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 한자를 조합하여 한문식 해석이 가능한 이름을 짓는 현대와 달리,

삼국시대까지는 지배층 사이에서도 고유어 이름을 지닌 이들이 많았음.

물론 그때는 우리 고유의 문자가 없었기에 당연히 한자를 빌려서 적어야 했는데,

고대인들은 보통 두 가지 방법을 썼음.

첫 번째는 소리를 빌려 적는 음차(音借)이고,

두 번째는 고유어의 뜻을 빌려 한자로 적는 훈차(訓借)임.

보통 사서 기록에서 인명을 기록할 때는 둘 중 한 쪽의 표기만 나오는 경우가 많음.

그래도 음차 표기는 쓰이는 한자가 거의 정해져 있어서 고유어의 음차임을 쉽게 알 수 있지만,

훈차 표기의 경우 잘만 하면 원래부터 한문식으로 지어진 이름과 별다른 차이가 없어서 분간하기 쉽지 않음.


그러나 개중에는 다행히도 음차와 훈차 표기가 둘 다 현전하는 인명들 또한 더러 존재함.

대표적인 사례로는 한국사를 조금만 공부해봤다면 누구나 알 박혁거세의 이름임.

현대 한국어 화자들은 당연히 한자를 그대로 음독하여 혁거세라고 부르지만

고대인들은 그의 이름을 다소 다른 방식으로 불렀을 가능성이 큰데,

그 근거는 바로 《삼국유사》 〈기이〉 1권에 등장하는 다음과 같은 기록임.


因名赫居世王, 蓋鄕言也. 或作弗矩內王, 言光明理世也.
따라서 이름을 혁거세왕이라고 하고,
【아마도 향언(鄕言: 우리말)일 것이다. 혹은 불구내왕(弗矩內王)이라고도 하니 광명으로써 세상을 다스린다는 말이다.】
《삼국유사》 〈기이〉 1권 신라 시조 혁거세왕 中


일연은 각주에서 "혁거세가 아마도 고유어 이름일 것이다"라고 추측하고 있음.

그러나 '혁거세'라는 이름만 본다면 밝을/빛날 혁()에 세상 세(世)라는 한자가 존재하여

역시 각주에 나와 있는 '광명으로써 세상을 다스린다'는 의미와 묘하게 부합하므로,

여기까지는 그저 일연의 착각이라고 볼 여지도 존재할 것임.

그러나 같은 대목에서 혁거세를 불구내(弗矩內)라고 부른다는 기록이 있는데,

'불구'가 赫의 새김인 '밝다/붉다'의 어간을 표기한 것이며

혁거세의 거(居) 또한 불구의 마지막 음절 ''를 덧붙여 적기 위한 음차자이고

''는 세상[世]을 뜻하는 옛말 '누리'의 중세국어 어형 '뉘'를 표기한 것이라고 본다면

두 인명이 사실은 같은 고유어 이름을 서로 다른 방식으로 적은 결과라는 추측을 해볼 수 있음.

이를 현대 국어로 바꾸어 본다면 '밝은 누리' 혹은 '붉은 누리' 정도로 치환할 수 있을 것임.


신라 초기의 또다른 왕이었던 유리 이사금 또한 의미가 명확히 파악되는 고유어 이름을 지니고 있음.

유리 이사금은 유리(儒理) 이외에도 노례(弩禮), 치리(齒理), 세리지(世里智) 등의 이름이 전하고 있는데,

우선 '유리'와 '노례'는 상고 한어 재구음 상으로 둘 다 /nVli/ 정도의 음가를 지녔으므로 같은 이름을 다르게 음차한 것이 분명함.

문제는 '치리'와 '세리지'인데, 이들은 한자음으로만 본다면 뒤에 '리'가 붙은 것을 빼고는 도저히 유사성을 찾아볼 수 없음.


그러나 훈독을 도입한다면 어떨까?

'치'는 고대 한국어로 '니(尼)'라고 훈독했으므로 이를 적용하면 '니리'가 되어 음가가 어느 정도 비슷해짐.

세리지(世里智)의 경우 智가 고대 국어의 존칭 접미사였으므로 본래 이름은 세리가 되는데,

신라 향가에서 자주 나타나는 훈주음종(訓主音從: 뜻을 먼저 적고 끝소리를 덧붙여 적음) 법칙을 적용하면

세상, 누리를 뜻하는 '세(世)' + 누리의 마지막 음절 '리(里)'의 형태로 결합한 것으로 볼 수 있음.

이를 통해 신라 초기에도 '누리'가 세상을 뜻하는 단어로서 존재했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음.

참고로 200여년 뒤 집권한 신라의 유례 이사금도 유리와 같은 이름을 가졌다고 함.


시간이 흘러 5세기 초, 박제상이라는 인물이 등장함.

표면상으로는 누가 봐도 한문식 이름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에게는 모말(毛末)이라는 또다른 이름이 있었음.

일본서기에도 모마리(毛麻利)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모종의 고유어 이름을 음차한 표기로 사료됨.

제상(堤上)과 모말이 완벽한 대응 관계였을지는 확실치 않지만,

'말(末)'을 '마루', '머리'를 뜻하는 신라 계통의 어휘로 본다면(마립간의 '마립'과도 동계어임)

이는 제상의 '上(윗 상)'과 얼추 대응되는 것으로 볼 수 있음.


6세기에 이르면 음독과 훈독 표기가 공존하는 인명이 쏟아지기 시작함.

이 분야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로는 신라 장군 이사부가 있을 거임.

삼국사기에서는 '이사부를 태종(苔宗)이라고도 한다'라는 기록이 등장하는데,

여기서 '태()'는 이끼를 뜻하며 '~종(宗)'은 대충 인칭접미사라 생각하면 됨.

이를 고유어 인명으로 추정되는 이사부와 대응시켜 본다면,

'이사'는 중세 국어에서 이끼를 뜻했던 '잇' 혹은 '이ᇧ'과 발음이 비슷하므로 '태(苔)'와 대응되며

'부'는 종(宗)과 마찬가지로 인명 뒤에 자주 붙었던 접미사이므로 서로 통한다고 볼 수 있음.

이것이 후에 변하여 현대 국어의 울보, 먹보, 느림보 등에 붙는 접미사 '-보'가 되었다고 보기도 함.

즉, 이사부를 현대 한국어로 번역하면 '이끼보' 혹은 '이끼 사람'이 됨.


동시대를 살았던 인물들 중에는 《국사(國史)》 편찬으로 유명한 거칠부도 있음.

역시 삼국사기에서는 '황종(荒宗)'이라는 이표기가 실려 있는데,

'황()'은 거칠다는 뜻이므로 '거칠부'를 풀이하면 '거칠보', '거친 사람'이 되며

이를 영어로 번역하면 터프 가이(tough guy)가 된다고 볼 수 있음.

또한 가야 왕족 출신 군인이었던 노리부도 세종(世宗)이라는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어

본래 이름이 '누리[世]+부', 즉 '누리보' 또는 '세상 사람'의 뜻을 지녔을 것으로 추측됨.


같은 6세기 인물이지만 조금 덜 알려져 있는 사례로는 진흥왕의 아버지였던 사부지 갈문왕이 있음.

이 사람 역시 입종(立宗)이라고도 불렸는데, 앞서 언급한 수많은 사례에서 '종'과 '부'가 대응되므로

'立(설 립)'은 자동으로 '사'와 대응하게 됨.

여기서 '사'는 '서다[立]'의 어간 '서-'를 표기한 것으로 보이며,

따라서 사부지 갈문왕의 이름은 '서보', '서 있는 사람' 정도로 치환 가능함.


이후 7세기에는 지배층 사이에서 점차 한문식 인명이 퍼져감에 따라 이러한 사례가 대폭 줄어들지만,

그래도 고등학교 국어 시간에 차자표기의 대표적인 사례로 종종 등장하는 소나 장군이 이 시기에 살았던 인물임.

삼국사기에서는 소나의 다른 이름을 금천(金川)으로 기록하고 있고,

이를 통해 소나가 '쇠[金]' + '내[川]'의 구조로 이루어진 고유어 이름임을 알 수 있음.


이외에도 삼국 시대에 고유어 인명을 지녔을 것으로 추정되는 인물들은 셀 수 없이 많지만,

글의 서두에서 언급했듯 그 뜻과 어형을 동시에 알 수 있는 인명은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이 현실임.

그래도 삼국시대 인명이 개인적으로 흥미로운 주제였기에 남아있는 몇 안 되는 자료라도 싹싹 긁어모아 한 번 올려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