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사의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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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 2년 임오-1402년 11월 1일
태상왕의 어가가 동북면으로 떠났다.
태상왕 이성계가 동북면으로 떠나고
태종 2년 임오-1402년 11월 5일
안변 부사 조사의 등이 군병을 일으키고 주군에 사람을 보내 병사를 징발하였다. 대호군 안우세가 마침 동북면에서 돌아와 급히 역마를 타고 와서 그 사유를 보고하였다. 조사의는 곧 현비 강씨의 족속으로 강씨를 위해 원수를 갚으려는 것이었다.
며칠 뒤에 조사의 등이 반란을 일으킴
태종 2년 임오-1402년 11월 7일
이틀 뒤에는 상왕이 머지않아 복위하고 이방간이 군대를 이끌고 서울로 들어갔다는 소리를 하며 사칭극을 벌인 일당이 잡히기도 했음
태종 2년 임오-1402년 11월 8일
그 뒤로 동북면에 보낸 사신이 주군의 수령들에게 조사의를 따르지 말라고 하다가 그들 세력에게 피살당했음
태종 2년 임오-1402년 11월 11일
신이 은밀하게 움직여 문주에 이르렀는데, 박양이 문주에 들어가 병사를 징발한다는 말을 듣고 들어가 박양을 만나 보니, 역시 흘겨보며 말을 나누지 않고 그저 징발하는 문서에 서명하고만 있었습니다.
영흥부에 이르러 부윤 박만을 만났는데, 박만이 울면서 ‘내가 처음에 조사의가 보낸 군사 징발 문서를 보고 사람을 보내서 아뢰었고, 또 갑옷과 병장기를 실어 보내라는 문서를 보고 사람을 보내 아뢰었는데, 그대는 그것을 보았는가?’라고 하기에 제가 보지 못했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박만이 ‘그 사람들이 필시 붙잡혔을 터이니 내가 위험할 듯하다.’라고 하였습니다.
박만이 또 ‘내가 처음에는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었지만 장수가 되어서는 변경의 진영을 가볍게 포기할 수 없었다. 그대는 샛길을 따라 돌아가 주상께 아뢰어야 한다. 그대가 만일 붙잡힌다면 그대와 나는 해를 당할 것이다.’ 하고 이어 칼과 상등의 말을 주었습니다.
출발하여 영풍에 이르러 길에서 한방을 만났는데 한방은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지나갔습니다. 신이 영풍의 촌가에 이르러 유숙하였는데 한방이 사람을 시켜 촌가에 쫓아와 신의 손을 묶어 방에 가두고 10여 인이 지키게 하였습니다. 밤이 깊어 지키는 자들이 곤히 잠들었기에 몰래 도망해 나왔는데, 지키던 자들이 잠에서 깨어 고산까지 추격했지만 신은 산으로 올라가 숨어서 도망쳐 왔습니다.”
호군 송류가 명을 받고 함주에 갔다가 역시 저쪽 군사에게 피살되었다.
그 뒤로도 사신들이 군사를 징발하는 동북면 관리들을 볼 수 있었고, 이들은 사신들을 죽이려 했고 일부는 살해되었음. 여기서 특이한 점은 반란군을 보통 흉적, 반적 등의 멸칭을 붙이는데 이 조사의 세력은 단지 저쪽 군사라고 불렀을 뿐임. 여기서 태상왕 이성계의 병력을 차마 흉적이라고 붙일 수 없었던 사정을 엿볼 수 있음
태종 2년 임오-1402년 11월 16일
그 뒤에 파견된 사신들은 아예 반란군에 합류한 관리들을 죽이고 돌아오기까지 함
태종 2년 임오-1402년 11월 18일
태상왕의 어가가 서북면의 고맹주로 향하였다.
이러던 중 태상왕 이성계가 서북면으로 향하자
태종 2년 임오-1402년 11월 19일
이천우가 기병 100여 명을 고맹주로 보냈는데 조사의의 군병에게 붙잡혔다.
도절제사 이천우가 기병 100여 명을 태상왕이 있는 곳으로 보냈는데 조사의군이 이를 사로잡았음
태종 2년 임오-1402년 11월 20일
그 뒤 이천우는 계속 싸웠지만 결국 패하였고, 아들을 포함해 소수의 기병을 데리고 간신히 포위망을 뚫고 탈출하였음
태종 2년 임오-1402년 11월 21일
일이 심각해지자 조선국왕 이방원은 직접 경성을 떠났음
태종 2년 임오-1402년 11월 22일
어가가 원중포에 머물렀다.
태종은 원중포에 이르렀고
태종 2년 임오-1402년 11월 25일
6, 7천명에 달하는 조사의군 내에서 도망하는 자가 많아졌음
태종 2년 임오-1402년 11월 26일
주상이 원중포에서 돌아왔다.
그리고 태종이 원중포에서 돌아오니
태종 2년 임오-1402년 11월 27일
조사의 세력은 순식간에 무너졌음
태종 2년 임오-1402년 11월 28일
연산 부사 우박에게 사복시의 말 1필을 내려 주었다. 우박이 역마를 타고 와서 태상왕이 어가를 돌렸다고 보고하자, 주상이 기뻐서 내려 준 것이다.
그리고 태상왕 이성계는 어가를 돌리게 되었음
딱봐도 이상해 보이는 전개인데 이성계가 주도한 난을 어떻게든 돌리려다 보니까 이렇게 된 것 같음
태종 2년 임오-1402년 12월 2일
대간이 합동으로 상소하여 시무 몇 조항을 올렸다. 그 내용에...
1. 동북면의 함주 등 지역에 가별치라고 부르는 자들이 모여서 한 무리가 되어 국역의 의무를 바치지 않고, 별도로 가병을 만들어 사사로이 서로 결탁해서 마음대로 횡포를 부리고 있는데 주군에서 막지 못한 지 이미 여러 해가 되었습니다. 이번에 적신 조사의 등이 변란을 꾀하던 초기에 오로지 이 무리를 의지하여 원조 세력으로 삼고 멋대로 군사를 일으켜 사직을 거의 위태롭게 하였으니, 만일 혁파하여 없애지 않는다면 다시 이와 같은 변이 있을까 걱정됩니다. 하나같이 모두 혁파하여 없애고 국역의 의무를 바치게 해야 합니다...
하니, 윤허하고, 회안군을 옮겨 안치하는 일만 윤허하지 않았다.
난이 진압되자마자 이성계가 거느린 사병집단인 가별초를 혁파하라는 상소가 올라와서 윤허하고
태종 2년 임오-1402년 12월 3일
태상왕 이성계의 행차를 호종한 당상관들이 조사의의 난에 참여했다는 기록이 바로 나오는 것으로 이를 알 수 있음
이처럼 반란이지만 주도자가 국왕의 아버지인 태상왕이자 창업군주인 이성계였던만큼 기록을 남기는데 신중했던 것 같음
조선 초에 일어난 부자관계인 두 왕들의 전쟁은 싱겁게 끝나버렸지만 오히려 그랬기에 다행인 것일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