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야합


: 공자 가계의 내력에 대해, 역대 가장 문제가 된 것은 <史記,孔子世家>에 나와 있는 다음 구절이다. 

"纥与颜氏女野合而生孔子" 즉, 공자의 부친인 숙량흘叔梁紇( 叔梁은 자, 원래 이름은 紇 )이 안징재(顔徵在) 라는 여인과 야합하여 공자를 낳았다는 것이다. 이 야합이 의미하는 바에 대해서 역대 많은 논쟁이 있어 왔으나 가장 보편적인 지지를 얻는 설은 이때 숙량흘의 나이가 이미 환갑이 넘어 칠순에 가까운 나이로 공자 모친이 된 안씨의 나이는 불과 16세라 나이 차가 너무 심해 그 당시 기준으로도 상식적인 혼인이 아니었기에 이러한 표현을 썼다는 것이다.


숙량홀은 원래, 송나라 대사마(현대의 국무총리나 국방장관과 비슷한 국왕 아래 최고직위)였던 공부가(孔父嘉)의 후손으로, 그의 조상은 송나라의 왕위계승을 둘러싼 혼란을 피해, 공자가 태어난 노나라, 지금의 산동성으로 망명했다. 숙량홀 대에 이르러 신분이 일반적인 士 정도로 떨어졌으나 그 자신이 세운 전공으로 인해 大夫의 신분을 획득하였고 노나라 3대 명장 중 하나로 불리었다(중국 고대 귀족의 신분은 국왕 아래에, 卿 - 大夫 - 士 의 순서이다). 


고대 중국에서 남녀간에 혼인을 할 경우, 가장 우선시되는 것은 둘의 신분이 일치하는가이다. 숙량홀과 안징재의 결합에 야합이라는 표현을 쓴 더 큰 이유는 공자의 모친인 안징재의 신분이 숙량홀이라는 명장과 어울리지 않은 천한 신분이었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노나라에서 안(顔)씨성을 쓰는 집단은 두 부류가 있는 데, 하나는 노나라의 귀족집단이고, 또 하나는 안징재가 속한 집단으로 노나라의 부용국으로서, 노나라에 의해 멸망한 주국(邾國)의 유민들이 사용한 성씨로 노나라의 일반적인 사,농,공,상의 평민들보다 그 신분이 낮았다 한다. 


공자의 제자들 중, 공자가 가장 아꼈던, 유명한 一簞食一瓢飮(일단사일표음) 고사에 나오는, 요절한 안회(顔回)도 바로 이 안씨에 속했다 한다. 공자가 유달리, 안회를 아꼈던 것은 그의 지혜와 성품이 자신의 가르침에 부합했던 것은 물론, 어린 나이에 공자를 낳아서, 어려운 환경에서 그를 기르다 역시 요절한 그의 모친과 같은 일족이었던 것도 작용했지 않았을까?


<孔子家語> 등 후세에 편찬된 책에서 숙량흘이 신분상 어울리지 않은 안징재를 처로 맞아 들인 이유로 숙량흘이 나이가 60대 후반이 되어서 슬하에는 정실이 시(施)씨에게서 난 9명의 딸과 첩실인 맹(孟)씨에게서 난 한 명의 아들이 있는데 이 아들도 절름발이여서 기골이 장대하고 위풍당당한 무인이었던 숙량홀이 이를 불만족스럽게 여겨 결국 하나의 정상적인 아들을 얻고자 신분이 낮은 안징재를 취했다고 설명한다.


이러한 설명에 따르면 머리에 움푹 파여진 부분이 있어 구(丘)라 불렸다하나 어려서부터 몹시 총명했다는 공자는 응당 아버지 숙량흘에게서 총애를 받아 아버지의 집에서 애지중지 길러져야 할 것 같으나 여러 사서들에서 나오는 바를 종합할 때 공자가 그의 3살 때 죽은 아버지 숙량홀의 집에 들어가 보지도 못했고 심지어 그의 17세 때 사망한 모친에게서 그의 아버지가 묻힌 묘지가 어디에 있는 지도 들어 보지 못했다 한다.


여기에 대해, <孔子家語> 등은 숙량홀의 정실인 시씨가 매우 시기심이 강하여 공자 모자가 숙량홀의 집에 들어갈 경우 정실과 그의 딸들의 등쌀에 못 이겨 견디기 힘들 것이기 때문에 안징재가 미리 이것을 우려해 아예 싱글맘의 고단한 삶을 살기로 했다고 한다. 안징재와 공자 모자가 힘겨운 삶을 살았음은 <論語,子罕편>에 "吾少也賤,故多能鄙事(나도 어려서 비천하였으므로, 천한 사람이 하는 여러 힘든 일도 할 수 있다.)"라는 공자가 말한 구절로도 알 수 있다. 


서양의 성모마리아와 비견될 수 있는 지혜롭고 자애로운 모친의 화신인 안징재는 어려운 처지에도 숙량흘 사후에 자기가 낳은 아들도 아닌 장애인으로서 집에서 구박받고 있던 공자의 이복형 맹피(孟皮)도 자기집으로 데려와 함께 길러서, 공자가 孔二(중국에서 남자형제의 순위에 따라서, 氏에다, 大-二-三등을 붙여서 부름)로 불리었다고 한다.


후세에 유가에 의해 편찬된 사서들은 이렇게 <사기>에 나온 야합이라는 표현에 담긴, 오늘날로 치면, one night stand로도 이해될 수 있는, 유가의 엄격한 예법에 부합하지 않는 숙량홀과 안징재의 비정상적인 결합을 합리화하기 위해 여러 윤색을 가했다는 혐의를 피하기 어렵다고 본다.


위의 여러 사실을 종합해 보면, 숙량홀과 안징재는 어떤 이유로 인해서든 정식적인 혼례를 치룬 적도 없고, 안징재는 숙량홀이 떳떳하게 맞아 들인 측실도 아니었을 것이고, 나이 어린 미혼모인 안징재가 낳은 공구는 숙량홀의 집안에서 그의 대를 잇는 아들로서 인정받지도 못했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후세에 공자의 유교 혹은 그를 계승한 주희의 성리학을 통치원리로서, 가장 엄격하고 철저하게 실천한 조선왕조에서 가장 문제가 되었던 것 중 하나가 적서차별이었다. 유교의 창시자인 공자가 서자로서조차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서자보다 더 격이 낮았던 얼자 취급을 받았던 사실과 대비해 보면, 역사의 아이러니라 할 수 있을 것이다.


 

2. 孔末亂孔 (공말란공)


공자의 유학이 한대에 이르러, 국가의 공식적인 이데올로기로 자리 잡고, 통치의 가장 중요한 이념으로 작용하면서 고대 중국의 역대 황제들은 공자의 후손들에 대해서도, 파격적인 우대정책으로 대우해 주었다. 즉, 국가의 여러 납세나 군역의 의무를 면제해 주고 공자의 적손으로 인정되는 이에게 토지를 하사하고 작위나, 벼슬을 주어 대대로 공자 고향 부근에 살면서 공자의 제사를 지내고 그의 학문을 알리는 데 주력할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그러나, 당말에서 오대십국에 이르는 전란의 혼란 속에, 역대 황제들도 자신들의 안위조차 제대로 지켜내기 힘든 상황에서 공자 후손 집안에 대한 대우나 배려도 소홀해 졌고 여러 공자의 후손들은 산동성의 곡부를 떠나 본거지의 공자 후손들의 수가 급격히 줄어 들었다. 


이 틈을 타서, 원래 공자의 후손이 아니고, 공자 후손 집안에서 청소나 집안 일을 돕던 하인 신분이었으나 주인의 성을 따라 공씨를 취했던 孔景(공경의 원래 성은 劉씨라 전해짐)이라는 이의 후손 중에 공말(孔末)이 공자의 42대 정식 적손인 공광사(孔光嗣)를 죽이고 연성공의 작위를 참칭해 공자에 대한 제사를 자신이 주도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공말은 공광사는 물론 많은 공자의 후손들도 죽여서 공자의 고향에는 그의 후손이 그다지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 


공자 집안에 내려오는 설에 따르면, 공광사가 죽을 당시 아직 아들이 없었으나 그의 부인 장씨는 임신한 지 9개월이 되었는데 다행히 공말의 살육을 피하여 자신의 친가로 피신해 공광사의 유일한 아들인 공인옥(孔仁玉)을 낳았다. 그는 신동으로 9살에 벌써 <춘추>에 정통하고 외모가 조상 공자와 같은 위엄이 있고 무예에도 모두 능했다 한다. 


또 다른 설에 의하면, 공말이 공광사를 죽이고 무자비한 학살을 자행할 때 그의 어린 아들 공인옥도 이미 태어나 있었는데 그 어린 아기는 장씨라는 유모가 맡아서 기르고 있었다. 장씨는 공말이 공광사의 아들을 죽이러 들어 왔을 때 마침 자기 아들도 공인옥과 비슷한 나이였는데 이 아기를 공인옥이라 속여서 죽게 하고 공인옥은 살아남아 다른 곳으로 빼돌려서 공자 가문의 멸문지화를 피하게 했다고 한다.


후당 명종(서기 930년경) 재위시 공자 고향 부근 사람들이 관부에 공말이 공자일족을 죽이고 그 작위를 참칭한 사실을 고발하자 명종은 관원을 파견하여 이 사실을 조사하게 하였다. 몇 년간의 조사 끝에 그 고발이 진실임을 확인한 후 공말을 처형하고 공인옥을 공자 가문의 43대 정식 적자로 인정하여 공자에 대한 제사를 주관하도록 하고 작위와 토지를 하사하였다. 


이후 공인옥은 후당을 이은 후진의 고조나 후주의 태조와 같은 오대시기 다른 황제들로부터도 그 정통성을 인정받아 공자 가문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고 자손을 퍼뜨릴 수 있었다. 이리하여 공자 가문에서는 공인옥을 공자가의 중흥조라 일컫고 오늘날 공자의 적손으로 자처하는 이들은 모두 이 공인옥의 후손으로부터 나왔다고 한다. 그러나, 공인옥의 모친 장씨가 공말의 무자비한 학살 당시 다행스럽게 공자의 적손을 이을 수 있는 공광사의 아들을 이미 임신하고, 9개월의 만삭의 몸으로 극적으로 목숨을 건지고 공인옥을 낳았다는 일화나 유모 장씨가 자신의 아들을 공인옥 대신 죽게 하여 공씨 집안을 보존했다는 설은 어딘가 작위적이라는 생각을 떨치기 어렵다.

 

3. 孔氏南遷 (공씨남천)


오대십국을 지나 송 태조 조광윤에 의해, 송이 건국됨으로서 정국이 안정되었고, 송왕조도 역시, 유교가 통치이념인 정통 한족 왕조로 공자 가문에 대한 우대는 계속되었다. 그러나 거란족이 세운 요와의 힘겨운 전쟁을 거치면서 연운 16주를 내주어 쇠약해진 가운데 그보다 더한 무력을 지닌 여진족이 세운 금과의 전쟁에서는 송의 두 황제인 휘종과 흠종이 포로로 잡혀 가는 '정강의 변'이라는 수모를 겪자 송은 수도를 개봉에서 강남의 양주로 옮기게 되었다.


서기 1128년에 수도를 남쪽으로 옮긴 송의 황제 고종은 강력한 금의 위협은 물론 언제 북방으로 잡혀간 두 황제가 다시 돌아와 자신의 제위를 위협할 지 불안한 가운데 공자에 대한 제사가 자신의 정통성을 과시할 이벤트라 여기고 공자의 적손인 공단우(孔端友) 및 다른 공자의 후손들을 양주로 불러들여 공자의 가계를 잇고, 제사를 지내게 한다. 후에 고종은 다시 수도를 더 남쪽의 임안부(지금의 항저우)로 옮기고, 공단우와 그 가족들을 임안 남쪽의 더 안전한 지대라 여겨진 지금의 절강 구주(衢州; 지금의 취저우) 일대에 안치한다. 이로부터 공자 가문의 남종이 성립된다.


한편 북쪽에서는 금나라가 한족 유예를 꼭두각시로 제(濟)라는 괴뢰정권을 세우고 유예는 공단우의 동생인 공단조(孔端操)의 둘째 아들 공번을 새로운 연성공으로 제수하고, 공자에 대한 제사를 지내게 한다. 이를 일컬어 공자 가계의 북종이라 하였으므로 이로서 공자 가계는 남북 양쪽으로 분화하게 된다.


여진족의 금이 징기스 칸의 몽골제국에 의해 멸망하고 마지막에 최남단 광동성까지 옮겨서 저항하던 남송까지 멸망시킨 원 세조 쿠빌라이 칸은 신하들로부터 현재 남북에 각각 연성공이 존재하는 데 남쪽의 공단우 후예인 공수(孔洙)가 원래 공자 가계의 적자이므로 이들을 다시 곡부로 이주시키고 하나로 통합한 공자가문의 대표로 삼아야 한다는 건의를 받는다. 이에 쿠빌라이는 공수를 불러 산동성으로 다시 이주하는 것이 어떠한 지 묻는다.


공수는 자기 가문이 이미 강남 구주에 거주한지 6대를 지나 6대 조상들의 분묘도 다 거기에 모셨는데 그 곳을 버리고 다시 산동성으로 이주하는 것은 불가하다며 차라리 연성공(衍聖公)이라는 공자가문의 대표라는 작위를 북쪽의 가문에 양도할 것을 요청한다. 이로서 연성공의 작위는 공씨북종으로 귀속되고 공자가문의 정통성은 다시 하나로 이어져 내려오게 된다.


몽골족이 세운 원나라 시대는 다른 왕조에 비해 유교와 유학자들에 대한 대우가 좋지 못했던 시대이고 공자 가문에 대해서도 이전 왕조들만큼 중요시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많은 공씨들이 해외로 이주하였고 고려시대 공민왕에게 시집 온 노국대장공주를 따라 온 공자의 53대 후손 공소(孔紹)는 현재의 경상남도 창원에 뿌리를 내려 한국 공씨의 시조가 되었다. 창원 공씨는 조선 정조때 공자의 원래 관향을 따르라는 정조의 지시를 받아 본관을 곡부 공씨로 개칭하여 오늘에까지 이어 내려오고 있다.

 

4. 內孔外孔 (내공외공)


오늘날 산동성 곡부시의 인구는 약 60만이 넘는 데 이 중 25%인 약 15만이 공씨 성을 가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15만명의 공씨가 모두 공자의 후예가 아닌 것은 분명하며 공씨들 사이에서는 내공과 외공이라 하여 구분하고 있다고 한다.


1) 내공이라 함은 정통 공자의 후손인 공인옥으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가계로서, 청대까지는 외부와는 독립된 연성공부에 그 호적이 등재되었고 지방관부에는 호적이 올라가지 않은 반면 외공의 사람들은 지방관부에 호적이 등재된다.


2) 내공의 사람들은 <공자세가보>라는 가문의 족보에 정식으로 등재되어 있고 공자의 후손으로 권리와 의무가 있는 반면 외공은 이러한 권리와 의무가 없다.


3) 공자집안에서 사용하는 항렬자는 대대로, 황제가 직접 정해준 것이다. 이러한 항렬자를 외공은 사용해서는 안 된다.


4) 원래 대다수가 내공의 공자가문에 부용하던 노비신분으로 공씨를 차용한 외공의 후손들은 명분상 내공사람들과는 주인과 하인의 관계이다.


5) 외공의 공말이 내공의 공씨들을 학살한 역사가 있는 만큼 내공과 외공은 대대로 원수지간이다.


당연히 내공의 핵심에서 외공으로 일컬어지는 이들은 보통 자신들이 외공임을 부정하고 내공의 서자나 얼자 등 모 지파 중 하나라고 하고 그 증거로서 내공과 같은 항렬자를 들거나 족보 상의 기재 등을 내세운다. 이것은 내공과 외공의 경계가 생각처럼 명확한 것이 아니며 흔히 외공으로 여겨지는 이들조차도 전란이나 여러 원인으로 다른 내공과의 연계가 옅어진 후 외공으로 전락한 것일 수도 있다. 내공과 외공간의 이러한 다툼은 외부에서 보면 한국에서 족보를 둘러싸고 서로 정통임을 주장하거나 상대편에 대해 차별과 질시를 가하는 일과 아주 유사해 보인다. 


봉건왕조 시기 공자가문은 부역과 군역이 면제되고 각종 특혜를 받았고 이러한 특혜를 이용해서  그 지역의 많은 백성들에 대해 그 명성과 어울리지 않게 사사로이 사람을 부리거나 땅을 빼앗거나 심지어 사람을 죽이는 등 여러 행패가 심심찮게 있어서 그 지역의 내공 이외 다른 사람들에게서 또 다른 악질 지주와 다름이 없었던 적이 많았다. 문화대혁명 시기 비림비공이라 하여 공자의 유적을 파괴하고 후손들에게 린치를 가하는 일이 발생했던 것도 민중들에게 공자 가문이나 유자(儒子)로 행세한 이들이 행한 악습들에 대한 보복의 성격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