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의 대학도시인 레이던에 있는 국립 유물 박물관(Rijksmuseum van Oudheden)에 전시 중인 대 오소르콘의 왕명을 새긴 벽돌 부조>


일반인들에게 가장 잘 알려진 이집트 신왕국만 해도 제19왕조 말기가 되면 파라오들에 관한 정확한 정보를 얻기 힘들어진다. 일례로 메르넵타-세티 2세 사후 파라오에 즉위한 십타는 누구 아들인지도 불명확하다.(과거에는 세티 2세의 아들이라는 게 정설이었지만 최근에는 기록말살당한 아멘메세스의 아들이라는 설이 대세다) 제3중간기에 접어들면 남은 기록 자체가 워낙 없어서 학자들마저도 마네토의 '이집트 역사'에선 이런 파라오가 있었다고 하는데 실존 안하는 거 아님?이라고 의심받았던 파라오들이 상당하다. 그 중 한 명이 제21왕조의 5대 파라오인 대 오소르콘이다.


대 오소르콘은 고대 리비아인 유목부족인 메시웨시(Meshwesh, 다른 명칭은 마Ma)의 대부족장인 세숑크 A(Shoshenq A)과 그의 후처인 Mehtenweshkhet A 사이의 아들이다.  대부족장 자리를 물려받은 님로트 A(Nimlot A)의 동생인데 님로트 A의 아들이 훗날 파라오로 즉위하여 제22왕조를 개창한 시조인 셰숑크 1세이므로 그와는 삼촌 사이가 된다.


이 사람이 실존했다는 주장은 1963년에 이집트학자인 에릭 영(Eric Young)이 카르나크 신전 신관 연대기 중 3B 부분의 1~3행에서 아크헤페레 세테펜레(Aakheperre Setepenre, 위대하신 라의 현현, 라에게 선택받은 자)라는 왕의 치세 2년차 셰무(Shemu, 나일강이 범람하기 직전 수위가 가장 낮은 시기를 칭하기에 수확의 계절, 낮은 수위의 계절이라고도 번역한다. 대략 5월 9일부터 시작해서 9월 5일에 끝난다) 20일에 네스파네호르(Nespaneferhor)라는 사제가 사제단에 합류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영은 아크헤페레 세테펜레라는 즉위명을 쓴 파라오가 마네토의 기록에서 Osochor라고 언급된 왕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 당시에는 학계 전체에서 인정받진 못했다.


그러다가 프랑스의 이집트학자인 진 요요트(Jean Yoyoytte)가 1976년~1977년에 계보학 문서에서 오소르콘이라는 이름의 리비아인 왕은 세숑크 A와 Mehtenweshkhet A의 아들이며, Mehtenweshkhet A는 '왕의 어머니'라는 직함이 부여되었다는 사실을 논문으로 발표했는데, 역대 이집트의 파라오들 중 오소르콘이라는 이름을 쓴 파라오들 중에서 어머니가 Mehtenweshkhet A인 경우는 없었기 때문에 여기서 말하는 오소르콘은 마네토가 Osochor라고 언급한, 제21왕조의 파라오인 대 오소르콘으로 확정되었다.


1999년에는 셈나(Semna, 나일강의 제2폭포와 제3폭포 사이의 장소로 세누스레트 1세 시절에 조성된 요새 3개가 있었다. 아스완 댐의 건설로 물에 잠겼으나 유적지들은 전부 뜯어서 옮겼다) 사원의 기록문에 언급된 카리말라(Karimala) 왕비가 대 오소르콘의 딸이라는 주장이 나왔다. 그녀의 직함은 '왕의 딸'이자 '왕의 아내'였고 이름으로 볼 때 리비아 출신이었기 때문.


네덜란드 레이던의 국립 유물 박물관에는 아크헤페레 세테펜아문(Aakheperre Setepenamun, 위대하신 라의 현현, 아문에게 선택받은자)이라는 왕명을 쓴 오소르콘의 파이앙스제 인장과 왕명이 새겨진 벽돌 부조를 전시하고 있는데, 오랫동안 이 유물들은 제22왕조의 마지막 파라오인 오소르콘 4세의 것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2000년에 이 유물들의 주인은 대 오소르콘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고 이게 맞다면 대 오소르콘은 왕명을 2개 썼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런 과정을 거쳐 대 오소르콘이 실존했던 파라오였다는 게 증명된지 50년 되었는데, 훗날 제21왕조가 단절된 후 이집트화된 리비아인 왕조인 제22왕조가 열린다는 걸 알린다는 점에서 중요하게 여겨지는 파라오이다. 또한 마네토의 기록이 상당히 정확하다는 것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