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메키타 잇키(梅北一揆)는 분로쿠(文禄) 원년(1592년) 6월에 시마즈 가문의 부하로 오오스미노쿠니 히시카리군(大隅国 菱刈郡 ; 현재의 가고시마 현 히시카리 군)의 지토(다이묘의 부하로 지방에 파견되어 군사, 내무, 치안, 조세 등의 업무를 맡았다. 현재의 군수급에 해당)였던 우메키타 쿠니카네(梅北国兼)가 일으킨 반란이다.


개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임진왜란 때 전선기지인 히젠나고야성으로 향하는 배를 기다리는 명목으로 히고쿠니 아시키타군 자시키(肥後国 葦北郡佐敷 ; 현재의 구마모토 현 아시키타 군)에 머물던 우메키타 쿠니카네는 임진왜란 당시 6월 15일(1592년 7월 23일) 아시키타를 다스리는 히고 구마모토 성주 가토 기요마사가 조선으로 원정 간 틈을 타 사시키 성을 점거한다. 동기는 조선 출병에 대한 반발 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지배에 대한 반발로도 알려져 있다.

반란에는 타지리 타지마(田尻但馬 ; 평민이었는데 전공을 세우고 무사가 된 인물), 토고 진우에몬(東鄕甚右衛門)이라고 하는 시마즈 가문의 부하들이 참가해, 반란군 틈에 농민이나 마을 사람이 가담하여 반란군의 인원수는 최소 700명에서 최대 2000명이었다고 한다.

지금까지 쿠니카네는 사시키 성의 성주 대리를 맡고 있던 야스다 야우에몬(安田弥右衛門) 등의 거짓 투항에 방심하여 6월 17일에 사카이 젠자에몬(境善左衛門)에 의해 죽음을 당했기 때문에 반란은 불과 3일만에 진압되었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최근 반란군이 사시키 성을 15일동안 점거했다는 가설도 제기되고 있다. 어쨌든 반란군은 사시키 북쪽의 야쓰시로 성(八代城 ; 현재의 구마모토 현 야쓰시로 시 무기시마 麦島城 성터)을 공격했으나 실패하고 가토 가문과 히토요시 성의 성주 사가라 가문의 토벌대에 의해 진압되어 쿠니카네는 전사했다. 구니카네의 머리는 히젠나고야 성으로 옮겨져 해변에 효수되었고 몸통은 사시키고혼마쓰(佐敷五本松)에 묻혔다고 한다.

이 우메키타 잇키는 원래 지체되었던 시마즈 씨의 임진왜란 참전을 더욱 늦추는 결과가 되어 시마즈 요시히로로 하여금 '일본 제일의 지진(日本一の遅陣)'이라고 말하게 할 정도의 실수로 이어졌다.(지진 遲陣은 전쟁에 늦게 도착함을 가리킨다. 보통 이 행위는 패전의 원인이 되기도 하여 적전도주, 전시탈영 같이 중죄로 여겨졌다. 나중에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지진 사건을 일으킨 아들 도쿠가와 히데타다를 사형에 처하려고 했다가 주변의 필사적인 만류로 취소한 일이 있었다.) 이 사건은 시마즈 씨에 대한 도요토미 정권의 불신을 초래해 시마즈 영내에서는 도요토미 정권이 보낸 아사노 나가마사나 호소카와 유사이 등에 의한 철저한 감시가 이루어지게 된다. 더욱이 시마즈 토시히사가 히데요시에 의해 반란의 배후로 간주되어 시마즈 요시히사에 의해 사망했으며, 반란에 부하가 참여했다는 빌미로 히고의 아소 신사의 대궁사 후계자였던 아소 코레미츠(阿蘇惟光)가 겨우 12세라는 어린 나이에 참수되었다.(아소 코레미츠는 삿사 나리마사의 집에서 양육되던 중 히고 고쿠진 잇키가 일어나, 삿사 나리마사가 그 책임을 물어 사형당한 뒤 가토 기요마사의 손에 맡겨졌다. 그러나 우메키타 잇키 사건에 연루되어 죽음을 당했으며, 동생 코레요시 惟善에 의해 아소 신사의 대궁사직이 계승되어 현재 아소 신사 신주 가문의 종가와 당주는 전부 아소 코레요시의 후손이다)

우메키타 잇키에 의해 시마즈 씨의 정치적 입지는 극도로 악화되었으나 검지와 그에 따른 고쿠진 등 지방 지배계층의 몰락은 결과적으로 시마즈 가문의 다이묘 권력 강화로 이어졌고, 임진왜란에서 군공을 올려 명예를 만회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 사건 후의 처벌이 본보기 성으로 혹독하게 이루어졌기 때문에, 이후의 분고 오오토모 가문의 개역 사건 등과 함께, 도요토미 정권의 지배에 익숙치 않았던 규슈의 여러 다이묘 세력을 정권 체제하에 편입시키는 효과가 있었다고 여겨진다.

한편 반란을 일으킨 우메키타 쿠니카네는 자신의 옛 봉토에서 신으로 추앙받아 현재도 가고시마현 아이라시 기타야마(鹿児島県姶良市北山)에 그를 모시는 우메키타 신사가 남아 있다.


우메키타 쿠니카네의 아내도 연좌되어 사형당했으며, 죽음을 앞둔 순간에도 당당한 모습을 보여 루이스 프로이스의 일본사에서 '이교도임에도 불구하고 훌륭하다' 는 호의적인 기록으로 서술되었다. 우메키타 가문의 일족들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을 때까지 은둔하다가 시마즈 가문의 부하로 돌아왔다.


출처 : 일본어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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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발발 2개월 뒤에 사쓰마에서 일어난 작은 반란이긴 하지만 이 사건은 의외로 시마즈 가문의 발을 제대로 묶어놓았고


그 영향으로 시마즈 요시히로는 조선에서 별 군공을 세우지 못했다는 뒷이야기를 남겼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