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 동남리 유적에서 나온 1번 목간의 앞 1면과 판독문.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제공


1500여년 전 백제시대에 오늘날 ‘조달청’ 성격의 관공서 공무원들이 정부 물자를 출납한 기록 문서가 세상에 처음 나왔다.

화제의 유물은 6~7세기 백제왕조의 마지막 도읍 사비성이 있던 충남 부여읍 동남리 49-2번지 공공주택 신축 터 안 유적에서 최근 출토된 나무쪽 문서 ‘목간’들이다.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는 지난 3~4월 울산문화재연구원이 발굴 조사해 거둬들인 6~7세기께의 백제 목간 5점을 분석한 결과 당시 관공서의 물자 출납 관련 문자 기록들이 적힌 것으로 확인됐다고 10일 발표했다. 


목간 5점의 출토 현황을 보여주는 도해도. 울산문화재연구원 제공


연구소 쪽은 한국목간학회(회장 이성시 와세다대 교수)의 중견 연구자들과 네차례 회의를 열면서 목간 내용을 집중 분석했다. 판독본 2개는 물자 출납기록을 적은 문서용이고 3개는 물자에 붙이는 꼬리표(하찰)로 드러났다. 문서용 목간 1번 유물에는 날짜(1210일), 귀금속 재는 단위로 추정되는 금(金), 70년대 무령왕릉 출토 은제팔찌 등에도 새겨진, 금의 중량을 뜻하는 ‘主’(주) 모양의 단위 글자 등이 보이고, 물자를 보내거나 맞는 이동을 뜻하는 글자, 재고 상황(亡) 등으로 해석할 수 있는 글자도 나타났다. 목간 2번 유물에서는 곡물 중 하나인 피(稗)와 함께 이동, 연령 등급(丁), 사람 이름, 용량 단위(斗) 등으로 볼 수 있는 글자가 확인된다.

목간에 새긴 문자들 중 특히 ‘主’(주) 모양의 단위 글자가 백제에서 중량을 재는 도량형의 가장 아랫 단위로 사용되었음을 사실상 확인된 것은 판독 과정에서 가장 큰 성과로 꼽힌다. 원래는 무겁다는 뜻의 ‘重’(중)이란 한자가 원형이지만, 이를 문서용으로 흘려 쓰다 보니 변형된 것으로 학자들은 추정하고 있다. 또 ‘金’(금)이 세금 등으로 백제 국가재정예산의 기본 단위로 쓰였다는 것도 이번 목간 문서 판독을 통해 밝혀졌다. 지금의 화폐 단위와는 다른 것이지만, 금이나 은의 조각(금편, 은편) 등이 곡물과 더불어 두루 세금이나 세원을 세는 기본 단위로 쓰였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부여 동남리 유적에서 나온 1번 목간의 뒤 2면과 판독문.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제공


부여 동남리 유적에서 나온 2번 목간의 앞 1면과 판독문.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제공


아울러 문서의 기록 방식 측면에서도 독특한 특징이 새롭게 발견됐다. 세로로 표기한 문서 행간의 빈 공간에 이음표(丶)를 쓴 뒤 그 다음 줄에는 문자를 180도 거꾸로 써내려가는 등 당대의 관공서 공무원들끼리 공유한 색다른 기록 형식이 확인돼 연구자들의 눈길을 끌었다.

목간을 판독한 고문서 학계 연구자들은 출토된 목간들이 행정 관부 출납을 담당하던 관리가 기록한 장부 용도의 문서와 이에 딸린 기록들이라고 보고 있다. 백제 후기 당대 정부 관청의 물자 출납 구매기록이 처음 구체적으로 나타났고 백제인들이 금 등의 귀금속 계량 단위를 어떻게 썼는지도 추정할 수 있게 돼 당시 국가기구 운영 실태를 짐작할 소중한 사료가 확보됐다는 평가다. 


부여 동남리 목간 출토 지점. 국립부여박물관 진입로 인근에 있다.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제공


목간 내용을 검토한 윤선태 동국대 역사교육과 교수는 “백제시대 국가에서 정한 도량형 계량 단위의 구체적인 실체를 파악할 수 있게 됐고, 이를 통해 백제가 매우 세련된 국가 재정 운영 구조를 가진 나라였다는 것을 알게 됐다”며 “당대 국가 관공서 말단 직원들의 생생한 문서 행정 양상이 처음 드러났다는 점도 큰 의미를 지닌다”고 설명했다.

동남리 유적은 국립부여박물관으로 가는 진입로 부근에 자리한다. 백제 시기 도로, 건물지, 수혈, 수로, 우물, 경작 유구 등 다양한 유구가 확인되는 사비 도읍 시기 중요 생활사 유적이다. 이번 목간 발견으로 유적 일대가 고대 관청가 밀집지역이거나 지방의 세금을 받아 용도에 따라 각지에 분배하는 국가 물류 센터였을 것이란 설이 유력하게 대두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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