는 바로 행주대첩

사진은 나무위키에서 퍼왔다.


손자병법에 이르기를, 명장의 조건은 두가지다.

하나는 지는 싸움을 이기게 만드는 장수, 나머지 하나는 이길 싸움만 골라서 하는 장수. 더 정확히는 이겨 놓고 싸우는 장수.


하지만 나도 어쩔 수 없는 제 3자 관찰자 시점이라 재미는 지는 싸움을 이기게 만드는 장수 쪽이 재밌다.


임진왜란의 수군의 최고 전투는 한산도 해전을 뽑고, 육군의 최고 전투는 행주대첩을 뽑는다. 


유난히 육군쪽은 '이겨놓고 싸운다'는 기조에 어울리는 전투가 크게 없다는 점이 더 흥미롭다고 생각한다.


나는 전쟁사는 그 전후 사정을 알고 보는게 훨씬 더 재밌다고 여기는 쪽이기 때문에, 배경을 설명하자면

북진을 하던 일본군은 이순신 제독의 미친 활약으로 북진 속도가 너무나도 지체되었고, 결국 명나라군이 참전하여 조선군과 같이 남하하기에 이른다. 평양을 탈환한 조명연합군은 이에 각지에서 병력들을 긁어모아 한성 탈환을 위한 포석을 마련하던 중,


벽제관 전투에서 대패를 해버린다. 이에 명나라의 이여송 장군은 남하를 멈추고 평양에 눌러붙어 버린다. 일본군의 사기가 잔뜩 올라있는 상태에서 조선군 3천이 행주산성에 있다는 소식을 들은 일본군은, 그들을 저지 하기 위해 군사 3만을 이끌고 행주산성 앞으로 가 전투 준비를 하기에 이른다...




행주산성은 토성으로 알려져 있지만 현대에 발굴 결과 석성으로 된 내성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아마 권율장군은 석성을 토대로 한 내성, 그리고 토성에 목책을 세워 외성으로 구분하여 수성전을 준비 했을 것이다.


물론 이것으로도 행주산성의 방어력은 부족하다고 볼 수 있을것이다. 석성은 삼국시대때 축성된 것 으로 보이는 데다 목책을 세웠으니 당연히 그 방어력은 그 흔한 읍성보다도 부족한 수준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권율장군의 3천군은 온갖 신무기로 무장한, 포방부의 전신다운 모습을 보여준다. 이들이 가지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무기는,

1. 신기전

현대로 따지면 고체연료추진로켓.

세종 29년(1447)에 개발 되었으며, 최무선이 만든 주화를 장영실과 최해산이 개량한 물건이다.

본래 목적은 수비용이 아니라 현대의 미사일과 같이 활로 확보 혹은 전략자산 공격같은 용도였다.

아마 명군과 같이 한양 탈환을 위해 있던 군대이기 때문에 가지고 있었던 듯 하다. 어찌됐던 이 무기는 조선군에게 엄청난 도움이 되었다. 

 2. 총통기

무려 문종 1년(1451) 에 만들어진 무기다. 신기전이 미사일이라면 이놈은 기관총이다. 

한 번 발사를 시작하면 수십초간 백여발을 쏟아 부을 정도의 미친 화력을 가진놈이다. 한번에 총통 50발을 발사 할 수 있다고 하니 어마어마 한 놈이다.

찾아보다가 알게된건데 여기 사용된 총통은 사전총통으로 한 번 발사시 4발의 화살이 나가는 총통이다. 한번만 발사해도 200발이 나간다는 무시무시한 얘기다. ㅎㄷㄷ.


3. 문종화차

사실 얘가 먼저 나왔어야 했는데 좀 꼬였다. 앞선 신기전, 총통기는 모두 이 문종화차의 개량형에 탑재되어 사용되었다.

문종 1년(1451)에 기록이 처음 등장하므로 그 즈음 나온것으로 추측된다. 

여기에는 재밌는 얘기도 있는데 문종화차를 복원 할 당시 재료는 다 있는데 어떻게 생긴지를 몰라서 아무리 조합해봐도 부품이 남거나 해서 도저히 조립을 못할 때, 담당자가 문종대왕릉에 가서 묘지기 몰래 당신이 만든거니 어떻게 만든건지 알려달라 하고 집에와서 잤는데, 꿈에서 이 문종화차의 온전한 모습이 보였다고 한다. 꿈에서 깬 뒤 그 모양 그대로 만들었더니 진짜 완벽하게 복원이 됐다고 한다. 


4. 변이중 화차

위 사진은 남아있는 그림과 기록을 토대로 복원한 변이중 화차다.

사실 위 복원도 맞다고는 할 수 없고 꽤나 많은 논란이 있으니 완벽히 저 모습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말자.

변이중 이라는 사람이 전쟁이 나자 문종화차를 개량해 만든 화차로, 전쟁 당시 가장 널리 보급된 화차였다.

승자총통 40문을 달고있으며 한번 불붙이면 일제히 발사되는 방식이라고 한다.

굳이 따지자면 장갑차에 가깝다. 아마 돌격하는 일본군에게는 뚫기도 힘들고 그렇다고 무시하자니 어마어마한 화력을 내는 화차였을 것이다.


5. 승자총통

재미있게도 개인 화기다. 허리에 대고 쏘는 총통으로 한 번에 여러발을 발사하는 산탄총이라 생각하면 편하다.

다만 아마도 많이는 없었을 것이고 대부분 화차에 장착되는 형식이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재미있는것은 승자총통의 화승총 버전인 소승자총통이다

사실 화승총 버전이라고 하기도 좀 그렇고 그냥 좀 작게 만들었다. 대신에 명중률을 크게 향상시킬 수 있도록 가늠쇠와 가늠자가 붙어있다. 개인화기의 눈부신 발전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6. 천자총통

어? 육군의 무기인데 왜 수군 배에 있는 사진인가요?

원래 수군에서 쓰는 무기였으니까. 근데 왜 육군에 있냐면

권율과 평소 친했던 이순신 제독께서 "써보니 괜찮던데? 좀 써볼래?" 하고 줬다.


사실 좀 더 많을지도 모르지만 내가 아는건 여기까지라 그냥 여기까지만 적겠다.

암튼 행주산성의 조선군 3천은 권율이 지휘하고 있었고, 

일본군 3만의 총사령관은 우키타 히데이에.

그리고 3만의 군대를 7개로 쪼개 1군에 고니시 유키나가 (현재 구마모토쪽 영주), 2군에 이시다 미츠나리(현재 시가현쪽 영주), 3군에 구로다 나가마사(현재 효고현쪽 영주), 4군에 총대장이던 본인 우키타 히데이에(현재 오카야마현 일대 영주), 5군에 깃카와 히로이에(현재 야마구치현쪽 영주), 6군에 모리 히데모토(현재 시모노세키 일대 영주), 그리고 7군에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현재 에히메현쪽 영주) 라는 쟁쟁한 다이묘들이 지휘를 맡았다.


행주산성은 뒤로는 한강을 낀 배수진 형태. 조선군은 승려 처영이 이끄는 승병 6천이 합류하고, 진을 정비한 뒤 압도적인 군세의 일본군을 긴장한 채 바라보며 마음을 다잡는다.


그리고 시작된 전투, 1군에 고니시 유키나가는 조선군의 압도적인 화력을 뚫고 좁은 입구를 지나가야 하는 막중한 임무를 이기지 못하고 패퇴한다. 2군의 이시다 미츠나리는 '저 정도 화력을 쏟았으면 이제 더 쓸 화약도 없겠지' 라는 생각으로 닥돌 하다가 고니시와 마찬가지로 무시무시한 화력에 패퇴하고 만다. 3군의 구로다 나가마사는 '이건 공성전이다' 라는 생각이었는지 누각을 짓고, 그 위에 총병과 공병을 올려 공격하는, 전형적인 공성전의 전술을 짜 전투에 임한다. 그러나 이 때 이순신 제독이 권율장군에게 준 천자총통이 큰 힘을 발휘한다.


천자총통은 수군에서 쓰던 만큼 적의 함선을 파괴시키는 용도로 쓰던 강력한 무기였다. 그런 무기로 누각을 부수는게 어렵지는 않았을 것이다.


결국 3군의 구로다 나가마사 조차 뚫지 못하고 패퇴하자 4군의 지휘관이자 전투의 총사령관 우키타 히데이에는 직접 출병하여 전투가 시작됐다.

우키타군은 순식간에 조선군의 외책을 뚫고 내책까지 진격했다. 조선군의 1차 위기였는데, 이 때 권율은 모든 화력을 우키타 히데이에가 있는 중군에 화력을 집중시키라는 명령을 내린다.

변이중 화차, 문종화차, 신기전. 모든 조선의 화력무기들은 굉음을 내뿜이며 우키타의 깃발 부근에 화력을 몰아치기 시작했고 아마 비격진천뢰도 포함 됐을 것으로 추측되는 만큼 당시로서는 생각하기도 힘들 엄청난 화력이었을 것이다. 이 공격에 지휘관인 우키타 히데이에는 죽기 직전까지 갔다가 부하들이 업고 도망쳐 겨우 살았고, 왜인지 이시다 미츠나리도 이 때 큰 부상을 입혔다.

결국 지휘관이 전투불능이되자 4군은 자연스레 박살났고, 이로써 조선의 1차 위기는 힘겹게 넘길 수 있었다.


5군의 깃카와 히로이에는 화공을 명했다. 목책에 불을 지르라고 한 것인데, 이는 조선군이 한강물을 퍼와 목책에 불을 끄는 것으로 막아냈다. 조선군은 목책에 불을 끈것으로 끝난게 아니라, 다시한번 미친 화력으로 5군마저 박살내며 패퇴시켰다.


6군의 모리 히데모토는 승병들이 지키는 서쪽을 공략했다. 그러나 승병들은 재와 석회를 뿌리며 저항했다. 이게 뭐 사람 안구나 몸에 들어가면 어떤 반응에 의해 강염기가 된다고 한다. 시력손실과 호흡곤란을 당한 6군은 패퇴한다.


마지막 7군의 지휘관이자 백전노장 고바야카와 다카카게는 이치전투에서 1만의 군대로 1천의 권율에게 진 기억을 갖고 복수하기 위해 주저없이 진격한다. 문제는, 아침부터 계속 된 전투에 조선군이 상당히 지쳐있었다는 점이다. 7군의 군대에 의해 서쪽의 승병들이 붕괴되기 시작하며 조선군과 일본군은 치열한 백병전을 벌인다. 그러나 조선군도 수비형 배수진을 쳤고, 한양 탈환이라는 목표가 코앞이었던 탓인지, 일본군의 주특기인 백병전이었음에도 밀리지 않고 처절하게 싸운다. 


그러다가 한강으로 충청수사 정걸이 배 2척에 화살을 잔뜩 실어 후방에 도착했고, 때 맞춰 바다로 조운선 수십척이 지나가고 있던것을 이순신의 조선수군이 지원을 왔다고 생각한 일본군은 끝내 후퇴했다.


결국 권율장군은 3만의 기세등등한 일본군을 3천의 조선군으로 이겨버린것이다.



양측의 피해는 제대로 알 수 없으나 위키백과에는 조선군 130여명 사상으로 추측한다.


정말 말 그대로 총통을 위시한 신무기, 정신력으로 무장한 조선군의 인간승리라 볼 수 있을것이다.


이후 일본군은 파주로 진격할까 생각도 하지만 이내 포기하고, 움직이지 않던 이여송의 명나라군도 이 믿을 수 없는 승전소식에 남하하여 2개월 후에는 한양을 수복한다. 


나는 이 이야기를 참 좋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