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방


1대 서퍽 공작 윌리엄 드 라 폴은 1450년 1월 의회에서 탄핵을 당했다.


그의 혐의는 크게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잉글랜드를 배신하고 앙주와 메인을 프랑스에 팔아넘긴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정당한 법 절차와 정부 절차를 방해하거나 매수한 것이었다.


그를 죽이라는 하원의 요구에 따르고 싶지 않았던 왕과 귀족들의 거부 때문에 시간이 많이 지체된 끝에, 3월 17일 서퍽 공작은 '당시 도시에 머물던 모든 성직자와 평신도 영주들이 모여 있는' 웨스트민스터궁의 내실로 끌려갔다.


그곳에서 공작은 귀족 배심원 재판을 요구할 권리를 포기하고 모든 것을 왕의 자비에 맡겼다. 왕은 첫 번째 혐의가 입증되지 않았다고 선언했고, 두 번째 혐의에 대한 처벌로 그해 5월 1일을 기준으로 5년 동안 공작을 왕국에서 추방했다.


그날 밤 공작은 이전까지 구금되어 있었던 웨스트민스터궁의 탑에서 비밀리에 풀려났다. 왕은 그렇게 함으로써 공작이 분노한 런던 시민들의 보복을 피할 수 있기를 바랐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 2,000명의 군중들이 필즈의 성 자일스 대성당까지 그를 추격했고, 그곳에서도 결국 탈출에 성공했지만 그의 말과 일부 하인들이 붙잡히고 약탈당했다.



*납치


4월 30일 서퍽 공작은 어린 아들에게 편지를 쓴 뒤, 하인들과 함께 배 두 척과 보트 한 척을 타고 입스위치를 떠났다.


그러나 공작의 배는 '탑의 니콜라스호(Nicholas of the Tower)'라는 배에 의해 가로막혔다. 안타깝게도 그 어떤 기록에도 이름이 나오지 않는 이 배의 선장은 수소문 끝에 서퍽 공작의 위치와 계획을 알아내고 그를 가로막기 위해 출항해 있었다.


공작은 니콜라스호의 선원들에게 자신이 왕명에 따라 칼레로 파견되었다고 말했지만 그들은 그가 자신들의 선장과 이야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공작은 분명 국왕의 안전통행증을 믿고 있었겠지만, 니콜라스호에 오르자마자 그는 선장으로부터 "환영한다 반역자놈아(welcome traitor)"라는 말을 들었다.



*재판과 처형


윌리엄 롬너는 "어떤 이들은 공작이 배 위에서 기소되고 재판을 받은 끝에 유죄 판결을 받았다고 주장한다"고 기록했다. 그리고 브루트 역시 "그는 재판을 받고 사형선고를 받았다"고 언급했다.


실제로 일종의 모의재판이 있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물론 서퍽 공작은 국왕의 안전통행증을 언급하는 것 외에는 다른 변론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다음 날인 5월 2일, 그는 니콜라스호에서 작은 보트로 옮겨진 뒤 그곳에서 녹슨 검으로 참수형을 당했다.


롬너에 따르면 사형 집행자는 "배에서 가장 무식하고 난폭한 선원 중 하나"였고, 다른 연대기에 따르면 "아일랜드 출신 불한당"이었지만, 법정 기록에 따르면 그는 서식스의 보샴 출신 선원인 리처드 레너드였다.


그 후 서퍽 공작의 시신은 도버의 모래사장에 던져졌고 머리는 나무기둥 위에 전시되었다. 그의 하인들은 무사히 해안으로 옮겨졌지만 소지품을 모두 빼앗겼다.


켄트의 셰리프는 곧 이 살인 사건의 자세한 전말을 알게되었고, 즉시 런던으로 전달했다.

이 소식은 5월 4일 런던에 도착했고, 6일이 되기 전에 레스터에 도착했다.



*기소


6월 18일 심리 및 판결 위임권(commission of oyer and terminer)이 버킹엄 공작에게 발부되었고, 6월 30일 리처드 레너드와 토머스 스미스는 서퍽 공작 살해에 가담한 혐의로 턴브리지에서 기소되었다.


두 사람 모두 서퍽 공작 납치와 살해에 가담한 혐의를 받았으며, 레너드는 사형을 집행한 당사자로도 알려져 있었다.


그들은 살인죄뿐만 아니라, 국왕의 안전통행증을 무시하고 조롱한 혐의와, 헨리가 왕국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고 반역자를 처벌하지 못했다고 비난한 혐의로 반역죄로도 기소되었다.


대배심에서 기소장이 승인되었고, 스미스와 레너드는 자신들이 왕국을 위해 헌신했을 뿐이라며 무죄를 주장했다.


스미스에게 다음날인 7월 1일 턴브리지에서 재판을 받으라는 명령이 내려졌지만, 안타깝게도 국왕법정 기록에서는 두 사람에 대한 그 이상의 추가적인 절차들을 다룬 내용을 찾을 수 없다.



*잉글랜드의 왕과 왕권


이들에 대한 기소장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서퍽 공작이 국왕의 안전통행증을 보여주었을 때 선원들이 했다고 알려진 대답이다.


이들은 "우리는 네가 말한 왕(the king)을 알지 못하지만 잉글랜드의 왕권(the crown of England)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다. 잉글랜드의 왕권은 곧 잉글랜드의 왕국 공동체(community of the realm)고 왕국 공동체가 곧 왕권이다." 라고 주장했다고 기소장에 적혀 있다.




...서퍽 공작 윌리엄 드 라 폴은 상기한 왕의 신하로서, 왕의 명령에 따라 그의 보호와 안전통행권 아래 외국으로 여행을 떠났고, 상기한 시간과 장소에서 상기한 공작이 그들에게 상기한 지역으로의 안전통행권에 대해 통지하고 공개적으로 보여주고 읽은 후, 상기한 왕과 왕국에 대한 반역자이자 적으로서 중범죄와 반역 혐의로 붙잡혔다. 그들은 그를 죄수로서 구금하고, 상기한 왕의 안전통행권을 무시하고, 그들이 상기한 왕을 알지 못하지만 잉글랜드의 왕권을 잘 알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상기한 왕권은 곧 상기한 왕국의 공동체이며, 왕국의 공동체는 곧 왕국의 왕권이라고 말했다...



잉글랜드의 왕권은 왕국 공동체의 상징일 뿐이며 왕의 명령은 절대적이지 않다는 이러한 주장은, 일반 대중들 사이에서도 왕국의 주권과 국왕의 인격을 구별하는 것이 상당히 가능해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왕과 왕권을 사실상 분리시키고 후자를 인민(the people)과 동일시한 이 같은 이례적인 발언은 정치헌법사학자들의 상당한 관심을 끌어왔다.


일반적으로 중세 후기는 복종의 시대(age of deference)였다고 말해진다.

그러나 이 진술과 그것이 만들어진 맥락은 그 반대를 나타낸다:

'여론'은 왕과 귀족들의 견해와는 별개로 형성되고 표현되고 있었다.




Anne Curry ed., 'The Hundred Years War Revisited'

R. Virgoe, 'The Death of William de la Pole, Duke of Suffol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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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현대에는 여러 신분들이 있지만,

태초에 모든 인간은 똑같은 자유를 가진 자유인이었다.

우리 모두가 한쌍의 남자와 여자의 후손이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구가 늘어나고, 오늘날에도 그렇듯이 지나친 자만심과 질투로 인해 원한과 전쟁이 발생하기 시작했을 때,

평화롭게 살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모든 사람이 스스로를 위대한 군주라고 생각한다면 평화롭게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들 가운데서 왕을 선출해서 군주로 삼았다. 그리고 법을 만들고 질서를 유지할 수 있도록 그에게 잘못을 저지른 자를 처벌할 권력을 주었다.

또한 왕이 공동체의 적들과 사악한 관료들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할 수 있도록, 자신들 가운데서 가장 아름답고, 강하고, 현명한 자들을 선출해서 봉신으로서 왕을 도우며 평화를 지키는 영주들로 삼았다.

그렇게 해서 귀족이라고 불리는 신분이 만들어져 지금까지 전해진 것이다.


자신들 가운데서 귀족을 선출한 사람들 중 남은 이들은 비귀족 자유민이 되었다.


농노들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그런 예속인 신분이 되었다.

어떤 이들은 전쟁에서 포로로 잡힘으로써, 몸값 대신이거나 감옥에서 풀려나는 대가로 농노가 되었다.

어떤 이들은 재정적 이익을 얻거나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신을 팔아서 농노가 되었다.

어떤 이들은 왕이 왕국의 방어를 위해 외국인들과 전쟁을 시작하면서 무장을 한 채 같이 전장에 나갈 의무가 있는 자들을 전부 소집했을 때 안전한 후방에 남은 대가로 농노가 되었다.

어떤 이들은 전장에서 도망친 죄로 농노가 되었다.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 교회가 설립된 시기에 경건한 의도로 성인들에게 자신을 바침으로써 농노가 되었다.

어떤 이들은 부당하게 예속을 강요하는 영주들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할 수 없었기 때문에 농노가 되었다.


어떻게 해서 농노가 되었든, 농노들에게 자유를 주고 예속인 신분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은 영주들이 할 수 있는 선행 중에서도 훌륭한 것이다.

그리스도교인이라면 누구도 예속된 상태에 있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필리프 드 보마누아르, <보베 지방 관습법>(Coutumes de Beauvaisis), 1283년.





...그러나 우리의 지칠 줄 모르는 지도자이자 왕이자 군주인 로버트 경의 도움으로,

지금 우리는 이 수많은 악행으로부터 해방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백성과 유산을 적들의 손에서 해방하기 위해,

마치 마카베오나 여호수아처럼, 고난과 역경과 피로와 배고픔을 기꺼이 견뎠습니다.


신의 섭리,

우리가 최후까지 지켜야 하는 우리 왕국의 정당한 법과 관습에 따른 그의 계승권,

그리고 우리 모두의 동의와 허락이 그를 우리의 군주이자 왕으로 만들었습니다.


그가 우리 민족을 구원했고 우리의 자유를 보호하므로,

우리는 왕국의 법과 그가 쌓은 공로 때문에 그를 신하로서 섬기며,

그가 하고자 하는 일은 무엇이든 따릅니다.


그러나 만약 그가 시작했던 일을 포기하고, 우리 왕국이나 백성을 잉글랜드 왕이나 잉글랜드인들에게 바치는 것에 동의한다면,

우리는 지체 없이 그를 그 자신의 권리와 우리의 권리에 대한 배신자이자 우리의 적으로 규정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지켜줄 수 있는 다른 사람을 왕으로 추대할 것입니다


고작 백 명의 스코트인이라도 남아있는 한, 우리는 절대 잉글랜드인들의 지배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싸우는 것은 영광도 부유함도 명예를 위해서도 아닙니다.

오직 자유, 의로운 사람이라면 목숨을 버릴지언정 절대 포기하지 않는 자유를 위해서입니다...


-스코틀랜드 왕국 공동체의 '아브로스 선언', 1320년




중세의 정치이론이라고 하면 보통 봉건제나 왕권신수설을 떠올리지만 위와 같은 국민주권론도 있었음.


그런데 이 '서퍽 공작 납치살해 사건'은 이 이론이 성직자나 지식인이 아니라 배운 것 없는 선원들의 입에서 나왔다는 점에서 매우 특이한 사례고, 중세 후기의 국민주권론이 기록상으로 보이는 것보다 대중에게 널리 수용되고 있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사례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