샹보르 백작 앙리


1873년 10월 4일 프랑스의 왕당파 의원들은 군주제 복원에 투표하기 전에 샹보르 백작과 함께 헌법 초안에 합의할 위원회를 임명했음

샹보르 백작은 절대로 삼색기를 받아들이지는 않겠지만, 자신의 명예와 양립할 수 있는 해결책을 얻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있으며, 의회와 국가를 만족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음. 이때 샹보르 백작이 국기를 위해 구상한 해결책은 알려지지 않고 있음


당시 샹보르 백작의 왕위 계승은 거의 결실을 맺을 것으로 보였고, 알퐁스 도데도 '그가 빨리 오기를, 우리의 앙리... 우리는 그를 보고싶고 너무 그립다'고 하기도 했음

위원회는 11월 5일 제1차 국회 회기부터 표결에 부쳐질 본문을 준비하고 있었으며, 제1조는 '프랑스 정부는 국가적, 세습적, 입헌 군주제'임을 명시하고 있었다고 함


1873년 10월 말에는 프랑스 내부에서 왕의 귀환을 준비하고 있었고

샹보르 백작은 프랑스로 귀국할 준비를 시작했으며, 왕위에 복귀한 후 국기를 수정하거나 다른 국기를 제안할 수 있는 주도권을 부여받는 조건으로 일시적으로 삼색기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다고 했음


여기서 일이 꼬여버리는데, 샤를 사바리가 작성한 의원 회의록에서 샹보르 백작이 프랑스에 입국할 때 삼색기를 행복하게 맞이할 것이라는 말을 인터뷰에서 했다고 한 거임. 이 왜곡은 일부 신문들에서 그가 마침내 프랑스 국기에 합류했다고까지 부풀리면서 더 커졌고, 이를 부인하기로 결정한 샹보르 백작은 백기에 대한 애착을 재확인시켰으며

이로 인해 희망은 산산조각났고 위원회는 작업을 종료했음


이 결과를 예상하지 못한 앙리는 다시 기회를 잡기 위하여 11월 9일 베르사유에 정착했고, 3일 뒤에 블라카스 공작에게 드마크마옹 대통령을 만나는 것을 요청해서 군주제 복원에 열광하는 의원들의 세력을 키우기로 했음. 하지만 드마크마옹은 행정수반으로서의 의무가 있어서 만나는 것이 금지되었다고 여기며 지지자를 만나는 것을 거부했음


11월 20일 밤, 앙리가 프랑스에 있다는 것을 모르는 의회는 7년 간의 대통령 임기를 표결에 부쳐 드마크마옹의 임기를 연장했으며, 1877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공화파가 승리하고 왕당파 다수가 소멸하면서 계속 희망을 잃지 않은 앙리의 꿈은 끝내 좌절되었음


백기에 대한 애착을 보였지만 단기적으로라도 삼색기를 받아들이면서까지 왕위에 오르려는 앙리의 노력이 그의 말을 왜곡하고 부풀린 언론과 그에 대한 앙리의 단호한 대처로 망해버렸다는 게 아이러니한 것 같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