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병자호란

그리고 4차례의 대기근


피해가 거의 전쟁 규모로 큼




대기근은 일단 한번 발생하면 전쟁규모로 터져나감


알아본게 계갑대기근(1593~1594),병정대기근(1626~1627),경신대기근(1670~1671),을병대기근(1695~1699)


4대 대기근이 조선의 3할을 날렸다고 함 그 당시 조선의 인구는 1590년대 쯔음가면 호구조사로는 500만인데 실질추정치는 800~1100만이상이니까 최소한 300만명을 죽인게가 4대 대기근이라 이해하면 편할듯


임진왜란도 경제,인명피해도 컷어도 추정치로 40만~100만명가량이 사상자가 생겻고

병자호란은 전쟁이지만 그래도 이 중에서 가장 인명적 피해가 적어 그 당시 청은 큰 인구를 부양할만한 능력이 아직 없엇음

아직 명나라가 살아있어서 자신의 체급을 많이 늘리지 못한 상태라서 인것도 있고 

하지만 대기근은 민간인 고위인사 모조리 가리지않고 휩쓸엇다는 면에서 어찌보면 두 차례의 전쟁보다 더 피해가 클수도 있음




계갑대기근은 왜란발발 후 1년뒤에 찾아와 이때의 피해는 추정치로는 일단 왜란중에 죽은 사망자의 절반안팎으로는 얘임


교과서에는 임진왜란 피해를 말할때 기근이 일어났다~ 정도로 넘어가는데 내가 보기엔 실제 전투로 인한 사망자보다는 기근으로 인해 죽은게가 더 많지 않을까 싶음




그렇다고 이 대기근이 한번만 찾아왓냐? 두번 왔음 1차는 1592년 겨울~1593년(계사년) 여름.

2차는 1593년~1594년(갑오년) 가을까지.  그나마 가을엔 수확의 계절이라 진정된거지 93~94 계사와 갑오를 합쳐서 계갑대기근이라 부름


대기근이 모두가 피해가 큰데 이 계갑대기근은 그 전쟁중에 터진 대기근이라 그야말로 막장수준임


전쟁은 보급과 시간이 곧 무기임 그런데 대기근이 터져서 당장 먹을 식량도 보급도 없음 



그런데 대기근만으로도 부족한게 하나더 있음 바로 역병


대기근으로 인해 몸이 약해지면 면역력이 약해진 몸에 병이 찾아옴 그래서 흑사병도 기근이 같이 따라온거임


묵시록의 4대 기사중에 전쟁 정복 기근 죽음중에 기근이 괜히 4기사를 차지한것도 무리가 아님







총합하자면 계갑대기근으로 인해 사상자는 최소한 50~70만이상으로 추정


병정대기근은  1626~1627년으로 기록이 되지만 많이 다뤄지지 않은 대기근이라 아래에 있는 경신대기근을 보면 됨


하지만 이때의 기록을 보면 인조 4년 12월에 태백성이 나타낫다는 기록이 10번이나 나타남

예로부터 선조는 태백성이 나타낫다하면 불길하다는 징조로 여김

이 태백성이 무려 10차례나 있음으로 인해 이 시기는 매우 어려운 시기로 해석이 됨



경신대기근은 1670~1671년 (현종11~12)으로 발생된것으로 기록돼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꽉 찬 1670년 그러니까 1월부터 그 징후가 보이기 시작해


癸亥/夜流星出亢星上, 入于天市星下, 色赤 

밤에 유성이 항성 위에서 나타나 천시성 아래로 사라졌는데, 색이 붉었다. 


색이 붉었다 라는 기록에서부터 벌써 불길하지?


보통 유성은 파랑색아니면 그에 준하는 색깔일텐데 말이지


그런데 문제는


이게 한달동안 지속되었는데 심지어는 몇몇은 운석이 되었어.


더 큰 문제는 유성은 대량의 미립자를 남겨서 해를 가려



이것이 불러오는 결과는 기온이 하강함으로 써 그것이 17세기 소빙하기.


이로인해 경신대기근은 태풍,메뚜기,홍수,가뭄,해충,수해,냉해,역병,지진,우박

이 모든 자연재해는 불과 1~2년만에 벌어졌다.



이 경신대기근은 어찌보면 한국 현대사에게까지 영향을 미쳤다.


경신대기근이 불러온 영향을 나열해보자면


1. 대기근 + 역병이 세트로 묵시록의 4기사가 출현


2. 신분 붕괴. 들어오는 세금이 없어서 공명첩을 남발. 대재앙수준의 대기근에 대처하기위해 공명첩으로 세수를 늘리려했기에 양인 천인들간 신분 붕괴가 가속화


3. 유랑민들이 북부로 북상해 간도등으로 개척


4. 대동법의 대규모 보급


5. 난방의 보급




이중에 5번 난방의 보급이 현대 한국에게 영향을 미치기도 했는데 이 당시 조선은 난방은 나무를 써서 얻는 온돌 방식이었음


추운 겨울을 나기위해서라면 사용을 하는 방식이지만 그것이 300년 지속된결과 삼림 자원이 거의 고갈났음


1950년대 산들을 보면 민둥산인게 많았음 즉 거의 다 베어냈다는 뜻.


 지금의 한국 산이 다시 자라게된건 난방의 방식을 나무 -> 석유 등으로 소비자원을 변화했고 산림녹화사업을 해 다시 숲을 보호를 했기 때문




경신대기근은  이때 피해를 추산해보면 200만명이상 사망




세차례의 대기근으로 끝나면 좋겟지만 기근은 여전했고 대기근은 한번 더 찾아옴






24년뒤 을병대기근


을병대기근은 1695년 ~ 1699년 (을해~병자) 의 대기근을 가리키는 기간이 긴만큼 끔찍한 대기근임


경신대기근은 짧고 강렬한 마늘이라면 을병대기근은 길고 아픈 고추라고 할수있음


숙종21년. 이해에는 곡식을 죽일 재해는 모조리 찾아옴


서리,바람,가뭄,장마,우박,눈


심지어는 내륙지방에 여름인데도 눈이 내린 기록이 있었다. 


이전에는 전라도가 그나마 상황이 나앗으나 이번에는 전국이 모조리 쓸려나갓다. 벼 값이 50%폭등한것이다. 마치 삼국지에서나 볼 물가상승량을 보인것이다.

이정도로 끝나면 좋겟지만 1년뒤 삼국지정도는 가볍게 씹을 물가상승량을 보엿다 그 상승량은  4~6배 폭등한 것이다.



그 이듬해에도 상황은 나아지지않았다.

 말그대로 이전의 대기근보다 더한 상황이었다.


1696년 참다참다 못한 조선이 마침내 전쟁을 치룬지 100년도 지나지않은 청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경신대기근 때에도 도움을 요청을 하지않았는데도 말이다.


이들은 청나라의 쌀 5만석을 들여왓는데 이 쌀을 청미라고 불렀다. 이들이 오랑캐의 쌀을 들여와야 할정도로 최악이었다.

이러고도 기근은 계속되어 1699년까지 지속했다.



이때의 피해는 추상적으로 140만명이상으로 보고있다.





4번의 대기근 그리고 그외에도 있던 기근을 포함해서보면 조선이 기근으로 인해 잃은 인구가 대략 500~600만명 죽지않았을까 싶다. 현대 한국으로 비유해보면 1000만명 죽은 느낌같다


이렇게 조사하고보니 교과서에 왜 대기근에 관한 내용이 부실한건지 이해가 안가긴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