“미안. 미안해.. 미안해...”

 

너 혼자서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을 때 나는 거짓된 기억에 웃고 있었다.

그런 네가 나를 위해서 만신창이의 몸으로 움직이다 쓰러질 때 나는 너를 죽이려 했다.

언제나 내 상처를 보듬어주고, 격려해준 너와 달리 나는 너에게 생긴 상처 하나 치료해주지 못한다.

 

“미안.. 미안...”

 

파도 파도 끝이 보이지 않는 자기 혐오와 죄책감 속에서 에이르는 급히 헤른의 상처를 지혈시키고선, 품에 안은 그를 치료할 사람을 찾기 위해 미친 듯이 달렸다.

 

 

 

 

***

 

 

 

 

내가 다시 정신을 차린 것은 다섯 번째 그림자. 도플갱어와의 싸움으로부터 3일이 지난 뒤였다.

 

“허억... 허억... 살아 있어?”

 

마지막 기억이 목을 졸려가면서 정신을 잃는 것인 만큼 나는 정신을 차리자마자 숨을 크게 들이쉬면서 떨리는 손으로 목을 어루만졌다.

가공을 거쳐서 웬만한 힘으로도 끊어지지 않는 줄로 된 목걸이를 제외한 그 무엇도 맞닿지 않은 목의 살결.

지금 내가 죽기 직전의 환상을 보거나, 사후세계에 도달해 있는 게 아니라면, 다행히도 나는 그때 죽지 않았고, 멀쩡히 회복한 것 같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상처 하나 없이 멀쩡하지는 않았지만.

 

‘나쁜 새끼! 죽어! 죽어! 죽으라고!’

 

행복한 웃음을 짓기를 바라는 에이르의 얼굴이 나를 향한 혐오로 일그러지고, 분노 어린 그녀의 목소리가 내 존재를 부정하는 기억.

물론, 이건 그녀의 진심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도플갱어의 조작된 기억으로 인한 일시적인 혼란일 뿐이다.

……그렇게 머리로 알고 있다고 해도 뇌리에 박혀 버린 에이르의 얼굴과 목소리는 계속해서 내 속을 파헤쳤다.

 

‘도플갱어를 마주친 자는 죽거나 미친다. 그 말이 이런 뜻이었나...’

 

이게 놈의 능력이라면 정말 개 같은 능력이고, 그렇지 않다면 도플갱어는 진짜 개새끼다.

배에 칼이라도 찔린 것처럼 오만상을 찌푸리던 나는 그림자에 대한 조사 도중 들었던 소문을 떠올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나저나, 에이르는?’

 

내가 아직 멀쩡히 살아있다. 그것은 내 목을 조르던 그녀의 기억조작이 도중에 풀렸다는 것.

매일 밤 악몽을 꾸며 괴로워하고, 그러면서도 남에게 의지하지 않고 속에서 곯는 그녀의 특성상 이번 일에 적잖은 혼란이 있을 것이다.

아직, 에이르에 대한 마음을 접지 않은 나로서 이는 넘길 수 없는 일.

한시라도 빨리 그녀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과 함께 침대에서 일어난 나는 병실을 나서 그녀의 행적을 묻기 시작했다.

 

“저기 혹시, 저와 함께 왔던 여성이 어디 갔는지 아시나요?”

 

“……여성이요?”

 

“네. 머리와 눈 색이 붉은...”

 

“아! 그분!”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다, 부가 설명에 곧바로 입을 동그랗게 벌리는 간호사.

저 신선한 반응을 보아 에이르는 최근에도 이곳에 들렀던 건가. 

 

“환자님을 데리고 오신 분이 확실히 그랬죠. 붉은 머리, 붉은 눈. 워낙 특색있는 분이라서 기억하고 있어요.”

 

“진짜 엄청 무서웠다고요. 피를 잔뜩 칠한 환자분을 데려온 것도 그렇고, 빨리 치료하라며 울고불고 난리를 피우는 게.”

 

울고불고 난리를 피웠다고? 그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에이르가? 

하늘을 나는 물고기처럼 아귀가 안 맞는 간호사의 발언에 순간 다른 사람인가 생각했지만, 붉은 머리 붉은 눈이 흔한 외형은 아니다.

거기다 쓰러진 나를 데려오기까지 했다는데 에이르가 맞을 것이다.

그나저나, 에이르가 우는 얼굴이라……

 

‘너 같은 걸... 너 같은 걸 믿는 게 아니었어...’

 

울고 불며 소리 지르는 에이르의 얼굴을 상상하려던 나는 깜빡이 없이 닥쳐오는 아픈 기억에 몸을 떨었다.

가벼운 잽도 아닌 어퍼가 무방비한 턱에 꽂힌 것처럼 순간 멍한 상태가 되어버린 나는 정신을 가다듬은 뒤 그녀가 어디 간지를 간호사에게 물었다.

 

“……방금전에 밖으로 나가시는 걸 봤어요. 되게 서두르는 느낌이 무슨 급한 일이라도 생기신 거 같아 보이던데요.”

 

간호사의 말을 들은 나는 절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급한 일? 카티라에서 에이르가 재빠르게 처리해야 할 일이 있었나? 

 

“에이,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금방 돌아오시겠죠. 환자님이 깨어나기 전까지 옆에서 찰싹 달라붙는 게 정말 환자님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분 같던데.”

 

그녀가 이 꽃의 도시 카티라에서 해야 할 일을 아무리 생각해도 찾지 못하던 내가 답답하게 보였는지 간호사가 주책이라며 말한다.

 

‘에이르가 쓰러진 내 옆에 계속 있었다고?’

 

그리고 나는 그런 간호사의 말에 기쁨을 감출 수가 없었다.

최근 조금씩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에이르가 나를 용검 사용을 위한 도구로밖에 보지 않는다는 가설.

그것이 내 착각일 뿐이었고, 적어도 그녀가 나를 동료로는 바라봐주고 있다는 사실. 기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가요.”

 

“네. 네. 금방 돌아와요. 그러니, 빨리 병실로 돌아가서 안정을 취하세요. 환자분 돌아오면 웃는 얼굴로 반겨주셔야죠.”

 

“……네. 그래야겠네요.”

 

에이르의 새로운 면을 보았다는 것이 기쁜 나는 간호사의 말대로 병실로 돌아갔다.

 

‘아직 가을꽃 축제 기간이 조금 남았으니, 이곳 카티라에 좀 더 머무르는 것도 나쁘지 않겠네.’

 

그리고, 에이르는 가을꽃 축제가 끝나고 나서도 내가 있는 병실에 돌아오지 않았다.

 

 

 

 

 

 

***

 

 

 

 

 

악몽이 찾아온다.

 

그러나 언제나 꾸던, 우리 부모님이 죽는 날의 기억을 재생하는 그 악몽과는 다르다.

 

나는 설산이 아닌, 한 언덕에서 주저앉았다.

 

그 앞에는 미동도 하지 않는, 온기라곤 전혀 없는 누군가가 죽어있었다.

 

나는 그 누군가의 정체를 알고 있다.

 

선조들의 업보를 청산하라고 목숨을 던지라는 내 부당한 명령에 말없이 따라와 준 헤른.

 

서큐버스 여왕의 악몽에 괴로워하며 소리지르던 나를 몇 없는 가문의 보물까지 써가며 안심시켜준 헤른.

 

영혼과 영혼을 이어서 상대를 속박한다는 정신 나간 위험도의 주문을 사용하게 용기를 준 헤른.

 

강철보다 더 단단한, 수없이 뒤엉킨 넝쿨을 베면서 팔이 잘 움직이지 않아도 나를 지켜준 헤른. 

 

그 어떤 용감한 전사도 주저하게 만드는 시체들의 집합. 무언가에 떨면서도 나를 걱정하던 헤른.

 

피가 옷에 묻어나올 정도의 부상을 입고서도 나를 구하기 위해 달려온 헤른.

 

그리고, 환상에 정신을 놓아버린 내가 이 두 손으로 목을 부러뜨려 죽인 헤른이 아니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헤른은 살아있어. 그날 나는 마법으로 헤른을 치료하지는 못했지만, 분명 병원으로 데려갔어. 죽지 않았다고! 내가 죽이지 않았어! 그러니까 이건 모두 꿈이야. 악몽이야! 현실이야? 아니야. 꿈이야! 거짓이야. 헛것이야. 환상이야아아아아아아아아악!!!!!

 

질퍽.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 안으며 비명을 지르던 나는 피부에 느껴지는 소름 끼치는 감촉에 몸을 떨었다.

 

비릿함. 끈적임. 따뜻함.

 

머리가 아늑해진다. 눈을 뜨자 보인다. 피가 묻은 손이. 헤른의 피가 묻은 손이. 등의 상처에서 흘러나오는 헤른의 피가 바닥을 적시는 게.

 

무서웠다. 헤른의 그 붉은 피가. 그 위에 내가 있고 그는 죽어있다는 게…… 뭔, 개소리야! 안 죽었어! 헤른은 안 죽었다고! 나는 안 죽였어!

 

나는 도망치려 했다. 무책임하게. 헤른의 시체. 내가 죽인 시체를 두고. 안 죽였어! 나는 안 죽였다고! 내가 헤른을 죽일 리가... 내가 죽였...

 

터억!

 

비명을 지르며 도망가려던 내 다리가 멈춘다. 

 

어느새 언덕은 사라지고 주변은 거대한 피 웅덩이로 변하여 있었다. 


피 웅덩이는 늪처럼 도망치기 위해 움직이던 내 다리를 붙잡고 있었다. 

 

이에 벗어나고 싶어 놔달라고 몇 번이고 애원하고 빌던 와중, 피 웅덩이에 이빨과 혓바닥이 자라난다.

 

‘에이르 왜 그런 거야?’

 

‘어째서 나를 죽이려고 한 거야?’

 

‘왜 도망간 거야?’

 

그 혓바닥과 이빨에서는 헤른의 목소리가 나왔다.

 

 

 

 

 

***

 

 

 

 

 

 

 

몽환적인 느낌을 내는 빛이 눈꺼풀을 두들기는 것에 부르르 눈이 뜨인다.

나는 누워 있었다. 몸이 빠져드는 피 웅덩도, 언덕도, 헤른의 옆도 아닌, 북쪽 산맥에 숨겨진 용의 둥지.

2주일 전부터 내가 몸을 맡기고 있는 곳이었다.

 

“흑... 끄흐윽...”

 

정신을 차린 나는 눈물 자국이 빨갛게 나 있는 얼굴을 감싼 채 울기 시작했다.

도플갱어 사건 이후 잠들면 찾아오는 악몽은 변하였다. 매우 끔찍하게.

기존 부모님이 죽는 그 기억조차 적응은커녕 매일 밤 고통에 시달리는 나에게 이는 악몽이란 말로도 부족한 정도였다.

 

거기다 지금 내가 있는 이곳은 북쪽에 있는 용의 둥지.

주인인 용, 그리고 그가 허락한 존재가 아니라면 그 누구도 접근할 수 없게 완전히 외부와는 단절된 공간.

그런 곳에서 이런 악몽의 고통을 함께 나누어줄 누군가 따위 존재하지 않았다.

전부 내가 자초한 일이었다.

 

2주일 전, 악몽으로 인해 조금씩 피폐해져 가던 나는 어떻게든 지키겠다고 한 헤른의 옆에서 도망쳤다.

악몽이라도 꾸는 건지. 잠들어 있는 헤른이 몸을 뒤척이면서 앓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어머니... 왜, 도대체 왜 이러시는 거에요...’

 

헤른은 서큐버스 여왕과의 전투 이후 괴로워하는 나를 안심시키기 위해 그녀의 어머니 관련한 이야기를 했었다.

그 탓에 나는 그의 어머니가 언제나 인자하고 가족을 위해 희생을 아끼지 않는 사람이란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 어머니가 나오는 꿈이 저렇게 괴로울 리 없다. 그렇다면 어째서? 그에 대한 대답을 당시의 나는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도플갱어.

 

엄마로 변한 도플갱어가 내 앞에 나타난 것처럼, 헤른에게도 그의 어머니의 모습을 한 도플갱어가 나타났고, 그는 지금 그 기억을 보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소중한 사람이 배신하는 끔찍한 광경을.

 

거기까지 생각이 도달한 나는 어느새 병원을 빠져나가 도망치고 있었다.

도플갱어 때문에 소중한 기억이 더럽혀지고, 상처를 입으면서까지 날 구하러 온 헤른.

그런 헤른이 나에게, 거짓 기억에 취해 실실 웃다가 그를 죽이려고 한 나에게 할 말이 너무나도 두려웠다.

 

‘난 내 어머니에게 등을 찔리면서까지 너를 구하려 했어.’

 

‘그런데 너는 왜 내가 괴로워하는 동안 웃고 있는 거로도 모자라. 나를 죽이려고 하는 거야?’

 

‘난 너를 위해 목숨까지 내걸었는데. 너는 왜...’

 

물론, 헤른은 그럴 말을 할 사람이 아니다. 그건, 목숨을 건 여정을 함께한 에이르가 누구보다 잘 아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매일 밤 찾아오는 악몽과 헤른을 죽이려 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린 에이르는 그런 헤른을 떠올릴 수 없었다.

그녀의 기억 속 헤른의 웃는 얼굴은 전부 그녀를 경멸하는 표정으로 바뀌고 있었다.

거기에 인질로 잡힌  자기를 구하다 부모님이 죽었다는 것에 자기 혐오가 엄청난 에이르의 특성이 더해지니, 에이르는 내심 확신하고 말아버린 것이다. 

 

헤른은 이제 나를 싫어한다. 나 같이 남의 목숨을 가볍게 여기고, 받은 만큼 바로 돌려주지 않고, 자신의 처지만 생각하는 여자를 혐오할 거라고.

그런 생각을 품은 에이르가 도망을 선택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했다.

물론, 도망을 간다고 에이르의 정신 상태가 호전되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더욱 심해졌다.

 

촤악!

 

폴리모프를 일부 해제하여 드러난, 붉은 비늘과 용의 발톱.

그것이 새하얀 살결을 찢고, 바닥에 투두둑 핏물을 떨어트린다.

도플갱어 사건 이후 헤른의 피가 손에 묻어있는 환각을 본 때부터 에이르가 시작한 자해 행위였다.

 

“흐윽...”

 

상처를 일부러 벌려 흘러나온 피를 손에 바른다.

이렇게 하면 손에 묻어있는 헤른의 피가 가려져서 보이지 않게 된다.

그렇게 멀쩡한 손에 피를 묻혀야만 에이르의 마음에는 조그만 평화가 찾아온다.

 

 

 

 

 

***

 

 

 

 

용의 둥지에 온 지 2달째.

 

이제는 악몽 속에서만 아니라 눈을 뜨고 있는데도 헤른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귀를 막았다. 다른 시끄러운 소리를 들어서 듣지 않으려 했다.

 

그 무엇도 안 되었다. 

 

헤른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울리는 게 너무 끔찍하다.

 

헤른의 얼굴이 보고 싶다.

 

 

 

 

***

 

 

 

 

3달째.

 

손에 묻은 헤른의 피를 언제나 했던 것처럼 내 피로 덮어씌웠으나, 이번엔 벽에 헤른의 피가 묻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이를 없애기 위해 용으로 변해 피 묻은 벽을 부숴보았으나 그러자마자 곧바로 다른 곳에 피가 묻었다.

 

 

 

 

***

 

 

 

 

4달째.

 

벽에 묻은 헤른의 피에 대한 해결책을 찾았다.

 

나도 참 여태껏 멍청했다. 처음 손에 묻은 것처럼 내 피로 덮어씌우면 될 것을 너무 어렵게 생각했다.

 

문제라면 벽에 묻은 만큼 그 크기가 좀 크단 것이고 그만큼 내 피가 많이 필요했다.

 

어쩔 수 없이 나는 폴리모프를 전부 해제하여 인간 형태보다 더 큰 용의 몸을 상처 입혀 피를 구해야만 했다.

 

 

 

 

***

 

 

 

 

5달째.

 

마법을 다시 쓸 수 있게 되었다.

 

이걸로 무얼 할까는 처음부터 정해놓았다.

 

머릿속에서 떠올리려 할 때마다 듣기 싫은 목소리를 내뱉는 헤른의 얼굴.

 

그것을 마법으로 벽에 그리면, 목소리는 안 들리지 않을까?

 

 

 

 

***

 

 

 

 

6달째.

 

마법으로 벽에 헤른의 얼굴을 그리는 것은 실패였다.

 

마법으로 그린 헤른의 얼굴을 보자 그 듣기 싫은 목소리가 들려와 정신이 나갈 것만 같았다.

 

정말 헤른의 얼굴을 보는 방법이 없는 걸까?

 

헤른의 얼굴을 떠올릴 때 들려오는 저 목소리가 사라졌으면 정말 소원이 없을 거 같다.

 

 

 

 

***

 

 

 

 

7달째.

 

방법을 찾았다!

 

저번도 그렇지만, 나도 진짜 멍청하다.

 

언제나 도움을 주는 건 내 피였는데, 왜 그걸로 헤른의 얼굴을 그릴 생각은 못 한 거지?

 

다시 헤른의 얼굴을 보게 되는 것이, 그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는 게 너무 기쁘다.

 

조금 더 많이 그려볼까?

 

 

 

 

***

 

 

 

 

8달째.

 

누구야아아아아아아!!!

 

누가 둥지에 들어왔어. 헤른. 헤른의 얼굴에 왜 가까이 있는 거야.

 

떨어져. 떨어져. 떨어져. 손대지 마. 손대지 마아아아아아악!!!

 

 

 

 

***

 

 

 

 

“허억... 허억...”

 

북쪽 산맥에서 겨우겨우 용의 둥지를 발견한 마법사 칼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자신의 마법으로 구속된 무언가를 바라봤다.

 

전해 들은 그대로인 붉은 머리칼과 붉은 눈.

딱 봐도 인간이 아니라는 듯한 비늘과 발톱이 드러난 오른팔, 위협적으로 휘둘러지는 꼬리.

이 둥지의 주인인 용이 확실했다.

 

“만지지 마! 헤른을... 헤른을 만지지 말라고!!!”

 

문제는 그 상태가 심각하게 뒤틀려 있다는 것이다.

도대체 뭘 하면 수백 수천 년의 세월을 사는 용이 저렇게 미쳐버릴 수 있는 거지?

순간 의문이 들었으나, 눈앞의 용에게 물어본다고 대답을 들을 수 있을 거 같지도 않았기에 칼은 이곳에 온 이유를 밝히기로 했다.

 

“저는 칼이라고 합니다. 최전선. 지금은 쓰러진 마왕의 그림자. 거인과 리치가 있던 검은 대지에서 싸우던 마법사죠.”

 

“헤른 칼라이스 씨가 많이 위독한 상태입니다. 같이 가주실 수 있겠습니까 래드 드래곤 에이르님.”




최대한 괜찮게 써보려고 했는데 뇌절을 많이 친 것 같네. 구린 필력도 모자라 이야기까지 망쳐서 미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