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7월 14일,

스웨덴 스톡홀름

그날은 땡볕이 쨍쨍 찌던 여름이었다.

제 5회 올림픽, 이 날은 마라톤 경기가 예정되어있었다.

전세계 19개국에서 68명의 선수들이 참가했다.

그리고 시베리아철도를 타고 20여일 동안 달려 먼 동양의 이국에서 온 선수도 한 명 있었다.

바로 일본의  가나구리 시조(1891-1983)선수였다.

그는 쿠마모토현 타고미시에서 서민 출생으로 태어났으나, 1911년 올림픽 예선전에서 2시간 33초의 기록으로 최초로 올림픽에 참여할 수 있었다.

이 날 마라톤은 험난했다.

68명 중 34명만 완주에 성공했고, 완주 못 한 사람들 중 한 명인 포르투갈 선수 프란시스쿠 라자루는 탈수 증상으로 사망했다.(몸에 땀이 나는 걸 막기 위해 밀랍(왁스)를 칠한 게 사인이라 한다.)

가나구리 또한 마찬가지여서, 

더위만도 버거운데 대회에 앞서 컨디션을 망쳤으니 경기가 잘 풀릴 리 없었다. 어떻게든 완주를 하기 위해 이를 악물고 뛰었지만 후반부에는 체력이 고갈되어 도저히 달릴 수가 없었다. 결국 그는 33.3km 부근에서 정신을 잃고 쓰러져버렸다. 다행히 길을 지나던 주민에게 발견되어 근처 농가로 옮겨져 안정을 취할 수 있었다.

다음날 아침 가까스로 의식을 되찾은 그는 낙심할 수밖에 없었다. 완주는 커녕 도중에 쓰러진데다 남에게 도움까지 받았고 경기는 끝났으니…

결국 그는 당시 같이 참여했던 미시마 선수와 가노 지고로 의장과 상의한 끝에 먼저 일본으로 돌아갔다.


한편 대회 주최 측은 기권하지도 완주하지도 않은 일본 선수 카나구리 시조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 지 고심했다. 레이스 도중 허기를 달래기 위해 농가로 찾아들어간 뒤 그 길로 레이스를 중단하게 됐다고 판단했지만 어쨌든 운영요원이나 심판이 정황을 확인한 바가 없기 때문에 ‘기권’으로 처리할 근거가 없었던 것이다. 결국 주최 측은 그를 레이스 중 ‘행방불명’으로 처리했다.



귀국한 카나구리 시조는 스웨덴 올림픽의 아픔을 잊고 다시 훈련에 매진했다. 그리고 1920년 벨기에에서 열린 안트베르펜(앤트워프)올림픽에 참가해 16위에 올랐다. 그는 1924년 파리올림픽에 참가(기권)한 뒤 선수생활을 마감하고 후진양성에 매진했다. 선수시절 못 다 이룬 꿈을 보상받기라도 하듯 일본 마라톤의 발전에 이바지하는 데 열정을 쏟았다. 


1967년 3월. 노년이 된 가나구리에게 스웨덴올림픽위원회가 초대장을 보내왔다. 올림픽 개최 55주년 기념행사에 와달라는 내용이었다. 초대장에는 ‘당신은 마라톤 경기에서 행방불명이 되었으므로, 골인하러 와주시기 바랍니다.’라고 쓰여 있었다. 올림픽 기록에서 ‘기권’은 있어도 ‘행방불명’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이제라도 경기를 마쳐야 한다는 것.

이 초대에 응한 카나구리 시조는 75세의 노구를 이끌고 다시 주로에 섰다. 올림픽위원회는 그의 나이를 감안해서 트랙 한 바퀴를 도는 것으로 완주를 인정해주기로 했고, 양복에 코트를 걸친 카나구리 시조는 환한 웃음을 지으며 결승 테이프를 끊었다. 장내 방송은 “일본의 카나구리 선수가 54년 8개월 6일 5시간 32분 20초 만에 지금 막 골인했습니다. 이로써 제5회 스웨덴 스톡홀름 하계올림픽대회의 전 일정을 모두 마치겠습니다”라고 감동적인 종료 선언을 들려주었다.


그는 골인 후 인터뷰에서 “참으로 긴 코스였습니다. 그 사이에 손자가 다섯이나 생겼을 정도로요.”라며 유머러스하게 소회를 밝히기도 했다. 세계 마라톤 역사상 전무후무한 최장기록은 이렇게 해서 만들어지게 되었다(기네스북에도 이 기록이 올라왔다). 이때 그의 나이 만 75세였다.

P.S. 마라톤 당시 사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