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한국 한자음(Sino-Korean)은 대체로 8세기 당나라의 중국어 발음을 기반으로 하여 그 이후 지속적인 수정이 가해진 것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이를 거꾸로 말하면 8세기 이전에는 현재의 한국 한자음과는 다른 한자음 체계가 존재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이 글에서는 현재의 한국 한자음이 있기 전의 한자음 체계를 통틀어 고대 한국 한자음(Archaic Sino-Korean)으로 부르기로 합니다.


이 고대 한국 한자음에 대해 국내 학계에서는 '상고음 기층'이니 '중고음 기층'이니 하는 용어를 써가며 고대 한국어의 한자음 체계에 대해 논하고자 하는 시도가 있어 왔습니다만 이러한 것은 중국어 역사상의 시대 구분을 그대로 한국 한자음의 층위 구분으로 사용하게 된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잘못된 접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컨대 고대 일본의 경우 소위 스이코(推古) 시기부터 나라 시대 초기에 이르기까지 약 200여 년에 불과한 기간 가운데서도 뚜렷하게 다른 성격을 가진 3개의 서로 다른 한자음 체계가 사용된 것이 파악되는데, 이들 체계는 모두 말하자면 '중고음 기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중국어의 시대 구분과 외국 한자음(Sino-Xenic)의 층위 사이에는 너무나 당연하게도 일대일 대응이 성립하지 않는 것입니다.


또한 중국어의 발음이 '상고음'에서 '(전기) 중고음'으로 단번에 변화한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도 국내 학계의 기존 연구에서 사용되어 온 접근 방식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후기 고대 중국어와 전기 중세 중국어 사이에는 500년 가량의 간극이 존재하며, 이 사이에는 다양한 발음 변화가 복잡한 과정을 통해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고대 한국 한자음을 연구하는 학자들의 연구 수준은 중국어의 옛 발음이 사전 형태로 정리된 자료를 보고 단순히 옮겨적는 수준에 그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중간 과정이 전혀 반영되지 않고 있습니다.


고대 한국 한자음의 이해에 있어서는 중국어의 발음 변화 과정에 대한 분석이나, 대체로 한반도를 통해 전래된 것으로 여겨지는 고대 일본 한자음과의 대조 등 다양한 관점에서의 접근이 필요합니다. 이 글의 목표는 고대 한국 한자음에 몇 개의 서로 다른 층위가 있었는지를 파악하고 그 구분을 위한 대략적인 기준을 정립하는 것입니다.



(1) 고대 일본 한자음의 세계


고대 일본어의 한자 표기를 분석한 대표적인 연구인 Miyake (2003)에서는 고대 일본어의 한자 표기 체계를 다섯 층위 (A, B, C, D, E)로 구분합니다. 먼저 A 체계는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기록된 3세기 일본의 지명, 관직명 및 인명으로, 당시 일본에는 문자를 이용한 기록 문화가 아직 발달하지 않았으므로 A 체계에 의한 한자 표기는 일본어 화자들에 의해 직접 기록된 것이 아니라고 여겨지고 있습니다. 유일하게 후기 고대 중국어에 기반한 표기 체계입니다.


B 체계는 이나리야마(稲荷山) 고분 출토 철검, 에타 후나야마(江田船山) 고분 출토 철검, 그리고 스다 하치만 신사 인물 화상 거울(隅田八幡神社人物画像鏡) 등 대체로 서기 500년 전후의 것으로 여겨지는 금석문에서 발견되는 것입니다. C 체계는 스이코 시기(推古期, 593–628)에 주로 등장하는데 이때부터 자료의 양이 많아져 많은 연구의 대상이 되어 왔습니다.


D 체계는 '고사기' (712), '만엽집' 등에 보이는 나라 시대 (710–794)의 주류 표기 방식이고, E 체계는 '일본서기' (720)에서 나타나는 체계인데, 각각 오늘날의 일본어의 '오음(呉音)'과 '한음(漢音)'이라고 하는 한자음 층위의 근본이 됩니다. 역사적 배경을 생각하면 D 체계는 백제 멸망으로 인해 한반도에서 유입된 학자들이, E 체계는 일본에서 수나라와 당나라로 파견한 유학생 출신 학자들이 사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비슷한 시대에 수입된 오음 (D 체계 계통)과 한음 (E 체계 계통)의 차이를 통설에는 마치 당시 중국어의 방언 차이에서 유래하는 것처럼 이야기하는 경우가 있습니다만, 이러한 주장에는 그 실체라고 할 만한 아무런 증거가 없습니다. D 체계가 한반도를 거쳐 들어왔기 때문에 조금 더 과거의 중국어 발음을 반영하는 반면 E 체계는 후기 중세 중국어(Late Middle Chinese)로 불리는 7세기 후반 중국어 발음을 충실하게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일본 한자음의 층위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것은 층위가 형성되고 사용되는 과정입니다. 새로운 층위의 도입은 주로 중국어의 발음 변화가 아닌 새로운 기록자 집단의 유입에 의해 촉발되었는데, 물론 중국과 육지로 인접한 한반도 국가들은 중국과 더 안정적이고 잦은 교류를 지속해 왔으므로 상황에 차이는 있습니다만 역사언어학적 사건보다 역사적 사건이 더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은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또한 어떤 기록자에 의해 특정한 고유 명사의 표기가 확립되고 나면 이후의 기록자들은 자신이 사용하는 표기 체계와 다르더라도 이를 그대로 옮겨적는 현상도 관찰됩니다. Miyake (2003)에서 B 체계로 분류하는 금석문 자료들 가운데 가장 많은 고유 명사 표기 (10개)를 보여주는 이나리야마 철검의 경우, Miyake는 'B 체계'라는 별도의 표기 체계를 설정하였지만 저는 이것이 C 체계와 일치하는 명사 8개와 A 체계 명사와 일치하는 (즉 후기 고대 중국어 기반의) 명사 2개로 이루어져 있으며 B 체계를 상정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나리야마 철검 명문의 기록자는 그 스스로는 C 체계를 사용했지만, 대왕의 이름과 궁궐의 이름에 대해서는 야마토 조정의 A 체계를 사용하는 기록자가 만든 표기를 그대로 따른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고사기'와 '일본서기'와 같이 많은 수의 기록자들이 동원된 대규모 역사 편찬 작업의 일환으로서는 일관성을 위해 기존의 다른 체계로 된 표기를 해당 작업에 참여한 기록자들이 공통적으로 사용하는 표기 체계로 바꾸어 적는 모습도 볼 수 있습니다. 고대 한국의 경우 8세기 중반 신라 경덕왕의 지명 개칭이 이러한 표기 개정의 사례에 해당하는데, 이 시기를 기점으로 이후 시기의 통일 신라 저자들 (최치원 등)은 후기 중세 중국어 기반 표기 체계를 일관적으로 사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2) 일본 한자음을 참고한 한국 한자음의 층위 설정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E 체계를 제외한 고대 일본의 한자음은 모두 한반도를 경유하여 전해졌다고 여겨지고 있습니다. Miyake (2003)의 다섯 체계 가운데 B 체계의 존재를 저는 부정하고 있으므로, 한반도에서 전래된 체계는 A, C, D의 3개가 됩니다. 이는 고대 한국 한자음에 최소 서로 다른 4개의 체계가 존재했음을 의미합니다. 일본이 자체적으로 중국으로부터 수입한 E 체계와 마찬가지로 통일 신라 역시 후기 중세 중국어를 자체적으로 수입했기 때문입니다. 즉, 일본으로 수출된 3개의 체계에 수출되지 않은 1개의 체계가 더해져야 하는 것입니다.


A 체계와 D 체계는 각각 후기 고대 중국어와 전기 중세 중국어의 중국 중앙 방언 발음을 비교적 충실하게 따르고 있기 때문에 굳이 고대 일본 한자음과의 비교를 통해 그 존재를 설정할 이유는 없겠습니다만, 흥미로운 것은 C 체계입니다. C 체계는 Miyake가 주목한 바와 같이 당대 중국의 중앙 방언 발음을 통해서 설명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비슷한 시기에 한반도에도 설명하기 어려운 한자음이 존재했으므로, 우리는 가장 자연스러운 설명, 즉 이 '설명하기 어려운 고대 한국 한자음' 층위가 '설명하기 어려운 고대 일본 C 체계'의 유래가 되었다는 가설을 수립하게 됩니다.


예컨대 백제의 '부리(夫里)' 계열 지명 표기가 일본의 C 체계에 해당하는 고대 한국 한자음의 예시로 지목될 수 있습니다. '부리(夫里)'는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기록된 마한 국명에 나타나는 '비리(卑離)'와 동일한 지명 요소로 여겨지는데, '비리(卑離)'를 구성하는 두 글자 '비(卑)'와 '리(離)'의 모음은 모두 후기 고대 중국어 *-°e로, '삼국지' 동이전에서는 *e [에] 또는 *i [이]의 발음을 나타내는 표기입니다. 따라서 '부리(夫里)' 역시 그와 비슷한 발음을 표기하는 것으로 안전하게 가정할 수 있겠습니다만 '부(夫)'는 후기 고대 중국어 *p°a [바]에서 *pɨa [브아] → *pɨə [브어] → *pɨo [브오]와 같이 변화합니다 (고대 중국어에서 중세 중국어로의 모음 변화에 대해서는 Schuessler 2006 등 참조). 즉 중국어에서는 [베]나 [비]와 같은 발음을 나타낸 적이 없습니다.


이 수수께끼를 해결하는 단서를 제공하는 것이 '거(居)' 자로 고대 일본어 '게(kë)'의 발음을 나타내는 고대 일본 C 체계입니다. '거(居)'는 위진 시기까지 중국어에서 '부(夫)', '소(所)', '조(助)' 등과 같은 모음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거(居)'가 [게] 발음을 나타내는 체계에서는 '부(夫)', '소(所)', '조(助)' 역시 *pe [베], *se [세], *tɕe [제]와 같은 발음을 나타냈을 것으로 예상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백제의 '부리(夫里)' 계열 지명 가운데 '소부리(所夫里)'의 '소부(所夫)'를 *sepe [세베]로 읽을 수 있으므로 이후의 '사비(泗沘)', 즉 *sipi [시비]라는 표기와 모음이 유사하게 됩니다 (*e와 *i는 매우 가까운 발음이기 때문에).



(3) 개로왕의 이름 표기에 대한 기초적인 역사언어학적 분석


당시의 중국어에서 *-ɨə [으어] 발음이었을 '부(夫)', '소(所)', '조(助)' 등의 모음이 고대 한국어에서 *ə [어]와 같은 모음이 아니라 *e [에]로 받아들여진 데는 아주 간단한 이유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당시의 고대 한국어에 *ə [어]에 해당하는 발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백제 개로왕 (재위 455–475)의 이름은 단순한 음차 표기인 개로(蓋鹵)와 개루(蓋婁), 중국식 음차 표기인 경사(慶司), 그리고 '일본서기' 권14에 실린 가수리(加須利)의 4가지로 전해지는데, 이 표기들은 불일치하는 것 같지만 역사언어학적으로는 *kasero [가세로]의 원래 발음을 복원할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먼저 개로(蓋鹵)와 개루(蓋婁)는 가장 간단합니다. '루(婁)'는 후기 고대 중국어에서 모음이 *-ˤo [오]였는데, 이 모음은 중국어에서 *-ou [오우]로 꺾이게 되고 고대 한국어 화자들은 이를 고대 한국어의 *u [우]에 가까운 발음으로 인식한 듯합니다. 그래서 *-ou [오우] 대신 *-au [아우]를 가진 '고(高)', '도(道)', '모(毛)'와 같은 한자를 [오] 모음 표기에 사용하거나, 아니면 후기 고대 중국어에서 원래 *-ˤa [아]를 가졌다가 중국어에서 *-o [오]로 변화한 한자를 선호했습니다. '로(鹵)'는 후자의 경우로, 후기 고대 중국어에서 *rˤaʔ [라]였다가 *roˀ [로]로 변화한 글자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고구려(高句麗)가 고려(高麗)를 칭하게 된 데서도 관찰할 수 있습니다. '고구려'라는 명칭은 원래 현토군의 현 이름에서 나온 것인데, '한서' 지리지에 실린 현토군의 현은 3개로 그 이름이 고구려(高句驪), 상은태(上殷台), 서개마(西蓋馬)입니다. 일반적인 현의 이름이 1글자 또는 2글자인 것을 고려하면 3개의 현이 모두 3글자인 것은 특이하다고 할 수 있겠는데, 그 앞 글자가 고(高), 상(上), 서(西)로 모두 어떤 상대적 위치를 나타내는 수식어로 보입니다. 따라서 고구려의 원래 명칭은 '구려(句麗)'의 후기 고대 중국어 발음을 참고하여 *kore [고레]였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입니다. 그런데 훗날 '구(句)'라는 한자는 개루(蓋婁)의 '루(婁)'와 마찬가지로 그 발음이 *kou [고우]로 꺾여 *ku [구]에 가까운 것으로 인식되기에 이르렀으므로, 고구려인들은 원래 음차 표기의 일부분이 아니었던 '고(高)'의 *kau [가우]라는 발음을 *ko [고]의 표기로 재활용한 정황이 있습니다.


잠깐 이야기가 옆으로 빠졌습니다만 다시 개로왕의 이름 문제로 돌아오자면, 개로(蓋鹵)와 개루(蓋婁)라는 이표기의 존재는 이 이름의 마지막 부분이 고대 한국어 *ro [로]의 발음을 반영함을 굉장히 강력하게 시사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남은 것은 앞부분인데, 먼저 개(蓋)가 되겠습니다만 개(蓋)는 후기 고대 중국어 발음이 *kˤajs [가이스]이고 고대 한국 한자음에서는 이렇게 *-s로 끝나는 거성 한자음을 *kasV [가ㅅ]와 같이 반영한 기층이 존재했던 것 같습니다.


고구려 건국 신화에 등장하는 비류(沸流)라는 명칭도 송양(松讓)의 이름과 비교할 때 "소나무"를 의미할 가능성이 큽니다. 사실 '양(讓)'이라는 글자 자체가 '평양(平壤)' 같은 고구려식 지명 표기의 '양(壤)'과 발음이 같은 점을 고려할 때 송양은 다름아닌 '비류나(沸流那)'라는 지명을 의인화한 존재로 생각해야 합니다 ('조선'과 이름의 발음이 같은 소서노가 고조선을 의인화한 존재이듯이). 그런데 송악(松岳)의 음차 표기 부소갑(扶蘇岬) 등의 예를 생각할 때 '비(沸)'는 후기 고대 중국어 *pəjs [브이스] 발음에 상응하는 *pesV [베ㅅ]와 같은 고대 한국 한자음으로 인식되었던 것입니다.


또 이야기가 옆으로 빠졌습니다만 여러 예를 들며 논리를 전개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읽어주시는 분들의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아무튼 여기까지 봤을 때 개로왕의 이름은 *kasVro [가ㅅ로]로 제2음절의 모음을 알 수가 없습니다. 제2음절을 반영하는 기록은 개로왕이 중국 북위에 사신을 보낼 때 백제 조정의 어떤 유능한 신하가 한문식으로 멋들어지게 표기한 (것으로 보이는) 이름 경사(慶司)와, '일본서기'에 남은 가수리(加須利)뿐인데, '경(慶)'은 당시 중국어 발음이 [강]에 가까웠을 것이므로 *ka [가]를 좋은 글자로 적은 것이겠습니다만, 중국어 발음이 [스]였을 '사(司)'는, 일본서기의 '수(須)'라는 표기 (아마도 [소] 또는 [수]의 발음을 나타낼)를 기준으로 생각하면 왜 선택된 것인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경(慶)'의 ㅇ 받침이야 고대 한국어에 존재하지 않았으니 완전히 무시되었겠습니다만 그런 요소를 제외하면 웬만하면 어느 정도 발음이 일치하는 한자를 선택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4) 개로왕의 이름 읽어내기: 단서


여기서 단서가 되는 것이 백제 왕의 칭호로 중국 사서에 전해지는 '건길지(鞬吉支)'의 존재입니다. 전기 중세 일본어 자료인 '일본서기' 훈에 백제 왕을 '고니기시(コニキシ konikisi)'라고 하는데, 기존 연구에서는 이를 '건길지'와 대응시키면서 전기 중세 일본어 '고(コ ko)'를 고대 일본어의 '거(kö)' 발음에서 온 것으로 간주해 왔습니다. 전기 중세 일본어의 '고'는 고대 일본어의 '고(kô)'와 '거(kö)'가 합쳐진 존재이며, 둘 중에서는 후자의 빈도가 높기 때문입니다. 이 경우 상정되는 고대 일본어 '거니(köni)'의 발음은 '건(鞬)'의 "일반적인" 한자음과 잘 맞아떨어집니다.


그러나 세상 일이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습니다. '고니기시'라는 단어는 고대 일본어 시기 당대의 문헌인 '일본서기' 권14, '만엽집' 권1 등에 '군군(軍君)', '군왕(軍王)'의 표기로도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이 '군(軍)'은 '거니(köni)'에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고니(kôni)'에 해당하는 것으로밖에 이해할 수 없습니다. 더욱 자세하게 말하자면 6세기에 고대 일본어에서 일어났다고 알려져 있는 중모음 상승(mid vowel raising, MVR)이라는 음운 변화에 따라 그 시점에 고대 일본어에 존재했던 단어들에서 '고(*ko)'의 발음이 '구(*ku)'로 일률적으로 변화했고, 그에 따라 7세기의 고대 일본어 화자들이 '구니기시(kunikisi)'라는 발음으로 인지했던 백제어 차용어가 '군군(軍君)', '군왕(軍王)'이라는 표기로 기록되었다고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즉, '건길지'의 백제어 발음은 6세기 시점에 첫 모음이 *ə [어]가 아니라 *o [오]였습니다.


이렇게 되면 고대 일본어 '고니기시'를 '건길지(鞬吉支)'와 일치시킬 수 없게 되지만, 해결책은 남아있습니다. 남북조 시기 중국 사서의 백제에 대한 기록에서 왕성의 이름은 거발성(居拔城) 또는 구발성(俱拔城)으로 기록되고 있는데, '구(俱)'의 발음은 *ko [고]를 반영하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웅진에 대한 '거발성' 또는 '구발성'의 명칭은 마한의 소국명 '감해비리(監奚卑離)'를 떠오르게 하는 것으로서, '삼국사기' 지리지의 '고막부리(古莫夫里)'를 웅진도독부 '감합현(甘蓋縣)'으로 고쳤다는 기록을 참고할 때 (입성 독음을 의식한 것으로 보이므로 '개'가 아니라 '합'으로 삼았습니다), 마한 당시의 발음은 *komakepere [고마게베레]였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따라서 '거발성'은 '거(居)'로 *ke [게]의 발음을 기록한 것이고, '구발성'은 이 *ke [게]의 발음이 *ko [고]로 바뀐 것을 반영한 표기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전기 고대 한국어 *kepere가 제1음절에 [오] 모음을 가진 후기 중세 한국어 kwowolh (현대 한국어 '고을')과 비교되는 점 또한 참고가 됩니다.


해당 기록에 반영된 한자음 체계에서 '거(居)'를 *ke [게]로 읽는다면, '건길지(鞬吉支)'의 '건(鞬)' 역시 *ken [겐]으로 읽혔을 것이고, *kepere [게베레]라는 단어에서 *ke [게]가 *ko [고]로 변화했듯이 '건길지(鞬吉支)'의 첫 음절 모음 또한 *o [오]로 변화했다고 보면 '고니기시'를 설명할 수 있습니다. 이 한자음 체계에서는 개로왕의 이름 '경사(慶司)'의 '사(司)' 또한 *se [세]로 읽혔을 것이며, 이것이 *so [소]로 변화한 *kasori [가소리]가 고대 일본어 '가수리(加須利)' 표기로 적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분석에 따르면 '거(居)', '부(夫)', '소(所)', '조(助)' 등의 모음이 *e [에]가 되는, 고대 일본 한자음 C 체계의 뿌리가 된 고대 한국 한자음은 개로왕 재위 중에 존재했던 것이 되는데, 개로왕은 웅진 백제 (열린 구간)의 출발점이 되는 (죄송합니다) 왕이므로, 이러한 고대 한국 한자음 체계를 '웅진 한자음'으로 명명할 수 있겠습니다.



(5) 개로왕의 이름 읽어내기: 결론


개로왕의 이름이 생전에는 *kasero [가세로]였다가 그것이 뒤에 *kasoro [가소로]로 발음이 변해 고대 일본어 '가수리(加須利)'로 전해졌다는 분석은, 고대 한국어에서 이 시기에 어떤 다른 모음이 *o [오]로 변하는 발음 변화가 있었다는 사실을 상정한다는 자체로 하나의 이점이 있습니다. 한강의 이름으로 광개토왕비에 나타나는 '아리수(阿利水)'와 '삼국사기'에 나타나는 '욱리하(郁里河)'의 불일치를 설명해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욱(郁)'이라는 한자를 우리는 오늘날 뒤에 ㄱ 받침이 붙는 입성 한자음으로 읽습니다만, 고구려 우수주(牛首州) 우오현(于烏縣)의 이름을 욱오(郁烏)라고도 한다는 '삼국사기' 지리지의 기록에서 보듯이 고대 한국어의 한자 표기 체계에서는 '우(于)'와 같은 발음, 즉 *o [오]의 발음을 표기하는 데 쓰였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즉 웅진 한자음으로 '욱리(郁里)'는 *ore [오레]라고 읽는 것이며, 이것은 '위례(慰禮)' 즉 전기 고대 한국어 *were [웨레]에서 *w가 탈락한 (확실하지 않으나 어두 *w는 모두 탈락한 것으로 보입니다) '아리(阿利)' 즉 *ere [에레]가 5세기 이후 *ore [오레]로 발음이 변화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고대 일본어 '가수리(加須利)'의 마지막 모음에 대해서 잠깐 언급하자면, 여전히 마지막 모음이 일치하지 않는데, 연개소문(淵蓋蘇文)의 이름이 일본에서 '이리가수미(伊梨柯須彌)'로 남은 것을 고려한다면 고대 한국어 인명의 마지막 부분을 *i [이]로 수정하고자 하는 어떠한 경향성이 존재했던 것일 수도 있고, 고구려 '설부루성(屑夫婁城)'이 '초리파리홀(肖利巴利忽)'로부터 개칭되었다는 '삼국사기' 지리지 기록 등을 고려하면 고대 한국어에서 6세기에 무언가의 변화가 있었거나, 앞서 언급한 *e [에]에서 *o [오]로의 변화로 인해 표기에 혼란이 생겼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이러한 혼란이 일본 측의 기록에 영향을 끼쳤을 수도 있겠습니다. 아무튼 이러한 관점에서는 연개소문의 이름의 발음도 덤으로 *kasomo [가소모]와 같이 복원할 수 있게 됩니다.



(6) 영락 모음 추이의 가능성


'소부리(所夫里)'는 웅진 한자음 체계에서 *sepere [세베레]로 읽히게 되는데, 그 앞부분이 '사비(泗沘)'의 *sipi [시비]와 발음이 유사하다는 점을 이미 언급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단순한 표기 혼란인지, 아니면 실제의 발음 변화를 반영하는 것인지를 판단해야 합니다. 우선 '소부리'는 5세기의 단순한 웅진 한자음 표기인 반면, '사비'는 538년 사비 천도를 전후하여 수도의 명칭으로서 멋들어진 한자를 붙인 것으로 생각되므로 선후 관계는 '사비'가 나중입니다.


'삼국사기' 지리지에 '부리(夫里)'가 들어가는 백제 지명은 소부리군(所夫里郡), 고량부리현(古良夫里縣), 고사부리군(古沙夫里郡), 부부리현(夫夫里縣), 미동부리현(未冬夫里縣), 반나부리현(半奈夫里縣), 모량부리현(毛良夫里縣), 이릉부리군(爾陵夫里郡), 파부리군(波夫里郡), 고막부리(古莫夫里)가 있습니다. 이들 가운데 '소부리'와 '고막부리'는 이미 언급되었고, 나머지 지명 중에 개명 기록을 통해 발음 변화를 추적할 수 있는 것은 '이릉부리'와 '부부리'가 있습니다. 이 중 '이릉부리'는 이표기로 '인부리(仁夫里)'가 있고, '인(仁)'의 중국어 발음은 *nʲin [닌]이지만 여기서는 고대 한국어 *nirV [니ㄹ]과 같은 ㄹ 발음을 의식한 것으로 보입니다 (당시의 중국어에는 ㄹ 받침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n이나 -t로 대체하는 등 다양한 표기 전략이 사용되었습니다). 웅진 한자음에서 '이릉(爾陵)'은 *nere [네레]이므로 '이릉부리'의 경우는 *e [에]에서 *i [이]로 실제로 발음이 변화하였다는 가설을 지지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부부리'의 경우는 조금 더 복잡합니다. '삼국사기' 지리지의 기록상으로 '부부리'는 회미현(澮尾縣)이라는 별 상관 없어 보이는 이름으로 개칭되었습니다만 그 대신 회미현이 속한 임피군(臨陂郡)의 이름에 '부부리'가 반영되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경덕왕 때 개칭된 지명 가운데 '림(臨)'이라는 글자로 시작하는 것은 9개 (원래 소속을 기준으로 고구려 4현, 백제 1군, 신라 2군 2현)인데, 이들의 작명 의도를 먼저 이해해야 합니다.



(7) 영락 모음 추이: 도림형 지명에 대하여


'림(臨)'으로 시작하는 지명은 아주 재미있습니다. 기존 연구에서 관련된 내용을 접한 적이 없어 다른 연구자가 이런 지명을 일컫는 무슨 용어를 이미 만들었는지 저로서는 알지 못합니다만, 편의상 이러한 지명의 원형으로서 그 해석이 비교적 뚜렷한 도림현(道臨縣)의 이름을 따서 '도림형 지명'이라고 부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오늘날 한국어에서 "임하다"라는 말을 사용하듯, '림(臨)'은 한문에서 흔히 어떤 일을 주관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원래는 "관망하다", "바라보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업무에 임하다"를 "업무를 보다"라고도 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의미 확장입니다. 도림현(道臨縣)의 이름에서 이 '림(臨)'이라는 글자는 현대 한국어의 '보다'라는 고대 한국어 동명사형으로 '볼'에 해당하는 단어를 의도한 표기입니다. 즉, 도림(道臨)은 '도(道)'를 *to [도]라는 소리로 읽고 '림(臨)'을 *por [볼]이라는 뜻으로 읽어서 *topor [도볼]의 발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것은 삼국사기에 기록된 이 이름의 이표기 조을포(助乙浦)의 조을(助乙)에서 '조(助)'가 "돕다"라는 한자 뜻을, '을(乙)'이 어미 '-ㄹ'을 나타내는 것과 대응합니다. 현대 한국어에서는 '돕다'를 '도울'로 활용하지만 고대 한국어 시기에는 물론 중간의 ㅂ 발음이 살아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만으로도 상당히 특이한 표기지만, 경덕왕은 한 술 더 떠서 동사가 목적어 앞에 오는 한문식 어순을 도입해 '림(臨)'을 앞으로 옮겨버립니다. 임도현(臨道縣)이라는 이름은 이렇게 탄생했습니다.


'림(臨)'으로 시작하는 9개 지명 상당수는 이와 같은 원칙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원래부터 신라에 속한 2군 2현 가운데 임고군(臨臯郡), 임천현(臨川縣), 임관군(臨關郡)은 개칭되기 전의 원래 이름이 각각 절야화군(切也火郡), 골화소국(骨火小國), 모화(毛火)로, '화(火)'가 들어가 있습니다. 아마 고대 한국어에 관심이 있으신 분이라면 다들 알고 계시는 바와 같이 지명 표기의 '화(火)'는 "불"의 뜻에 해당하는 표기이므로 *por [볼]과 대응합니다. 나머지 하나인 임정현(臨汀縣)은 명확하지 않지만 '정(汀)'이 *te의 소리를 표기하는 글자라면 그 속한 군의 명칭인 의창군(義昌郡)의 원래 이름 퇴화군(退火郡)과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이 경우 *tepor [데볼]과 같이 읽어볼 수 있겠습니다.


고구려 4현 중 도림현은 이미 설명했고, 나머지 셋은 임강현(臨江縣), 임단현(臨端縣), 임진현(臨津縣)인데, 안타깝게도 임강현은 그 작명 원리를 알 수 없습니다. 임단현(臨端縣)은 원래 이름이 마전천현(麻田淺縣)인데, '천(淺)'은 다른 고구려 지명에서 '비열(比烈)', 즉 *pire [비레]와 대응하므로 이 지명도 끝에 *por [볼]과 유사한 *pVr 꼴의 접미사가 붙어 있었던 것입니다. 또다른 이름으로 제시되는 이사파홀(泥沙波忽)의 '파(波)'도 *pV [ㅂ] 발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여 참고가 됩니다. 임진현(臨津縣)은 이표기로 제시되어 있는 오아홀(烏阿忽)과는 대응하지 않는 것으로 보이지만, 임진강의 다른 이름이 칠중하(七重河)이고, 근처에 있는 칠중현(七重縣)의 이표기가 난은별(難隱別)입니다. 기존 연구에서는 칠중현과 난은별에 대해 '중(重)'이 뜻, '별(別)'이 소리를 나타내는 표기로 현대 한국어 '벌' (같은 것이 여러 개 있을 때 세는 단위)에 해당하는 고대 한국어 단어를 나타낸다고 여겨 왔습니다. 그렇다면 '임진(臨津)' 역시 '칠중(七重)', '난은별(難隱別)'과 동일하게 *por [볼] 계열로 끝나는 고유어 지명을 가졌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참고로 '칠중(七重)'과 '임진(臨津)'을 연결하여 한국어 수사 '일곱'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일곱'의 후기 중세 한국어 형태는 ‘닐곱’ 또는 '닐굽'인데 (ㄴㄹㄱㅂ), 칠중(七重)의 각 글자를 "일곱"과 "벌"에 해당하는 것으로 읽는다면 ㅂ과 ㅂ이 서로 이어지며 ㄴㄹㄱㅂ + ㅂㄹ = ㄴㄹㄱㅂㄹ의 4음절어의 표기가 됩니다 (모음의 복원이 명확하지 않으므로 편의상 자음만을 나열했습니다). 그런데 '임진(臨津)'은 "나루를 본다"이므로 "나루"와 "볼"로 읽게 되고, 후기 중세 한국어 자료나 현대 한국어 방언형 등을 통해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이 단어는 고대 한국어에서 끝에 ㄱ 발음을 가졌습니다. 다시 말해, "나루"가 ㄴㄹㄱ이므로 "나루"와 "볼"도 ㄴㄹㄱ + ㅂㄹ = ㄴㄹㄱㅂㄹ의 동일한 4음절형이 도출되는 것입니다.



(8) 영락 모음 추이: 부부리와 비조부


앞에서 '회미(澮尾)'로 개칭된 '부부리(夫夫里)'가 사실은 '임피(臨陂)'에 대응하는 이름일 것으로 추정한 바 있습니다. 임피군 자체는 백제 시대 이름으로 시산군(屎山郡) 또는 흔문(忻文)인데, 임피(臨陂)라는 명칭은 이들과는 무관해 보이고 오히려 함열(咸悅), 회미(澮尾) 등 속현의 명칭이 발음상 더 비슷해 보입니다.


'시(屎)'라는 글자가 그 뜻이 매우 바람직하지 못함에도 지명에 쓰인 데는 무언가 이유가 있을 것이고, 그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라 '시(屎)'라는 글자만이 가진 고유한 가치, 즉 이 글자의 중국어 발음이 매우 예외적으로 [히] 발음이라는 사실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합리적입니다. 즉, 고대 한국어의 *hi [히] 발음을 한자로 옮겨적고자 함에 있어, 일치하는 발음을 가진 글자가 '시(屎)' 하나밖에 없었으므로 그 아름답지 못한 뜻에도 불구하고 지명 표기에 사용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시(屎)'는 음차자일 수밖에 없고, 이 가설은 흔문(忻文)의 '흔(忻)'의 존재를 통해 확인됩니다. '문(文)'은 산을 뜻하는 고대 한국어의 발음을 적은 것인데, 고대 일본어에는 '무레(mure)' 등으로 보존되어 있고, 아마도 고대 한국어 발음은 *more [모레] 같은 느낌이었을 것입니다. 현대 한국어 '뫼'로 계승되는 단어입니다.


따라서 '임피'와 '시산', '흔문'이 대응하지 않는 것은 명백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미 도림형 지명의 읽는 법을 알고 있으므로 '임피'의 발음 또한 짐작할 수 있습니다. '피(陂)'는 아마도 *pi [비]에 해당하는 발음을 받아적은 것으로 보이고, '림(臨)'은 언제나 그렇듯 *por [볼]이므로, 이를 한문식 어순에 따라 이어붙이면 *pipor [비볼]이 되는 것입니다. 웅진 한자음 지명 '부부리'는 *pepere [베베레]이므로, '임피'가 나타내는 *pipor [비볼]의 발음과 비교할 때 *e [에] 모음이 *i [이]로 상승하는 현상과 *o [오]로 후설 모음화하는 현상을 관찰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분화가 일어났다는 것은 앞서 살펴본 '소부리', '사비'와 같은 *e [에]와 *i [이]의 이표기가 단순히 표기의 혼란이 아니라 실제의 발음 변화를 반영한다는 가설을 지지해 줍니다.


하나의 고유 명사 안에서 *e의 두 가지 변화한 발음이 나타난 사례는 인명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삼국사기' 권4의 법흥왕 9년 봄 3월 기사에는 이찬 비조부(比助夫)의 여동생을 가야 국왕과 결혼하게 하여 혼인 동맹을 맺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이 비조부(比助夫)라는 이름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인용된 최치원의 '석순응전'에는 비지배(比枝輩)라는 표기로 등장하는데, ‘비지배’의 '지(枝)'는 *tɕi [지] 발음을 나타내는 것이 명확하므로 ‘비조부’의 '조(助)'를 웅진 한자음 *tɕe [제]로 읽어야 합니다. 그런데 '비조부'가 웅진 한자음으로 된 이름이라면 전부 웅진 한자음으로 읽어서 *pitɕepe [비제베]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비지배'의 '배(輩)'는 통일 신라 한자 표기의 전반적인 경향을 생각하면 아마도 *po [보]의 발음으로 생각되는데 그렇다면 *pitɕepe [비제베]에서 *pitɕipo [비지보]로 변화한 것이므로 분화 사례에 해당합니다.


전기 고대 한국어 모음 *e [에]가 *i [이]와 *o [오]로 분화한 현상은 5세기 전체에 걸쳐 일어난 것으로 생각되는데, 제가 아는 한 확인할 수 있는 한국어 음운 변화로서 가장 이른 시기의 것입니다. 또한 웅진 한자음이 처음으로 도입된 시점의 고대 한국어에는 중설 모음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는 반면에 나중에는 (늦어도 8세기에는) 훨씬 다양한 모음들이 존재하게 된 점을 생각하면, *e [에]의 발음 분화는 고대 한국어 모음 체계의 전체적인 변화의 일부분이거나 또는 그 단초가 되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고대 한국어 모음 체계의 큰 변화를 저는 잠정적으로 이 시기 고대 한국어 사용 국가의 유일하게 확인된 연호를 따서 '영락 모음 추이'라고 명명하고 있습니다.


영락 모음 추이의 실체, 즉 어떤 모음 변화가 어떤 순서로 일어났고, *e [에]와 같이 분화가 일어난 경우 그 분화의 결과를 정하는 조건은 어떻게 되는지 등에 대해서는 안타깝게도 아직 거의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제부터 더 연구해야 할 것이 많습니다.



(9) 웅진 한자음은 어디서 왔는가


(10) 웅진 한자음 이전의 한자음 체계


(11) 웅진 한자음 이후의 한자음 체계


(12) 고대 한국 한자음 체계의 특징 비교


글이 너무 길어져서 일단 여기서 끊고자 합니다. 어쩌다 보니 전부 웅진 한자음에 초점을 다룬 내용이 되어버렸습니다만, 그만큼 웅진 한자음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한자음 체계들에 대해서도 다루고자 하는 내용이 많습니다.


부족한 내용이지만 언제나 읽어주시는 분들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