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식적으로 중앙아시아의 쌀 재배는 고려인들이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투르크메니스탄, 이란, 아프가니스탄에서도 쌀을 재배하고 있음. 또한 고려인들의 쌀 재배도 스탈린의 강제 이주 이후에 일어난 일이 아님. 많은 갤럼들이 아는 사실이지만, 갤에서 이에 대해서는 크게 다뤄진 적이 없는 듯 해서 한 번 재탕해 봄. 맨 밑에 요약 있으니 참고하시길.



1. 1920년대 후반, 고려인 쌀 재배의 시작

1920년대부터 중앙아시아의 개발 문제를 놓고 고심하던 소련 지도부는 중앙아시아에 농업과 경공업을 육성하려 했고 스탈린 집권 이후에 5개년 계획을 실시하면서 중앙아시아 개발은 크게 가속도가 붙음. 그리고 소련 지도부는 카자흐 동부에 한인과 위구르인들이 농사를 짓기도 하고 새로이 조사, 연구하니까 카자흐에서 쌀 재배가 가능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보게 됨. 그런데, 현지에선 벼 재배 전문가들을 구할 수가 없다보니 연해주 지역에 정착해서 다년간 쌀을 재배해 본 경험이 있는 연해주 한인들을 초빙하기로 결정함. 카자흐스탄 농업 인민위원회의 권유에 약 300여명의 한인들이 응해서 카자흐 세미레첸스크로 이주했고 여기서 '카스리스'(카자흐 쌀) 이란 명칭의 협동조합을 세워 벼 재배를 시작함.


개인적으론, 투르크메니스탄보다 훨씬 더 환경이 나쁜 연해주에서 벼 농사를 지어본 한인들이 투르크멘 농민들보다 카자흐에 더 잘 적응할 것으로 생각해서 한인들을 모집한 게 아닐까 함.


연해주에서 이주해 온 한인들은 현지 환경에 맞는 벼 품종을 선정하기 위해 다양한 종류의 벼를 재배했음. 그리고 벼 재배와 별개로 카자흐 현지에서는 당 지도부가 밀어붙이는 개간 사업과 운하 건설 사업이 벌어지고 있었고, 1931년에 카라탈 운하 건설 사업이 진행되면서 물을 끌어쓸 수 있게 됨. 이 덕분에 한인 농민들은 현지 환경에 적합한 벼 품종을 관개 농업을 이용해 재배할 수 있게 되었고 1931년에 풍작을 이루었음.


그래서 고려인 벼 재배는 이미 20년대 후반에 미리 카자흐에 이주해와서 적응한 선각자들의 선행 작업이 있었고 이들이 30년대에 강제 이주되어 온 동포들을 위해 자신들의 지식과 종자를 내어주면서 우리가 잘 아는 '중앙아시아 고려인의 벼 재배'라는 명제가 현실화됨.



2. 고려인들은 모두 농민이었나?

아님. 약 35%가 도시의 사무원이나 공장 노동자로, 5%가 어업, 나머지 60%가 농장에 배치됨. 그래서 고려인들이 모두 농장에서 쌀 농사를 지은 것은 아님. 그렇지만, 농업의 비중이 높은 것은 부정할 수 없음.



3. 고려인들은 맨주먹으로 시작했나?

상당 부분 사실. 그렇지만, 지원이 없었던 것은 아님. 고려인 강제 이주에 대한 논문과 고려인 1, 2세대의 증언을 들어보면 스탈린과 NKVD가 참 가혹하게 고려인들을 다루었다는 사실이 드러남. 그러나, 카자흐스탄 공화국이 고려인 집단 농장의 건설을 위해 800만 루블을 지급해 주는 등, 지원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님.



4. 고려인 마을도 사람 사는 곳

고려인들이 다른 민족에 비해 훨씬 더 근면 성실해서 성공했다는 얘기가 정설처럼 퍼져 있지만, 약간 수정해야 할 필요는 있음.


레닌기치 같은 고려인 신문지에 농민들이 자기네 집단 농장 간부들의 비리와 부정을 내부 고발한다거나, 간부들이 관리를 똑바로 안 해서 수확량이 낮게 잡혀 레닌기치 같은 언론에서 크게 비판하는 일도 있었음. 현재 한국의 화폐 가치를 예로 들어 설명하자면, 집단 농장 간부들이 예산을 횡령해서 출장비랍시고 혼자 수천만원을 쓰거나 뇌물로 서로 몇백만원씩 찔러주기도 하고 '고봉준'인가 하는 간부 ㅅㄲ가 볍씨는 안 심고 술만 빨다가 퍼질러 자는 바람에 농장의 파종이 늦어지는 일도 있었다고 함.


그리고 각 집단 농장 별로, 집단 농장 내부에서도 갈등이 벌어져서 간부들이 집단 농장의 농장원을 추방시키거나 파벌들끼리 싸우기도 해서 언론에서 다룬 적도 있음. 또는, 작업 반장이 수확물을 빼돌려서 몰래 내다팔거나 친한 사람, 가족, 친척들에게 나눠주던 게 발각당해서 추방당하는 일도 있었음.


고려인 집단 농장과 정착촌들이 고려인들의 노력으로 정말 빠른 시간 안에 건설, 안정화되긴 했지만 그래도 사람 사는 곳이긴 했던 것임. 고려인들은 순수한 이상과 동포에 대한 사랑만을 갖고 있는 초인이 아니라 우리랑 똑같은 불완전한 인간이었음.



5. 높은 교육열

다들 아는 사실이지만, 고려인들은 중앙아시아로 와서도 교육열이 높아서 크즐오르다 대학을 설립한다거나, 어떻게든 자녀들을 교육시키려 노력했고 다양한 문화 시설을 짓는 데에도 크게 신경 썼음.



6. 출처

- 레닌기치 에 나타난 1938년 카자흐스탄 고려인 사회



7. 요약

- 고려인의 중앙아시아 벼 재배는 강제 이주당한 뒤에 맨주먹으로 시작한 게 아니라 1920년대 후반에 소련 중앙 정부의 카자흐 벼 농사 재배 사업에 참여해 중앙아시아로 이주한 연해주 한인들이 이미 시작했던 것이다. 그리고 30년대 초부터 연해주 출신 한인들을 중심으로 카자흐 지역에 벼 재배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 투르크메니스탄, 이란, 아프간 등, 중앙아시아 남부에서는 벼를 재배 중이었다. 기억이 가물가물하긴 하지만, 이란에서는 모내기도 한다고 알고 있다.

- 30년대 강제 이주로 중앙아시아에 온 고려인들의 60%는 농장, 35%는 도시, 5%는 어장에 배치되었다.

- 고려인들도 우리와 같은 불완전한 인간들이라서 간부나 농장원들의 부정부패, 횡령, 태업, 각 농장 간의 갈등이나 농장 내부 파벌 싸움이 벌어지기도 했다.

- 그렇지만, 고려인들은 농장과 정착촌들을 정말 빠른 시일 내에 안정화시키고 크즐오르다 대학을 비롯해 여러 학교와 문화 시설을 세워 교육에 신경썼다.


- 깜빡하고 안 쓴 것 추가 : 굳이 고려인이 강제 이주되어야 중앙아시아에서 쌀 농사가 된다고 생각하는 건 편견. 단순히 연해주 한인들을 모집해서 중앙아시아로 보내는 것도 가능함. 이것도 고증이고, 스탈린도 도장 찍어준 일이니까 굳이 강제 이주라는 선택지를 고를 필요가 없음.




출처: https://m.dcinside.com/board/alternative_history/621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