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프 4세의 관료들은 성직자, 귀족, 그리고 비귀족으로 분류될 수 있다.


대부분의 비귀족 관료들이 부르주아 계층이기는 했지만, 부르주아보다는 비귀족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기욤 드 노가레 같은 주요 고관들을 포함한 많은 관료들이 도시 시민 공동체의 실제적인 회원 자격을 가졌다고 입증할 근거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성직자 중에도 물론 질 아이셀린 같은 귀족 출신이 많이 포함돼 있었지만, 대부분의 기록에는 교회 내의 지위만 언급되고 집안과 출신에 대해서는 언급되지 않는다.



대략적으로 말하면, 높은 관직일수록 귀족과 고위 성직자(주교나 부주교)가 우세했다.


파리의 고위 관료 중 적어도 73명이 성직자였다:

28명이 주교였거나 나중에 주교로 승진했고,

35명은 대성당 참사회원, 주임사제, 부주교 등이었다.

4명은 수도원장이거나 소수도원장이었다.

단순히 '성직자'라고만 지칭된 사람은 10명뿐이었다.


귀족은 53명이었고, 아르투아 백작 같은 대귀족도 일부 포함돼 있었다.


비귀족은 20명뿐이었다.

이들 중 최소 4명이 관직에 오른 뒤 얼마 안 있어 귀족 신분으로 승격되었다.


충분히 예상할 수 있듯이, 파리 고등법원의 서기와 공증인들은 대부분 성직자였다:

성직자 78명,

귀족 10명,

비귀족 33명(2명은 곧 귀족으로 승격됨).



지방의 고위 관직은 표본이 다소 불균형했다.

성직자는 바이이나 세네샬 같은 지방관이나 형사법정 판사가 될 수 없었고,

세네샬은 귀족만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바이이와 세네샬 131명 중,

71명이 귀족이었고,

60명이 비귀족(2명은 곧 귀족으로 승격됨)이었다.


그러나 바이이만 놓고 보면,

35명이 귀족이었고,

60명이 비귀족이었다.


지방의 고위 관직 전체로 보면,

귀족 100명,

비귀족 89명(4명이 곧 귀족으로 승격됨),

성직자 16명이었다.



지방 하급 관료들은 대부분 비귀족 평신도였다.


평신도와 성직자의 비율은 대략 2:1이었다.


귀족은 많아야 전체의 15%에 불과했다.

귀족들은 일반적으로 성주castellan, 자작viscount, 행정관viguier 등 명예로운 관직만을 선호했으며, 그 적은 수의 관직을 놓고 비귀족들과 경쟁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귀족들은 성직자나 비귀족들보다 승진할 가능성이 훨씬 높았다:

지방 하급 관직의 귀족들 중 10%가 바이이, 세네샬, 또는 파리의 고위 관료가 되었다.

반면에 성직자와 비귀족의 승진 가능성은 약 1%에 불과했다.



이 수천 명의 관료들은 어떻게 모집되었을까?


모든 관료들 중에 왕 자신이 개인적으로 알고 지내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했다.


왕은 자신의(또는 왕비의) 가신들과 자주 사적인 만남을 가졌고,

의회, 파리고등법원, 그리고 재무부의 관료들과는 좀 더 공적인 만남을 가졌다.


아마 대부분의 바이이와 세네샬과도 면식이 있었을 것이다.


북프랑스의 주교들과 중요한 수도원장들과도 면식이 있었겠지만,

남프랑스의 고위 성직자들과는 잘 모르는 사이였을 수 있다.


이 모든 사람들이 친척, 친구, 또는 피후원자들에게 정부의 일자리를 추천할 수 있었다.


유명한 예를 들면, 앙게랑 드 마리니는 아마도 자신의 사촌이자 당시 왕의 고해사제였던 니콜라 드 프뢰빌의 추천으로 왕비의 가신단의 하급직을 맡았을 것이다.


나중에 궁내부 장관직에 오른 뒤, 마리니는 자신의 가족들과 부하들의 출세를 도왔다.

그의 형제 중 한 명은 상스의 대주교가 되었고, 또 다른 형제는 보베의 주교가 되었다.

그의 서기 두 명도 높은 직책을 맡았다.


모든 국왕 참사회원들이 그처럼 자신의 친구들을 높이 밀어올려줄 수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중앙행정기관 관료들의 인맥의 눈에 띄는 연관성은 부분적으로는 후원의 결과물이었다.

필리프 3세 시절에 고위직을 맡은 관료들의 아들, 조카, 서기들이 필리프 4세 밑에서 고위직을 차지했고, 이들의 친척들과 피후원자들은 다시 필리프의 후계자들을 섬겼다.



이러한 사례들이 자주 나타나긴 하지만, 그럼에도 가족 인맥의 중요성과 후원의 영향력을 과장해서는 안 된다.


관료의 아들들이 모두 아버지처럼 관직을 맡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었고, 모든 고관의 서기들이 중요한 직책을 맡을 자격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상당수의 관직은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았다.

회계관이나 징세관이 되는 것은 이익은 작은 반면 심각한 재정적 위험을 가져올 수 있었다.

왕의 가장 유능한 성직자 관료들 중 일부는 주교로 승진하면서 관직을 그만두었다.


그러므로 급격히 성장하고 있는 관료집단의 자리를 채울 새로운 인물들에 대한 수요가 끊이지 않았다.



왕을 위해 일할 사람들을 모집하는 일에는 바이이와 세네샬들이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그들은 자신이 담당한 지방의 유능한 사람들, 즉 징세관, 법관, 판사, 자작, 행정관으로 이용할 수 있는 사람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지방 하급 관료들의 승진은 대부분 그들의 추천으로 이루어진 것이 분명하다.


그 결과 능력 있는 인재들이 관료집단의 상위 계층으로 조금씩 꾸준히 유입되었다.



기욤 드 노가레는 적어도 자기 고향 지방에서는 명사에 속했고, 행정업무에 대해 약간의 훈련을 받았다.


하지만 노가레는 그런 조건에 비해 매우 빠르게 승진했다.

예를 들어, 왕비의 가신단의 아주 작은 직책에서 시작해서 6년(또는 9년)만에 처음으로 중요한 관직을 맡았던 마리니보다 훨씬 더 빠르게 승진했다.


주된 원인은 아마도 필리프가 유능한 부하들을 이미 다 구해서 새로운 사람을 찾을 절박한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던 시기에 마리니의 경력이 시작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노가레는 대부분의 동료들보다 더 많은 장애물을 극복해야 했다.


그는 귀족이 아니었다.

노가레의 집안은 유명하지 않아서 그의 출생지나 가족관계를 후대에 완벽하게 그려낼 수 없었다.

노가레의 정적들은 그의 아버지가 이단혐의로 유죄 선고를 받았다고 (아마도 거짓으로) 주장했는데, 명문가였다면 무의미한 공격일 것이다.


하지만 그의 집안은 극빈층은 아니었다.

가족들은 노가레를 몽펠리에 대학에 보낼 돈이 있었고, 그는 그곳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취득하기 위한 긴 과정을 이수했다.


노가레는 틀림없이 뛰어난 성취를 보였을 것이다. 그는 1287년경에 이미 몽펠리에 법학부 회원이었다.

이는 매우 권위 있는 집단이었고, 노가레는 랑그독 남부에서 꽤 눈에 띄는 인물이었음이 분명하다.


이후 다른 법학 교수들처럼, 그는 계약의 협상과 중재에 협력해달라는 요청을 여러번 받았고, 그 사건들 중 일부는 정부의 이익과 관련이 있었다.



-Joseph R. Strayer, 'The Reign of Philip the Fai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