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릴레오의 종교재판에 대한 여러 사항들은 혼란스럽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이야기는 갈릴레오가 지동설을 주장했기 때문에 천동설을 지지한 교회가 그를 단죄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교회는 지동설 연구를 인정했으며 갈릴레오가 종교재판을 받은 것은 교황을 모욕했다거나 종교적 문제를 거론한 등의 다른 이유 때문이었다고 설명하기도 한다.


이 문제는 혼란스럽다. 먼저 갈릴레오가 재판을 받은 것은 지동설 때문이 맞다. 갈릴레오의 최후 진술에서는 명백히 지동설이라는 잘못된 주장을 했다는 점을 이유로 밝히고 있지, 교황을 모욕했다거나 다른 종교적 문제를 거론하고 있지 않다. (참고로 최후 진술이라는 것은 현대의 재판에서처럼 피고의 입장을 피력하는 게 아니고, 종교재판의 결론을 피고가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읽는 것이며 피고가 아닌 재판정 쪽에서 작성한 글이다. 따라서 판결문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리고 같은 문서 마지막에 재판관들이 판결을 써놓는다.) 그러나 반대쪽 주장이 거짓말을 한 것도 아니라서, 교회의 고휘 인사들이 지동설 연구를 허가하거나, 심지어 지지하는 듯한 모습을 보인 것도 사실이다.


이런 혼란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교회의 입장 자체가 통일되지 않고 몇 가지 서로 다른 입장이 혼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우리가 이 문제를 천동설과 지동설의 대결로 보는 것 자체가 당대의 교회의 관점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중세 교회의 입장은 천동설과 일치하지 않으며, 교회가 공격한 주장 역시 지동설이라는 하나의 주장으로 간주되지 않았다.


중세의 교회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관계

그 배경을 살피기 위해 먼저 중세의 교회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과의 관계를 간단히 언급하도록 하자. 흔히 중세 교회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은 천동설을 지지하는 공고한 연합을 형성하고 지동설과 근대과학을 공격한 것으로 생각하지만, 사실 교회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은 상당부분 긴장관계였다. 물론 학계에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 절대적인 지위를 누리고 있었던 만큼 성직자들 중에도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받아들인 사람들이 있고 토머스 아퀴나스처럼 이를 신학에 적용한 사람도 있지만, 그렇다고 그 긴장관계가 사라지지는 않았다. 이는 다음과 같은 이유들 때문이다.


(1) 아리스토텔레스는 세계가 시작도 끝도 없는 불변의 존재로 보았는데, 이는 천지창조로 시작해서 최후의 심판으로 끝나는 세계관에 맞지 않았다. (2) 아리스토텔레서는 실체와 속성이 분리될 수 없는 것으로 보았는데, 이는 성체성사에서 빵과 포도주가 예수의 몸과 피라는 실체로 변한 후에도 빵과 포도주의 속성을 유지한다는 교리를 부정하는 것이었다. (3)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은 그 법칙에 따라서 움직인다. 이는 기적의 존재를 부정했다. (4) 아리스토텔레스는 영혼 불멸을 부인하고 사람이 죽으면 영혼도 사라진다고 생각했다. 


그 때문에 13세기 초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책을 읽으면 파문이라는 포고가 파리에서 내려질 정도였다. 하지만 이런 금지령은 제대로 실행되지 않은 듯하며, 13세기 중반에 대학들에서 공공연하게 아리스토텔레스의 책을 교육한 것을 보면 어느 시점엔가 금지령은 철회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교회를 무시할 수도 없었기 때문에, 타협안을 도출하려는 시도를 하게 된다.


학자들의 타협안은 "이중 진리"였다. 즉 어떤 명제가 철학의 영역에서 진리인 동시에 그와 반대되는 명제가 신학에서 진리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타협안은 성직자들을 격분하게 했다. 이는 철학에서 신학과 교리에 어긋나는 것을 진리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교회에서 나온 타협책은 자연 철학은 현상을 "구제"하는 수단이라는 것이었다. 즉 현상을 그럴듯하게 설명할 수 있는 수단일 뿐 신앙과 같은 진리의 반열에 올라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타협책의 내용에서도 완전한 타협은 되지 않았지만, 이 문제는 중세가 끝날 때까지 깔끔하게 정리되지 않았다.


이런 갈등 때문에 교회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공격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그런 공격의 수단 중 하나가, 현대의 관점에서 보면 다소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경험주의였다. 그 대표적인 인물로 "오컴의 면도날"로 유명한 오컴이 있다. 오컴은 이성적인 지식은 경험을 통해 얻어야 하지만, 경험은 인과관계를 증명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예컨대 헝겊에 불을 갖다대었더니 불이 붙었다고 하면, 헝겊에 불이 붙은 것은 불을 갖다대었기 때문일까?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당연히 그렇다. 하지만 오컴은 경험으로 알 수 있는 것은 불을 갖다댄 다음에 불이 붙었다는 시간적 순서 뿐이며, 단순히 그 시점에 신이 헝겊에 불을 일으킬 수도 있기 때문에 경험으로 인과 관계를 확인할 방법은 없다고 주장했다. 즉 오컴과 그의 제자들은 불가지론을 주장한 셈이다. 하지만 경험주의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과 정면 충돌까지 가지는 않았다. 사실 불가지론은 기독교와 잘 어울리는 조합이 아니기도 하고,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관찰과 경험을 강조했기 때문에 (불가지론이 아닌 범위에서) 경험주의를 적당히 수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교회와 근대과학의 관계

중세의 교회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갈등 때문에, 지동설과 근대과학은 처음에는 교회의 경계 대상이 아니었다. 오히려 환영을 받기도 했다. 이는 지동설이 경험론 이상으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공격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짧은 밀월관계는 금방 파탄이 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교회가 지동설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자연 철학은 현상을 "구제"하는 가설에 불과하다는 전제하에서였다. 그러나 근대과학은 이런 지위를 단호히 거부하고 과학을 통해 진리를 추구하고자 했다.


현대의 과학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과학의 이론은 진리가 아닌 게 맞지 않나" 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런 문제가 아니었다. 중세의 과학은 현상을 사변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것으로 만족했지만, 근대과학은 어떤 설명이 맞는지 관찰과 실험을 통해 검증하는 것을 그 특징으로 한다. 단순히 가능한 가설들 중 하나가 아니라 과학적으로 검증된 이론이라는 지위는 "현상을 구제하는 가설"은 물론 "이중 진리"로도 간주할 수 없는 것이었다. 자연철학은 신학과 다른 설명을 내놓을 수 있다는 수준이 아니라 이제 신학에 맞는 설명이라고 해도 과학적 검증을 통해 부정할 수 있는 지위를 주장한 것이다.


이를 중세의 천동설과 비교해보자. 우리가 흔히 "천동설"이라는 이름으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과 프톨레마이오스의 체계, 그리고 교회의 우주관을 하나로 묶는 경향이 있지만, 사실 이 세 가지는 전부 서로 어긋난다.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서는 천체의 운동의 중심은 우주의 중심(즉 지구)를 통과하는 축이어야 한다. 반면 프톨레마이오스의 체계에서는 이심원과 주전원을 도입했기 때문에 우주를 통과하지 않는 축을 중심으로 한 운동이 존재한다. 이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관을 받아들이면서도 프톨레마이오스의 체계를 사용해야 행성의 움직임을 계산할 수 있다는 어정쩡한 태도를 고수했으며, 스콜라 철학의 중요한 논점들 중 하나는 주전원과 이심원이 물리적 실체를 가지는가였다. 


교회의 우주관은 또 달랐다. 아리스토텔레스나 프톨레마이오스의 체계에서는 모든 천구들을 묶는 천구가 하루에 한 번씩 자전하며, 각 행성들은 자기 천구상에서 자신의 고유 운동을 한다. 그러나 성경은 천체들이 각자 지구를 돈다는 원시적인 우주관을 반영하고 있다. 성경에서는 태양과 달이 신의 명령에 따라 멈췄다고 하는데, 나중에 갈릴레오가 지적했듯이, 아리스토텔레스와 프톨레마이오스의 체계에서는 태양과 달이 같은 자리에 계속 떠있는 것처럼 보이려면 태양과 달이 멈추는 게 아니라 천구상을 맹렬한 속도로 움직여야 한다.


그러나 중세의 자연철학에서는 이런 모순을 그대로 안고 갔다. 교회가 자연철학을 "자연 현상을 구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볼 것을 제안한 것은 교회의 독창적인 발상은 아니었고, "계산은 프톨레마이오스 체계를 따라서 하지만 우주관은 아리스토텔레스를 따른다" 는 사고방식이 통했던 것이다.


근대과학은 바로 이런 자세를 거부하고, 논리적 모순을 배격하며 검증을 통해 어느 쪽이 진실인지를 확인하자고 한 것이다. 이런 자세가 언제부터 나타났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코페르니쿠스는 지동설이 진리라고 강변한 반면, 코페르니쿠스의 책인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의 인쇄를 감독한 신학자인 오시안더는 "이 가설이 참인지는 중요하지 않으며 계산의 정확성만이 중요하다"는 서론을 코페르니쿠스의 상의 없이 삽입했다는 점은 이미 근대과학과 교회의 충돌을 보여준다.


교회가 근대과학과 지동설에 대해 갈수록 태도가 강경해진 것은 근대과학의 실체를 교회 측에서도 제대로 파악했음을 보여준다. 물론 그 대응은 부정적이었지만. 지동설은 아리스토텔레스 체계에 흠집을 내는 가설이 아니라 교회에 도전하는 사조의 선두주자였던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지동설을 "현상을 구제하는 가설"로는 용인하는 중세적 관점을 가진 성직자들도 있었고, 이 때문에 교회가 지동설을 용인했는지 그렇지 않았는지에 대해 혼란의 소지가 있다. 이는 실제로 상황이 혼란스러웠기 때문이기도 하다.


교회와 지동설

그런데 지동설은 과학적인 측면에서 하나의 학설이지만, 교회에서 중요시한 것은 과학의 관점이 아닌 종교적 관점이었고, 이 때문에 지동설은 두 개의 주장으로 분리되었다.


- 태양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주장

- 지구가 움직인다는 주장


과학적 관점에서 보면 두 주장을 분리하는 것은 무의미하지만, 종교적인 관점에서 보면 이는 서로 다른 성경 구절에 어긋나는 것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성경에 어긋난다고 간주된 것은 태양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주장 쪽이었다. 성경에서는 신이 태양과 달에게 멈추라고 명령했기 때문이다. 태양이 움직이지 않는다면 신은 대체 무슨 명령을 한 것인가? 반면 지구가 움직인다는 주장은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과 모순되는 듯한 구절을 제외하면) 성경과 명시적으로 어긋나지는 않았다. 이 때문에 갈릴레오에 대한 1616년의 재판(유명한 1633년의 재판과는 달리 갈릴레오는 재판에 세우지도 않았다)에서는 태양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주장은 "이단"이지만, 지구가 움직인다는 주장은 "신앙상 오류가 있는" 주장이지만 이단까지는 아니라는 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1620년에 코페르니쿠스의 책을 검열할 때는 태양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부분은 그다지 언급이 없었던 반면, 지구의 움직임을 논하는 8장은 전면적으로 삭제해야 한다고 판정했다. 이후 지구가 움직인다는 주장은 "신학의 진리를 크게 훼손한다"는 평가를 받으며 위험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성경에서는 인간은 신의 모습을 따라 창조되고 신이 보살펴주는 특별한 피조물인데,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 태양 주위를 도는 행성의 하나라는 주장이 바로 이런 신학적 관점을 무너뜨릴 수 있는 위험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태양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주장"에 대한 교회의 태도와 "지구가 움직인다는 주장"에 대한 태도는 일치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지동설을 하나의 주장으로 생각하는 관점에서 보면 교회의 태도가 혼란스러울 수 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면 지동설은 교회가 배격하는 주장이었다.


갈릴레오의 종교재판

1616년의 재판에서는 갈릴레오가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았으며 오히려 1616년 5월에 추기경인 벨라르미누스에게 자기가 이단 단절 선언을 하지 않았다(즉 그런 선언을 하라는 판결을 받지 않았다)는 증명서를 발급해달라고 요청했으며, 실제로 증명서를 받을 수 있었다. 이 때문에 당시까지는 교회에서 지동설에 관대했다는 주장이 종종 나온다. 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1633년보다 상대적으로는 관대했다고 볼 수 있지만, 지동설 자체를 용인한 것은 아니었다. 갈릴레오가 받은 증명서의 내용도 갈릴레오가 지동설을 주장하지 않았다는 것이지, 지동설이 괜찮다는 내용이 아니다.


"(전략) 갈릴레오는 (중략) 이단 단절 선언을 하지 않았다. (중략)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돌고, 태양이 우주의 중심에 머물러 있으며, 동에서 서로 움직인다는 사실은 코페르니쿠스의 주장일 따름이다. (후략)"


또한 벨라루미누스는 갈릴레오를 소환해서 지동설은 잘못되었으며 지동설을 포기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이어서 검사성성(종교재판을 주관하는 기관)의 총주임인 세기치 신부는 벨라루미누스 앞에서 지동설은 전면적으로 포기하고, 어떤 형태로도 그런 생각을 품거나 가르치거나 옹호해서는 안 되며 이 경고를 따르지 않는다면 법정에 세울 것이라고 선언했다.


세기치의 경고와는 달리 벨라루미누스의 경고는 내용이 구체적으로 기록되지 않았다. 그러나 벨라루미누스는 갈릴레오에게 우호적이었고, 갈릴레오가 지동설을 "가설로만 다룬다면 현명한 일일 것이다" 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이를 보면 벨라루미누스는 "현상을 구제하는 가설"로서는 지동설을 용인하는 중세적인 입장이었던 반면 세기치는 가설으로라도 지동설을 가르치거나 옹호해서는 안 된다는 더 엄격한 입장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갈릴레오는 1616년에는 자기가 지동설을 옹호한 적이 없다는 주장을 관철시켰을 뿐 아니라, 증명서까지 받았다. 이 때의 경험 때문에 "천문 대화"로 인해 재판을 받게 된 1633년에도 같은 주장을 관철시킬 수 있다는 근자감을 가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천문 대화의 내용을 보면 그런 주장이 통할 여지가 없었고, 게다가 1616년의 경고를 무시했다는 점까지 인정되었다. 결국 갈릴레오는 지동설을 포기한다는 서약과 함께 이단 단절 선언을 했다. 


갈릴레오가 고문을 받았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흔히 갈릴레오가 고문 때문에 지동설을 포기했다고 생각하고, 이에 맞서서 갈릴레오는 절대로 고문을 받지 않았다고 단언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확실한 것은 없다. 재판 기록에는 고문을 받았다는 언급이 없지만, 종교 재판의 기록에서는 피고의 자백과 참회는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이라고 하지 고문을 받아서 억지로 한 것이라고 하는 경우는 없기 때문이다. 재판관이 갈릴레오와 대면한 자리에서 "진실을 말한다면 적절한 법의 구제책을 적용하겠다"는 언급을 하기도 했는데, 이는 진실을 말하지 않는 경우의 고문을 암시하는 말이고, 교황이 갈릴레오에게 "고문 위협을 해서라도" 심문하라고 한 것을 보면 고문이 가능한 수단으로 고려된 것은 분명하다. (물론 "고문 위협"과 "고문"은 다르지만, 고문 위협을 하는데 자백하지 않는다면 그 다음 단계는 하나밖에 없다.) 그래도 실제로 고문은 받지 않았을 것으로 보는 연구자들이 많은데, 이는 갈릴레오가 재판 이후 육체적으로 망가졌다고 보기 어렵고, 고문을 받았다고 보기에는 "난 지동설을 옹호한 적이 없다"는 주장을 너무 오래 고수했기 때문이다.


갈릴레오에 대한 판결이 가벼운 처분으로 끝났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는데, 갈릴레오는 "검사성성에서 바라는 기간 동안" 검사성성의 정식 감옥에 갖히는, 투옥형이라는 중형을 선고받았다. 이는 공개채찍형 같은 "가벼운" 처분보다 훨씬 무거운 처벌이었다. 다만 하루동안 감옥에서 보낸 뒤 메디치 가문의 저택에 연금되는 형벌로 감형되기는 했고, 반 년 후에는 자택연금으로 변경되었다. 그러나 한동안은 외출을 할 수 없고 외부인들 불러서도 안 되고 방문객과 대화를 해서도 안 된다는 조건이 유지되었으며, 자택연금은 죽을 때까지 해제되지 않았다. 자택연금이 대단한 형벌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지금처럼 컴퓨터나 인터넷이 없고 전화도 없으며, 편지를 지금처럼 쉽게 주고받거나 책이 대량으로 출판되는 시대도 아니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렇지도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