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글 모음


*간략히 썼기에

약간의 누락이나 오류가 발생 할 수 있다*


*학살을 포함한 내용이 있어 잔혹스러울 수 있다*



1. 과테말라의 역사

간단하게 과테말라의 역사를 알아보자

1871년, 자유주의자들은 오랫동안 자리 잡던 보수당을 전복시킬

'조국을 위한 계획'을 세우게 되고 이 계획은 성공하게 된다


그 후, 대통령으로 선출된 후스토 루피노 바리오스커피 생산을 확대했으며

이를 위해서는 많은 토지와 노동자가 필요했다


그래서 바리오스는 1877년 일용노동자 규정을 제정하여

원주민 노동자들이 크리오와 이민자로 구성된 지주들을 위해

저임금으로 일하도록 강요했다

한편, 미국은 먼로 독트린을 빌미로 유럽 식민세력을 몰아내고 있었다

라틴아메리카를 구해주고 싶어서가 아닌 자기의 세력권을 만들기 위해서였고

다른 국가와 달리 과테말라는 미국에 순응적이라 군사를 쓸 일이 없었다


너무나도 잘 따라주고 있는 과테말라는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미국에 순응하면서 미국 기업의 조세를 면제해주었고 그 중에는

유나이티드 프루트 컴퍼니(UFC)가 있었다

1920년대 점점 사회 구조가 형성 되어가고 있었는데

과테말라를 방문한 칼 빌헬름 루드비그 왕자가 뚜렷한 3가지 계급으로 구분된다고 했다


가장 높이 있는 지위는 크리오로 라틴아메리카를 정복한 콩키스타도르의 후손이다

수는 제일 적지만 국가의 엘리트 계급으로 정치적, 지적 영역을 독점하고

농경지 대부분을 소유했다


그 다음으로 라디노원주민, 흑인, 크리오의 혼혈인 이들은

수공업자, 점원, 상인, 하급 공무원으로 일했다


그 밑이 가장 낮은 지위인 인디오였다

수는 확연히 많았지만 거의 공교육조차 받지 못했고

농업노동자로 구성되어있었다

1931년, 호르헤 유비코가 미국의 지원을 받아 집권했다

부유한 귀족이자 확고한 반공주의자였던 그는 농민과의 분쟁에서

항상 UFC의 편을 들어줬으며 대공황의 여파로 농민 제도가 흔들리자

빚을 지면 상대방의 노예가 되는 부채 노예 제도강제 노동으로 노동자를 쉽게 구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우비코는 자신을 또 다른 나폴레옹이라고 생각했으며

화려하게 옷을 입고 황제의 동상과 그림으로 자신을 둘러싸고

우체국, 학교, 교향악단 같은 수많은 정치 및 사회기관을 군사화했고 감시했다

인디언의 혐오, 강제 노동, 감시받으며 살아야 하는 사회...

여러 가지 불만이 겹치고 겹쳐 1944년 과테말라 혁명이 터지게 된다


결국, 우비코는 사임했으며 건국 이후 최초의 민주적 선거가 실시되었다

(모두가 투표가 가능했던 건 아니었고 문맹이 아닌 남성에게만 주었다)

이 기간부터 1954년 6월까지 10년의 봄이라고 불린다

1944년 선거가 열렸고 압도적인 표 차이로(득표를 85%) 후한 호세 아레발로가 당선됐다

아레발로는 최저임금법, 교육 자금 확대, 보통선거(문맹 여성은 제외), 노동 개혁을 포함한

여러 사회 개혁을 시행했다


그러나 아레발로의 개혁은 중산층에게만 돌아갔을 뿐

인구 대다수를 구성하는 농업노동자에게는 거의 도움이 되지 않았다

게다가 그의 온건 개혁마저 받아들일 생각이 없던 미국 정부, UFC, 대지주들은

아레발로 정부를 공산주의 정권이라고 보았고 그가 재임하던 동안 최소 25건의

쿠데타가 일어나 군인들도 그렇게 좋게 보지는 않았다

1950년

우여곡절 한 아레발로 정권이 지나 그다음은 하코보 아르벤스가 물려받았다

아르벤스는 아레발로의 개혁을 보다 진보적으로 만들었다


1952년 6월 17일

그는 900호 법령을 통과시켜 272헥타르 이상의 모든 비 경작지, 91~271헥타르 사이의

부동산 중 비 경작지가 1/3 이상의 것들을 유상몰수 하는 식으로 농지개혁을 추진했다

농지개혁은 빠르게 진행되어 1954년 6월까지 인구의 1/6에 달하는 

50만 명이 57만 헥타르에 달하는 토지를 분배받았다

아르벤츠는 900호 법령으로 과테말라를 봉건주의에서 자본주의로 탈바꿈하려는 계획이었다

이 정책의 수혜자들은 스페인의 침공 이후 토착민 집단이 주를 이뤘고 토지경작을 늘려

농업 생산량을 높이는 것 말고도 많은 과테말라인들이 존엄성을 갖추게 되는 역할도 하였다


하지만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은 자기들의 권력 기반인 토지를 해체하려는 그의 개혁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UFC도 법령 900호를 따라 22만 헥타르에 달하는 소유지의 85% 비 경작지를 내놓아야 됐었다

멀쩡하게 토지를 가지고 있던 사람들까지 몰수하니 UFC를 포함한 대지주들은

과테말라 정부를 공산주의로 해석해 미국 정부에 일러바치기도 했다


미국 정부도 UFC의 입장에 동조하였고 CIA의 아르벤스 축출 계획을 승인하고

1954년 6월 CIA의 지원을 받아 정부는 붕괴하고 10년의 봄은 끝난다

(1954년 과테말라 쿠데타)

그 후 과테말라 육군 대령인 카를로스 카스티요 아르마스가 지도자가 된다

카스티요 아르마스는 10년간 진행된 사회, 경제 개혁을 중단시키고 노조와 좌파 정당을 금지했으며

토지를 UFC와 지주에게 반환했다


하지만 그 이후로도 계속 쿠데타가 일어났으며

카스티요 아르마스도 대통령도 1957년 7월 26일 암살당한다



2. 시작된 내전

1960년 11월 13일

좌익 장교들이 이디고라스 푸옌테스 정권에 맞서 반란을 일으켰다

봉기를 일으킨 이유는 푸옌테스 정권의 부패와 무능력 그리고 자신을 지지하는

장교들에만 특혜를 주는 것에 불만을 가졌고 무엇보다 피그만 침공을 위한

미국의 훈련기지 설치를 군대와 상의도 하지 않고 독단적으로 허용하였고

게다가 미국으로부터 받은 보상을 군대와 나누지 않은 것이 결정적 이유였다

반란을 일으키자 정부는 폭격으로 기지를 파괴했고

반군은 과테말라 동부로 후퇴했고 반군은 봉기가 일어난 날을 기념하여

MR-13을 결성하였다


그 후 1962년 2월 6일

본격적인 게릴라전을 시작했고 과테말라 노동당(PGT), 4월 12일 운동, 에드가르 이비라 게릴라전선(FGEI)

접촉하여 연합조직인 FAR을 결성했다 MR-13, PGT, FGEI는 각자 전선을 만들어

활동했는데 MR-13이사발사카파, FGEI는 시에라데라스미나스, PGT는 도시게릴라로 활동했다

반군이 연합을 만들고 있던 중 평범한 학생들도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푸옌테스는 1961년 12월 총선에서 부정선거로 승리한 탓에

새 국회의원 임기가 시작되는 1962년 3월 1일 과테말라시티의 학생단체가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시위를 일으켰다


시위는 과테말라 전역으로 확대되었고 민중도 같이 파업하면서 학생의 운동을 지지해줬다

3월 19일 푸옌테스는 계엄령을 선포했고 민중 시위를 "사실은 공산주의가 선동한 것이다!"라고

몰아가면서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시위는 약 22명의 사망자를 포함해 300~500명의 사상자, 1,000명이 붙잡히면서 진된다

퇴위는 안 당했지만 이때의 일로 푸옌테스를 지지하는 사람을 대거 잃게 되고

좌파들은 적어도 여러 사회개혁을 시도하려 했던 아레발로를 그리워하며 단일화하였다


하지만 군부와 극우는 공산주의자라는 소리만 들어도 발작을 일으키던 상황이었는데

공산주의로 보이는 아레발로가 다시 집권한다?

이것만큼은 막기 위해 3월 30일 엔리케 페랄타 아주르디아가 쿠데타를 일으켜 집권했다


아주르디아가 쿠데타를 한 이유가 푸옌테스의 정치가 맘에 안 들어서 같은 이유가 아닌

공산주의자로 보이는 아레발로가 정권을 되찾는 걸 막기 위해

공산주의자가 과테말라에 있는걸 막기 위해 권력을 잡았기에 멀쩡한 정책을 펼칠 생각이 없었다


아주르디아는 과테말라에 공산주의가 침투했다고 말하면서 1963년 대선을 취소하고

헌법을 정지하며, 의회를 해산하기까지 했으며, 국가원수로서 정부의 모든 기능을 인수 하였다


1964년부터 본격적으로 반란을 진압하기 시작했으며 9월~10월에는

팔콘 작전을 벌여 사카파 지역의 반군을 제압하기 시작했고 이 과정에서

정부군은 미국으로부터 대게릴라전 교관과 고문을 지원받았다

11월에는 도시게릴라 상대로 림피에사 작전을 벌여 PGT 핵심요인을 억류, 고문하고 살해했다


3. 심해져가는 진압

진압 과정에서 반군뿐만 아니라 민중이나 의심되기만 해도 같이 벌을 받았다

1966년 이후 2년 만에 최소 19개의 형벌부대가 창설되었고 연좌제로

가족, 친구까지 탄압 당했다


1966년 3월 3~5일

G-2(군사 정보국)과 사법경찰은 PGT의 주요 활동가인 빅토르 마누엘 구티에레즈를 포함한

노조 지도자 28명을 체포했고 그들은 모조리 실종되었다

이 실종의 진상을 밝히려는 대학생연합(AEU)가 진상을 밝히려고 하자

정부는 부대를 보내 다수의 AEU의 회원이 암살됐다

(참고로 언론 검열 안 한다고 했다)

이러한 전술은 1966년에 급격히 증가했는데 이 시기에

훌리오 세사르 멘데스 몬테네그로가 집권해서이다


그는 민간인이었기에 군부의 지지를 받기 위해

어떤 수를 써서라도 반군을 제압할 권리를 부여했다

도시든 시골이든 좌익 또는 그 동조자로 의심되는 자

재빠르게 실종되거나 암살되었다


1966년 10월

정부군은 과테말라 작전을 개시하여 사카파, 이사발 군사지구에

5,000명의 병력을 투입하여 진압 작전에 나섰다

당연히 여기서도 의심되기만 하면 살해가 되었고 1966년 10월부터 1968년 3월까지

약 3,000~8,000명의 농민이 살해당했다

1970년대

정부군은 폭력은 더 심해졌다

계엄령을 선포하고 난 뒤 1968년 6월 24일 경보령으로 낮아졌지만

1970년 7월 즉위한 카를로스 마누엘 아라나 오소리오는 11월 13일

다시 계엄령을 선포하고 오후 9시부터 오전 5시까지 통금령을 내렸다


국제엠네스티와 단체에 따르면 1970~1971년 사이 7,000명이 넘는

민간인이 살해되었거나 실종되었고 1972~1973년에도 8,000명이 똑같은 운명을 맞이했다


정리하자면 내전이 일어난 1966년부터 1973년까지 살해되거나 실종된 민간인은

약 42,000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4. 꺽이지 않는 반군

반군의 거의 없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과테말라 내전의 근본적인 이유, 토지 소유와 개혁이 무산됨이 해결되지 않았음으로

여전히 내전은 계속 되어갔다


1973년 석유 파동1976년 과테말라 지진으로 상황은 더 안 좋아졌다

석유 파동은 급격한 물가 폭등과 석유 품귀현상을 만들어냈으며

과테말라 지진은 약 23,000명에 달하는 사망자와 77,000명의 부상자, 258,000채의 가옥이 파괴되었고

120만 명의 이재민이 생기게 된다

이런 상황 속에서 정부는 계속 공산주의자 찾기를 가정한 학살을 하거나

계속 대통령을 부정선거로 당선하는 등 과테말라 시민의 분노를 유발했다


그 결과 1970년대에는 반군과 연합한 사회운동이 엄청 활발하게 일어났다

많고 많은 운동 중 하나가 농민단결위원회(CUC)이다

과테말라 최초로 원주민이 주도하는 노동자 조직인 CUC는

노동자와 원주민 농민의 사이 연대를 추구했으며 잘나갈 때는 15만명의 조직원을 거늘렸다

(1980년대에는 파업으로 최저임금을 1.12달러에서 3.20달러로 인상했다)

1974년 부정선거로 대통령이 된 셸 유지니오 라우헤루드 가르시아처음에는 폭력을 쓰지 않았다

하지만 1975년 6월 이후로 EGP(남은 FAR의 사람들이 새로 만든 집단)에 의해 지주가

계속 죽자 라우헤루드도 학살을 하기 시작했다


1975년 6월부터 1975년 12월까지 이슈칸 지역에서만 60명의 주요 지도자를 살해하거나 실종시켰고

1976~1978년까지 163명의 지도자와 촌장을 살해했다

게다가 EGP를 지지하는 집단이 카톨릭 교회로 판단했고 카톨릭 전도사들도 납치하거나 살해했다

이 외에도 설명하기에 길고,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학살이 일어났다


이러한 학살 소식을 들은 미국은

1977년 지미 카터 행정부는 인권유린을 이유

과테말라를 비롯해 라틴아메리카의 군사원조를 줄였다

여기에 장기전 방식을 도입해 반군은 완전히 변화했다

얼마 되지도 않았던 300~500명으로 추산되던 반군이 수치가 4,000~12,000으로 증가했고

마야 원주민도 최소 25만 명에서 50만 명이 적극적으로 반군을 도와줬다


그리고 비슷한 시기 근처의 나라에서 니카라과 혁명에 고무되어

더더욱 공세를 벌이고 있었으니....



그러나 그 누구도 모르고 있었을거다

그 뒤의 대통령들이 얼마나 사악한지....




5. 과테말라 제노사이드

1978년 수립된 페르난도 로메오 루카스 가르시아 정권은

반군 진압 과정에서 무자비한 학살을 벌였다


CUC가 스페인 대사관을 점령하여 내전을 세상에 알리려고 했으나

루카스 가르시아는 그냥 대사관을 불태우는 방식으로 대처했고

스페인 외교관 8명을 포함해 36명이 사망했다

(이 사건에 당연히 스페인은 분노했으며 과테말라와 단교했다)

일단 정권의 이미지는 말아먹은 지 한참 됐으며

그렇다고 반군의 활동을 멈추진 못했다

헬기를 이용해 죽이기까지 했으며 정부군에게 살해된 수는 1979년 일 평균 20~30명에서

1980년에는 30~40명으로 증가했고 1980년 한 해에는 5,000명이 피살되었다

1980년에 거둔 성공과 니카라과 혁명은 반군을 상기시키기에 아주 좋았으나

엘살바도르 내전의 영향으로 남부 국경이 불안정해지자 정부군이 남부로

배치되었는데 이 때문에 반군의 군사력이 정부군과 맞먹는다고 판단했다


1981년 초

과테말라를 서서히 공세 하기 시작했으나 정부의 대응이 한 발 더 빨랐고

중순이 되자 기둥부대를 편성하여 고원지대의 수색 및 격멸 임무에 투입하는 방식을 택했다


7월과 8월에 걸쳐 고원지대에서 결성된 무장민중혁명조직(ORPA)를 찾아내

완전히 씨를 말려냈으며 노획한 문서를 통해 과테말라시티 공세일까지 알아냈다

국방참모총장 마누엘 베네딕토 루카스 가르시아(페르난도 로메오 루카스 가르시아 동생)는

11월 13일 공세일 보다 먼저 반군을 쳐 역공세를 하기로 했다


11월 13일 새벽

정부군은 세나자 작전을 벌여 게릴라를 향한 토벌전에 들어갔다

국립협동조합연구소(INACOOP)는 마르크스주의와 관련이 있다는 혐의로

불법연구소로 선언됐으며 그냥 공산주의로 의심되는 자는 암살되거나 실종되었다

베네딕토 가르시아로 탄압 정책은 말살 정책으로 변모했다

이전까지는 공산주의자로 보였던 즉, 적어도 사람은 가리긴 했었다는 건데

1980년대에 들어서 원주민이 반군에 대해 우호적으로 변화하면서


반군은 공산주의자이기 때문에 죽여야함 → 원주민이 반군에게 우호적으로 대하고 있음

따라서 반군을 따르는 원주민도 공산주의자니 죽여도 된다

...로 바뀌어갔다

반군이든 반군이 아니든 그냥 내 팀을 제외한 다른 사람이 보이기만 하면 죽였고

도망친 주민들은 반군 지지자로 간주하고 마을의 농작물에 방화하고

가축들을 도살해 생존자의 남은 삶까지 방해하고 파괴했다


목격자의 증언에 따르면 희생자들 일부는 자기가 묻힐

매장지를 직접 파야됐으며 1981년, 살해된 수는 11,000명에 달했다

(참고로 1980년 전체가 5,000명이다)

루카스 가르시아의 탄압 방식은 군부에서도 불만이 나왔고

1982년 3월 32일 에프라인 리오스 몬트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켜 정부를 장악했다


그는 6월 2일 인터뷰에서


"게릴라들은 어떻게 하실 건가요?"


"우리는 그들하고 대화하고 싶습니다. 도움을 주고 싶습니다

그들은 과테말라인이며 우리의 형제와 다름 없습니다"


하지만 이런 발언과 다르게 몬트는 자신들의 형제라고 했던

과테말라인을 이전과 다르게 아주 끔찍하게 학살한다

몬트는 집권 이후 계엄령을 선포하고 헌법을 정지시켰다

그러면서 안보와 발전을 위한 국가계획안을 발표하면서

빅토리아 82 작전, 소피아 작전을 수행했다

빅토리아 82 작전의 목표는 국가의 발전을 위해 각종 사태를 무력화시키는 것이었다

주요 섬멸대상은 반군이거나 그 지지세력이거나 지지자로 의심되는 자였다

그러니깐 게릴라 말고 그들을 지지했던 카톨릭, 노조, 원주민도 섬멸대상이었다


정부군은 섬멸대상을 참수하거나, 몽둥이로 때려죽이거나, 죽을 때까지 마체테로 내려치거나

산채로 불에 태우거나, 머리를 나무나 바위에 패대기 쳐 죽이거나

.....등 잔혹하게 죽였다

여기에 멈추지 않고 게릴라로 위장하여 반군에 대한 여론을 약회시킬려는 작전도 했고

게릴라로 위장한 정부군의 학살은 400회가 넘는다


1982년 12월 7일

단 하루동안 게릴라 위장 작전으로 최대 300명이 희생되었다


엄청난 민간인 학대 때문에 최소 250,000의 어린이가 한명의 부모를

잃은 것으로 추정되고 있을 정도였다

그럼 적어도 어린이

적어도 어린이라도 살려줬냐고 하면......

과테말라 군대는 건강한 성인보다 어린아이와 노인을 표적으로 삼았다


군인들은 부모가 보는 앞에서 부모의 아이들 죽이기도 했으며

얼마나 많은 아이들이 살해당했는지 정확한 결과는 오리무중이지만

엘키체 한 지방에서만 약 24,000명이 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몬트가 이 작전을 수행한 이유는 당연히 '공산주의자 처분'

그리고 몬트는 복음주의자였기에 공산주의자는 종교를 믿지 않기에

죽여도 된다, 정확히는 종교를 믿지않는 악마이기에 죽여도 된다고 

자기만의 정당성을 부여했다


(과테말라는 스페인의 지배를 받았기에 카톨릭이 많았다는건 뭐....

그리고 1986년에는 무교가 10%정도였다)

그 다음은 소피아 작전

빅토리아 82가 전국을 대상으로 했다면 소피아는 이실 지역을 목표로 했다

이실은 이전부터 교통이 닿아있기 않았기에 많은 게릴라들이 이곳을

주 무대가 되었고 EGP가 대표적이다


정부입장에선 활동하고 있던 게릴라가 아니꼽게 보였겠고

1982년 7월 16일 ~ 8월 19일

소피아 작전을 시행하여 이실 전체를 학살에 휩싸이게 만든다

거진 1달 동안 이실에 8,800명이나 살해당했다

그냥 보이는데로 죽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여성을 조직적으로 강간하여

성노예로 만드거나, 임산부의 배를 갈라 태아를 꺼내거나....


앞서 말했듯 과테말라 군인은 아이에게 더 자비없고 잔혹스럽게 대했기에

아이의 부모들이 자신의 아이들이 강간 당하는 것을 보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사람만 죽이지만 않았다


마을을 완전히 파괴하여 생존 조차 못하게 하였다

대략 이실 70~90%가 초토화 되었고 마을주민은 생쥐나 잿더미라도 먹고 살아가야 됐었다

제노사이드라는 말이 붙어질 정도로 과테말라 군인은 게릴라와 원주민을 말살했다

위는 과테말라 출생 시 기대 수명 그래프인데 급격하게 떨어지는 부분이 2~3번 있다


2020년은 말 안 해도 다들 아는 코로나 때문이고

1976년은 위에서 설명했던 과테말라 대지진, 그리고 바닥까지 완전히 떨어진

1982년, 몬트가 대량학살을 지시한 연도


몬트 기간만 해도 학살된 수는 많은데 몬트가 취임한 첫 달만 해도

3,330명이며(하루에 111명을 살해한 꼴) 몬트 기간 동안 약 75,000명

이르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역사가들은 이보다 더 할것으로 추정하고 있고 이전과 비교 하면

1966 ~ 1973년 : 42,000명[7년으로 나눈다고 칠 시 1년에 6,000명]

1980년 : 8,000명 / 1981년 11,000명 / 그리고 1982년 75,000명.....)



6. 평화로

1983년 8월 8일

군 내부에서도 이건 좀...이다 싶었는지 오스카르 움베르토 메히아 빅토레스

쿠데타를 일으켜 몬트를 정권에서 내려오게 한다

(쫓겨난 몬트는 과테말라 공화당 전선을 창당한다)


이미 메히아 빅토레스가 정권을 잡았을 때는 루카스 가르시아와

몬트의 작전으로 반군과 민간인을 분리하는 데 성공하기 직전이었다

그래서 메히아 빅토레스는 과테말레 사회를 군사화하여 대중의 동요와

반란을 억압하는 두려운 분위기를 형성했다

여기에 연이어 리고베르타 멘추가 <나, 리고베르타 멘추>라는

그녀의 삶을 담은 책을 출판하여 전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았다

(멘추의 아버지가 스페인 대사관 방화에서 사망하였다)


그녀의 회고록은 끔찍한 과테말라에 국제적 관심을 이끌게 되고

1992년에는 노벨평화상을 받게 된다


(아쉽게도 이 책은 한국어 번역판이 없다

대신 벤 마이켈슨이 쓴 나무소녀를 추천한다)

엄청난 국제적 압박을 받게 된 메히아 빅토레스점진적인 민주주의 복귀를 허용했다

1984년 7월 1일 민주헌법 초안을 작성하기 위한 제헌국회 총선이 실시되었고

1985년 5월 30일 새 헌법 초안 작성을 마쳤으며 헌법은 직시 발효되었다


총선은 예정 되어있었고

1966년 이후 최초로 민주선거로 선출된 민간인 대통령

비니시오 세레소가 당선되게 된다


(민주주의가 부활했지만 실종과 살해는 끝나지 않았다

거진 30년 가까이 진행된 학살 정책 때문에 필수적인 부분이 되어서이다)

민간인 대통령인 세레소는 1986년 1월 14일 취임했다


1월에 출범한 세레소 정부는 정치적 폭력을 종식하고 법치를 확립하는 것을

우선 과제로 여겼고 인신보호청원, 암파로 영장에 관한 법률, 인권 위원회를

창설하고 부패를 척결하는 등 일련의 개혁에 착수했다


그래서 첫 2년은 안정적인 경제와 정치적 폭력이 조금씩 감소하었다

(2번의 쿠데타가 일어나긴 했지만 실패했고 헌법 질서를 지지하면서 했으니....)

하지만 마지막 2년은 실패한 경제와 파업, 많고 많은 부패

유아사망률, 문맹, 보건 및 사회 서비스 부, 이에 따른 증가하는 폭력 

민주적으로는 크게 발달했다고 할 수 있지만 아직 처리해야 할 문제는 많았다


그래서 1990년 11월 11일에 대선과 총선 열렸고

르헤 세라노 엘리아스가 당선되면서 민간 정부 이후

첫번째 정권 교체의 순간이었다

세라노 엘리아스의 평가는 엇갈리는 편이다

문민 통제를 확립하고 다수의 고위 장교를 교체하고 군인들을 평화회담에 참여하도록

설득하는 등 초반에는 폭력을 막고 부패를 방지하도록 노력했다


그러나 1993년 5월 25일 친위쿠데타를 시도했다가 실패했고

며칠 지나지 않아 사임하고 해외로 망명했다

국회는 라미로 데레온을 대통령으로 선출하여 남은 임기를 채우도록 했고

데레온은 무소속이라 본인의 편이 적었지만 국민의 지지를 바탕으로 부패 척결에 착수했다

어느 정도 민주주의가 찾아오고 있고 유엔이 데레온과 평화를 중개하면서

인권, 이재민, 역사적 규명, 원주민 권리에 관한 협약을 체결했다

그럼 이제 남은 건 반군과의 평화뿐이다


1995년 11월

대선이 치러졌으며 20개의 정당이 출마한 탓에 2차로 나눠졌고

6만 7천 표와 6원 3천 표, 4 천표의 접전으로 알바로 아르수가 당선되게 된다


아르수 정부도 평화를 위해 계속 노력했으며

1996년 3월 20일 휴전을 선언하고 1966년 12월 29일

결의안 1094호를 채결하며 30년 넘게 지속된 내전이 끝을 맺게 된다



7. 그 후

과테말라 내전의 사상자는 140,000 ~ 200,000명이 죽은거나 실종된 것으로 추정된다

게릴라도 16건의 학살이 있었으나 제노사이드까지의 정도는 아니였고

전체 학살 중 정부군은 90%이고 반군은 5% 미만이다


분량 상 설명을 못 했을 뿐 초반에 미국이나 이스라엘도 지원하면서 학살을 했고

학살이 최고로 심했던 1981년부터 1983년까지 50~150만 명이 난민이 되었으며

그 중 15만 명이 멕시코로 피신했다

한편, 과테말라에 잊혀질 수 없는 역사를 새긴 몬트는

그렇게도 비난을 듣고도 2003년 대선에 출마한다


고작 20년 지났다고 과테말라 사람들이 몬트를 봐줄 거라고 생각했는지는 몰라도

이미 과테말라에선 몬트는 히틀러와 같은 취급이며 이걸 막기 위해

일어난 시위는 빈번했다


그리고 2009년 이후 과테말라 법원은 내전에 관련된 사람에게 판결을 내리고 있다

당연히 몬트도 재판을 받았긴 했으나 80년 징역형이 취소되었으며

몬트가 사망하기 전까지 판결을 내리지 못했다

지금의 과테말라는 베르나르도 아레발로가 이끌고 있다

좀 잊을 수도 있겠지만 맨 위에 나온 여러 사회개혁을 시도한

후한 호세 아레발로의 친아들이다


교육을 중시하고 대통령 시절 개혁을 시도한 아버지 밑에서 자란 탓인지

장학금을 늘리고 초중학교 열악한 환경을 개선하고

의학적으로도 암 치료를 전문으로 하는 병원을 건설하는 등

아들 역시 여러 사회개혁을 시도하고 있는 중이다

30년 간 진행된 내전 때문에 과테말라 내전은 과테말라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이념적 분쟁이 심해지고 있고 아직 과테말라에선 실종된 사람의

포스터를 붙여놓고 있는 등 상처가 많이 남아있다


이미 냉전 시대가 끝나서 공산주의에 관한 생각이 변해가고 있고

공산주의자가 절대 악이라서 없애라 된다는 생각도 없어졌으니 반공을 목적으로

대량 학살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아직 과테말라는 빈곤, 인구 불평등 문제같은 있지만

두 번 다시 과테말라 내전같은 폭력으로 불만을 없애는 일이 일어나지를 않길 빌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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