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5년 12월


발해 남경남해부 고려 국경 인근 지역



"하....제기랄."


어느 한 병사가 초점 없는 눈으로 제대로 닦이지도 않은 창을 대충 들며 대뜸 욕지거리를 뱉어냈다. 


"망할 놈의 눈, 허다하고 내리는구먼."


그의 눈가는 매우 짙어 콧구멍까지 어두운 부분이 닿을 지경이었고, 눈빛은 퀭하여 아무런 빛이 그 안에 없었으며, 피부 또한 검은 묵같이 짙고 퍼석퍼석해 인생을 막 시작할 젊디 젊은 22세의 나이였음에도 마치 불혹에 들어선 중년 남자를 보는듯 했다.


하기사 12살에는 무리한 세금 때문에 집안이 풍비박산나고, 13살에는 아비가 죽고, 14살에는 어미와 두 동생과 같이 노비로 팔려나가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고, 15살에는 어미와 두 동생이 모두 길거리에서 비참하게 객사한 모습을 보았으니, 오히려 불혹처럼만 보이는 것이 더 신기할 지경이기는 했다.


"둘째 놈이 눈을 참 좋아했었는데..."


잠시 눈을 감으며 옛 기억을 떠올린 사내는, 이윽고 머리를 세게 휘저으며 기억을 흐트렸다.


"젠장, 왜 이딴 생각이..."


생사가 불분명했던 가족만 보고 살아왔던 그는 이제 죽지 못해 억지로 살아가고 있었다. 


그가 어머니와 두 동생이 길거리에서 찢어진 누더기를 걸치고 쓰러져 있는 모습을 보았을 때, 그는 수레를 빌려 여러 의원에게 가 보았다. 하지만 어떤 의원이든 허름한 옷차림의 그의 모습을 보고서는 단칼에 거절하며 내쫓았고, 그나마 그의 가족을 치료하겠다는 마음씨 좋은 의원을 만났을 때엔 이미 가족들의 몸은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이후 가족들의 시신을 최대한 정성스럽게 묻어 주고 주인집으로 돌아갔지만, 평소에도 성정이 좋지 않았던 주인은 그가 가족의 시신을 묻어주느라 이틀 넘게 돌아오지 않았다는 소식을 듣자 그를 창고에 처박고 물도 밥도 주지 않으며 굶겨 죽이려 했다. 


모두가 그를 외면할 때 몰래 자신의 음식과 물을 나누어주며 그를 돌보아준 어린 나이의 종은 다음날 나무 몽둥이를 맞고 세상을 떴다.


그 아이에게 복수를 해 주겠노라고 기세좋게 창고를 탈출한 것까지는 좋았지만, 주인의 추노꾼과 관군을 피하는 도망자 신세로 전락했다.


도망자 신세였던지라 딱히 어디 갈 곳도 없었고, 그저 길바닥에서 동냥을 하거나 음식점에서 간간히 밥을 얻어먹거나, 혹은 허드렛일을 하며 그렇게 5년을 보냈다.


그렇게 갖은 고생을 하고 나니, 나름 곱상하던 얼굴은 주름살이 가득해졌고, 피부는 까무잡잡했으며 인상은 험악해져 도저히 그 예전의 노비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리고 또 동냥질을 하던 와중에 어느 군관이 밥을 줄 테니 자기 부대에 들어오지 않겠냐는 말에 혹하여 덥썩 제안을 받아들인 결과가 바로 지금 그의 상황이었다. 


"참이오!"


그렇게 그가 잠시 회상을 하느라 정신이 팔린 사이, 해지고 녹슨 갑옷을 입은 병사가 아침시간이라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맛대가리라고는 없고 한 주먹의 반 정도 되는 온갖 잡곡과 모래가 섞인 주먹밥이 평소에 아침이랍시고 먹는 것이었다.


그러나 요즘에는 그것을 먹는 것도 하늘의 별 따기였던지라, 힘없이 앉아 있던 다른 병사들은 밥 소리를 듣자마자 생기가 살아나 평소와는 다른 속도로 하여금 걸음을 재촉하였고, 그 역시 그들 중 하나였다.


참이라 외친 병사는 바구니에 수북히 담긴 주먹밥 덩이를 한 명에 하나씩 나누어주었다.


"이 빌어먹을 놈의 맛대가리는 도저히 익숙해지지가 않는구먼."


"그래도 이게 어딘가. 지난번에는 이것도 먹지 못해 쓰러진 자가 어디 한둘이던가?"


"제기, 장령부(발해 15부 중 하나) 놈들은 사정이 좀 낫다던데."


"그래봤자 거란 놈들하고 허다하게 싸워야 하는데 뭐가 좋나? 차라리 안전한 데서 있는게 낫지."


"아이고 이 똘추야, 안전하다면 차라리 장령부가 더 안전하지. 나라의 모든 정예군이 다 모여 있는데 유사시에 버티긴 가장 잘 버티지 않겠나? 그리고 도적떼들이 날뛰는데 장령부에선 그런 게 거의 없다니, 장령부는 그나마 낫지."


"하긴 그렇긴 하구먼."


오랜만에 들어가는 밥에 병사들의 회포도 풀리기 시작했다. 


"장령부..."


그는 한때 그의 고향이었던 곳을 되뇌였다.


한때 이 나라에서 가장 위험한 땅이었지만, 지금은 모든 정예군이 집중되어 있어 오히려 가장 안전한 곳이 되었다.


이 지긋지긋한 전쟁이 끝나면, 다시 장령부로 돌아가볼까 생각했다.


어차피, 이제 그를 아는 사람들은 모두 죽었을 테니, 그 누구도 그를 다시 잡지는 못할 것이다.


그리고 다시 농사를 짓고, 참한 처자를 만나 혼인을 하고, 토끼 같은 자식을 낳아 그럭저럭 사는 것이다.


상경이 함락되기 전까지는, 그렇게 생각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