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8년에 일어난 알레포 대지진은 역사상 가장 치명적인 피해를 준 지진 중 하나이다. 도시 이름은 사상자가 가장 많았던 시리아 북부의 알레포(Aleppo, Halab)에서 따왔다. 이 지진은 알레포 주변 지역까지 피해와 혼돈을 야기했다. 지진은 1138년 10월 11일에 발생했고 10일 동안 여진이 발생했다. 이 지진은 중국의 섬서 대지진과 당산 대지진에 이어 역사상 세 번째로 사상자를 기록한 지진으로 자주 언급된다. 그러나 이집트 맘루크 왕조 시대의 역사학자 이븐 타그리비르디(Ibn Tagribirdi)가 15세기에 기록한 23만 명의 사망자 수는 1137년 11월 자지라 평원(상부 메소포타미아)에서 일어난 지진과 1139년 9월 30일에 일어난 현재의 아제르바이잔 간자(Ganja)에서 일어난 대규모 지진 사건의 역사적인 연관성에 근거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배경


알레포는 아라비아판과 아프리카판을 가로지르는 사해 단층 경계에 속해 있으며  이 지진은 두 차례의 강력한 지진 중 첫 번째 지진의 시작이었다. 1138년 10월부터 1139년 6월까지, 1156년 9월부터 1159년 5월까지 훨씬 더 강력한 2차 지진이었다. 첫 번째 지진은 알레포 주변 지역과 에데사 지역(오늘날 터키 샨르우르파 주)의 서부 일대에 영향을 미쳤다. 두 번째 기간 동안 시리아 북서부, 레바논 북부, 안티오키아(오늘날 터키 남부 하타이 주 안타키아) 지역을 포함하는 지역은 파괴적인 지진의 영향을 받았다.

12세기 중반 시리아 북부는 십자군 전쟁의 여파로 황폐해진 땅이었다. 안티오키아 공국과 같은 서유럽인들이 세운 십자군 국가들은 알레포와 모술을 중심으로 한 북시리아와 자지라 일대의 무슬림 국가들과 지속적인 전쟁 상태에 있었다.



지질학적 배경


중동 지역은 아라비아판, 아프리카판, 유라시아판 사이에 위치한다. 세계에서 가장 지질학적으로 활발한 지역 중 하나이다. 아라비아판은 유라시아판 아래로 가라앉아 코카서스 산맥과 아나톨리아 고원의 침식을 일으키고 있다. 북쪽을 따라 섭입대를 보완하는 것은 홍해와 아라비아해 근처의 서로 다른 경계일 뿐만 아니라 시나이 반도에서 시리아-터키 국경까지 대략 지중해 연안을 따라 서쪽으로 경계를 전환하는 것이다.
사해 단층과 그 북쪽의 수렴 경계는 알레포 지진 전후로 수많은 지진을 일으켰다. 이들 중 일부는 너무나 충격적이어서 고대인들의 신화와 신학으로 단서를 찾았는데, 예를 들면 기원전 1500년에 일어난 예리코 성의 파괴나 예수의 십자가형 이후에 일어났다고 전해지는 지진이 그것이다. 1927년 예리코 지진으로 팔레스타인에서 약 500여명의 사망자가 발생했고, 특히 종교적 성지들이 파괴되었다.



묘사


동시대 다마스쿠스 연대기의 저자인 이븐 알 칼라니시(Ibn Al-Qalanisi)는 1138년 10월 11일에 발생한 지진을 기록했다. 그는 10월 10일에 첫 지진이 있었고 10월 20일 저녁, 10월 25일 밤, 10월 30일부터 11월 1일 밤에 여진이 있었고 11월 3일 이른 아침에 또 다른 여진이 있었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나중에 집필한 작가 케말 알딘(Kemal Al-Din)은 10월 19일에서 20일 사이에 단 한 번의 지진만 기록했는데, 이는 알칼라니시의 기록과 일치하지 않는다. 알 칼라니시는 지진이 발생했을 때 기록을 남겼으며, 다른 역사학자들의 기록이 10월 10일 또는 11일이라는 것을 뒷받침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의 날짜가 10월 11일이라는 것이다. 현대에는 최초의 지진이 7 이상의 진도를 기록했고 해일을 동반했다고 본다. 이러한 요인들은 1138년 알레포 지진이 역사상 가장 치명적인 지진 중 하나로 손꼽히는 데 기여했다.


가장 큰 타격을 입은 지역은 하렘(Harem, Harim 현재의 시리아 이들리브 주 하렘. 그 하렘이 아니다)으로, 십자군은 큰 성채를 건설했다. 자료에 따르면 성이 파괴되고 성당이 스스로 무너졌다고 한다. 당시 이슬람교도들이 점령했던 아타렙 성(Fort of Athareb)도 파괴되었다. 성채도 무너져 600명의 군사가 죽었지만 성주와 일부 하인들은 살아남아 모술로 도망쳤다. 이미 약탈당했던 자르다나 마을(Zardana)은 파괴된 시흐 성(Fort Shih)처럼 완전히 파괴되었다.


이 기간 동안 수만 명의 대도시 알레포의 주민들은 지진이 발생하기 전에 여진의 경고를 받고 시골로 도망쳤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이 충격의 경고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고, 남아있기로 결정했다. 이 실수는 다음 날(10월 11일) 많은 건물이 무너지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다.


성채의 성벽은 무너졌고, 성채의 동쪽과 서쪽의 성벽도 무너졌다. 많은 집들이 파괴되었고, 건축에 사용된 돌들이 거리에 떨어졌다. 성벽과 건물의 기초에 생긴 균열과 구멍은 알레포 사람들에게 더 큰 문제를 야기했다. 이 구멍들은 십자군과 이슬람 세력의 군대가 도시를 침략할 수 있게 했다. 알레포의 피해에 대한 당대의 기록들은 알레포가 지진의 가장 큰 피해를 입지는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지만, 그저 알레포가 파괴되었다고만 기술하고 있다.


다른 보고서들은 알레포의 북쪽에 있는 아즈랍(Azrab)이 가장 큰 피해를 입었다고 주장한다. 이에 따르면 땅이 중간에서 갈라져 마을을 집어삼켰다고 한다. 아마 지진으로 인한 산사태의 결과였을 것이다. 또한 본진과 여진이 다마스쿠스에서 감지되었지만 예루살렘에서는 감지되지 않았다고 말한다. 라카의 땅에 구멍이 뚫린 구멍에 사람들이 삼켜졌다는 이야기는 알레포 지진으로 와전되기도 했는데, 이는 12세기 말 시리아 정교회의 총대주교였던 미카엘(Michael The Syrian)의 혼란스러운 이야기에 기초하고 있다.



정치적-경제적 영향


지진의 여파는 충격에 의한 직접적인 파괴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알레포의 경제와 행정에 도미노 효과를 야기했다. 첫째, 대다수의 민가는 완전히 파괴되었고, 재산도 함께 파괴되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떠나야 했고, 다수는 사막으로 도망쳤다.


성채는 황폐화되었고 도시 전체의 약 60%가 파괴되었다. 이 대규모 파괴를 재건하려면 예산이 많이 들었고, 그에 따라가지 못하는 부족한 형편 때문에 재건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도시의 사람들의 직업과 삶은 영구적으로 바뀌었다. 또한, 건축물 관리를 위한 새로운 제도가 시행되었다. 이것은 사람들을 도시로 다시 끌어들이고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한 그들의 시도였지만, 그럼에도 예전 같지 않았다.

알레포는 아프리카와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통하는 육로 무역로의 거점을 따라 자리잡았기 때문에 알레포는 부유하고 모두가 노리는 도시가 되었다. 지진으로 파괴된 이후 동서간 무역은 도시가 재건될 때까지 더디게 진행되었다. 이는 제4차 십자군의 콘스탄티노플 약탈과 함께 베네치아, 피사, 제노바와 같은 이탈리아의 도시 국가 출신 상인들이 무역에 진출하여 육로 무역을 지중해-흑해 해로 무역으로 대체할 수 있게 했다.


출처 : 영문판 위키피디아 1138년 알레포 대지진 항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