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호 파다가 해방을 맞으셨다고 그러셨죠?

응. 파는데 8월 15일이 돼서 해방을 맞았어요. 우린 그것도 몰랐지. 쭉 우리부대가 산에 배치 돼 가지고 참호를 파고 있는 거예요. 소련군하고 한판 붙으려고. 그런데 그게 1945년 8월 17일인데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은 산 밑에 있는 부락을 통과하게 됐어요. 이렇게 지나가는데 부락에 있는 청년들이 우리들을 따라와요. 힐끔힐끔 보면서 말이야. 그래서 한 청년을 잡고 "오늘 동네에 무슨 좋은 일 있소?"하고 물었지. 워낙 먹는 게 시원치 않으니 닭고기나 좀 얻어먹을까 해가지고 말이지. 그랬더니 이 청년이 깜짝 놀라더라고. 나를 완전히 일본놈인 줄 알았나 봐. 나를 이래저래 살펴보더니 한국 사람인 것을 확인하고 "아이고! 일본이 졌어요." 하더라고. 그래서 알았지. 부대 고위층은 알고 있었는지 모르지만 암튼 우리 졸병들은 전혀 몰랐어요. 그때 처음 알았고 내가 막 소문을 퍼트렸다고. "우리 해방이다. 그러니깐 우리 준비 허자. 갈 준비 하자"고. 막 이야기가 퍼져 나가니까 전부 모이라 그래. 아마 1연대가 모였는데 그땐 뭐 다 알았었지. 우리가 수근수근 거리니까 연대장이 이거 영감탱인데 이제 늙은 대령이지요. 머리 허-연 대령이지. 딱 위에 올라서더니 일본말로 그러더라고. "고레카라 한또슛신와 지유데아루これから半島出身は自由である" 아, 이러더라고. 조선 사람은 지금부터 자유란 뜻이야. 내가 지금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어요. 그래가지고 이렇게 군대 천막에다가 짐을 싸는데, 그게 아마 지금 생각하면 한 50킬로그램 될 거예요. 하하하. 철모서부터 군화 여분 있는 거 뭐 이런 거 다 쌌지요. 결국 무거워서 전부 버리고 왔어요. 짐을 싸고 보니 무척이나 많더라고. 돌아올 때도 화물차지 뭐. 흥남에서 서울로 오는 화물차를 아마 8월 19일 날 탔을 거야. 그렇게 해서 청량리역에 도착했어요. 경원선이니까 청량리로 왔어요. 도착해서 보니 뭐 여기저기서 데모하고 무슨 청년단이니 뭐니 해가 지고 대단들 하더라고. 이 플래카드 짊어지고서 왔다 갔다 하구. 좌익이니 우익이니 해서 막 대립하고 싸우더라고.
-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의 『서울 사람이 겪은 해방과 전쟁』에서


1924년에 태어난 민태윤 옹의 증언입니다. '갑자생(甲子生)'으로 불리던 1924년생 식민지 조선인 남성들은 격동의 시대를 온몸으로 겪었습니다. 군대에 징집돼 아시아·태평양 전쟁과 한국 전쟁을 잇따라 치렀기 때문입니다. 민 옹도 "일제시대에 일본군대로 끌려가 구사일생으로 돌아 왔고, 또 6·25때는 인민군한테 끌려갔다가 도망쳐 가지고 살았고, 국군이 들어왔을 때는 국민방위군에서 도망을 쳐 살았으니 세 번 죽을 뻔한 거죠"라고 말하며 갑자생의 비애를 털어놓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