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청 전문적인 건 아니고 밤에 공부하다가 현타와서 공부할 겸 적어봅니다....


1. 북연의 멸망과 고구려 - 북위의 갈등

5세기 경, 북연에서 왕위계승을 둘러싼 내분이 일어납니다. 이후 내분을 정리하고 황제에 등극한 사람이 

그 유명한 소성황제 풍홍이죠.

그러나 북연의 남쪽에 있는 북위는 태무제 시기를 맞아 본격적으로 화북 통일에 박차를 가하고 있던 시기....

본격적으로 북위는 대대적인 북연 침공에 돌입합니다.

이에 풍홍은 고구려 장수왕에게 도움을 요청하게 됩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장수왕>

위(魏)의 사람들이 자주 연(燕)을 침공하여 연이 날로 위태롭고 궁지에 몰렸다.

연왕 풍홍이 이르기를, "만약 일이 급박해지면 동쪽으로 고구려에 의지했다가 나중에 후일을 도모하려고 한다." 라고 하고 몰래 상서(尙書) 양이(陽伊)를 보내 맞이해주기를 요청했다.


그러자 고구려의 장수 갈로, 맹광, 양이 등은 수도 화룡성에 불을 지르고 풍홍과 유연의 유민 세력 등을 흡수하면서 점차 성장하던 북위를 견제하고 이들을 효과적인 노동력으로 삼으려 했습니다.

이에 북위는 격노하여 고구려와의 외교 관계를 끊고 심지어 고구려를 직접 공격하려고 시도하기도 했습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장수왕>

왕이 사신을 보내 북위에 가서 표(表)를 올려 풍홍과 함께 왕의 교화를 받들겠다고 말했다. 위주(魏主)는 왕이 조서를 어겼다며 공격할 것을 의논하고 농우(산시성 농현) 지역의 기병을 징발하려고 하였다. 유혈(劉絜 )과 낙평왕 비(丕) 등이 간언하여 위주가 이를 그만두었다.

이 일이 있고 나서 고구려와 북위의 관계는 급속도로 악화되었으며 이후 약 20년 간 양국 간 외교관계가 거의 단절되었습니다.

(고구려로 왔던 풍홍은 고구려가 자신에게 해주는 대접이 부당하다 생각하여 남조로 가려다 미국가셨습니다...ㅠ)


2. 북위와 고구려는 왜 관계개선을 시도했는가?

고구려와 북위의 관계개선에 큰 영향을 주었던 것이 바로 신라의 탈고구려적 행보였습니다.

그 시초는 눌지마립간이 즉위한 이후인 450년 실직에서의 고구려 장수 살해였습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눌지마립간>

고구려의 변방을 지키는 장수가 실직(悉直)의 들에서 사냥하고 있었는데, 하슬라성(何瑟羅城)의 성주 삼직(三直)이 병사를 내어 습격하여 그를 죽였다. 고구려왕이 그것을 듣고 노하여 사신을 보내 말하였다...... 임금이 겸손한 말로 사과하자 이내 물러갔다.

장수왕은 이에 분개하여 신라를 침공하려고 하자 신라 측에서는 이에 대해 사과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는 표면적 사과일 뿐 455년 장수왕이 백제를 공격했을 시 신라는 백제를 지원하게 됩니다.

이를 통해 신라는 내물왕 대부터 이어져오던 고구려의 간섭을 받는 과정에서 이에 대해 불만을 가져왔던 것으로 보입니다. 눌지마립간 시기에 이런 불만들이 표면적으로 드러나면서 고구려와 군사적 긴장관계를 형성하게 된 것이죠.

고구려는 음력 439년 12월부터 북위에 사신을 보냈다는 사료가 전무합니다. 이후 음력 462년에서야 북위에 사신을 파견하고 조공을 바치죠.

고구려가 북위에게 사신을 보내고 조공을 바친 이유에 대해서는 북위가 주변의 고구려 적대세력과 연대할 가능성을 염두에 두었다거나, 북위가 요서지방, 산동지방의 지배권을 확립하는 상황 속에서 관계개선의 필요성을 체감했다는 의견도 존재합니다만

많은 학자들은 한반도 남부로의 진출을 위한 북방 지역의 안정화작업의 일환이었다던가, 신라가 고구려 세력에서 이탈하고 백제와의 군사적 협력을 강화하고 있는 국제적 상황에 대응하기 위한 방편으로 인식하기도 합니다.


 3. 개로왕의 국서에서 나타난 백제의 당시 외교관계 인식

개로왕의 국서에서는 앞에서 언급했던 풍홍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를 통해서 백제의 개로왕은 북위와 고구려가 외교적 대립 상태임을 인식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또 풍씨(馮氏) 일족의 사람과 말에게는 조축지련(鳥畜之戀)이 있고, 낙랑(樂浪) 등 여러 군(郡)은 수구지심(首丘之心)을 품고 있습니다.

또한 개로왕의 국서에서는 당시 동아시아 주요국들의 외교관계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지도 나옵니다.

남쪽으로는 유씨(劉氏)와 통호하기도 하고, 북쪽으로는 연연(蠕蠕)과 맹약하기도 하여 서로 순치(脣齒)의 관계를 이루면서 왕략(王略)을 짓밟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개로왕은 고구려가 북방에서 군사적으로 위협하고 있는 이 상황을 탈피하기 위해 북위를 설득하기 위한 논리로 북연의 멸망과 풍홍 사태를 비롯해, 고구려가 북위를 위협하기 위한 실질적인 시도로 유연과 송나라와 긴밀히 통교하고 있다는 주장을 한 것이죠...

그러나..... 

연(璉 = 장수왕)에게 조서를 내려 소안(邵安) 등을 호송하게 하였다(백제로), 소안 등이 고구려에 다다르자 연(장수왕)은 예전에 여경(餘慶 = 개로왕)과 원수진 일이 있다고 하면서 동쪽으로 지나가지 못하게 하였다...... 그 후에 소안 등애게 동래에서 바다를 건너가 여경에게 옥새가 있는 문서를 하사하여 그 정성과 충절을 포상하려 했으나 소안 등이 바다에 이르러 풍랑을 만나 떠돌다 마침내 도달하지 못하고 돌아갔다. 왕은 고구려인들이 변경을 자주 침범한다고 하여 위에 표(表)를 올려 군사를 청하였으나 듣지 않으니, 왕이 이를 원망하여 마침내 조공을 끊었다.

결국 북위는 개로왕이 간곡히 요청한 군사지원을 해주지 않았습니다. 개로왕이 북위와 단교를 선언한 것은 곧 외교전에서 백제가 패배했음을 알려주는 것이죠. 이러한 부분엔 아마 개로왕이 표문을 전한 시점인 472년으로부터 약 10년 전에 북위와 고구려의 관계가 개선되었음을 개로왕이 인지하지 못하였을 가능성을 생각하게 합니다.

북위가 고구려를 친선국으로 인지하지 않았더라도, 고구려는 북위 입장에서 무시할 수 없는 국력을 지닌 존재였고, 북위가 남조를 제압하지 못한 상태에서 고구려와의 대립은 나라에 상당한 부담을 줄 수 있는 문제로 판단한 듯 합니다.

비록 무산되었지만, 북위에서는 고구려와의 국교 재개 이후 혼인동맹을 요청하기도 했습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장수왕, 466>

사신을 보내 위(魏)에게 조공하였다. 위의 문명태후가 현조(顯祖)의 육궁이 갖추어지지 않았다 하여 왕에게 교서를 내려 왕녀를 천거하라고 하였다..... 어떤 이가 왕에게 권하여 말하기를 위는 예전에 연(燕)과 혼인하고는 얼마 안있어 이를 정벌하였는데, 행인을 통해 그 나라의 평탄과 험함을 모두 알았기 때문입니다. 왕이 드디어 글을 올려 그 여자가 죽었다고 핑계를 대었다.

(육궁 = 황후 혹은 비, 빈들이 거처하는 침궁)

이 사료를 토대로 고구려와 북위가 여전히 군사적 긴장관계에 있음을 파악할 수는 있지만 관계가 개선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장수왕, 472>

가을 7월에 사신을 보내 위에 가서 조공하였다. 이후부터 공물을 바치는 것이 이전의 배가 되어 그 보답으로 주는 것도 또한 점점 증가했다.

이 사료라고 생각합니다. 


4. 결론

결국 동아시아의 복잡한 외교질서 속에서 장수왕이 세력을 팽창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필요에 따라서는 유연, 남조와 통교하기도 하고 필요에 따라서는 북위와의 관계개선을 도모하면서 북변을 효율적으로 안정시키고 이를 토대로 남진정책을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도 강대국들에게 뚝배기 깨지지 않으려면 좀 더 외교에 대한 관심과 통찰력을 함양하는 게 중요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이만 자러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