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모든 가정은 제 2차 세계 대전 당시 소련이 실제 역사 보다 독일을 유능하게 틀어 막았다는 전재로 시작하는 if 물이다.


전간기 - 제 2차 세계대전




원 역사와 동일하게 소련과 독일은 서로 손을 잡고 폴란드를 반갈죽 내며 영토를 대거 확보하게 된다. 이때 OTL과 다른 변곡점이 생긴다. 원역사의 소련은 소-폴 국경지대에 건설하고 있던 스탈린 라인을 파기, 현 독-소 국경 지대에 새로운 방어선인 몰로토프 라인을 재건설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하지만, 이 시간대의 강철의 대원수는 스탈린 라인을 본 계획대로 건설하는 방향으로 간다.


당연히 스탈린은 독일이 언젠가 소련을 침공할 거라는 걸 유럽 전역에 퍼져있는 스파이를 통해 실시간으로 듣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렇기에 대다수의 참모진은 현 스탈린 라인을 건설을 중단하고 독-소 국경 지대에 방어선을 재건설 해야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은 일부가 받아 들어져 폴란드 서부 지역부터 발트 3국 지역에 대한 방어 작전을 구상하게 된다. 이 작전명은 몰로토프 방어선이라고 불려지며, 이들의 주 목표는 독일군의 대대적 진공을 늦추며 스탈린 라인에 대한 방어를 튼튼하게 만드는 형태로 구축하게 된다.


이 방어 계획에 스탈린은 거의 관여하지 않았으며, 게오르기 주코프,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가 주축으로 된 일부 유능한 참모진이 유연한 방어 작전과 도시를 중심으로 한 점 단위의 방어 작전을 구상하는 등. 원 역사와 달리 유연한 모습을 보여주게 된다.



1941년 5월 15일. 독일은 바르바로사 작전을 발동. 원 역사와 다르게 한 달 빠르게 독소 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이에 소련은 기존에 구성한 몰로토프 방어 작전을 이용한 지연전을 시행했으나, 참모부의 계획과 달리 독일의 진격은 소련의 예상을 뛰어 넘는 형태였다.


애초에 지연전에 투입된 대부분의 인원이 대전차 대책이 없는 순수 보병으로 구성된 사단들이었고, 독일은 기갑사단을 주축으로 한 충격군 형태로 침공을 했기에 몰로토프 방어 작전은 큰 효용을 가지지 못했다. 거기에 독일군은 저항이 거셀 거 같은 지역은 뒤따라오는 보병 사단에게 맡기고 무작정 돌격하는 형태로 진공했기에, 점조직 형태의 방어선은 큰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하지만 파죽기세로 진격하던 독일군이 맞이한 건 구축이 끝나 독일군을 맞이할 준비가 된 스탈린 방어선이었다.


독일군과 루마니아군으로 구성된 남부 집단군의 공세는 키시나우를 돌파하여 빠르게 오데사까지 진군 했으나, 남부 집단군이 맞이한 건, 완벽하게 구축한 벙커와 기회만 되면 날아오는 소련군의 포병 전력의 화력 투사였다. 거기에 소련의 흑해 함대가 해안에 자리를 잡아 포격 지원까지 진행하면서 진격은 완벽하게 돈좌되었다.


독일 중부 집단군의 공세는 일부 스탈린선을 돌파하고 그대로 키예프를 점령하기 직전까지 나아갔다. 이때 만약 키예프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면, 중부집단군은 크림 반도를 향해 군 일부를 돌려 남부 집단군을 지원하면서 오데사가 돌파. 스탈린 라인의 남부가 완전히 돌파 당해 흑해 함대에 심각한 타격이 가해졌을 거다. 하지만 독일 중부 집단군은 키예프를 눈 앞에 두고, 스탈린 라인을 완전히 돌파하지 못하고 공세가 완전히 돈좌 되었다.


북부 집단군의 경우 상황이 훨씬 좋았다. 이들은 스탈린 선 북부를 완전히 돌파하여 북부로는 레닌그라드를, 남부로는 벨리키노브고라드를 통해 모스크바로 빠르게 진격해 나아갔다. 이러한 성과는 겨울전쟁에 대한 복수에 불타던 핀란드 군의 지원의 덕택이 컸다. 하지만, 북부 집단군은 실제 역사와 마찬가지로 레닌그라드에서 지옥의 시가전을 펼치며 돌파는 실패로 돌아갔고, 후방에 배치된 예비대가 벨리키노브고로드를 틀어 막으면서 독일의 모든 공세는 총체적으로 실패하는 최악의 상황이 벌어진다.


물론 소련은 주요 공업지대 일부에 대한 막대한 피해와 간신히 얻은 발트 3국과 폴란드 동부를 다시 빼앗겼지만, 소련 당국에게 있어서 대부분의 공업 시설이 몰려 있던 우크라이나 지역과 벨라루스 지역을 비롯한 서부 러시아 지역을 온존 했다는 거만으로도 큰 성과였다.



스탈린 라인이 효과적으로 독일의 공격을 틀어 막게 되자, 전쟁의 양상은 결국 1차 세계대전과 별 다를 게 없는 참호전과 비슷한 형태가 되었다. 물론 소련 공군보다 정예화되며 성능도 좋은 독일 공군의 공습은 소련의 방어 작전을 방해했고, 일부 지역은 방어선이 돌파 당하는 모습도 보여주기도 했다. 하지만, 여전히 스탈린 라인은 건재했다. 북부만 빼면 돌파 당한 지역은 실질적으로 없었다.


이런 성과를 바탕으로 소련 당국은 반격 작전을 철저하게 구상하게 된다. 물론 이 과정에서 미국에서 들어오는 막대한 양의 랜드리스와 영국에서 들어오는 정보는 소련의 반격 작전 설립에 큰 도움이 됐다.


참모부는 이전부터 연구되어 있던 종심돌파이론을 실전을 통해 계속 검증해나갔으며, 온전한 서부 공업지대를 통해 신형 기갑인  T-34와 KV-1을 비롯한 전차를 대거 생산하며 반격에 대한 준비를 철저하게 이어나갔다.


1942년 4월. 독일은 정체되어 있던 상황을 완전히 타개하기 위해 북부 집단군의 벨리키노보고라드와 레닌그라드를 완전히 돌파하는 형태의 '적색상황'이라는 작계를 구성하고 대대적인 공세를 가했다. 이 작전을 위해 독일은 신형 기갑인 6호 전차와 대부분의 기갑 전력을 북부 집단군에 배속하고, 독일 해병대와 팔슈름예거를 대거 동원하며 이 두 도시에 대한 대대적인 공세를 진행했다.


이 적색 상황의 성과는 딱 레닌그라드의 포위의 성공. 그 이상의 성과를 내놓지는 못했다. 핀란드 군도 스탈린 라인의 돌파를 하지 못하고 지지부진했고, 당초 목표로 둔 모스크바로의 진격로 확보는 실패했기에 어떤 성과도 내놨다고 할 수 없었다.



잇따른 독일의 공세 작전 실패는 인적 자원의 손실로 이어졌고. 이 손실과 철저하게 진행된 타 민족 학살은 자연스럽게 후방에 대한 치안 공백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실패했다고 생각된 몰로토프 방어 계획이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이들은 잔존 소련군과 독일에 대한 강한 적개심을 가진 인민들의 규합하여 독일의 후방 보급로에 대한 공작으로 독일의 작전 역량을 깎아 먹었다.


독일은 파르티잔의 지속적인 후방 보급로의 공격으로 전방에 있는 부대를 후방으로 돌려 후방 안정화에 힘쓸 수 밖에 없었고, 설상가상으로 적색 상황이 총체적인 실패로 이어져 독일은 공세 역량을 완전히 상실하게 된다.



1942년 9월. 소련은 기본적으로 재정립된 종심돌파이론의 실험을 위해 레닌그라드를 포위하고 있는 독일의 북부 집단군에 대한 포위 섬멸을 위한 천왕성 작전을 수립. 벨리키노브고로드를 통해 발트 3국 국경 지대에 건립된 스탈린 라인을 확보하는 작전을 진행하게 된다.


이때 작전을 지휘한 건, 게오르기 주코프였으며, 권터 폰 클루게가 해당 지역에 방어를 담당하고 있었다. 결과적으로만 말하면 이 작전은 절반 만의 성공이었다. 당초 소련군의 목표는 레닌그라드를 포위하고 있는 독일 북부 집단군의 포위였지만, 권터 폰 클루게의 지연전으로 대다수의 독일군이 탈출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추후 연구에 따르면 기갑의 투입 이후 들어가는 보병 사단의 성과가 늦어졌다는 게 큰 문제였다.


물론 이때 탈출한 독일군은 대다수의 장비를 버리고 몸만 간신히 탈출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프리드리히 파울루스가 이끄는 독일 제 6군은 아군의 탈출을 위해 분전하다가 포위되었고 이때 프리드리히 파울루스가 방어 중 사망하게 됐고, 독일의 북부 집단군은 공세 능력을 완전히 상실하게 된다.


1943년 3월. 북부 집단군의 대대적인 후퇴와 스탈린 라인의 완전한 회복에 성공하자 핀란드는 급히 독일과의 방위 조약을 파기하고 만네르헤임 담판을 통해 전쟁에서 완전히 빠져나갔다. 이 과정에서 핀란드는 자국 내에 주둔하고 있던 독일군과의 충돌. 7억 달러의 전쟁배상금, 일부 지역의 완전 할양이 대가였다.


1943년 5월. 소련은 상대적으로 방어가 약한 남부 집단군을 공격하여 키시나우까지 공세 작전인 해왕성 작전을 설립한다. 이 역시 종심돌파이론에 대한 시험적인 성격이 강했다. 소련의 목표는 키시나우를 완전히 점령하여 남부 집단군의 후방을 위협하여 오데사 방어선에 가해지는 압박을 줄이는 형태였다. 작전이 원활하게 풀리면 소련은 그대로 오데사를 공락하는 독일군의 후방을 공격하여 오데사 지역을 안전하게 만드는 작전이었다.


해왕성 작전은 천왕성 작전과 다르게 큰 성과를 거두며 오데사에서 소련과 대치하던 독일 5군의 후방을 완전히 장악했다. 이로 인해 소련은 종심돌파이론은 완성에 가까워졌다. 남부 집단군은 큰 피해를 봤지만, 대부분의 장비를 버리고 나온 북부 집단군과 달리 어느 정도의 역량을 보존할 수 있었다.


1944년 3월. 스탈린 라인에서 소규모 산발적인 교전만 이어지던 상황에서 중부 집단군과 남부 집단군의 공세 능력의 전면적인 상실 및 독일 영내 진군을 위해 종심돌파이론을 바탕으로 한 종심돌파작전을 설립. 바그라티온 작전을 설립하여 대공세를 진행했다. 중부집단군의 주요 요충지이자 키예프 돌출부의 후방을 치고 들어가며 포위를 강행하며 대대적인 침공을 강행했다.



이때 중부 집단군 사령관의 발터 모델 원수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소련의 공세를 막기 위한 방어선을 구축했다. 하지만, 초기 공세로 독일의 주요 전력인 3기갑군이 큰 피해를 입고 작전에서 완전히 배제를 피할 수 없었다. 하지만 소련은 오데르-나이세 선에서 간신히 소련군의 공세를 간신히 막았다.


하지만 이 작전으로 루마니아, 불가리아, 헝가리는 무조건 항복하며 추축국에서 이탈했고, 그리스, 유고슬라비아, 슬로바키아는 소련군에 의해 완전히 해방되었다. 소련의 이러한 성과에 연합국도 부흥하듯 바그라티온 작전 실행과 동일하게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진행하게 되며, 소련이 오데르-나이세 방어선까지 진공하는 데 성공한 시점에서 연합군은 프랑스 전역과 저지대까지 완전히 해방되며 독일은 패전을 목전에 두었다.


독일의 패전을 목전에 둔 상황에서 소련과 연합국은 전후 질서에 대한 몰타 회의를 통해 독일의 분할과 동유럽의 소련 영향권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연합군은 알프스 산맥을 넘어 이탈리아 북부 지역으로 밀고 들어가기 시작했고, 이미 시칠리아 지역은 영국의 통제 하에 있었다.



1944년 5월. 이탈리아의 두체인 베니토 무솔로니는 로마에서 연합국에게 무조건 항복 의사를 전달했으나, 독일은 이탈리아의 이러한 행동을 배신이라고 생각하며 이탈리아 침공을 강행했다. 하지만 히틀러의 공격은 볼로냐까지 진격하는 데 그쳤고, 이탈리아는 군정을 위해 들어오는 연합국과 연계해 독일을 완전히 몰아내며 1944년 7월, 빈을 점령하며 독일 남부 지역을 완전히 확보하게 된다.


1944년 소련군 10월, 오데르 공세를 통해 독일의 수도 베를린을 점령했고, 연합군은 11월 공세를 통해 함부르크와 프랑크푸르트를 완전히 점령하게 된다. 베를린 공방전 때 독일의 총통인 아돌프 히틀러는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1944년 11월. 독일의 2대 대통령인 카를 되니츠는 하노버에서. 독일의 총사령관인 빌헬름 카이텔은 포츠담에서 소련에게 항복하며 유럽에서의 제2차 세계대전은 실질적으로 끝나게 되었으며, 잔존 독일군의 무장이 완전히 해제되고, 전범 재판이 완전히 끝난 1944년 12월 25일. 제2차 세계대전의 유럽 전선은 완전히 끝을 맺는다.