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글 모음


*간략히 썼기에

약간의 누락이나 오류가 발생 할 수 있다*



1. 동맹의 역전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으로 프리드리히 대왕은

오스트리아부터 슐레지엔을 얻어냈고

오스트리아는 새로운 동맹을 맺을 시간을 벌기 위해

엑스라샤펠 조약에 서명하게 된다

그러나 이 전쟁에 참여한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의 동맹에

만족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오스트리아의 동맹인 영국은 보조금을 줬으나 별다른 도움이 되지 못했고

슐레지엔을 지키지 못했다


프로이센의 동맹 프랑스는 이기기도 했고 괜찮았지만

오스트리아와 단독 평화 협상을 한 번도 아닌 두 번이나 해서

프랑스에게 불신을 샀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프로이센으로부터

슐레지엔을 되찾고 프로이센을 분할하고 과거시대의

공곡까지 되돌려는 목적으로 프로이센을 침공하려 했다


즉, 간략하게 보자면 7년 전쟁이 일어난 이유는

프로이센에 대한 복수라고 볼 수 있다

7년 전쟁에는 꽤 다양한 상황이 엮어져 있는데

일단 오스트리아는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를 지키려는 목적으로

프랑스와 동맹을 맺고 싶었다


만약  또 영-오 vs 프-프 상태로 전쟁이 일어난다면

오스트리아는 네덜란드 지역과 프로이센 지역 둘 다 동시에

상대해야 한다는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 영국은?


영국은 하노버 선제후국과 동군연합 상태라서

만약 지금과 같은 상태에 전쟁을 선포한다면

양쪽에서 프로이센과 프랑스를 상대해야 한다는 양면전선이 생기게 된다


그럼 이 상황에선 유럽에 있는 국가가 잘해줘야하는데

오스트리아는 프로이센에 탈탈 털리면서

오스트리아를 믿지 못하게 되었다

여기에다가 러시아까지

일단 러시아는 오스트리아는 서로 사이가 좋았고

1726년에 동맹 관계를 맺을 만큼 서로 신뢰했다


그리고 러시아는 폴란드-리투아니아를 통해 발트 해로 진출하고 있었고

이를 프로이센과 오스만이 침공하길 막기 위해 오스트리아와 함께 지원하기로 했고

1746년, 서로 방위 동맹을 맺게 된다

스웨덴까지 프로이센과 영 관계가 시원치 않았다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에 프로이센과 편을 먹어

러시아를 공격하긴 했었는데 득 본 게 없이 끝났고

이미 러시아는 대북방전쟁 때문에 나라가 크게 흔들렸으니

그럴 바에는 프로이센을 공격하자는 여론이 생겼고

스웨덴도 오스트리아 편으로 들어가게 된다

(프로이센도 대북방전쟁 때 먹은 땅이 있기도 하고)

오스트리아는 프랑스를 편으로 만들기 위해

네덜란드를 준다는 협상까지 했고 러시아와 몰래 동맹을 맺었다


이러한 사실을 알아챈 프리드리히 대왕은 오-러를 견제하기 위해

영국과 동맹을 맺을 수밖에 없었고 영국도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때

프로이센이 활약하는 모습을 보고 하노버를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해

오스트리아를 버리고 영국과 동맹을 맺게 된다

(웨스트민스터 조약)


프랑스는 갑자기 고립되었고 이대로 가다간 파멸을 맞이하기에

오-러 동맹에 가입하게 된다

(베르사유 조약)


그렇게 영원할 것 같았던 영국-오스트리아, 프로이센-프랑스 동맹이

10년도 안 되는 시간에 영국-프로이센, 프랑스-오스트리아로 바뀌게 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전쟁이 일어날 건 확실했고


1756년 5월 17일

영국이 프랑스에게 선전포고를 알리고


1756년 5월 20일

프랑스가 미노르카 섬을 포격하면서

7년 전쟁의 서막을 알리게 된다



2. 시작된 전쟁

영국은 미노르카 섬을 구하기 위해

존 빙 제독과 12척의 함선 7척의 프리깃을 보내고

마온 항구에 있는 수비대를 구출하려고 했으나 프랑스의 함대가 개입했고

정오 쯤 서로를 마주보며 대형을 갖췄고 바람이 바뀌면서 전투는 시작되었다

12척의 프랑스 함대를 본 빙은 12척의 함선을 하나의 전선으로 편성한뒤

프랑스 함대 반대편에 있는 함선들과 나란히 오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당시 열악한 신호체계 때문에 작전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으며

이로 인해 대열을 이탈하거나 하는 일이 발생했으며 이 틈을 노려

프랑스는 영국 함선에 공격을 퍼부었다

영국 함선도 공격하려고 했으나 효과적인 대포가

사정거리 안에 들어오지 못했고 결국 갈수록 손해만 나고

프랑스 함대를 한 대도 침몰시키지 못한 채 영국은 철수하고 만다

(미노르카 해전)


그 후 빙은 미노르카를 구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처형당하게 된다

(마냥 빙의 잘못이 아닌 게 빙이 이끄는 배들은 다 상태가 좋지 못하고

함대 상태가 심각하지 지원해달라는 편지까지 쓸 정도로 대비를 잘하는 사람이다)

한편 프리드리히 대왕은 북미에서 벌어진

충돌 보고를 받고 영국과 동맹을 맺은 후 작센으로 진군 했다


프리드리히가 작센으로 진군한 이유는

오스트리아-프랑스가 예상한 슐레지엔 침공 예상을 깨고

작센을 먼저 공격하여 전쟁에서 선점하기 위해서인데

작센을 점령해 자원을 군대와 재정에 쓰기 위해서이다


이번 오스트리아 전쟁에선 3가지 목표가 있는데

앞서 말한 작센을 점령하여 군비로 쓰기

두번째는 보헤미아를 침공하여 오스트리아의 비용으로 겨울 숙소 설치하기

마지막은 슐레지엔에서 모라바를 침공하여 빈까지 진격하는 목표였다

그러므로 모라바에서의 침공을 막기 위해

쿠르트 크리스토프 폰 슈베린에게 25,000명의 병력을 슐레지엔에 남겨두고

한스 폰 레발트는 동프로이센에 남겨 러시아의 침략을 막으라고 지시한 뒤

프리드리히 대왕은 1756년 8월 29일 작센으로 진군했다

1756년 10월 1일


아직 제대로 준비가 안 된 오스트리아군과 브라운 남작은 

로보세 언덕에 진지를 구축하고 크로아티아에서 온 대대를 포도밭 사이에다가,

미끼로 마을 앞에다가 소규모의 기병과 척탄병을 배치했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짙은 안갯속에서 로보지츠에 있는 경기병대와 주둔 중인 기병대를 발견하고

그들이 오스트리아군이 후위에 있다고 판단하고 브라운 남작이 작센군과

합류할 것을 염두에 둬 전군에 공격 명령을 내렸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보병대가 기습당하는 걸 막기 위해 페르디난트 왕자에게

보병대의 좌우 측면을 보호하라고 지시했고 오전 7시 30분

프로이센의 군대는 거의 200m의 공간을 메우게 되었다

시간이 좀 지난 뒤

프로이센 포병대는 평야에 배치된 오스트리아 기병대를 향해 포격을 개시했고

오스트리아 포병대도 포격으로 맞대응했다


오전 8시에는 브라운 남작이 전투 대형을 형성하라고 지시했고

프리드리히는 로보지츠 길을 향해 진군했다

오전 11시 경

프리드리히 대왕은 안갯속에서 오스트리아 전선을 정찰하라고

카우 중장에게 명령했고 카우는 3개 기병연대와 바이로이트 용기병의 지원을 받아

적 척탄병과 용기병의 격전에서 성공을 거뒤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 보병대의 역습그랜저 연대의 돌격에 직면하며

카우은 호몰카 기슭까지 밀렸지만 아군 보병대의 도착으로

전열을 재정비할 수 있었다

 

오전 11시 30분 경


안개가 걷히기 시작하면서 프리디르히는 적의 대형을 확인할 수 있었고

프로이센 기병대에게 중단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동료 기병들이 굴욕을 당하는 걸 보고 게슬러 장군은 두 번째 공세를 시작했고

오스트리아 진지를 향해 돌격했지만, 척탄병의 사격으로 큰 피해를 입고

뒤늦게 도착한 명령으로 퇴각했다

베베른 백작이 로보지츠를 공략하려 했지만, 강한 저항으로 대대를 추가해 보강했고

오스트리아군은 계속하여 저항하여 프로이센군에게 피해를 주고 있었지만

전투의 전세는 시간이 지날수록 프로이센에 유리하게 변해하고 있었다


오후 1시 무렵


프리드리히 대왕은 오스트리아군이 쉽게 무너지지 않는 걸 보고 

다른 장군에게 지휘관을 맡긴 뒤 후방으로 물려갔다


해가 질 무렵까지 양 측 다 교전을 하고 있었고

브라운은 프로이센군을 저지하는 목적을 달성했기에 후퇴하고 만다

(로보지츠 전투)

치열한 전투가 있고 난 뒤

프리드리히는 북쪽으로 돌아가 작센을 점령하고

피르나에 강력한 방어진지를 확보 한 걸 본 대왕은 고립시켜 항복하게 만들 거라고 

계획했고 결국 10월 14일 작센은 프로이센한테 항복하게 된다

(피르나 공성전)


그 후 작센 병력은 프로이센이 이끄는 병력에 강제로 편입되었고

작센 재무부는 프로이센 전쟁 자금을 지원해주기 위해 국고는 계속 바닥나는 상태고

통화는 약세가 보였다

1756~1567년 겨울은 전투에 집중하긴 보단

동맹을 확보하고 동맹국과 전략을 조율하기 노력했다


윌리엄 피트는 영국 의회를 설득하여 프로이센에 보조금을 전달하라고 설득했고

영국은 피트의 설득과 프로이센 공세를 보고 보급품과

연간 £670,000(2023년 £1억 6백만/1788억원)을 지원해주기 시작했다

또 프랑스의 하노버 침공을 막기 위해 군대 배치를 승인했다

프로이센의 작센에 대한 공격은 오스트리아 연합에 활력을 불어넣았다


1757년 5월

프랑스와 오스트리아는 동맹을 강화하고 프랑스는 오스트리아가 

슐레지엔을 회복할 때까지 지원해준다 것과 병력 투입을 한다는 2차 베르사유 조약을 맺게된다

그 대가는 위에서 언급한 대로 네덜란드는 준다는거였다


그 후 스웨덴도 대북방전쟁 때 잃어버린 땅을 회복할려는 목적으로 침공한다고 했으니

점점 반프로이센 연합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작센에서 겨울을 보낸 후 프리드리히는

보헤미아를 침공하기로 결정했고


1757년 4월 21일

프라하로 가는 도중 오스트리아 군대를 다시 만났고

경험이 풍부한 폰 베베른 지휘 아래 적 보급품을 획득하게 되고

프라하로 계속 진군할 수 있게 되었다

(라이헨베르크 전투)

오스트리아는 가만히 있지 않았다

막시밀라안 울리세스 브로운은 능숙하게 후퇴하고 프라하에서 병력을 집결한 뒤

마을 동쪽에 방어 진지를 구축한 뒤 로렌의 카를에게 지휘권을 넘겨주었다


1757년 5월 6일

프로이센은 대량의 군대가 프라하에 모였고

프리드리히는 오스트리아의 목표를 방해하기 위해 30,000명을 

도시 서쪽으로 보내고 오스트리아군을 향한 전투를 준비했다

프리드리히는 즉각적인 공격을 생각했지만 슈베른은 정찰을 먼저 하자고

설득했고 점차 경사지는 초원에 가면 오스트리아군의 후방을 공격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걸 보고 오전 10시쯤 눈에 띄지 않고 이동하는데 성공한다


빈터펠트 장군과 함께 슈베른은 공격할 준비를 마쳤으나

얼마 가지 않아 진군해야 할 곳이 연못가라는 걸 깨닫게 된다

힘겹게 돌파하는 동안에 빈터펠트가 총탄에 맞게 되고

프로이센군이 흔들리는 걸 보자 슈베른은 보병을 규합해 선두에 서서

지휘했지만 포탄에 맞은 채 결국 전사하게 된다

오스트리아 보병은 프로이센의 혼란을 감지하고

경사면을 따라 프로이센을 압박하기 시작했고

이 때문에 나머지 오스트리아 전선과 간격이 벌어졌고

브라운은 프로이센 보병의 사격으로 치명상을 입고 뒤로 물러나게 된다

프리드리히 대왕과 폰 지텐 장군이 프로이센 보병을 남쪽에서 재정비하는 동안

하우차모이베번 장군은 오스트리아 전선의 틈을 찾아 보병을 투입했다


오스트리아 크로아티아군은 북쪽에서 프로이센군과 교전했지만

프로이센군이 전선 틈을 파고들면서 후퇴하여 새로운 전선이 형성되었다


오후 3시 경

프로이센군은 아직 형성 중인 오스트리아군과 교전하면서

남쪽에서 외곽을 공격했고 결국 카를은 철수하고 만다

(프라하 전투)

프로이센에 피해가 좀 컸지만 그래도 적을 후퇴하는 데에 성공하고

곧 바로 프라하를 포위한다


오스트리아 원수 다운은 전투에 너무 늦었지만 병력을 데리고 프라하를

구제하기 위해 움직였으며 프리드리히도 다운을 요격하기 위해

34,000명의 병력을 가지고 움직였다

6월 18일


프라하에서 좀 떨어진 곳에서 두 군대는 만나게 되었고

오스트리아의 포병 사격이 프리드리히의 작전을 방해하고

기병대의 의해 새롭게 투입한 병력은 분쇄돼버리고 만다

5시간이 지나자 프로이센군은 방향 감각을 잃고

프리드리히 보기슬라프 폰 타운예치옌의 후방 엄호 아래 후퇴하면서

프리드리히 대왕의 작전은 실패로 돌아가게 된다

(콜린 전투)

작전의 실패 말고도 프로이센에 절망적인 상황아 찾아왔는데


1757년 8월 10일

러시아는 75,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동프로이센을 침공하여

프리드리히가 남겨둔 수비대를 격파하면서 참전을 알린다

(그로스예거스도르프 전투)


그리고 그 잘나가던 프리드리히가 패배했다는 소식을 듣자

9월 13일 스웨덴도 프로이센에 전쟁을 선포하고

17,000명의 병력을 이끌면서 포메라니아를 점령한다


동쪽에는 러시아가, 서쪽에는 프랑스,

남쪽에는 오스트리아, 북쪽에는 스웨덴이....

동서남북으로 프로이센은 고립되어갔다

1757년 중반

오스트리아는 루사티아로 진군했고

2배나 차이 나는 병력 때문에 모이 전투에서 승리하고

빈터펠트 장군까지 전사하게 된다

거기에다가 프랑스의 하노버 침공 이후

하스텐백 전투에서 승리하며 클로스터-체번 협정을 맺으며

평화를 이루게 됨과 프로이센의 측면을 더욱 노출시켰다


1757년 10월 16일

프로이센의 수도 베를린까지

콜린 전투로 인해 소홀히 관리했고 이때를 노려

안드라스 하딕은 후사르 전술을 이용해 하루 동안은 베를린을 장악하고 만다


프리드리히는 소식을 듣고 곧장 군대를 보냈으나 그들은 이미 떠난 지 오래됐었다

다양한 위기를 직면하고 있는 프로이센은 핵심영토를 방어하기 위해

다른 곳으로 이동해간다



3. 로스바흐와 로이텐

다시 한번 1757년의 상황을 정리해보자


전쟁의 시작 될 때 프로이센 '군대'의 상황은 꽤 괜찮았다

어떤 중대든 간에 분 당 4~5발을 발사할 수 있고

(영국이 사용한 브라운베스는 분 당 3~4발, 프랑스가 사용한 샤를빌 머스캣은 분 당 2~3발이다)

하루에 적어도 20km에서 32km까지 행군할 수 있고 행군 중에도

복잡한 기동 수행을 할 수 있는 뛰어난 군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이러한 군대와 프리드리히의 지휘 덕분에

처음에는 성공적이었지만 콜린 전투 이후로 전쟁은 소모전으로 바뀌어갔다

1757년 여름

프로이센은 동쪽 러시아에 위협을 받았으며

5일간의 포격 끝에 프로이센의 중요한 요새 중 하나인 메멜 요새가 점령당했다

그 후 위에서 얘기했듯 그로스예거스도르프 전투가 일어나며 수비대가 격파 당했지만

보급품 문제 때문에 진군하지 못하고 있었고 프리드리히도 보헤미아 침공을 그만두고

프로이센 영토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오스트리아는 프리드리히가 점령한 영토를 회복하고 있었고

9월에는 모이 전투로 빈터펠트가 지휘하는 프로이센군을 물리치고

여름이 끌날 무렵 오스트리아군은 서쪽에서 접근하는 프랑스군과 합류하고

브로츠와프까지 진군하는 계획을 세웠다


프로이센은 연이은 패배로 사기가 저하됐고 군대까지 연합한다면

끔직한 상황이기에 오스트리아-프랑스 연합을 격파할 전투가 필요했다

그렇기에 프리드리히는 병력을 모아 보급마차까지 버리면서

13일에 270km(하루에 20.76km)를 행군하게 된다


그러는 사이 하딕이 후사르 전술을 이용해 베를린을 점령하고

베를린으로 갔으나 이미 떠나버렸고 그 사이 군대는 합류하게 된다

1757년 11월 5일


프로이센의 진영은 왼쪽 로스바흐와 오른쪽 베드라 마을 사이에 위치하여

연합군을 마주하고 있었으며 프랑스의 수비즈 왕자와 작센의 요제프 왕자

프리드리히에게 전투를 시작할 기회를 주지 않고 전날 기동한 상태였다


그들의 군대는 오른쪽 측면에는 브란데로다 마을 근처에

왼쪽 측면은 뮈체른에 배치에서 서쪽에 자리잡고 있었다

연합군은 수적으로 2배나 차이 나고 클로드 루이가 지휘하는 대대는

프리드리히의 모든 진영을 내려다볼 수 있는 곳에 위치해있었다


프랑스와 합스부르크 제국군은 62개의 보병대대(31,000명), 84개의 기병대대(10,000명),

110명의 포병으로 총 41,110명으로 구성되어있으며 수비즈와 요제프의 지휘아래

기동을 지휘하기로 했고 요제프가 공세를 취하기로 했다

요제프는 수비즈에게 전투의 위험을 감수하라고 설득시켰으며

11월 5일 11시가 넘어서야 야영지에서 움직였다


연합군의 계획은 자연 장애물이 없는 프리드리히 왼쪽에 위치한

제우츠벨트로 진군해 오른쪽 라이할트스베르벤과 왼쪽 페트스타트사이에 북쪽을 향한

전투 배열로 배치하는거였다


요제프가 제안한 전투보다 더 제한적인 수비즈의 목표는

프리드리히가 잘레 강변의 마을로 후퇴하는걸 차단하는거였다

또, 연합군은 프로이센의 측면을 돌아서 진지를 확보할 수 있기에

적의 전선을 가로질려 진군해야 한다는 취약한 처지에 놓여 있어서 노출된 측면에

상당한 규모의 방어를 배치했다

프리드리히는 27개 보병대대(17,000명), 43개 기병대대(5,000명), 72명의 포병으로

약 22,000명의 병력을 지휘해야 했고 공성포 몇 대를 가지고 있었다


대왕은 로스바흐의 골다커 저택 옥상에서 프랑스군을 지켜보며 아침을 보냈고

연합군 이동 초기 단계에서 불길함을 느껴 농민들한테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정찰대를 보냈다

정찰대는 수비즈가 비이센펠스 길로 갔다고 보고했는데

그 길은 마을뿐만 아니라 수비즈가 보급품을 찾을 수 있는 프라이부르크나

프로이센군을 잘레 강에서 차단할 수 있는 메르세부르크까지 연결된 길이었다


정오 무렵

프리드리히는 식사하러 갔고 젊은 대위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폰 가우디는

프랑스의 움직임을 관찰하기 위해 자리를 비웠고 2시간 후

프랑스군이 접근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처음에는 후퇴를 확인하고 물러나는 것처럼 보였지만

대왕은 연합군 대열이 제우츠벨트로 향하는 걸 관찰했고

적 기병과 보병이 페트스타트에 접근한 것도 보고 적의 의도가

측면과 후방을 공격하고 완전히 분쇄하긴 못하더라도 통신선을 끊을 러는 것을 깨닫게 된다

프리드리히는 오후 2시 30분이 되어서야 이 계략을 깨닫았고

오후 3시가 되자 프로이센 군대 전체가 진영에 진을 치고 대열에 합류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폰 자이들리치는 38개의 기병 중대를 이끌고

로스바흐와 라이할트스베르벤 사이의 작은 언덕인 야누스와

푈첸으로 이동하였다


그리고 카를 프리드리히 폰 몰러 대령의 18문 포대가 야누스 후방에 배치되었고

로스바흐에는 7개의 중대가 남아있었다

이러한 움직임을 파악하고 있는 장군도 있었지만

수비즈는 프로이센군이 후퇴한 걸로 생각했고

야누스 언덕을 향해 서두르라는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언제 야누스로 가야 하는지, 야누스의 도착한 후 어디서, 어떻게

배치할지는 아무런 지시를 내리지 않았다


연합군 보병은 세개의 긴 열로 이동했으며

프랑스군 10개 편대는 예비로 남아있으며 12개의 편대는 왼쪽 측면을 방어했다

수비즈는 더 이상 의심할 꺽더지가 없다고 생각한 듯 정찰 명령을 하지 않았고

선발대도 보내지 않으며 프리드리히 앞으로 진격했다

프로이센군은 생제르맹 장군이 지휘하는 프랑스 전진 초소 앞에

소수의 병력을 남기고 야누스와 푈첸 직각으로 놓인 샤르타우 언덕에 측면 보초를 구성했다


연합군이 북쪽을 향해 전선을 향해 전선을 형성하고 있으면

오른쪽 측면을 공격할 수 있는데 만약 다른 방향으로 이동하고 있으면

새로운 방향으로 배치되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지만 앞서 말했듯

프로이센의 군대는 기동력이 뛰어났기에 많은 시간을 소모하지 않을수 있었다

연합군은 왼쪽 첫 번째 대열과 오른쪽 두번째 대열 순서대로 행진했고

그 사이 보병 예비대와 포병 예비가 위치했다

수비즈는 프로이센의 움직임을 감지하고 동쪽으로 선회 명령을 내렸으나

지형의 어려움과 원활하지 않은 소통으로 혼란이 발생했다


수비즈와 요제프는 전투 중일 때 혼란이 일어나는 걸 무시하고

프로이센이 동쪽으로 후퇴하려는 것으로 판단하고 재빠르게 행군을 시작했다

우익 기병대는 라이할트스베르벤으로 이동하고 좌익 기병대와 측면 기병대도

불러들려 전체 추격전에 참여하도록 한 탓에 구심점의 흔적은 사라지고

나머지 전열은 응집력과 질서를 상실했다

3시 15분 경


야누스 언덕에 있는 몰러의 포병은 혼란스러운 기병을 향해 포격을 가했고

라이할트스베르벤 북쪽에 있는 연합군 기병대는 몰러의 포격을 받았지만

지휘관들은 포격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후퇴를 방어하기 위해 중포를 사용하는 것이 지휘관들의 생각이었기에

연합군은 프리드리히가 후퇴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고 기병대는

빨리 포격의 사거리를 벗어났지만 이 때문에 보병 전선이 더 무너졌고

더더 혼란스러움과 부대의 결속력은 무너져내려갔다

자이들리치는 눈에 띄지 않게 20개 편대와 18개 편대의 두 줄로 구성된

기병대를 푈젠 언덕의 배치하고 접근 속도를 줄였다


오후 3시 30분

자이들리치가 언덕을 넘자 20개의 대대가 연합군으로 내려왔고

연합군의 전선을 뚫고 지나와 안그래도 혼란을 수습하기 바쁜데

더 큰 혼란을 일으키게 된다

자이들리치는 중상을 입으면서 전투에 참전했고

야누스 언덕에서 대기하던 18개 대대를 투입하며 두 번째 돌격을 진행했다


계속 기병대와 싸운다면 이미 전열이 흐트러졌고 포병의 지원이 있어 제대로 반격하기 힘들고

기병과 포격을 피해 샤르타우 언덕 위로 가면 미리 대비한 프로이센 보병의 사격을 맞게 되니...

연합군은 프리드리히가 계획한 함정에 걸리게 되었다

게다가 연합군은 아직 총검 사정거리에 적이 들어오지 않은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잘 훈련되고 질서정연한 프로이센 보병은

연합군의 대열을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그런 다음 몰러의 포병을 받으면서

자이들리치가 38개 기병 대대를 이끌면서 측면 공격에 나셨고

갑작스럽고 활기차게 등장한 프로이센의 기병은 이미 사기가 저하된

적들한테 혼란과 절망을 안겨주었다


결국 수비즈와 요제프는 간신히 살아남은 병력을 이끌고

후방으로 도피했고 자이들리치가 지휘하는 기병들은 어둠으로 인해

제대로 작전이 수행 불가능해질 때가지 잔여 부대 소탕전을 일으켰다

(로스바흐 전투)

연합군의 사상자는 약 10,000명인 반면에

프로이센의 사상자는 약 500명이고(이마저도 현대에선 더 적을 거라고 추정하고 있다)

이 전투로 때문에 프랑스가 유럽 전장에 관심을 줄어들게 하였고

소극적인 행보를 보이게 만들었다


머나먼 미래인 독일 제국에서도 로스바흐에서 훈련할 정도였으니

독일에겐 어떤 취급을 받는지 어느정도 예상이 될 것이다

프리드리히가 로스바흐에서 대승을 거두는 동안


1757년 11월 22일

오스트리아가 6만명의 대군을 이끌면서

2만 8천명의 프로이센을 찍어 눌리면서 브레슬라우를 공격하였다

(브레슬라우 전투)


프리드리히는 이번에도 12일에 274km를(하루에 22.83km)를 이동하는

놀라운 기동력을 선보이면서 로이텐 근처에 도착하였다

1757년 12월 5일


안개가 자욱한 날씨로 인해 오스트리아가 뭘 하는지 안 보였지만

바꿔서 생각해보면 프로이센 역시 뭘 하든 제대로 안 보일 수 있다는거기에

기병 부대와 보병 부대를 오스트리아 전선의 최북단(오스트리아 우측) 전방에 남겨두고

나머지 병력은 로이텐 쪽으로 배치했다


오스트리아 카를 장군은 재배치하는 걸 보고 철수하는걸로 착각하였다

새벽 4시


프리드리히는 4개의 열로 오스트리아 우익을 향해 이동했는데

안쪽 두 열에는 보병이 바깥 두 열에는 기병이 배치되어 있었고

언덕을 이용해 오스트리아군의 시야에 들어오지 않게 이동하였다


보병 2개 열과 기병 1개 열은 자신의 오른쪽으로 비스듬히 이동시켰으며

가장 왼쪽의 기병대는 오스트리아 전선 후방에 접근하는 걸 

확신시키기 위해 뒤에 남아있었다

불과 몇 주 전에 로스바흐 전투에서 성공했던 것과 같이

기동 작전을 실행하려는 교란 작전으로 이를 지켜본 카를은

예비군 전체를 오른쪽 측면으로 이동시켰다


이로 인해 왼쪽 측면이 약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전선이 로이텐에서

프로벨비츠를 지나 니페른까지 확장되어 원래의 4km를 훨씬 넘어섰다


기병대 한 열이 오스트리아 측면에 있는 동안

나머지 프로이센군은 오스트리아 왼쪽 날개에 도달했다

프로이센 보병은 남쪽으로 진군하여 적 시야에 벗어난 낮은 언덕 뒤에 머물렸다


두 소대의 간격은 프로이센 대열 전선 너비와 정확히 맞아떨어져 있었고

오스트리아 왼쪽 측면을 향해 행진하면서 방향을 틀어가며 전진해갔다

명령에 따라 기둥의 소대들은 로베틴츠에서 왼쪽으로 향해 전체 군대는

오스트리아의 가장 약한 부분을 바라보며 거의 직각으로 전투 대열을 이루며 서 있었다


한편 지텐의 기병대는 오스트리아 전선을 가로지르며

측면을 공격하기 위해 45도 각도로 배치되어있었다

프로이센 포병은 보병의 공격에 맞춰 포격 시간을 맞추기 위해

능선으로 이동하면서 오스트리아군 시야에서 벗어났고

버터버그의 뒷면에 숨어있었다


오스트리아 우측에 남아있던 프로이센 기병대와 소규모 보병 부대는

오스트리아군 앞에서 계속 도발을 하면서 북쪽으로 이동하는 거짓 작전을 펼쳤다

프로이센 보병은 전통적인 두 전선을 이용해

오스트리아 전선 측면을 공격하여 약점을 노렸으며 측면을 지휘한

프란츠 레오폴트 폰 나다스디는 얕은 도랑을 활용하려 노력했으나 

지원요청이 무시당하면서 불안해져갔다


프로이센군 대부분이 왼쪽에 배치되어 있었는데도

카를은 북쪽에서 공격이 올거라고 믿었으며

뷔르템베르거(루터교) 부대는 프로이센과의 전투를 의심하며 화약 연기를

뚫고 나타날 때까지 꾸준히 총을 쏘면서 버텼다

프로이센 보병과 포병은 프리드리히의 지원을 받아

로이텐으로 전진하며 오스트리아 제1전선을 압도하였다

카를은 자신을 속았다는 걸 깨닫고 프리드리히 교란에 대응하기 위해

급하게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병력을 바꿔서 4km 길이 정도였던 전선이 8~10km로 늘어났다


나다스디의 저항은 무력화되었고 오스트리아군이 혼란에 빠지자 프로이센에게

마을을 내주었고 프로이센 포병은 철수 중에도 포격을 멈추지 않았으며

마을로 진압하면서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로이텐은 큰 마을이 아니었기에 병력이 30~100미터 간격으로

빽빽이 들어섰고 척탄병이 성벽을 뚫고 교회를 습격하였다

 이미 오스트리아군은 사기가 극도로 저하가 되어가는 편이었고

승기를 잡은 것 같은 프로이센군한테 가볍게 밀리게 되었다

오스트리아군은 마을 북쪽 능선에서 포대를 이동시켜

보병을 엄호했고 포대의 사격으로 포병이 원래 전선에서

직각으로 배치되면서 잠시나마 우위를 점했다


프리드리히는 마지막 남은 좌익 부대에 진격 명령을 내리며

대응했지만 오스트리아 포대가 이를 격퇴했으며

프리드리히는 버터버그에 있는 중포로 포격을 퍼부었다

 

카를은 어떻게는 남은 병력인 기병대를 모아 어떻게

돌격했고 만약 성공했다면 전세를 뒤집을 수 있었으나

지텐 장군의 40개 기병 중대가 라닥스도로프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측면을 돌격했고 게오르크 빌헬름 폰 드리센이 지휘하는 또 다른 30개 중대가

전방으로 돌격했고 바이로이트 기병대는 반대편 측면을 향해 공격했다


결국 남은 희망이었던 기병대도 궤멸당하였고 설사 남은 병력을 모은다고 해도

기병대는 없는 상황에다가 프로이센의 보병, 기병, 포병의 조합을 이기긴 어려웠다


프로이센 기병에 압도당한 오스트리아 보병은 무너졌고

보병과 기병은 브레슬라우로 후퇴하여 검은 물이라고 불리는

슈바이니처 바이스트리츠 강을 건너갔다

(로이텐 전투)



간단하게 지도로 표시된걸 보면



빨간색은 오스트리아, 파란색은 프로이센, 점선은 움직임, 대각선 사각형은 기병이다
프리드리히가 접근하자 카를의 전진 진지는
니페른으로 철수하였고 프리드리히는 보른에서
오스트리아 군의 규모와 성격을 평가하며
병력을 조직하였다
카를이 프로이센의 진격으로부터
측면을 보호하기 위해 대부분의 예비군을
북쪽으로 보내는 동안 프리드리히는 오스트리아 군을 지나
왼쪽 측면으로 기습을 감행했다
카를은 자신의 휘험을 깨닫고
오른쪽 측면에 있던 기병과 병력을 전투에
투입하려고 했고 길이가 8km에 달했기 때문에
군대는 멀리 행군해야 했었다
카를의 군대는 현장에서 철수했고
프리드리히는 리사의 작은 성으로 들어갔다



병력이 2배나 차이 났는데도 불구하고 약 7시간 만에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하며 이전까지 얻은 이점을 모조리 지워버렸다


먼 훗날

나폴레옹은 이 전투를 보고 "움직임, 기동, 결단의 걸작'이라고 평가했으며

이 전투만으로도 위대한 장군에 오를 수 있다고 극찬했다

과연 승기를 제대로 잡은 프로이센은 어떻게 되어 갈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