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리악의 조제는 몇 개월이 걸리는 과정을 거쳐 조제되었는데, 일단 재료를 구하고 그것을 복잡한 공정으로 가공하여 몇 년 동안 항아리에 재워 숙성시키는 술 제조법과 비슷했다. 이렇게 완성된 테리악의 모습은 고추장이나 된장 같은 모습이었다. 영국에서는 테리악의 진득한 질감을 보고 ‘베네치아의 당밀(Venetian Treacle)’이라는 별명으로 부르기도 했다. 설탕은 꿀처럼 당시 유럽에서 구하기 어려운 사치품이었기 때문에 식품이 아닌 의약품으로 취급되었기 때문이었다. 마치 동양 의학에서 '고기'가 보약으로 취급되었듯이 말이다.

 

흑사병이 유럽을 강타한 시기에도 테리악은 흑사병을 치료해 줄 것이라는 믿음 하에 애용되었는데 이때 의사들은 경험적으로 어린이들에게는 가급적 먹이지 말고 되도록 피부에 바르도록 권고하기도 했다고 한다. 아무래도 약의 흡수율과 영향이 성인보다 높다는 점을 고려한 듯 하다.

 

테리악이 오랫동안 애용되었던 데는 독사의 살 등의 독성이 있는 물질이 함유되어 있어 이것이 오히려 몸에 좋은 효과를 줄 것이라는 믿음도 한 몫을 했다. 이는 동양의 이독제독(以毒制毒)이라는 믿음과 비슷하다.

 

그뿐만 아니라 종교적인 해석도 뒤따랐는데, "인간이 그의 영혼에 들어간 독이 있는 죄악을 거부하게 만드는" 약인 도덕적인 치료제로 생각했다. 흑사병, 특히 흑사병은 죄에 대한 징벌로 신에 의해 보내진 것으로 믿어졌고, 독사 자체에 기원을 두었기 때문에(민수기 21장에서 야훼에 대한 반항으로 뱀에게 물린 유대인들과 살기 위해 모세에게 부탁해 신과 소통한 끝에, 모세는 쇠로 만든 뱀을 장대에 높이 걸어 유대인들에게 이것을 쳐다보면 죽지 않는다는 구약성경의 일화를 떠올린다), 테리악은 특히 흑사병에 대한 적절한 조치라고 믿어졌다.

 

테리악의 독점 자체가 끝나는 계기는 위그노 출신에서 스페인 종교재판으로 투옥되었다가 가톨릭으로 원복한 모이 샤라즈(Moyse Charas)라는 프랑스인 약사가 1669년 조제법을 전면 공개하여 비로소 유럽의 다른 나라와 지역에서도 테리악을 직접 조제할 수 있었다.

 

17세기 유럽 최고의 약사로 손꼽혔던 모이 샤라즈. 그는 신교도 출신으로 영국-프랑스-네덜란드-스페인 왕실을 순회하며 살아왔다.


르네상스 시기가 절정이 되는 때에는 아예 테리악의 조제 자체가 성스러운 종교적 의식 그 자체로 취급되었다. 마치 이 약이 검증된, 그리고 신뢰할 수 있는 만병통치약임을 모든 사람들에게 공개하듯이 말이다. 이는 18세기경까지 유럽의 수많은 도시에서 의사들의 입회한 가운데 최고 권위의 약사가 마치 성직자가 기도문을 읊듯이 ‘의식’을 취하고 조제했다.

 

근대 시대로 접어들어 계몽주의가 유행하기 시작함에 따라 테리악의 권위는 점점 도전받기 시작했다. 테리악 자체를 사장시키는 데 가장 큰 기여를 한 문서는 영국인 의사였던 윌리엄 해버든(William Heberden)이 1745년에 Antitheriaca: An essay on Mithridatium and Theriaca라는 논문을 발표하면서부터였다.

 

윌리엄 해버든은 역사상 처음으로 미트리다티움과 테리악에 대한 비판적인 의견을 공식적으로 내놓은 최초의 인물로 현대 약학의 조상으로 일컬어지는 그 유명한 파라켈수스(Paracelsus)조차 환자에게 테리악을 처방하는 등 시대의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했었다.


첫 계몽주의 시대의 의학박사 윌리엄 해버든. 환자를 돌보는 것보다는 의학 연구에 더 열심이었다.

 

해버든의 논문은 만병통치약의 허황된 실태와 해로운 부작용에 대한 체계적이고 소상한 저술로 이루어져 있어서 수많은 학자들의 공감을 샀고, 마침내 1756년 에딘버러 약학 사전 판본에서부터 미트리다티움과 테리악이 삭제되는 결실을 맺는다.


당시 의학계의 핵폭탄과 같은 충격을 던졌던 문제의 논문. 2천년 동안 군림해 온 유럽 의학의 성역이 이 논문으로 조금씩 무너져 갔다.

 

그러나 스페인과 독일 등지에서는 19세기 의학 서적 판본에까지 테리악의 제법이나 처방이 살아남아 있었으며 프랑스는 1908년까지 수록되어 있다가 사라졌다. 2천 년의 세월 동안 세계 의학계를 지배한 만병통치약의 허무한 몰락이었다.


1641년 제조된 항아리로 테리악을 담았던 용기이다. 중간에 IHS라는 예수회의 마크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