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에 썼던 글인데 고대 한국어에 대해 관심 있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아서 가져와 봄


(1)


실을 자아내는 도구를 뜻하는 한국어 '물레'가 최초로 문헌 기록에 나타나는 것은 1690년에 간행된 중국어 사전 '역어유해(譯語類解)'에서다. 역어유해는 '紡車'의 의미를 가진 한국어를 '믈레'로 싣고 있는데, ㅁ, ㅂ, ㅍ과 같은 순음 뒤의 ㅡ는 ㅜ로 변화하므로 이 형태는 현대 한국어의 '물레'로 그대로 이어지는 셈이다. 안타깝게도 이보다 더 이른 시기의 자료에서 '물레'를 뜻하는 한국어 단어에 대한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단순히 기록에 나타나는 단어를 정리하는 것이 전부라면 역사언어학은 참으로 재미없는 학문일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다. 역사언어학은 여러 나라의 수많은 사람들이 남긴 말과 글의 숲 속에서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단서를 쫓아 내달리는 학문이다. 지난 5월 9일, 언제나처럼 고대 일본어 운문 자료를 훑어보며 뭔가 흥미로운 내용이 없나 찾던 나는 아래의 시를 마주쳤다.


玉匣 tamakusiᵑgë

將見圓山乃

狭名葛 sanakaⁿdura

佐不寐者遂尓 saneⁿzu pa tupî ni

有勝麻之自 arikatumasiⁿzi


惑本歌曰

玉匣 tamakusiᵑgë

三室戸山乃 mîmurôtôyama nö


이것은 8세기 일본에서 편찬된 20권짜리 시집 '만엽집(万葉集)'의 제2권 94번 시이다. 고대 일본의 일반적인 운문 양식은 5행 31음절로 이루어지는데, 이 시의 경우 5행 중 앞 2행에 대해 '만엽집'에 두 가지의 변형이 제시되어 있다. 첫 번째는 본문에 있는 '玉匣 將見圓山乃', 그리고 두 번째는 "어떤 책에는 이 시가 이렇게 전해진다(惑本歌曰)"라는 단서를 달아 따로 적힌 '玉匣 三室戸山乃'다. 잘 보면 두 변형 모두 제1행이 '玉匣'인 것은 똑같으므로, 실제로 두 가지 서로 다른 변형이 존재하는 것은 제2행뿐인 셈이다.


(2)


이 시는 후지와라노 카마타리(藤原鎌足 puⁿdipara nö kamatari, 614–669)가 자신의 청혼을 받고 주저하던 카가미히메(鏡王女 kaᵑgamîpîmê, ?–683)를 설득하기 위해 보낸 것이다. 카마타리는 645년의 반정에서 세운 공으로 대왕의 신임을 받아 7세기 일본의 최고위 관직 가운데 하나인 '나이진(内臣)'을 제수받은 인물인데, 출신 가문의 힘이 약해 내정을 장악하지는 못했지만 그 대신 군사와 외교의 실권을 쥐게 된다. 일본 역사를 아는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그의 후손들은 그의 숙원을 풀기라도 하듯 헤이안 시대에 대대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른 후지와라 씨족(藤原氏)이 되었다. 아무튼 그런 대단한 인물의 가슴 절절한 구애의 시를 번역으로 감상해 보도록 하자.


玉匣 빗접이라니

三室戸山乃 미무로토 산 속의

狭名葛 오미자처럼

佐不寐者遂尓 얽혀 자지 않으면

有勝麻之自 견딜 도리가 없네


제1행의 '빗접' (고대 일본어 tamakusiᵑgë)은 빗을 담기 위한 뚜껑이 있는 함을 말한다. 카가미히메가 청혼을 한 차례 거절하면서 '빗접의 뚜껑이 열리듯 세상 사람들이 우리 사이를 훤히 알게 된다면 당신은 괜찮더라도 저는 어떻게 되겠습니까?'라고 비유한 것 (만엽집 제2권 93번 시)을 그대로 받아서 다시 빗접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이다. 제3행의 '오미자'는 남오미자(Kadsura japonica)라는 덩굴 식물로, 카마타리는 이 시를 통해 오미자 덩굴처럼 서로 얽혀서 동침하지 못하면 더 참지 못하겠다는 감정을 직설적으로 담아내고 있다.


그런데 주의 깊게 관찰했다면 알 수 있겠지만 위의 번역에서 나는 제2행을 본문에 적힌 '將見圓山乃'가 아니라 별도로 실려 있는 '三室戸山乃'로 바꿔 놓고 번역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본문의 제2행 '將見圓山乃'는 그 읽는 법이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변형 '三室戸山乃'의 경우 三은 mî, 室는 murô, 戸는 tô, 山는 yama, 乃는 nö로 읽는데, 뒷부분 山乃 yama nö는 "산의"를 의미하기 때문에 앞쪽의 三室戸는 '미무로토(mîmurôtô)'라는 산 이름이 된다. 이제 본문의 '將見圓山乃'을 보면 將見 두 글자가 mîmu를 나타내고, 山乃 두 글자는 아까와 마찬가지로 yama nö이므로, 사이에 끼인 圓가 rôtô를 나타내야만 똑같은 '미무로토'가 되는데, 圓을 도저히 rôtô로 읽을 길이 없는 것이다. 고대 일본어에서 圓의 일반적인 읽는 법은 matô이다.


(3)


이 모든 이야기가 한국어 '물레'와 대체 무슨 관련이 있는 것인지 슬슬 의문스러워지기 시작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역사언어학의 묘미라고 할 수 있다.


이 시에서 언급되는 미무로토 산은 고대 일본에서 신성하게 여겨진 미와 산(三輪山 mîwayama, 오늘날의 나라 현 사쿠라이 시에 위치)을 가리킨다는 것이 정설이다. 미와 산은 고대에는 '미모로 산(三諸山 mîmörö nö yama)', '미무로 산(三室山 mîmurô nö yama)'이라고도 불렸는데, 같은 산에 대해 이러한 여러 명칭이 왜 동시에 존재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미모로', '미무로'와 '미무로토'는 그럭저럭 비슷한 이름 같아 보이기 때문에, 미무로토 산을 미와 산으로 비정하는 것은 굉장히 그럴듯하게 들린다. 하지만 그곳에 바로 함정이 있다. '미모로', '미무로'와 '미무로토'가 같은 이름이고 그것으로 끝이라면, 만엽집 제2권 94번 제2행의 두 가지 변형은 왜 존재하는 것인가?


여기서 나는 읽는 법이 명확하지 않은 '將見圓山乃'의 圓을 tôrö로 읽어야 한다는 새로운 가설을 주장하기로 한다. 안타깝게도 고대 일본어에서 圓이 tôrö를 나타내는 경우는 찾아볼 수 없으나, 만엽집 제1권 9번 시에는 圓隣이 나타나는데, 현재 전해지는 만엽집의 가장 이른 판본들인 겐랴쿠 교본(元暦校本)과 니시혼간지본(西本願寺本)은 모두 圓隣을 일본어로 "달"의 뜻인 ツキ tuki로 읽어야 한다고 주해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어 내부적으로는 圓隣을 tuki (고대 일본어 tukï)로 읽을 길이 도저히 보이지 않기 때문에, 만엽집 제1권 9번 시에 대한 현재까지 가장 유력한 해석에서는 이 시가 고대 한국어로 쓰여졌다고 보고, 圓隣을 신라 향가 '처용가'의 月羅理에 대응하는 "달"의 고대 한국어로 읽는다 (Vovin 2017: 39–55).


(4)


만엽집 제1권 9번 시의 고대 한국어 해석은 역사언어학적으로 굉장히 치밀한 논리로 짜여져 있는 것이지만, 여기서 그 전체를 설명하기는 어렵고, 圓隣에 대해서만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隣의 중국어 발음은 lin인데 이는 '처용가'의 月羅理의 마지막 글자 理 liX와 거의 일치한다. 고대 일본어의 한자 표기에서 중국어 발음의 마지막 -n은 대체로 무시되는데, 예컨대 고대 일본어 a의 발음을 표기하기 위해 가장 흔하게 사용되는 글자 가운데 하나가 安 ʔan이다. 따라서 隣은 ri의 표기로 보아도 무방하다. 또한 圓의 뜻인 "둥글다"는 후기 중세 한국어 (15세기)로 '두렫다'이기 때문에 고대 한국어에서는 "달"을 뜻하는 단어와 발음이 비슷했을 가능성이 있다.


물론 고대 한국어는 기록이 희박한 언어이기 때문에 "둥글다"와 "달"의 고대 한국어가 정말로 비슷했는지는 확언할 길이 없다. 그러나 제1권 9번 시는 고대 일본어와는 완전히 다른 어떤 언어로 쓰여진 것이 분명하고, 해당 시가 쓰여진 661년경의 시점에 일본인이 접할 수 있는 외국어는 한국어, 중국어, 아이누어 정도가 전부이며, 제1권 9번 시가 중국어나 아이누어가 아닌 것도 확실하므로, 결국 소거법에 의해 제1권 9번 시는 고대 한국어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제1권 9번 시를 보는 태도는 거꾸로 제1권 9번 시를 통해서 고대 한국어의 모습, 그리고 고대 일본에서 사용된 (아마 백제의 방식을 그대로 수입했을) 고대 한국어 표기법에 대한 정보를 얻는 것이 되어야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는 제1권 9번 시로부터 '백제어를 구사하는 고대 일본 귀족 사회 구성원들은 圓의 백제식 발음을 알고 있었다'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제1권 9번 시와 카마타리의 제2권 94번 시는 모두 660년대에 쓰여졌으므로, 그 동안 사회상이 변화했을 리도 없다. 따라서 제1권 9번 시에 사용된 圓의 읽는 법이 제2권 94번 시에도 적용될 수 있을 개연성은 충분한 것이다.


만약 고대 일본에서 사용된 '圓의 백제식 발음'을 tôrö로 본다면, 제2권 94번 시에 등장하는 산 이름의 두 가지 변형 가운데 三室戸山은 '미무로토 산', 그리고 將見圓山은 '미무토로 산'이 된다. 이렇게 보면 三室戸山이라는 변형이 생겨난 배경을 설명할 수 있는데, 본문에 실린 '미무토로 산(將見圓山)'이 원래의 의도이고, 이 시가 후세에 전해지는 과정에서 '미무토로'라는 이름에 대해 알지 못했던 어떤 필사자가 이것을 '미무로'로 착각해 순서를 바꾸어 '미무로토'로 교정하고자 시도한 것이다. 필사에 의해 기록이 계승되던 고대에 이와 같이 필사자가 실수에 의해, 또는 의도적으로 자신의 주관이나 언어 습관을 개입시켜 원본의 내용을 변형시키는 일은 매우 흔했다.


(5)


앞서 미와 산의 이름으로 고대에 '미와', '미모로', '미무로'가 공존했음을 언급한 바 있다. 여기서 '미모로(mîmörö)'와 '미무로(mîmurô)'는 현대 일본어 발음으로 적었기 때문에 매우 비슷해 보이는데, 고대 일본어에서는 가운데 음절뿐만 아니라 마지막 음절의 모음도 달랐다. 고대 일본어에서는 일반적으로 한 단어에 u와 ö가 함께 쓰일 수 없어서, u는 ô와 함께 쓰이고 ö는 ö끼리 쓰이는데 (모음 조화), 만약 어떤 외래어의 발음이 murö로 전래되었다면 고대 일본인의 언어 감각으로는 이것을 murô 또는 mörö로 '조화롭게' 바꾸고 싶을 것이다. 따라서 '미모로'와 '미무로'의 두 이름이 존재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이 산 이름의 뒷부분이 고대 일본인에게 murö로 받아들여진 외래어로부터 유래한다는 것을 시사한다. 또한 '미무토로'를 보면 그 외래어가 murö 이외에 mutôrö로도 받아들여졌음을 알 수 있다.


내가 생각하는 미와 산의 다양한 이름들의 유래는 다음과 같다. 미와 산의 이름은 원래 '고대 일본에서 외래어로 지칭되던 어떤 물체'에서 따온 것인데, 그 외래어의 발음은 고대 일본어 화자들에게 murö 또는 mutôrö로 받아들여졌다. 그런데 murö는 고대 일본어의 모음 조화 규칙을 위배하므로, 고대 일본어 화자들은 곧 murö를 murô 또는 mörö로 바꾸어 부르게 되었다 (murô와 mörö 둘 다 고대 일본어에 원래 존재하던 단어라는 사실도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이렇게 바꾸어 부른 이름이 익숙해지자 나중에는 원래의 정확한 발음 murö와 mutôrö가 잊혀지게 되었다. 한편, 이 외래어에 익숙하지 않았던 사람들은 외래어를 그대로 사용하는 대신 고대 일본어로 번역해서 wa로 바꾸었다. 그런데 wa는 고대 일본어로 "바퀴"를 뜻하므로, 미와 산의 이름의 유래가 된 '외래어로 지칭되던 물체'는 바퀴와 비슷하게 생긴 무언가일 것이다. 외래어 murö 또는 mutôrö는 고대 한국어일 것인데, 한국어의 역사에서 이와 대응시킬 만한 명사는 '물레'뿐이다. 따라서 미와 산은 원래 "신성한 물레의 산"이라는 뜻을 가졌던 것이다 (앞부분 mî-를 고대 일본어의 존칭 접두사로 간주할 경우). 고대에 지금과 같은 형태의 물레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물레'라는 단어는 원래 가락바퀴 (방추차)의 명칭이었을 수 있겠다.


(6)


한국어 '물레'는 ㄹㄹ을 가지고 있는데, ㄹㄹ은 흔히 후기 중세 한국어 ㄹㅇ으로부터 유래하며, 이 경우 ㅇ 부분이 고대 한국어에서 k 발음으로 거슬러올라가기 때문에 mutôrö와 '물레'를 대응시키기 까다로워진다. 한국어의 일부 ㄹ은 고대 한국어에서 t였기 때문에, mutôrö의 t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물레'는 후기 중세 한국어 기록에 남아있지 않은 단어이므로, 후기 중세 한국어에서 ㄹㅇ이었는지 직접적으로 확인할 방법은 없다. 그러나 '모래', '벌레'와 같이 후기 중세 한국어에서 ㄹㅇ을 가졌던 단어들의 방언형에 ㄱ이 나타나는 반면 '물레'의 방언형에는 그런 현상이 드러나지 않는 것으로 볼 때, '물레'의 고대 한국어 형태를 mutôrö와 같은 발음으로 상정하는 데 있어 내가 아는 한 한국어 음운사 내부적으로 방해가 되는 증거는 없다.


이렇게 우리는 7세기 일본의 권력자가 연인에 대한 성욕을 유감 없이 드러낸 시 한 수를 재료 삼아 한국어와 일본어의 역사적 단계에서 나타나는 음운론적 특징을 이용한 적당한 추론을 통해 '물레'의 고대 한국어 발음을 알아낼 수 있는 것이다.


(7)


일본의 가장 오래된 역사서로 알려진 '고사기(古事記)' (712년) 중권 스진 천황(崇神天皇) 조에는 이쿠타마요리히메(活玉依毘賣 ikutamayöripîmê)라는 일본 신화상의 여성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실려 있다 (이건 비밀인데, 나는 사실 한문을 잘 못 읽기 때문에 제대로 번역했는지는 알 수 없다).


爾父母恠其妊身之事。問其女曰。汝者自妊。無夫何由妊身乎。答曰。有麗美壯夫。不知其姓名。毎夕到來。共住之間。自然懷妊。是以其父母。欲知其人。誨其女曰。以赤土散床前。以閇蘇紡麻貫針。刺其衣襴。故如教而。旦時見者。所著針麻者。自戸之鉤穴控通而出。唯遺麻者。三勾耳。爾即知自鉤穴出之状而。從糸尋行者。至美和山而。留神社。故知其神子。故因其麻之三勾遺而。名其地謂美和也。


[이쿠타마요리히메의] 부모가 딸이 임신한 것을 기이하게 여겨 물었다. "너는 사내가 없는데 어떻게 아이를 배었느냐." 이쿠타마요리히메가 답하기를, "용모가 빼어난 청년이 있는데, 그 이름은 모릅니다. 밤마다 찾아와서 함께 지내니 자연히 아이를 배게 되었습니다." 하였다. 이에 이쿠타마요리히메의 부모는 청년의 정체를 알고자 꾀를 내어 딸에게 "침상 앞에 붉은 흙을 뿌리고, 삼베 실타래를 바늘에 꿰어 그 사내의 옷자락에 찔러넣거라." 하고 일렀다. 이쿠타마요리히메가 그 말대로 한 뒤 다음날 보니, 바늘에 꿰어진 실은 문의 열쇠구멍을 통해 밖으로 이어져 있었고, 남은 실은 서 타래밖에 없었다. 청년이 열쇠구멍으로 빠져나갔음을 알고 그 실을 따라 찾아가 보니 미와 산의 성역에 이르렀다. 이에 이쿠타마요리히메가 가진 아이가 신의 자식임을 알게 되었다. 또한 이때 실이 서 타래 (三勾 mîwa)밖에 남지 않았으므로 산의 이름을 미와(美和 mîwa)라고 했다.


만엽집 제2권 94번 시를 쓴 카마타리 또한 이 설화를 알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는데, 카가미히메가 '빗접'이라는 단어를 쓴 것을 보고 자신도 '빗접'으로 시작하는 시를 쓰면서 그 뒤에 미무토로 산 (미와 산)을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쿠타마요리히메의 다른 이름이 '타마쿠시히메(玉櫛姫)'이기 때문에 빗접 (타마쿠시게)을 통해 이쿠타마요리히메를 연상하고, 그로부터 다시 미와 산을 떠올린 것이다. 그런데 '고사기'에 기록된 설화 내용을 기준으로 생각하면 어색한 점이 많다. 설화에 등장하는 산의 이름은 '미와 산'이고, 이는 실이 세 타래 남았다는 설화의 내용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데, 왜 굳이 카마타리는 제2권 94번 시에서 '미와 산'이라는 이름 대신 엉뚱한 이름을 인용한 것일까?


잘 생각해 보면 설화 내용 자체도 약간 이상하다. 실이 세 타래라는 것은 이쿠타마요리히메의 침실에 남아있는 실의 양이기 때문에, 미와 산과의 직접적인 연관성이 아무래도 부족하다. 이것은 미와 산의 이름 유래가 잊혀진 상황에서 '미와'라는 이름에 억지로 끼워맞추기 위해 실이 세 타래 남았다는 내용을 억지로 끼워넣었음을 시사하는 것일 수 있다. 그리고 어쩌면 카마타리는 '미무토로 산'이라는 이름이 등장하는 이 설화의 원형을 알고 있었기에 제2권 94번 첫 줄의 '타마쿠시게'에서 둘째 줄의 '미무토로 산'으로 시상을 이어간 것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