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대전기 일본 육해군의 대립은 각각 육군은 초슈/조슈 번, 해군은 사츠마/사쓰마 번에서 독립적으로 생겨났고 이 번들은 전통적으로 사이가 안좋았기 때문임.


익히 알려졌듯 사쓰마와 조슈는 메이지 유신때 삿초 동맹이란 이름으로 처음으로 적인데도 연합해서 유신을 이뤄냄.


근데 이후 두 번이 정치적 다툼으로 인해 세이난 전쟁이 벌어지고 사쓰마 번 계열은 정치적으로 몰락하고 조슈 번이 완전히 정치적으로 독점하게 됨. 얼마전 암살된 아베를 비롯해 이토 히로부미등 일본의 정치가들은 대부분 조슈 번 계통임.


이거 때문에 적의 적은 친구라는 논리로 인해 사쓰마 번을 옹호하거나 이들은 정한론에 반대했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음. 근데 이건 마땅한 평가가 아님.


바로 대표적인 정한론자였던 '사이고 다카모리'가 사쓰마계 유신지사이기 때문임.


이미 당시 일본 정계에선 사쓰마계, 조슈계 가리지 않고 정한론이 자리잡은 상태였음. 사이고와 대립하던 기도 다카요시(가츠라 코고로)도 타이밍 문제였지 정한론자였을 가능성이 높음. 단지 두 파벌은 언제 조선을 정벌할것이냐의 타이밍 싸움을 벌였던 걸로 보임.


그나마 이런 평가가 어울릴 만한 세력은 료마가 속했던 토사 번이라고 생각함. 이 토사 번의 지사들도 대표적인 토막파(반 막부파)였지만 사쓰마와 조슈에 밀리는 바람에 활약에 비해 딱히 혜택을 받은게 없고 정치적으로 소외된 결과 나중에 이 토사 계통에서 훗날에 일본의 자유민권주의나 아나키즘 정치의 기반이 생겨났고 이게 식민지 조선의 민권운동이나 독립운동에 영향을 주기도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