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서의 등장 자체는 오래 되었다. 그러나 유사역사학이 위서를 만들어낸 현상은 근대적 현상이다.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은 국수주의적 역사관을 통해 국가 체제의 단결을 꾀하고자 하는 전체주의적 발상이 밑바탕에 있다. 요즘은 그보다 부수적으로 생기는 돈에 집착하는 것 같기는 하지만...

아무튼 초창기의 유사역사학의 등장과 더불어 위서도 발생하게 되었다. 정상적인 역사 안에서는 자신들이 원하는 바를 달성할 수 없기 때문에 가짜 자료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전세계적으로 발생했으며, 위서를 날조하는 과정을 보면 인간의 상상력은 대개 흡사하다는 보편적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 이런 것이 역사를 연구하는 재미의 하나다.

러시아에는 '유라시아주의'라는 게 있다. 요약하자면 러시아판 대동아공영권, 국수주의, 제국주의 같은 것이다. 러시아를 이루는 슬라브민족만이 세계 최고의 민족으로 고대에 유라시아를 지배했다는 것이 그 골자다.

이를 증명하기 위해서는 사서가 필요하다. 그래서 만들어진 위서가 <벨레스書서>다. 우리에게는 <환단고기>가 있고 러시아에는 <벨레스서>가 있는 것이다. 이 책은 1950년대에 등장했다.

이 책의 등장과 <환단고기>의 등장을 비교해보겠다.


벨레스(Veles)는 슬라브 신화에 등장하는 신 중 하나로, 지혜와 지식, 그리고 물, 땅, 가축 등을 상징한다.


1. 발견 
- 벨레스서는 1950년대에 미국으로 이주한 러시아 문학가 미로류보프가 처음 소개했다.
- 환단고기는 1970년대에 남한으로 월남한 전 유학자 출신 이유립이 처음 소개했다.

2. 첫등장
- 벨레스서는 1951~3년에 미국 샌프란시스코 러시아 이민자들 사이에 발행하던 잡지 <불새>에 연재되었다.
- 환단고기는 1976~9년에 한국 군납잡지 <자유>에 소개되었다. (60년대에도 일부가 <커발한> 신문 등에 소개된 적이 있다.)

3. 최초 소유자
- 벨레스서는 러시아 내전 당시 백군 장교이자 화가인 이젠백이 발견했다.
- 환단고기는 일제강점기 때 독립운동가인 계연수가 편찬했다(고 주장한다라고 보는 게 더 적절하다. 왜냐하면 계연수라는 인물은 인적사항이 불분명하기 때문에 실존성을 의심받고 있다).

4. 전달
- 벨레스서는 이젠백이 벨기에로 도망쳐서 있을 때 미로류보프가 우연히 발견했다.
- 환단고기는 계연수가 살해당할 때 소년 이유립에게 넘겨주었다.

5. 미공개 사연
- 벨레스서는 알 수 없는 이유로 공개를 거부했다.
- 계연수는 알 수 없는 이유로 60년 후에 공개하라고 했다.

6. 진본의 행방
- 벨레스서의 진본은 2차세계대전 때 불타서 없어진 것으로 추정한다.
- 환단고기의 원본은 70년대에 어쩌다 분실한 것으로 추정한다.

7. 필사본의 등장
- 벨레스서는 미로류보프가 이젠백의 집에서 필사했다.
- 환단고기는 원본을 오형기가 강화도에서 필사했다.

8. 최초 소유자에 대한 의문
- 이젠백은 중앙아시아 고고학탐사단에 화가로 참여한 바는 있으나 이런 쪽에 조예는 없다. 거짓말일 가능성이 높다.
- 계연수는 묘향산 석벽에서 천부경을 발견해 시흥단군교에 보낸 바 있으나 그 이상의 확인은 어렵다. 거짓말일 가능성이 높다.

9. 위서의 내용 
- 벨레스서는 기원전 9백년 경에 파미르 고원에서 선조가 나타났다고 주장한다.
- 환단고기는 기원전 3897년에 시베리아에서 선조가 나타났다고 주장한다.

10. 위서의 확산
- 벨레스서는 1992년 슬라브 민족주의에 힘입어 책으로 등장해서 위대한 슬라브인의 감춰진 역사라는 이유로 인기를 끌었다.
- 환단고기는 1986년 한국의 민족주의에 힘입어 한글 번역책이 등장해서 위대한 한국인의 감춰진 역사라는 이유로 인기를 끌었다.

11. 학계의 대응
- 러시아 역사학계는 전면적이고 신속하게 100% 위서라는 것을 천명했다.
- 한국 역사학계는 일부 학자들이 위서 주장을 했으나 전반적으로 모른 척했다. (다행히 21세기에 들어와서 본격적인 반격이 시도되고 있다.)



여기서 놀라운 점은 러시아 역사학계의 반응인데


그 러시아 역사학계는 동북아시아 3국의 역사학계에 으레 따라붙는 비판 중 하나인 민족주의, 국수주의 색체가 강한 역사관을 정설로 민다는 의심을 자주 받아왔기 때문이다.


그들조차도 이 괴문서는 말할 가치도 없는 불쏘시개임을 인정했다는 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