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육십이 되던 해 부터 납치를 그만 둬. 심지어는 시공의 폭풍과 원래 세계를 연결하는 길을 알려주기 까지 했다니깐?

레이너는 갑자기 변해버린 우서를 엄청 걱정했어.

사람이 성격이 갑자기 변해버리면 죽는다고들 하잖아.

혹시 이 남자가 무슨 병이라도 걸린 걸까?

언제든지 원래 세계로 돌아 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루시우까지 우서를 걱정해서 돌아가지 않고 있을 정도니 우서의 변화는 주위 사람들에게 큰 충격이었지.

하지만 큰 일은 일어나지 않았어.

우서는 여전히 활발했고 붙임성 좋았으며 늘 그렇듯 전투가 일어났을 때 아서스와 누가 적들을 더 많이 처치하는가를 두고 경쟁을 했지(사실 서로 잡담하는 시간이 더 길었지만).

그저 늙었다는 자각에 스스로의 삶에 대한 반성이 있었던 거 같아. 지극히 인간스러운 변화였던 거지.

우서는 언제나 인간이었어. 그 어떤 순간에서도, 그 어떤 사건 속에서도 인간임을 포기하지 않았지.

칠십을 일 년 앞 둔 어느날이었어.

시공의 폭풍이 아닌 다른 공간을 발견한 우서는 비록 늙었지만 아직 호기심이 완전히 매마르지는 않았어

그래서 그는 시공의 폭풍과 그곳을 왕복하며 몇 날 며칠을 탐험과 연구에 몰두했어.

하지만 그 공간은 너무나도 위험하고 이상한 곳이었지.

비주기적으로 땅이 흔들리고 하늘도 흔들리는 굉장히 불안정한 공간이었어.

그럼에도 우서는 그곳을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겼나봐.

솔직히 그가 산전수전을 다 겪은 베테랑 성기사라는 것은 타인은 물론 자신 스스로도 인정하는 바잖아?

우서의 탐험에 대한 열의는 그곳이 전쟁으로 폐허가 된 세계이든 버려지고 잊혀진 세계이든 개의치 않았어. 하지만 그것이 그의 실수였지.

어떤 불의의 사고로 우서는 크게 다치게 돼.

가까스로 스스로를 시공의 폭풍으로 이동시키긴 했지만 그의 상처는 누가보더라도 심각한 수준이었지.

온몸은 피투성이가 됐고, 심장박동은 불안정해졌으며, 세상에.. 오른쪽 다리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을만큼 심하게 뭉개져 있었어.

이대로 죽는 걸까...

그의 몸에서 새어나오는 피는 갑옷을 잔인하게 물들이며 그의 의식을 좀먹기 시작했어.


눈을 떠보니 우서는 아까와는 다른 편안한 느낌이 들었어.

죽어서 어둠 땅으로 오게 된 걸까?

으윽..

갑자기 온몸에 고통이 느껴지기 시작했어.

숨이 가빠졌고, 몸이 덜덜 떨렸어.

아, 아직 난 살아있구나.

한참을 고통에 몸부림치다가 이제야 좀 안정이 된 기분이야.

숨도 규칙적이게 되었고, 몸의 떨림도 잦아들었어. 생각은 멀쩡한 거 같고, 팔도 잘 움직여.

그리고 다리도..

뭔가 허전한 기분이야.

다리. 오른쪽 다리!

아아.. 오른쪽 다리로 눈을 옮긴 우서는 깨달았어.

다리가 절단되었구나..

우서의 눈에서 조금씩 눈물이 흘러내렸어. 마치 산길을 따라 흐르는 계곡물 처럼

"우서? 정신이 드는가?"

우서의 입에서 새어나온 흐느낌에 누군가 나타났어.

메디브야.

메디브는 일찍부터 우서가 이상한 공간에 흥미를 갖게 된 것을 알고 있었어.

그 공간에 대해 꺼림직함을 느낀 메디브는 우서에게 그곳에 자주 가지 말 것을 권유했지만 이미 마음을 굳게 먹은 그를 누가 막겠니.

우서는 계속해서 그 곳을 왕래했고 메디브는 가끔 가다 우서의 동향을 살피기만 할 뿐이었지.

그러던 어느 날, 알터랙 고개를 배회하던 메디브는 익숙한 빛의 오라가 불안정하게 떨리는 것을 느꼈어.

우서의 빛이었어.

그 빛을 쫓아 도착한 곳에서 메디브는 죽어가는 우서를 발견한 거지.

우연이었어.

메디브가 알터랙 고개에 있지 않았더라면 우서는 꼼짝없이 죽고 말았을 거야.

차원문을 통해 움겨진 우서는 까마귀 궁정의 어느 한 집에 입원하게 됐고, 모랄레스의 치료로 정확히 보름만에 눈을 뜨게 됐어.

우서가 깨어났다는 소식에 정말 많은 영웅들이 까마귀 궁정을 찾았지.

표정들을 보아하니 하나같이 걱정을 많이 했었구나.

울면서 화를 내는 레이너, 우서의 손을 잡고 "다행이에요"를 되뇌이며 우는 리리, 말 없이 눈물을 훔치는 자리야.

심지어는 평소엔 적대하던 영웅들도 우서가 깨어난 것에 안도하고 있었어. 켈투자드, 디아블로, 케리건

파괴적인 힘을 다루며 인간들을 학살하는 삶을 사는 존재들이 한낮 인간의 생을 걱정해 준다는 것은 렉사르가 그간 적어온 생존 일지의 그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진귀한 풍경이었지.

우서는 그곳에서 또 한 번의 삶을 느끼게 되었어.


우서의 몸도 많이 회복되었어.

그는 열심히 재활훈련을 하고 있었지.(훈련이라면 이미 버릇이긴 했지만)

어느 날, 아서스와 켈투자드가 우서를 찾아왔어.

망치와 물약을 우서에게 내밀며 그들은 이렇게 말을 했지.

"우서, 죽음의 기사가 되지 않겠나?"

그들이 내민 물약은 사약, 그리고 망치는 붉은 룬 문자가 빛나고 있었지

인간의 몸이 갖는 모든 제약을 버리고 죽음의 기사로 다시 태어나는 것

다시 말해, 인간을 그만 두고 언데드가 되는 것

언제나 사생취의하며 살아온 외다리의 늙은 남성에게 전장에서 용맹을 떨치던 기사로서는 마다하기 힘든 달콤한 꿀을 두 언데드가 가지고 온 거야.

어떤 이야기 중에 더 많은 힘을 얻기위해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버린 엘프의 이야기가 있었지.

인간의 욕심도 엘프임을 포기하면서 까지 힘을 추구했던 그 쌍둥이의 동생과 다를 바 없을지도 모르지, 어쩌면 지금의 자신과도 같을 지 몰라. 그 보다 더 한 지도 모르지.

그런데 그 엘프의 끝이 어땠는지 알아?

"하하, 미안하지만 거절해야겠네."

우서는 두 언데드의 제안을 거절했어.

켈투자드와 아서스는 아쉬움과 슬픔이 뒤섞인 듯한 미묘한 표정을 지었어. 하지만 우서의 대답을 예상했다는 듯 엷은 미소를 지었지.

악마에게 영혼을 판 그 엘프는 악마로서 그의 욕심을 달성하고 악마의 영원한 노예로서 삶을 끝내는 것이 아닌 엘프로서 악마와 맞서 싸워 끝내 모두를 구원하게 돼


퇴원한 우서는 그 이후로도 꾸준히 신앙심을 키우고 전장에서 영웅들을 돕기도 하고 평소에는 적대하고 소원했던 이들과도 어울리며 살았어.

때로는 병에 걸려 골골대기도 하고, 하나무라의 벚꽃을 보며 술 한 잔을 기울이기도 하고, 잃어버린 오른쪽 다리의 환상통 때문에 고생하기도 하고, 사소한 이유로 레이너와 다투기도 하고, 또 금방 화해해 서로 술잔을 기울이기도 했지.

그렇게 빛의 수호자는 살아갔어.

그는 꽤 오래 살았지.

어느덧 백을 바라보던 어느 날, 레이너를 납치했던 주이레이 주점에서 얼굴에 미소를 띤 채 조용히 눈을 감았어

그 옛날 중년시절의 모습 그대로의 빛나는 갑옷을 입고, 손에는 커다란 빛의 망치를 쥔 인간 성기사는 그렇게 구원을 받았어.


아직도 살아있는 시공의 폭풍의 많은 영웅들은 여전히 빛의 수호자를 그리워 해.

지극히 인간적이었고, 평범했던 성기사. 시공의 폭풍은 그 매력적인 인간이 지나간 역사 위에 또 다른 역사를 써 가고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