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남북전쟁당시 남군 육군이 운용했다는 잠수함 헌리호이다

사실 미국은 일찌감치 남북전쟁때부터 바다밑에 사람을 침투시켜 적함을 격침시킨다는 컨셉의 무기를 발명했으니 세계최초의 군형 잠수정 터틀호이다.

당연히 이때는 아직 증기기관이 발명되기 전이었으므로 전후로만 가능한 추진은 오로지 수력을 동원해야만 했으며
기것 할수있는것도 배밑에 들어가 내장된 저 조그만 송곳(드릴)으로 몰래 구멍을 뚫고 거기에 화약을 창착해 격발시킨뒤 튀고나면 화약이 터지면서 적함을 침몰시키는 용도로 도입되었다. 

당연하겠지만 저당시에도 세계 정상급인 대영제국 해군에게 저딴게 먹힐리가 없었고 설상가상으로 화약 성능도 구려서 지가 알아서 잠수정이 적함에 닿기도전에 뻥뻥 터지거나 폭발물을 설치하기도 전에 발견되서 나포되는등 시련을 겪었으나 영국해군에게 나포된뒤 폭약이 영국군함 선상에서 터쳐서 자폭이긴 하지만 결과적으로 아무튼 애초의 목표인 영국함선 격침이라는 전과는 올리게 되었다...


하여간 그러던가 말던가 결국 대륙군의 승리로 미국은 영국에게서 독립했고 그렇게 세월은 더 흘러 미국에서 남북전쟁이 발발한다.



그리고 쩔어주는 공업능력을 가진 북군에게 해군력에서 열세였던 남군은 북군의 해상봉쇄망을 뚫어버릴 필살의 병기를 요구하였고 그렇게 독립전쟁시기의 컨셉을 그대로 이어받은 새로운 잠수병기가 도입되었다.


무론 이당시 남북군 모두 철갑함 혹은 철선이 도입되었기 때문에 목선에 구녕뚫어 화약을 집어넣는 무식한 전술은 사용할수 없었기 때문에 발전한 화약성능에 힘입어 잠수함으로 몰래다가간뒤 선수의 긴 장대끝에 시한신관이 들어있는 폭탄을 매단뒤(이를 활대기뢰라고 부른다) 북군 군함 흘수(배가 잠기는 선) 아래 에 그걸 붙혀서 격발시키면 손쓸세도 없이 물이 밀려들어와 순식간에 침몰시킬수 있는 말그대로 일격필살이 가능한것이다.




이컨셉에 제해권을 상실해 해상봉쇄중에 고생을 하던 남군은 '얼 ㅋ 님좀 쩌는듯?' 이라며 '좋아 진행시켜'를 불렀지만...그런데 19세기 기술력으로 본격적인 잠수함을 만들려니 애로사항이 한둘이 아니었따.



우선 추진기관이 문제였는데 이당시엔 이미 증기선은 발명되었으나 당연히 증기기관은 수중에서 사용할수 있을리가 없었다. 정 쓰려면 물밖으로 항상 연통을 빼놓고 다녀야 하는데 이럼 굳이 잠수함 보내서 테러할 필요가 있나? 걍 여기 잠수함 있어요 라고 홍보하는 꼴이며 당연히 저 연돌로 물이 쏟아져 들어오니 들어온 물에 엔진이 꺼지는건 애교요 당장 침몰해버린다. 물론 깊은 심도로 항해하는것도 불가능하다.

하지만 전기베터리와 모터가 발명되어 있었다. 전기베터리는 이탈리아의 알렉산드로 볼타가 이미 남북전쟁보다 60년도 전인 1800년대 발명했으나 이당시는 습식전지였고 그나마 건식전지는 남북전쟁 종전이후인 1870년에나 발명된다. 또한  전기모터는 30년도전인 1830년대에 발명이 되어있었으나 1860년대에는 아직 소형화가 안되어서 지나치게컸고 또 한계또한 명확하여 사용할수 없었다. 당장 54년여후인 1차대전때도 잠수함에서 이 문제가 해결이 안되어서 2차대전까지도 잠수함은 그냥 '잠간 물밑으로 다닐수있는 수상함' 이였다.


(실재 추진용 인력 크랭크축의 모습)

결국 남은 선택지는 터틀호가 활약한지 80여년이 경과했음에도 또 인력이었다. 와륜선이 일반적인 시대였지만 선미에 장착하는 프로펠러 또한 개발이 되어있기에 가능했지만 그 프로펠러를 돌릴 추진력은 인력으로만 충당해야했던 것이다. 이를 위해 모든 승조원은 선미 프로펠러에 바로 연결된 크랭크축을 열나게 돌려야 했다.



(문제의 관측창의 실재모습)

두번째로... 물속에서 앞을 보며 항해하는것이 난제였따. 아직 수중음파탐지 레이더가 발명되기 전이었기 때문이다.

헌리호라는 이름은 발명가인 남군 해군장교 헌리중위에게서 따왔다. 그런데 이양반은 시험항해에서 물이 세어들어와 익사로 사망한다. 물이 들어온 이유는 바로 관측을 위해 낸 창문을 통해 물이 세어들어왔고 결국 이걸 퍼내지 못하고 익사한것이다.

그나마 얕은 바다에서 침몰했으므로 남군은 다시 헌리호를 인양해 실전에 투입하게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대안이 없었기 때문에 이 문제점은 헌리호의 처음이자 마지막 실전투입때까지도 전혀 고쳐지지 않았으며 이때문에 헌리호의 최후의 미스터리에서 여지것 이 관측창 침수에 의함 침몰설이 유력한 원인으로 점쳐지곤 했었다.

세번째는... 이미 위에 언급한 터틀호에서도 원시적인 어뢰(어뢰 등장자체는 17세기가 처음이라고 함)를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당연히 실패했다. 오늘날 우리가 아는 자항어뢰는 남북전쟁이 끝난뒤인 1866년경에나 유럽에서 발명된다. 당연히 어뢰따위 써봤자 이빨도 안들어갈게 뻔해서 독립전쟁때마냥 확실하게 폭약을 적함에 붙히고 와야한다. 그리고 이게 잠수함을 이용해야만 하는 이유였다. 남군의 미천한 통통배 따위로 제아무리 몰래 접근해봤자 북군해군에게 모조리 걸려서 대포에 아까운 배와 수병과 화약을 용궁에 헌납해야만했던 것


그런데 문제는... 이시기 화약 성능도 절륜하게 발전해서 폭탄을 설치한 병사들이 충분히 대피할 시간을 벌지 못하고 폭발하면 걍 가미카제가 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온대안이 이 배의 유일한 무장이자 주무장인 활대와 그 활대에 장전(?)해서 붙히고 사용하는 활대 기뢰였다. 당연히 설치후 빠른속도로 적함에서 대피해야 했기에 헌리호는 선회없이 곧바로 후진하는 능력을 갖췄다고 한다.


(격침당한 미해군 워슬루프함 후사토닉)


그렇게 헌리호는 1864년 2월 17일 처음으로 실전에 투입되었고 저녁 찰스턴항구를 출항, 8시 45분경 북군의 해군군함 후사토닉호를 격침시키는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이후 헌리호는 예정된 도착시간이 되어도 모항에 귀환하지 않았다. 그날이후 헌리호는 다시는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첫 번째 출격이 마지막 출격이 된것이었다. 그리고 이들의 노력과 분투, 희생에도 불구하고 남군은 얼마안가 북군에 항복했고 남부맹방은 그렇게 멸망해 다시 미합중국에 합병되었다.

이후 백여년의 시간이 지난 1995년 헌리호의 잔해가 다시금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상당히 온전한 형태로 해저에 침몰해 있었다.

해저체서 인양하기 위해 작업중인 헌리호

2000년 크레인에 인양되어 마침내 세상에 다시금 모습을 드러낸 헌리호

복원중인 헌리호


복원이후 대중에게 공개된 헌리호의 모습, 저렇게 크랭크축을 직접 돌려볼수도 있다고한다.

헌리호의 발견으로 드디어 백년넘게 미스테리로 남은 헌리호의 최후를 밝혀내게 되었다.
발견당시 선내엔 온전하게 남은 선체속의 전사자들의 유해와 우품이 당시 그대로 고스란히 남아있었으며 이를 토대로 헌리호가 침몰한 원인을 밝혀냈다.

원인은 귀환도중 파도가 높아 관측창에 물이 들어왔고 이걸 퍼내는데 실패해 침수되어 사망했으리라고 예상되었던 것과 달리 활대기뢰 폭발과 동시에 충격파가 그대로 선체로 전해져 이에 노출된 선원들을 전원 사망시켰던 것으로 판명되었다. 즉 활대기뢰 폭발과 동시에 전원 즉사했다는것이다. 

그도그럴것이 헌리호의 장갑은 너무나 얇은대다가 당시 허접한 제강기술로는 폭발충격파를 막아낼수가 없었다고 한다. 게다가 활대기뢰의 길이도 고작 8m라 충분한 안전거리를 확보하는데도 실패했을것이라고 한다.


한편 인양된 선체에서 나온 승조원들의 시신은 유족들에게 인계되어 드디어 고향에서 영면을 맞이하게 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