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 옆나라 일본이었음.

처음 문증되는 사례는 6세기 후반 또는 7세기 초반의 작품으로 전해지는 신라 향가 〈혜성가〉로,


倭理叱軍置來叱多

*YERI-s KWUN-two WA-[i]s-ta

왜의 군도 와 있다


라는 구절에서 한자 倭(왜국 왜)에 대응하는 고유어의 말음을 '리(理)'로 적고 있는데

보통은 아래에 기술한 중세 국어형과 연관지어 '여리'로 재구하곤 함.

'나리(川理, 那禮)'가 '내'로, '누리(世理, 弩里)'가 '뉘'로 바뀐 것을 보면 충분히 합당한 재구라 판단됨.


이후 15~16세기 중세 국어에서는 앞서 언급했듯 어중의 ㄹ이 소멸한 '예'의 어형으로 나타남.

우선 한글 문헌에서의 첫 사용례는 1447년에 간행된 《용비어천가》 52장임.


見請之 與之戰鬪 若不脫冑 國民焉救 

請으로 온 와 싸호샤 투구 아니 밧기시면 나랏 小民을 사ᄅᆞ시리ᅌᅵᆺ가

청을 받고 온 왜적과 싸우사 투구를 아니 벗기시면 나라의 백성을 살리시겠습니까?


16세기에 이르러서는 1527년 편찬된 《훈몽자회》에서 倭의 훈음을 '예 와'라고 기재한 사례도 있으며,

임진왜란 당시 의주로 탈주한 선조가 1593년 발표한 〈선조국문유서〉에서도 '예'와 '예나라'라는 표현이 수 차례 등장함.


요ᄉᆞ이 합병ᄒᆞ여 부산 동ᄂᆡ 인ᄂᆞᆫ ᄃᆞᆯ흘 다 틸 ᄲᅮᆫ이 아니라 강남 ᄇᆡ와 우리나라 ᄇᆡ를 합ᄒᆞ여 바ᄅᆞ 예나라희 드러가 다 분탕ᄒᆞᆯ 거시니...

조만간 합병하여 부산, 동래에 있는 왜적들을 다 칠 뿐 아니라 중국 배와 우리나라 배를 합하여 바로 왜국에 들어가 다 토벌할 것이니...


이후 1617년에 왕명에 의해 편찬된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서도 '예', '예왕', '예나라' 등의 표현이 빈번하게 등장하고,

1668년에 출판된 《하멜 표류기》에서도 "(조선인들은) 일본을 예나라(Ieenare) 또는 일본(Iilpon)이라 하기에

야빤(Iapan)이라는 단어를 이해하지 못했다." 라는 기록이 남아 있어 적어도 근대 국어 초기까지는 쓰였던 표현으로 추정됨.


十二歲父爲倭賊所執號泣請釋賊感而從之

열두 설에 아비 게 잡혀ᄂᆞᆯ 브ᄅᆞ지져 울고 노홈을 청ᄒᆞ니 도적이 감화ᄒᆞ야 조ᄎᆞ니라

열두 살에 아비가 왜적에게 잡히거늘, 부르짖어 울고 놓아주기를 청하니 도적이 감화하여 이를 좇았느니라.


倭王怒曰 言鷄林臣 必具五刑

예왕이 노ᄒᆞ여 ᄀᆞ로ᄃᆡ 계림 신해라 니ᄅᆞ면 반ᄃᆞ시 다ᄉᆞᆮ 형벌을 ᄀᆞ초리라

왜왕이 노하여 이르되, "계림 신하라고 이르면 반드시 다섯 가지 형벌을 갖추리라."


18세기부터 문헌에 등장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대략 이 시기쯤부터 중앙 방언에서 왜(倭)에 밀려 사장되었다고 볼 수 있는데,

오구라 신페이에 따르면 서남 방언에서는 1930년대까지도 속담에 포함된 형태로 살아남아 있었다고 하며

지금도 제주도의 일부 지명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는 카더라식 이야기가 있음.


여담으로 일본 말고도 여진족 등 북방 민족이 '도이', '되'라는 명칭으로 불리기도 했는데,

사실 이 어휘는 '뒿[北]'에서 유래했다는 고유어설과 '島夷' 또는 '東夷'에서 유래했다는 한자어설이 양립하므로

고유어라 단정짓기는 조금 애매한 부분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